사일런트 페이션트
알렉스 마이클리디스 지음, 남명성 옮김 / 해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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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어본 따끈따끈한 신간이다. 한여름에 '따끈따끈'이라니 더워 보일 수 있겠지만 여름에는 역시 등골이 오싹한 스릴러가 제격 아닌가. 영미 독서계의 대표 상품인 스릴러는 몇 편의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통해 드라마틱한 유행의 변화를 보여준다. 그 옛날 <007> 시대에는 모든 작가가 양복 입은 스파이를 썼으며, <양들의 침묵> 이후에는 천재 사이코 빌런이 출연하는 사이코 스릴러가 대세였다. 한 10여 년 전의 <다빈치 코드> 시대에는 더 이상 어떤 역사적 음모론도 나오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팩션들이 서점에 쫙 깔렸었고. 80-90년대의 홍콩영화처럼 소설 하나가 터지면 아류작이 쏟아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상업 출판시장의 흐름인 것 같다.

제일 최근의 유행은 아무래도 <나를 찾아줘>가 만들어낸 도메스틱 스릴러 열풍일 것이다. 가정 내에서 벌어지는 배신과 음모, 살인이 주요 테마인 이 장르는 특히 전 세계 어디서나 공통적으로 독서 시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20-40대 여성들의 구미를 완전히 사로잡아 몇 년째 인기가 식지 않고 있는 듯하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해당 여성층은 밀리터리나 스파이, 액션, 사이코, 경찰물보다는 연애나 부부관계, 가정에서의 학대 등 현실적인 삶에 밀착된 얘기에 더욱 관심이 많아 보여 도메스틱 스릴러의 유행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예전 홍콩영화나 팩션이 몰락한 게 아류작의 범람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지나친 쏠림 현상은 확실히 이 장르에서 독으로 작용할 여지가 있다. 이름을 댈 순 없지만 모 작품은 내가 읽어본 2,000편 넘는 미스터리 소설 중 최악이었다(아, 실명 까고 싶다).

사실 도메스틱 스릴러에서 기본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게 주로 가정, 애인,친구 등이 사악한 실체를 드러내며 반전이 완성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대가족도 아니고 요즘은 부부 한 쌍에 많아야 애 하나, 심지어 1인 가족도 나를 포함해 즐비한데 기껏 해야 서너 명의 용의자 안에서 독자의 뒤통수를 때리는 반전을 만들기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러니 늘 좋은 사람인 줄 알았던 남편, 아내, 친구, 애인이 사실은 나쁜 놈이었다, 로 끝나기 일쑤인 것이다. 다만 범인이나 반전은 뻔해도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고, 트릭이나 미스디렉션 등 추리적인 장치가 빼어나다면 그건 또 다른 얘기이긴 하다. 그런 경우라면 고만고만한 아류작 수준을 뛰어넘어 한 편의 추리 스릴러로써 충분히 독자적인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홍콩영화 팬들이 <영웅본색>만큼이나 <첩혈쌍웅>을 좋아하는 것처럼.

반갑게도 <사일런트 페이션트>가 딱 그런 작품이었다. 남편을 총기로 살해하고 몇 년째 입을 닫은 정신병 환자를 치료하려 노력하는 정신과 의사가 나오는 중심 줄거리는 뻔한 편인데 트릭에서 독자를 완전히 한 방 먹인다. 실은 일본의 신본격파가 자주 쓰는 어찌 보면 좀 평범한 트릭인데 이게 서양 스릴러에서 나오니까 닳고 닳은 추리소설 독자인 나조차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작가가 일본 추리소설을 넓게 탐독했을 리도 없으니 아마 순전히 본인의 창의력에 의해 트릭을 만들어낸 것일 텐데, 이런 류의 트릭을 처음 봤을 가능성이 높은 서양 독자들은 완벽하게 넉다운, 정신을 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신인 작가의 데뷔작이 베스트셀러에 오를 만도 하다.

영화로도 만들어진다고 하는데 이런 류의 트릭은 영화화가 어렵다는 게 통설이지만 이 작품은 편집에서 잘 오려붙이면 충분히 그럴싸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데이비드 핀처 같은 감독이 제시카 차스테인, 벤 위쇼 혹은 에디 레드메인 진용으로 만들어내면 박스오피스도 점령하지 않을까. 실제 정신병원에서 몇 년이나 일했다는 작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모두 쏟아부으려는 신인의 치기도 범하지 않고 깔끔하게 플롯 위주로만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알케스티스'가 핵심 제제이지만 지나치게 현학적으로 빠지지도 않는다. 오직 흥미로운 이야기로만 승부하는 이야기계의 새로운 승부사 출현이다. 앞으로의 행보가 몹시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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