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섬 미도리의 책장 2
곤도 후미에 지음, 권영주 옮김 / 시작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동그란 얼굴의 여인이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표지가 무척 인상적인 작품이다. 무슨 서러운 사연이 있어서 이렇게 울고 있을까나, 궁금해서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읽기 시작했는데, 다들 책을 엄청 쳐다보길래 창피해져서 조용히 집어넣고 집에 와 단 2시간 만에 다 읽고 말았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얼어붙은 섬>이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고립된 섬에 갇힌 8명의 남녀가 하나씩 살해당한다는 내용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아야쓰지 유키토의 <십각관의 살인>,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외딴섬 퍼즐>과 비슷하게 섬을 배경으로 한 본격 추리소설이라고 간단히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언뜻 떠오르는 작품이 몇 개 없어 3권만 소개했지만 사실 섬을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은 더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본격 추리소설의 무대로 작가들이 섬을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섬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간다기보다는 보통 여름 휴가나 겨울 여행에 큰맘 먹고 한번씩 가는 곳이다. 도심에서의 안온하지만 심심한 일상과는 다른 뭔가 뒤틀린 비일상의 파격을 줄 수 있어서가 아닐까. 물론 더 큰 이유는 배만 끊기면 곧바로 섬 전체가 완벽하게 밀폐된 밀실이 되기 때문이겠지. 이 책에서도 역시 엽기적인 방법으로 한 명씩 죽어나가는 주인공들이, 머무르고 있는 무인도를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모터보트를 사용할 수 없게 되면서 숨이 턱턱 막히는 고립감과 공포감을 선명하게 전달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작가 곤도 후미에는 1993년, 제4회 아유카와 데쓰야 상 수상작인 이 작품으로 성공리에 등단했는데, 데뷔 연도로 봐서 아야쓰지 유키토나 아리스가와 아리스 등의 대표적인 신본격 작가군 중 약간 후배 격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본격 작가들, 특히 아야쓰지 유키토 같은 작가가 트릭에만 매몰되어 있고, 지나치게 게임 감각이며, 문장이 서투르다는 혹평을 듣기도 한다면, 곤도 후미에는 언급한 여러 문제점들을 전부 피해가고 있어 나무랄 데가 거의 없다. 특히 날카로운 가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정념과 열정에 불륜의 장미를 받아드는 화자이자 여주인공인 아야메의 섬세한 심리 묘사는 돋보인다. 8명의 주인공들은 모두 사랑이라는 독한 술에 한껏 취해 있으며,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가장 강력한 동기 또한 애달픈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본격 추리소설에서 이 정도로 연애소설의 풍미를 자아내는 작가는 곤도 후미에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데뷔작답게 일군의 등장인물이 섬에 고립되는 과정이 슬쩍 억지스럽다거나 주인공들의 나이가 이십대라 주고받는 말은 통통 튀는데 머릿속의 사고는 지나치게 관능적이고 탐미적이라 부조화가 느껴진다거나 하는 점은 읽는 동안 좀 걸리는 부분이었지만 독서의 재미를 크게 해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본격 추리소설에서 제일 중요한 트릭과 사건의 해결이 만족스러우니까. 애거서 크리스티의 아주 유명한 두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모티브를 따와 결정적인 트릭까지 거의 그대로 재현하다시피 하는 첫번째 결말에서는 솔직히 이게 뭐야,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모든 얽키고설킨 이야기들을 완벽하게 매듭짓는 진짜 결말이 기다리고 있어, 무척이나 성공적인 고전의 창조적인 재해석이라 불러주고 싶다. 추리소설을 별로 접해보지 않은 독자도, 애거서 크리스티 류의 고전 추리소설을 꿰고 있는 사람도 한방 먹일 수 있는 근사한 결말이다.

 

<얼어붙은 섬>은 1930년대 사교계에서 유행했던 드레스를 고이 간직하고 있던 할머니가 손녀에게 선물로 그 드레스를 주자, 손녀가 현대적인 디자인을 가미해 만인에게 선보임으로써 박수갈채를 받는 장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우아한 고전미에 현대의 세련된 감각이 접목된, 추리소설 팬이라면 누구나 흐뭇하게 읽고 뒤로 넘어갈 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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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8-08-19 0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마지막 문단이 정말 멋진 리뷰네요 ^^
리뷰 많이많이 올려주세요~
추리 소설을 자주 읽지는 못해도 대리만족하고 있습니다 ^^;;;

jedai2000 2008-08-20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빠서 리뷰를 잘 못 쓰고 있는데 정말 기운나는 말씀이네요 ^^
너무 감사드립니다. 길기만 하고 별로 멋지지는 않은 것 같은데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막 힘이 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