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인데, 10월 걸 쓰고 있다니...그때그때 써야지 한번 밀리니까 대책이 없네요ㅠ.ㅠ

<39계단 - 존 버컨>
무척 오래된 고전이 출간되었다. '쫓기는 사나이' 공식을 거의 최초로 확립시킨 알프레드 히치콕의 동명 영화로도 유명한 스파이 스릴러의 원조격인 작품이다. 아주 예전에 삼중당이나 하서에서 세로줄로 우리나라에서도 출간이 된 바 있다. 개인적으로 삼중당 판을 소장하고 있지만, 이번 기회에 읽기 편한 가로줄과 참신한 새 번역으로 보게 됐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작품의 내용은 간단하다. 아프리카에서 탄광 사업으로 재미를 본 영국인 리차드 해니. 그는 사교나 파티로 일관하는 따분한 런던 생활이 지겹기만 하다. 일주일 동안 기다려봐도 별 볼일이 없으면 다시 아프리카로 떠나기로 결심한 해니에게 낯선 미국인 기자가 접근한다. 기자는 블랙스톤이라는 비밀 조직이 세계 정계를 막후에서 조종하며, 그들이 영국 공습을 준비하고 있다는 음모론을 들려준다. 해니는 이 기자가 제대로 미쳤구나, 생각하며 무시하지만 며칠후 기자는 해니의 집에서 살해당하고 블랙스톤은 실재하는 것으로 밝혀진다. 그는 기자 살해의 누명을 벗고, 블랙스톤의 암살자들을 피하면서 영국 정부에 이 음모를 알리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1915년에 첫 출간된 작품이지만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 오늘날 무척 유행하는 스릴러의 A부터 Z까지 모든 게 들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모험을 꿈꾸는 쾌활한 신사, 끝없는 도피와 추격, 납치와 탈출, 비밀 조직의 음모, 최후의 역전...여전히 셜록 홈스풍의 명탐정 추리소설이 인기 있던 그 시대에 이런 별종이 난데없이 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역시 출간 당시 세계를 뒤흔들었던 1차대전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더 이상 돈이나 명예를 위해 이웃 한두 명을 죽이는 시대가 아닌,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죽어나가는 미증유의 전쟁을 목도한 작가 존 버컨에게 기존의 추리소설이란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오락물에 불과했을 터. 존 버컨은 암울한 시대에 국제 음모를 밝혀내는 한 사나이의 모험을 통해 새로운 장르를 창조하는데 성공했으며, 주인공 리처드 해니는 제임스 본드, 리차드 킴블(<도망자>), 제이슨 본 등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아무래도 지금 보기엔 지나치게 고색창연하고 전개도 느리지만, 역사적 가치로 판단할 작품이다.

<사탕과자 탄환은 꿰뚫지 못해 - 사쿠라바 가즈키>
<내 남자>로 나오키상, <아카쿠치바 전설>로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한 사쿠라바 가즈키는 라이트노벨에서 출발해 오늘의 위치에 오른 입지전적인 작가다. 라이트노벨 초기작인 <고식> 시리즈가 가상의 유럽 왕국에서 펼쳐지는 소년소녀의 청소년용 모험담에 가깝다면, <사탕과자 탄환은 꿰뚫지 못해>는 비록 라이트노벨이지만 작가의 개성과 주제의식이 오롯해 오늘날 일류 작가로 부상한 사쿠라바 가즈키의 원형이 될 만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등교거부에 히키코모리 오빠와 함께 살고 있는 여중생 나기사는 삶이 너무도 힘겹다. 그나마 엄마가 아르바이트로 벌어오는 적은 돈을 책이나 애니메이션 DVD 등으로 펑펑 써버리는 오빠는 한마디로 집안의 원수. 나기사가 보기에 오빠가 심취해 있는 가상의 세계는 삶에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는(무엇도 꿰뚫을 수 없는) '사탕과자 탄환'에 불과하다. 나기사는 얼른 성장해 돈을 벌어 현재의 가난을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실탄'을 얻고 싶어한다. 이 와중에 같은 반으로 전학온 유명 가수의 딸 모쿠즈는 자신을 인어라 생각하며 역시나 가상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나기사가 보기엔 모쿠즈 또한 사탕과자 탄환. 나기사는 모쿠즈와 전혀 가까워질 마음이 없지만 가정 학대를 당하는 모쿠즈의 비밀을 알게 되고 그녀를 도울 결심을 한다. 어울리지 않는 두 소녀가 서로에게 이끌리며 범죄와 맞닥뜨리는다는 <소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과 거의 흡사한 내용이다. 어린 소녀에 불과한 주인공들은 아직 어른이 아니기에 현실적, 사회적 제약이 너무도 많다. 그들을 잡아끄는 현재의 암흑에서 벗어나기 위해 처절하게 분투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마는 어둡고 슬픈 이야기.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악몽 속에서 밤새도록 헤매는 기분이 소름 끼치도록 오래 남았다.

<살인방관자의 심리 - 요코야마 히데오>
일본 추리소설계 보증수표 중 한 명인 요코야마 히데오의 2003년 단편집. 원제는 수록작 중 한 편의 제목을 그대로 담은 '진상'이다. 추리소설을 추리소설답게 만들어주는 트릭이나 반전도 빼어나지만 결말에 항상 깊은 감동과 여운을 주는 그의 단편들은 무엇 하나 뺄 것 없이 모조리 뛰어나다. 기자 출신이라는 경력에 걸맞게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를 소재로 취하는 그는 사회파 추리소설의 거두 마쓰모토 세이초의 직계 제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실력가. 먼 훗날 마쓰모토 세이초를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들을 확률이 가장 높은 작가라 생각한다(그러려면 지금 보다 훨씬 많은 작품을 써야겠지만). 작가의 말에 따르면 <살인방관자의 심리>는 '한 사건이 끝나고 나서 남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과연 다섯 편의 수록작 모두 끝났다고 생각한 사건 뒤에 감추어진 진실이 드러나며 둔중한 망치로 뒤통수를 맞는 듯한 감동과 씁쓸함이 가슴을 온통 헤집어 놓는다. 지방의 실권을 좌지우지하는 면장 선거에 출마한 주인공이 선거라는 지옥을 겪으며 스스로 파멸해가는 '마음의 지옥', 명예퇴직을 당하고 삶의 희망을 잃은 중년남자가 살인 용의자의 목격자가 된다는 '살생부'를 꼭 추천하고 싶다. 대표작이라 불리는 2000년 단편집 <동기>만은 못하지만 어느 작품 하나 질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단편들을 꾸준히 쓸 수 있는 역량이 그저 부러울 따름.

<고백 - 미나토 가나에>
2008년 일본 서점계를 휩쓸었던 작품. 판매만큼이나 비평적으로도 호평을 받아 신인 작가 미나토 가나에는 이 작품 한 편으로 그야말로 신데렐라로 부상했다. 어느 중학교에서 벌어진 몇 건의 살인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이 각자의 시점에서 정말은 어떤 사건이 일어난 것인가를 '고백'하는 형식으로 이뤄진 연작 단편집으로, 작가가 원래 공모전에 출품해 호평받은 첫 번째 단편 '성직자'의 뒷이야기를 이어서 쓴 것이라 한다. 비록 철없는 장난이었다지만, 그로 인해 자신의 소중한 딸을 잃은 여교사가 범인인 중학생 제자들에게 사적인 응징을 가한다는 강렬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어, 국내에서는 찬반 양론도 제법 일고 있는 것 같다. 또 아무리 머리가 좋기로소니 중학생들이 학교를 날려버릴 수 있는 위력의 폭탄을 만든다니 이게 말이 되느냐, 하는 리얼리티 부족을 지적하는 독자도 있는 걸로 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어리다는 이유 만으로 어떤 끔찍한 범죄를 저질러도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아니하는 소년범 문제를 지적하는 이른바 사회파 추리소설은 아닌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을 일종의 우화라 생각한다. 차디찬 복수가 더 끔찍한 복수를 낳는 끝없는 악순환의 연쇄와 '당신이 지옥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지옥 역시 당신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식의, 한 번 범죄에 발을 담구면 그 범죄의 동기가 아무리 고상해도 결국 똑같은 범죄자에 다름 아니라는 걸 말하는 그런 우화가 아닐까. 우화니까 어느 정도 리얼리티의 부족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내 눈에는 응징자인 여교사가 아무리 본인의 행동을 포장하려 해도 사실은 그녀 역시 자신의 비뚤어진 제자들과 똑같이 악의로 충만한 괴물로만 보였다. 이런 복수와 악의로 가득찬 암흑 세계의 한 폭 지옥도를 기리노 나쓰오 식으로 그려내 깊은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주제나 작가가 말하고 싶은 바를 떠나서 일단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재미있어 서스펜스 스릴러라는 장르적 관점으로만 봐도 충분히 합격점을 줄 만하다. <살인방관자의 심리>는 언제나 차돌처럼 단단한 요코야마 히데오의 뛰어난 단편집이지만, 자주 봐왔던 스타일이고 요코야마 히데오 작품들이 뛰어나다는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라서 더 논쟁적인 구석이 있는 <고백>을 이 달의 미스터리로 추천한다. 이런 논쟁이 더 확산되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야 추리소설 애호 풍토가 훨씬 조성될 테니까...
2009년 10월의 미스터리: <고백 - 미나토 가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