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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무덤 ㅣ 모중석 스릴러 클럽 15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제목에 소녀가 들어간다고 혹시 소녀시대와 관련이 있는 책이라고 착각해 집어드는 독자는 없어야겠다. <소녀의 무덤>은 스릴러 마스터, 반전의 제왕 제프리 디버의 출세작으로 1995년에 출간되었다. 이미 국내에 그의 대표적인 히트작 '링컨 라임 시리즈'가 6권이나 나와 있어 적어도 확실한 재미는 보장하는 작가라는 것은 다들 알고 있으렷다. 원서를 읽을 수 있는 축복받은 독자들 사이에서 링컨 라임 시리즈 외에 가장 재미있는 디버의 작품이 <소녀의 무덤>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라 디버 애호가들의 기대 또한 높았던 책인데 이렇게 우리말로 만나게 되니 반가움을 숨길 수 없다. 개인적으로도 제프리 디버 책 몇 권에 관여를 한 바가 있고, 그걸 떠나 열성팬이기도 해 기쁨 두 배라고나 할까.
정체가 모호한 스릴러 기획자 모중석 씨가 직접 선정한다고 밝히는 모중석 스릴러 클럽의 15번째 책으로, 모중석 스릴러 클럽은 책 맨 뒤에 모중석 씨와 편집자의 인터뷰가 실려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대체로 작가 소개나 이 책을 선정한 이유, 현지에서 받는 평가 등이 수록되어 있는데, <소녀의 무덤>에 관해서는 '훗날 자신에게 부와 명예를 안겨준 링컨 라임 시리즈의 톤을 확실히 세팅해놓았다'고 평했더라.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좋은 한 줄 평이라는 생각이 든다. <본 컬렉터> <코핀 댄서> <곤충 소년> 등 크게 히트한 링컨 라임 시리즈에서 작가가 트레이드 마크로 삼는 속임수, 반전, 서스펜스가 어디서 출발했는지 확실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었기에.
줄거리를 느슨하게 이끄는 법이 없는 디버답게 시작부터 강렬하다. 여덟 명의 소녀들을 인솔하는(한 명만 더 있으면 소녀시대잖아, 하악,,) 두 명의 여교사가 등장한다. 그녀들은 버스를 타고 멀리 떨어진 지방 축제에 참가하는 길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평범한 설정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 가지 독특한 건 그녀들이 모두 말을 못하는 농아라는 것. 비록 수화를 통해서만 대화를 나눌 수 있지만 만화책 영웅에 열광하는 딱 그 또래 나어린 소녀들이다. 신나게 버스를 달리다 일행은 우연히 교통사고를 목격하고 피를 흘리며 누워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버스에서 내린다. 이런 데서 오지랖 넓게 남들을 도와주다 온갖 고초를 겪는 건 스릴러나 호러의 공식인 법. 주인공들이 스티븐 킹이나 딘 쿤츠의 책을 몇 권만 읽었더라도 그냥 지나쳤을 텐데...
알고 보니 피를 흘리며 누워 있는 사람들을 그렇게 만든 건 바로 오늘 새벽에 감옥에서 탈옥한 세 명의 죄수들이었다. 루 핸디를 필두로 한 피도 눈물도 없는 탈옥수들은 도망치다가 교통사고가 나자 차에서 내려 맞은편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처치한 것이다. 사고 소식을 듣고 경찰들이 몰려오자 핸디는 어쩔 수 없이 도와주러 내린 열 명의 농아학교 일행들을 인질로 잡고 버려진 도살장 안으로 잠입해 농성 태세에 돌입한다. 한편 인질 협상의 대가 FBI요원 아더 포터는 오늘이 아내의 기일임에도 불구하고 호출을 받고 즉시 도착해 바리케이드를 치기 시작한다. 여기까지가 딱 35페이지 동안 일어난 일이다. 역시 디버는 페이지를 낭비하는 법이 없다!
한마디로 인질극 스릴러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인질 협상가 아더 포터와 루 핸디 사이에서 벌어지는 팽팽한 심리전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독자를 빨아들이는가 하면, 잔인하고 도통 죄책감이 없는 루 핸디와 어떻게든 아이들을 지켜내고 싶어하는 농아교사 멜라니 사이의 피 말리는 두뇌 게임이 교차해 읽는 동안 도저히 딴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책이다. 인질범, 협상가, 인질이라는 인질극의 세 핵심 요소들이 전부 비중있게 다뤄지며, 이런 거대한 사건의 와중에 어떻게든 끼어들어 특종을 만들겠다는 기자들, 아이들을 무사히 구원해 자신의 이미지를 드높이려는 정치꾼들까지 등장해 상황을 악화시키는 등 그야말로 현대 인질 사건의 모든 양상이 집약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언급한 대로 링컨 라임 시리즈의 모태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설정들도 자주 눈에 띈다. 전미 최고의 법의학자인 링컨 라임과 놀라운 인질 협상 성공률을 보유하고 있는 아더 포터의 전문가적인 면모가 겹치고, 링컨 라임이 각 분야의 스페셜리스트들과 팀을 짜 활기찬 수사를 벌이는 것처럼 아더 포터 역시 심리 분석가, 컴퓨터 전문가 등 늘 함께 일하는 믿음직한 동지들과 멋진 팀웍을 보여준다. 링컨 라임 시리즈에서 디버는 매 작품마다 다양한 소재들을 깊이 있게 조사해 작품에 풀어놓는 걸 즐기는데, <본 컬렉터>가 뉴욕의 역사, <코핀 댄서>가 비행기와 항공, <사라진 마술사>는 마술의 역사와 수법이었다면 <소녀의 무덤>은 수화나 농아 세계에서의 정치적 운동 등을 묘사해내 또 하나의 볼 거리를 주는 셈이다.
하지만 약은 약사에게, 반전은 디버에게, 물어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반전을 잘 다룬다는 세평답게 <소녀의 무덤>에서 가장 칭찬해주고 싶은 부분도 역시 반전이다. 디버의 작품을 처음 읽는 독자라면 사건과 별로 관계없어 보이는 어떤 사소한 사실들도 무시하지 말라고 충고해주고 싶다. 나중에 다 기가 막힌 반전의 재료로 사용되니까. 그의 작품을 제법 봐서 그 스타일에 아무리 익숙해졌다고 생각해도 결국 또 속고야 마니 디버는 타고난 사기꾼인 것인가...
그밖에 심리 묘사도 마음에 든다. 왜 머리핀 하나를 팔아도 성의껏 온 마음을 다해야 겨우 판매가 성사되는 법인데, 하물며 인질을 무사히 내놓고 항복하라고 설득하기는 얼마나 어려울까. 아더 포터는 인질범 루 핸디와 마치 연애를 하듯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는데 그에게 완전히 동화되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모든 상황이 종료되면 인질범은 죽거나 체포되거나 둘 중 하나다. 짧게나마 인질범에게 모든 마음을 다준 아더 포터가 느끼는 상실감은 비슷한 일에 종사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미묘한 지점까지 잘 잡아낸 것은 감탄스러운 부분이 아닐까.
그러나 아더 포터가 주책없이 인질 중 한 명에게 지나치게 마음을 뺏겨 전문가의 면모에 먹칠을 한다거나, 주인공 중 한 명이 갑자기 스티븐 시걸로 변신하는 결말이 되면 황당한 느낌마저 들어 완벽한 디버의 최고작이라고 하긴 힘들 것 같다. 현재까지 본 디버의 작품 중에서는 <코핀 댄서>와 <곤충 소년>이 최고작이라고 생각하는데, <소녀의 무덤>이 그 뛰어난 작품들을 만들어내기 위한 가교라고 한다면 그래도 역시 높은 평가를 내릴 수 밖에 없다. 애인과 싸웠거나, 지방 출장을 갔다거나 해서 무료한 하루를 때워야 할 사람이 있다면 <소녀의 무덤>이 확실한 답이 될 것이다.
p.s/ 모중석 씨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그래서 일단 국적을 추측해봤다. 모 씨라는 성이 국내에서는 대단히 희귀성이니 혹시 중국인? 모택동(毛澤東)도 있으니...혹시 텐진에 사는 모중석(毛中石) 씨. 아니면 미국인일지도 모르겠다. 전 뉴욕 메츠 선수 중에 모 본이라는 타자가 있었다. 풀네임은 모리스 사무엘 본(Maurice Samuel Vaughn). 어쩌면 모중석 씨의 풀네임도 모리스 중석(Maurice Joong Suk)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