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시효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김성기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제3의 시효]는 수많은 뛰어난 작가들이 우글대는 일본 미스터리계의 지형도 안에서도 그만의 경찰소설로 한 자리를 단단히 차지하고 있는 요코야마 히데오의 연작 단편집이다. 일반적인 범죄 발생-경찰 수사의 줄거리에 경찰 조직 안에서의 치열한 암투와 갈등 그리고 화해와 단결이라는 부차적인 재미를 더하는데 명수인 요코야마 히데오의 경찰소설은 실패할 확률이 극히 적은 주식투자와도 같다. 그는 장편과 단편을 골고루 내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장편보다는 단편들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는데, 무엇보다 이 작가의 미스터리 트릭은 비교적 단순한 게 많아 장편 하나를 온전히 끌고가기는 힘에 부치는 편인데다 감동적인 마무리에 다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의 장편은 독일 기계처럼 정교하게 돌아가는 조직 안에 충격적인 상황이 연속되면서 그에 따른 조직원들의 극적인 반응을 계속 흥미진진하게 묘사하는 스타일이라 읽는 동안 끊임없는 몰입감과 박력은 줄지언정 우리나라 독자들이 유독 좋아하는 기발한 트릭과 반전은 별로 제공하지 못한다는 약점이 있다.

 

하지만 요코야마 히데오의 단편은 다르다. 장편에 쓰기에는 조금 약하지만 단편에는 멋지게 녹아들 수 있는 준수한 트릭이 등장하며 아무래도 길이가 짧아서인지 감동에 대한 강박도 장편만큼 느끼할 정도로 심하지는 않은 것 같다. 기자 출신답게 늘어지지 않는 간결한 문장과 빠른 호흡, 타고났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박진감 넘치는 글솜씨로 책을 독자들의 손에서 절대로 놓을 수 없게 만드는 그의 단편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작품들이 모여 있는 책이 바로 오늘 소개하려는 [제3의 시효]가 아닐까 싶다. 앞으로 창창한 날이 남아 있는 작가니만큼 이보다 더 뛰어난 걸 쓰지 못한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적어도 현재까지 요코야마 히데오의 최고작이라고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F현 경찰청 강력계의 세 반을 무대로 펼쳐지는 여섯 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각 반 반장들의 각기 다른 매력과 개성적인 수사법이 기막힌 즐거움을 보장한다. 절대 웃지 않는 1반 반장 '파란 귀신' 구치키는 경찰청 내 최고 엘리트 집단의 수장답게 어디까지나 정공법으로 용의자를 압박하고 진실을 밝혀낸다면, 2반 반장 '냉혈한' 구스미는 공안 출신답게 위법에 가까운 편법과 도박성 강한 함정수사 등으로 절차야 어떻든 범인만 잡자 주의다. 3반의 '검독수리' 무라세는 천재 수사관이라는 세평처럼 범죄에 관한 직감이 비상해 현장만 보고도 대충 범인의 윤곽을 그려낸다. 진정한 경찰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범죄를 원수처럼 미워하는 이 세 반장이 각자 활약하다 때로 부딪치고 가끔 협력하며 난해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게 단편들의 기둥 줄거리. 물론 '조직'과 그 속에서 울고 웃으며 부대끼는 '사람'을 그리는데 독보적인 히데오의 작품이니만큼 능력이 뛰어난 세 반장을 제대로 휘어잡지 못해 약간의 굴욕감을 느끼는 다하타 과장이라든지, 어린 시절 범죄의 꼭두각시로 이용되었던 젊은 형사 야시로 등 다양한 캐릭터들이 나오는데 역시나 명불허전이라 할 정도로 잘 빚어진 인물들이다.

 

보통 이런 단편집을 보면 탁 튀는 놈이 한두 개 있고 나머지는 고만고만한데 비해 [제3의 시효]는 수준이 비교적 고르다. 놀랍게도 아주 높은 수준에서 고르다는 이야기다. 마지막 단편 <흑백의 반전>이 약간 억지스러운 설명이 있어 살짝 떨어질 뿐, 증명하기도 힘들고 효과도 별로 없을 것 같은 알리바이를 줄기차게 내세우는 용의자의 비밀을 파헤치는 <침묵의 알리바이>, 출입구가 봉쇄된 맨션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조직 폭력배를 수사하는 <밀실의 탈출구>, 십여년의 시차를 두고 일어난 청산가리 연쇄독살 사건을 그린 <페르소나의 미소> 같은 작품들이 모두 재미있고 완성도가 뛰어나다. 하지만 이 단편집의 최대 하이라이트는 표제작인 <제3의 시효>에 비춰져야 마땅한 것 같다. 2반 반장 피도 눈물도 없는 구스미의 악마 같은 카리스마에 전율을 금치 못할 작품으로 그는 15년이라는 살인 공소시효가 지나 공식적으로 소멸되어 버린 강간살인 사건에 도전한다. 도피 중인 용의자는 시효 기간 안에 대만에 일주일을 다녀온 적이 있는데 알고 보니 외국에 나가 있는 기간은 시효에 포함되지 않는다. 따라서 용의자의 진짜 시효는 15년 하고 7일. 그러나 2반 형사들의 노력에도 제2의 시효가 끝나도록 범인은 잡히지 않는다. 이제는 정말 끝이구나 낙담하는데 구스미는 지시를 멈추지 않는다. '제3의 시효'가 있으니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경악할 정도로 기발하달 수 있는 제3의 시효 때문에 결국 용의자는 잡히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또 다른 반전 그리고 또 한번의 뒤집기. 구스미는 사중, 오중의 함정을 파고 있었던 것이다. 근래 읽어본 단편 아니 국내에 나온 모든 2000년대 일본 미스터리 단편들 가운데서도 단연 최고, 라고 말할 수 있다. 몇 번의 뒤집어지는 반전의 연속과 더불어 작가 특유의 감동과 인간미가 배합되어 잊을 수 없는 즐거움을 주는 것은 물론이요 요코야마 특유의 문체 맛도 일품이다. 단문, 아니 아예 한 단어, 혹은 두 단어로 한 문장을 만들어 긴박감과 속도감을 배가시키는 솜씨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작가다. 지금 책이 곁에 없어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런 느낌.
-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 3의 시효가 남아 있다."
수사 속행? 형사들이 모인 방에 폭탄이 떨어졌다. 모두 경악. -

 

경찰소설의 장인이 모든 역량을 다해 써낸 [제3의 시효]는 사실 [강력1반]이라는 만화책으로 출간된 적이 있고, 여섯 개의 단편 중 네 개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강력1반]을 예전에 읽은 바 있어 썩 기대가 크진 못했는데 과연 원전에 범접하는 리메이크는 없다는 생각을 다시금 들게 만들었다. 얼핏 F현 경찰청의 새 시리즈가 연재되어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일본서 책으로 묶여 나오면 우리나라에서도 반드시 또 만나고 싶다.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은 단편집으로 특히 표제작 <제3의 시효>는 3년에 한 번 꼴로 다시 읽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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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8-07-10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고죠^^

jedai2000 2008-07-10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습니다. 요코야마 히데오, 최고죠 ^^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