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날짜는 10월 30일인데 9월달 걸 쓰고 있네요. 저번 달의 미스터리로 제목을 바꿔야 할까요-_-;;
<몽키스 레인코트 - 로버트 크레이스>
베트남전 참전용사 출신의 사립탐정 콤비 엘비스 콜과 조 파이크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 유쾌한 재담꾼 엘비스의 자잘한 유머와 과묵하지만 속정 깊은 조의 서로 다른 개성과 매력이 어우러지며 스피디하게 진행된다. 실패한 할리우드 에이전트 남편의 실종을 조사해달라는 아내의 평범한 의뢰의 배후에 지하 세계의 거물이 있다는 플롯은 닳고 닳은 감이 있을 정도로 자주 나오는 이야기지만 1987년에 나온 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비슷한 시기에 유행했던 미국 미스터리 스릴러들에서는 유사한 점이 많은 것 같다. 주인공이 베트남전 경험자가 많고, 가라테나 태극권, 태권도 등 동양무술을 제법 할 줄 안다는 것도 그렇다. 이렇다 보니 필연적으로 당시의 탐정은 범인을 밝혀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부 적들을 직접 때려눕히는 액션의 대가들이다. 폭력적인 탐정을 등장시켜 큰 성공을 거둔 미키 스필레인을 벤치마킹하고 싶었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영화판에서 거액의 판권을 얻어내기 위해서? 흥행 영화는 아무래도 액션을 중시하는 법이니까. 그렇다고 <몽키스 레인코트>가 <람보>풍의 무뇌아 액션 스릴러에 그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리쎌 웨폰> 1편을 떠올리게 하는 화끈한 액션이 있지만 탐정 엘비스 콜이 복잡하게 꼬여 있는 사건을 술술 풀어가는 재미도 충분하다. 볼 만한 작품.
<루피너스 탐정단의 우수 - 쓰하라 야스미>
사립 루피너스 학원에 재학중인 4명의 남녀 학생이 난해한 살인사건을 잇달아 해결하는 <루피너스 탐정단의 당혹>의 속편이다. 전편을 처음 읽어 내려갈 때 등장인물의 면면이나 전체적인 분위기를 보고 마치 순정만화나 소녀소설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갈수록 아, 이거 장난이 아닌데 했다. 생각보다 기발한 트릭과 독특한 맛이 있는 뛰어난 단편 추리소설집이었던 것이다. 비범한 추리력으로 경찰 언니를 도와(대부분 자의는 아니지만) 많은 사건을 해결한 아오우 사이코, 짧은 머리에 선머슴 같은 성격의 키리에, 요즘 말로 하면 된장녀라 할 만한 미소녀 마야, 그리고 아오우가 짝사랑하는 화석 마니아 샌님 시지마가 루피너스 탐정단으로 뭉쳐 3개의 사건을 풀어내는 모습을 보는 건 무척 유쾌하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나 같은 독자가 많아서일까. 작가는 전편 출간 이후 10년도 더 지난 2007년에 <루피너스 탐정단의 우수>라는 속편을 써냈다. 놀랍게도 시작부터 루피너스 탐정단의 멤버 한 명이 사망한다. 졸업하고 각자의 삶에 충실하던 탐정단은 세상을 떠난 친구의 장례식에 모여, 그가 남긴 마지막 비밀을 풀기로 한다. 모두 네 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지만, 안타깝게도 추리소설로서의 완성도는 전편들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다만 영원할 것 같았던 고등학교 시절의 풋풋한 루피너스 탐정단이 모두 성인이 되어 느끼는 소회, 그리고 그중 한 친구를 떠나보낸 슬픔 등이 아프게 그려져 잊을 수 없는 감흥을 준다. 루피너스 탐정단의 졸업식이 거행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숫제 펑펑 울었다. 루피너스 시리즈에서는 순정만화 같은 작풍을 선보였지만 실제로 작가 쓰하라 야스미는 징그러운 남자고, 특유의 탐미주의 스타일이 인상 깊은 환상소설, 호러소설 계열의 1인자다. 루피너스 시리즈도 꼭 만나보시길.
<항설백물어 - 교고쿠 나츠히코>
'교고쿠도 시리즈'로 유명한 교고쿠 나츠히코의 연작 단편집이다. <항설백물어>라는 다소 어려운 원제를 그대로 사용했는데, 풀어보면 '항간에 떠도는 백 가지 기묘한 이야기'라고 한다. 시리즈화를 즐기는 작가답게 <항설백물어>도 <속 항설백물어>, <후 항설백물어>라는 속편들이 나왔고, 이중 <후 항설백물어>로 나오키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기도. 교고쿠 나츠히코는 일본 전통 요괴를 소재로 차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과연 이번 작품에서도 여지없이 무수한 요괴들이 등장한다. 다만 이 작품의 주제는 '이 세상에 진정 이상한 일은 없다'는 것이기에, 진짜 요괴는 나오지 않고 요괴보다 더 무섭고 어두운 인간의 마음에 포커스를 맞췄다. 스님으로 둔갑해 50년 동안 사람을 속인 여우, 주인에게 잡아먹히고 매일같이 집을 찾는 말의 영혼 등 예부터 일본에 전해져 내려오는 괴담을 재해석하고 현대적인 맛을 가미해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어낸 작가의 역량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러나 이 모든 기묘한 사건의 뒤에 늘 에도시대판 해결사들이 숨어 있고, 그들이 가짜 요괴를 동원해 진짜 악인을 파멸시킨다는 대강의 내용이 대동소이해 읽다 보면 금방 질리는 단점이 있다. 적어도 교고쿠 나츠히코 풍 추리소설이라고 보기는 힘들 듯하다.
<수상한 사람들 - 히가시노 게이고>
매달 쏟아져 나오지만 안 보면 왠지 섭섭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집. 게이고는 25년 경력의 작가생활 동안 거의 70편에 달하는 소설을 쓴 책공장이라 작품의 편차가 제법 있는 편이다. 하지만 <용의자 X의 헌신>으로 나오키상을 수상한 이후로는 어느 정도 진지한 작가 이미지도 굳히고 퀄리티 관리도 좀 하는 모양인지, 특별히 수준 미달의 작품은 없어 다행스럽다. 그러나 그의 작풍이 완성되기 전인 초년병 시절의 작품들은 이미 게이고의 손을 떠난 화살. 그가 관리할 수 있는 영역 바깥이다. 일본처럼 그의 작품을 데뷔작부터 순차적으로 감상한 경우라면, 이 작가가 점점 성장하는구나 하며 기쁜 마음으로 한 권 한 권 읽어나가겠지만, 1980년대부터 2009년까지의 작품이 순서없이 중구난방으로 쏟아져 나오는 우리나라의 실정은 온전한 게이고 읽기에 약간 방해가 되는 것 같다. 초기에 쓴 몇몇 졸작을 읽고 현재의 작품까지 무시하거나 하는 사람이 있어서 하는 말이다. 작가는 언제나 가장 최근에 쓴 소설로 평가받는 직업이다. 예전에 좋은 작품을 썼다고 지금의 형편없는 작품도 옹호해줘서는 곤란하듯이, 과거에 쓴 몇몇 졸작 때문에 더 발전한 현재의 수작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유감이지만 <수상한 사람들>은 초기의 형편없는 작품군에 들어간다.
<12인 12색 - 신재형 外>
함부로 평가하기 난감한 한국 추리소설가들의 작품집이다. 개인적으로 비슷한 기획에 참여해 한국 추리소설의 질적 저하에 기여한 전과가 있기에 특히 그렇다. 한 가지 꼭 말하고 싶은 건 내가 참여한 단편집의 판매 수치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는 것. 우리 독자들은 여전히 우리 작가가 쓴 추리소설을 기다리고 있구나, 수준 높은 작품만 나오면 언제든 책을 사줄 용의가 있구나 하는 기분 좋은 확신을 얻었다. 감히 <12인 12색>의 작가들도 이러한 독자들의 욕구를 기억하고 더 정진해 좋은 작품으로 두루 사랑받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바이다. 굳이 말해 이 작품집에서 읽기 괜찮았던 작품들은, '마지막 장난', '안락사', '글월비자', '반지하', '의식은 시공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정도를 꼽고 싶다. 그렇지 않은 작품들까지 거론해 열심히 노력한 작가분들을 신경질나게 하는 건 원치 않는다. '마지막 장난'은 장난에 목숨거는 세 대학생이 끔찍한 결과에 맞닥뜨린다는 아이디어가 흥미로운데 비해 세세한 디테일이 부족하다는 점(잠겨 있을 게 분명한 시체 보관실과 별장가의 빈집은 어떻게 들어갔는가 하는 등의 설명이 없다)에서 머리로만 쓴 느낌을 받았고, '안락사'는 무난하지만 쉽게 짐작 가능한 결말이 아쉽다. '글월비자'의 산뜻한 결말은 높이 평가할 만한데, 진상을 밝혀내는 과정이 단순하다. '반지하'는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잘쓴 환상소설에 가깝고, 알프레드 베스터의 초능력 SF를 연상케 하는 '의식은 시공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문장을 좀더 다듬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자기 머리도 못 깎으면서 남의 머리를 지나치게 지적한 것 같아 마음이 좀 그렇다. 참여한 모든 작가분들의 건필을 기원하며 이만 마무리하는 수밖에.
<졸업 - 히가시노 게이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가가 형사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 뛰어난 추리력 못지않게 인간적인 성품이 매력적인 가가 형사 시리즈는 현재까지 총 7편이 나왔고, 올해 국내에서도 모두 완간되어 추리소설 팬에겐 큰 기쁨이 되고 있다. 가가 형사 시리즈는 대학 졸업반인 가가 교이치로가 단짝 친구들 사이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파헤치는 <졸업>부터, 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민완 형사로 활약하고 있는 현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최신작 <붉은 손가락>까지 작가와 함께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 게이고의 대표 캐릭터라 할 수 있다. 애거서 크리스티에게 포와로, 코넌 도일에게 홈스라면, 히가시노 게이고에게는 가가 교이치로라는 말이다. <방과후>로 에도가와 란포상을 타며 화려하게 데뷔한 이듬해 내놓은 작품이니 게이고도 '소포모어 징크스'를 어느 정도는 걱정했을 텐데, 전작보다 훨씬 뛰어난 완성도를 선보이고 있기에 괜한 걱정에 불과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초기 스타일인 학원물+물리트릭의 공식을 아예 극한까지 밀어붙여 대성공을 이룬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작품의 핵심 미스터리는 잠긴 문의 열쇠 트릭과 '설월화'라는 복잡한 일본 다도의 법칙을 이용한 독살 트릭 두 가지로 되어 있는데, 첫 번째는 첨단 신소재에 대한 지식에 어두운 사람이라면 알 길이 없는데다, 좀 황당하다. 그러나 20장 가까운 설명 그림까지 동원하는 두 번째 독살 트릭은 그야말로 기가 막힌다. 이런 생각을 어떻게 해냈지, 하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니 꼭 직접 확인해보시길. 트릭이 워낙 복잡하다 보니 수많은 그림을 비롯해 상황 설명이 끝없이 계속되지만 꼼꼼하게 읽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다. 결코 지레 겁먹을 필요가 없다.
<남겨진 자들 - 제프리 디버>
스릴러의 장인, 제프리 디버가 오랜만에 시리즈 외의 작품으로 돌아왔다. 최근 몇 년 간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법과학자 링컨 라임 시리즈와, 용의자가 무심코 한 동작을 읽어내 그의 진짜 속마음을 알아채는 심리분석 전문가 캐서린 댄스 시리즈만을 번갈아 집필하더니, 이번에는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다. 시리즈물은 매력적인 주인공을 계속 만나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앞으로 계속될 시리즈를 위해 주인공이 어떠한 위기에 빠져도 결코 죽을 리 없으니 그만큼 긴장감이 덜하다는 단점도 아울러 있는 것 같다. 디버도 이 함정을 생각하고 간만에 새로운 등장인물과 이야기를 써서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한 게 아닐까. 끝간 데 없이 광활한 숲이 계속되는 위스콘신의 별장지대. 어느 부부가 주말을 보내기 위해 자신들의 별장을 찾는다. 그러나 평화로운 시간도 잠시, 총을 든 두 명의 킬러가 별장에 찾아왔고 부부는 킬러들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둔다. 그러나 부부는 죽기 전에 911에 신고 전화를 걸어둔 상태. 확인 차원에서 별장을 방문한 지역의 여경 브린은 끔찍한 살해 현장을 목도하고 충격에 빠진다. 그러나 킬러들은 자신들의 얼굴을 본 브린을 살려둘 수 없었으니, 이리하여 생사를 건 추적 게임이 막을 올리게 된 것이다. 이 책의 전반부는 두 킬러와, 브린 그리고 킬러들의 손에서 가까스로 살아난 부부의 친구가 2대2로 편을 이뤄 거대한 숲속에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펼치는 내용으로 진행된다. 킬러들이 머리를 짜내 브린 일행을 잡으려는 시도를 하는 챕터가 끝나면, 바로 다음 장에서 기발한 방법으로 반격을 가하는 브린 일행의 모습이 이어지는 식이다. 체스 게임처럼 온 힘을 다해 서로의 지략을 겨루는 흥미로운 협동 플레이라고 할까. 이번엔 디버가 전형적인 Cat & Mouse Game을 썼구나, 생각할 때쯤, 전매특허인 반전이 등장한다. 아아, 이번에도 당했구나, 무릎을 칠 새도 없이 연속으로 터지는 반전에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페이지의 끝이었다. 이번 핵심 반전의 특징은 'how'나 'what'이 아닌 'why'라는 것을 힌트로 염두해두시길. 핵심 반전이 나오고도 페이지가 150쪽 이상 이어져 힘이 떨어지지 않겠나 싶었지만, 악한인 줄 알았던 인물이 사실은 선인이었다는 식의 디버가 자주 구사하는 자잘한 반전들과 함께 이 범행을 왜(why) 했나를 밝혀나가는 과정이 이어져 끝까지 흥미진진했다. 제프리 디버, 이쯤 되면 진짜 신들린 반전 제조기라고 불러주고 싶다. 마르지 않는 아이디어의 샘을 자랑하는 우리 시대 최고의 스릴러 마스터의 작품을 9월의 미스터리로 선정한다.
20009년 9월의 미스터리: <남겨진 자들 - 제프리 디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