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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더리스 브루클린 ㅣ 밀리언셀러 클럽 72
조나단 레덤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머더리스 브루클린>이라는 제목의 추리소설이라면 누구나 murderless를 떠올릴 것이다. '살인 없는 브루클린'이라니 탐정이 범죄를 다 소탕해 평화의 고장이 된 브루클린을 그리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런데 motherless더라. '엄마 없는 브루클린', 이건 뭐지? 오래된 영화 '엄마 없는 하늘 아래'도 아니고. 알고 보니 정말로 엄마가 없는 고아가 주인공인 하드보일드 미스터리였다. 하드보일드의 본고장인 미국이 아니라 영국에서 2000년도에 영국추리작가협회 최우수상을 탔다니 이색적이다.
예전에 처음 하드보일드 미스터리를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이건 마치 RPG 게임 같잖아 하는 거였다. 보통 사립탐정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은데, 우연찮게 사건에 말려든 탐정은 몇 가지 기본 단서를 가지고 관련자들을 계속 만난다. 여러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고 거기서 연결된 또 다른 참고인들을 만나고, 악당들로부터 뒷통수도 맞고(말 그대로 '얻어맞는' 경우가 많다)...여차저차해서 정보와 단서가 충분히 쌓이면 최종적으로 사건을 해결하지.
애거서 크리스티 식의 본격 미스터리가 기본적으로 탐정과 독자에게 처음부터 공정하게 단서를 제공하고 그걸 하나로 꿰어 사건의 진상과 트릭을 밝혀내는 데 골몰한다면, 하드보일드는 탐정이 단서를 수집하는 과정 자체에서 재미와 문학성을 획득하는 것 같다. 하드보일드의 탐정은 비열한 거리를 누비며 어두운 사회의 현실을 관찰하기도 하고, 거리에서 만난 다양한 인간군상을 스케치하며, 진정한 자기 자신의 모습과 대면한다. 아무래도 작위적이고 진행 과정이 판에 박은 듯 도식적일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한계를 가진 본격 미스터리가 현대에 와서 시든데 반해, 하드보일드는 탐정이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사회와 인간을 그리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그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는 게 아닐까.
<머더리스 브루클린> 역시 하드보일드의 매력과 장점을 어느 정도 간직한 작품이다. 고아원에서 자란 네 명의 소년을 청년이 될 때까지 돌봐주던 건달 똘마니가 피살되자(<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슬리퍼스> 등과 분위기가 약간 비슷하다), 그중 한 명인 라이어넬이 범인을 밝히고 복수하기 위해 조사를 결심하고 음울한 브루클린의 곳곳을 누비기 시작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너무도 전형적인 하드보일드라 심심할 것 같은데, 라이어넬에게 매우 독특한 개성이 있어 그렇지는 않다. 고아 라이어넬은 '투렛증후군'이라는 일종의 신경장애를 앓고 있다. 그는 투렛증후군의 무의식적인 충동을 억누르지 못해 갑자기 되도 않는 소리를 지르거나, 말도 안 되는 신조어를 만들고, 상황에 부적절한 단어, 문장 등을 마구 내뱉는가 하면, 자기가 만든 규칙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의지로는 제어가 안 되는 그의 투렛증후군은 곳곳에서 희극적인 장면을 연출하지만, 깊이 사랑에 빠진 여자에게도 반복되는 이상 행동을 함으로써 결국 그녀를 잃고 마는 안타깝고 쓸쓸한 장면도 아울러 만들어내고 있다.
투렛증후군을 가진 주인공을 이토록 현실감 넘치게 그린 책은 또 없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생각에 골똘히 잠기면 무심코 속마음을 겉으로 말하곤 해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 등의 창피를 당하곤 하는데, 매일같이 이런 장애를 겪어야 한다면 정말로 엄청나게 불편할 것 같다. 투렛증후군으로 인해 사고 자체가 남들과는 다른 라이어넬을 생동감 넘치게 그려낸 작가의 필력이나 문장력만큼은 높이 사고 싶다(또한 라이어넬을 '영어로' 생동감 넘치게 그려낸 작품을 '우리말'로 생동감 넘치게 옮긴 번역가의 노고도 높이 사고 싶다). 작품의 호평도 대체로 그쪽에 쏠려 있는 것 같고. 그러나 미스터리의 측면에서 보자면 작가가 준비해둔 사건의 결말도 평범하고 조사 과정이나 라이어넬이 진상에 도달하기까지의 흐름에는 대단할 것이 없어 흥이 좀 떨어졌다. 레이먼드 챈들러, 로스 맥도널드 같은 작가들의 정통 하드보일드를 연상시키는 플롯의 진행도, 어떤이가 보기엔 찬란한 고전에의 오마주요, 다른이가 보기엔 하드보일드의 뻔한 공식을 그대로 재탕한다고 할 수 있어 취향에 따라 찬반이 갈릴 듯하다. 굳이 미스터리로 한정할 게 아니라 한 편의 문학 작품을 보는 마음으로 읽는 편이 훨씬 인상적인 독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