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ower & Tree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과 나무 이야기
마리안네 보이헤르트 지음, 마리아-테레제 티트마이어 그림, 이은희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2002년 7월
평점 :
절판


 개천가에 가면 요즘 흔하게 볼 수 있는 꽃 중 하나가 엉겅퀴다. 자주색 꽃이 피어났기 때문인데 아마도
여름 내내 그 자리를 지켜낼 것이다. 어릴 때부터 자주 들었던 엉겅퀴를 알게 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으
며 또한 이처럼 자주 볼 수 있게 된 것도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집에서 조금만 걸어나가면 개천가가
보이는 곳으로 거주지를 옮겼기 때문이다. 그곳에 놓인 앙증맞은 돌다리도 신기했고 오염된 환경으로
약간의 냄새를 풍기는 물이 때로는 맑은 것도 신기했다. 그러나 역시 이름을 아는 식물을 만날 때가
가장 즐겁다.

 식물에 관심이 있어서 관련 책을 찾던 중 지식이 아닌 흥미로 다가올 만한 책을 찾았다. 꽃과 나무라는
이 책의 내용은 해당식물의 자생지라던가 식물학적 분류에 의한 정리가 아닌 해당식물 고유의 역사를
안고 있었다. 꽃말이나 특징이 담담한 수채화와 함께이다. 사람보다 먼저 이 땅에 자리 잡은 꽃과 나무
이야기는 그저 이름만 알고 있던 식물에서 상징과 표시를 보편적인 정보 그리고 동서양에서의 의미
차이까지 전한다. 물론 저자의 말처럼 서양 기독교 전통과 그리스·로마신화에서 유추된 관점임은 아쉬
운 부분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저자가 서양인인 것을. 고대신화(그리스·로마뿐 아니라 게르만 신화까
지도)나 예술,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괴테의 자연론에 관심이 있다면 더 흥미로울 것이다.

 단지 예쁜 식물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문화, 예술, 자연 과학, 종교까지 식물의 특성과 어우
러져 있다. 그러니 식물학적으로 원한다면 식물도감이 편하겠으나 그 밖의 것을 원한다면 충분히 그 욕
구를 채워줄 것이다. 또한,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의 코드를 더 이해하고자 하거나 타로 등의 식물적 의
미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책에서 배운 내용을 살짝 들여다 보자.
올리브의 상징은 신과 인간의 화해, 평화, 피 흘리지 않은 승리(월계수가 초기에 피 흘려 성취한 승리에
대한 속죄의 표시였다 한다.) 등이다. 고대 시대부터 신성하게 여겨져 스파르타인은 기원전 5세기 중엽
아테네를 파괴했으나 신들의 복수가 두려워 올리브 숲만은 건드리지 않았다. 열매에서 나는 오일은 우
리나라서도 대중적으로 사용한다. 특히 그리스권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자연의 산물이다.

 샤프란 하면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섬유 유연제가 아닐까? 향이 좋기 때문인데 그래서인지 샤프란은 제
우스와 헤라의 신혼잠자리에서 사용한 향이었다. 연꽃은 지금도 끊임없이 고결하게 추앙되며 귀엽고
신비한 보라색의 아이리스는 백합과 마찬가지로 강한 의미가 있는 꽃으로 서양 정물화 등에서 서로 다
른 계절에 피는 꽃들이 하나의 유리병에 꽂혀있는 바니타스(유리병은 인생의 무상함을 드러냄.)라는 중
세서양의 예술대상물이었다.

 또 서양 시에서 알게 된 물푸레나무 이야기, 올망졸망 붙어 피어있는 히아신스가 급속한 생성과 소멸의
상징이며 대신 완전하게 꽃이 개화했을 때에야 비로소 향기가 퍼진다는 사실도 알았다. 서양영화에서
남녀가 겨우살이 나뭇가지 아래서 키스를 나누는 이유는 행운 때문이며 음식점 계산대에 서비스로 놓
인 박하사탕에서 박하의 의미는 손님에 대한 환대라는 사실도 재미있다.

 서양결혼식에서 신부가 은방울꽃 부케를 드는 상징은 행복과 사랑이었으며 레몬을 이야기한 실러의 말
도 기억에 남는다.

즙이 많은 별모양의 레몬을 짜면,
인생의 가장 안쪽 부분에서는 신맛이 난다. (172쪽)


 말로만 듣던 개암나무열매가 헤이즐럿이라는 사실, 이 책의 그림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은행나무! 또
은행나무 잎이 책을 해충이나 곰팡이로부터 지켜준다니 올가을에는 은행잎을 이용해볼까 한다.

 식물학자들에게 가장 똑똑한 식물이라 불리며 극지방의 얼음벌판서부터 뜨거운 열대지방에서도 볼 수
있는 식물은 바로 난초였다. 특히 난은 동양과 서양의 관점이 다른데 서양에서는 섹스심벌이다. 과연
생각해보니 양란이라 불리는 난의 외관은 어쩐지 관능적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버드나무의 상징 중 하나는 비를 부르는 마법으로 그 하늘거리는 가지가 비를 부
르는 것은 아닐지에 대한 생각을 해보았다. 향수는 싫어도 장미향만큼은 좋아하는데 식물의 역사에서
장미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마침 붉은 장미는 요즘 흔하게 피어있으니 그 향기에 취해도 좋겠다.
페르시아에서는 장미와 책이 자주 비교된다고 한다.

책은 장미와 비교될 수 있는데,
책은 한 장 한 장 눈여겨보는 독자에게 마음을 열기 때문이다. (327쪽)


 패랭이꽃을 개량한 품종이 카네이션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적다 보니 길어졌는데, 재미있는 내용
들이다. 그저 읽고 지나가는 내용이 아닌 다른 것으로의 확장을 통해 이해의 폭을 넓히는 기회를 얻었
다. 책을 통해 영화나 책 등에서 생소하게 느끼던 감정을 다소나마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보티첼
리의 그림에는 그 식물이 있었고, 상징은 무엇이었으며 역사적 배경은 어떠했는지를…. 처음에는 단순
히 꽃말이나 쓰여 있으려니 하고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런 식의 접근도 좋았다. 몇 달 전 읽은 <르네상
스의 비밀>에 담긴 기호, 상징을 되새겨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꽃을 생각하는 순간은, 바로 그 꽃이 나를 부르는 순간임을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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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늘 그렇듯 자정쯤 잠들어 새벽 일찍 깨었다. 신문을 넘기다 보니 흥미로운 기사가 눈길을 끈다. 내용은
이렇다. 미국 뉴욕의 쿠퍼 휴잇(Cooper-Hewitt) 박물관에서 열리는 전시회인데 '나머지 90%를 위한 디자인'.

 하루 2 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수십억의 사람들을 위한 디자인이라는 것이다. 이 자그마한 기사에
관심이 쏠린 이유는 바로 며칠 전 책장을 덮은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때문이었
다. 전시회에서 큐-드럼(Q-Drum)이라는 물 운반(최대 75ℓ)을 쉬이 할 수 있는 원통 모양의 컨테이너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린이가 줄로 끌 수 있을 만큼 부드럽게 굴러간다는 설명과 실제 흑인
아이가 끌고 가는 사진이었다. 자, 그렇다면 전시회 사진 속의 아이와 이 책 표지 아이의 상황은 얼마나
차이가 나는 것일까? 그 극명한 대조와 공존하는 세계의 푸른새벽을 맞고 있는 나의 상황은 어떤지도
말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제쳐놓고 책 표지의 아이처럼 기아와 재난에 허덕이는 아이에게 정작
필요한 큐-드럼을 쥐여주어야 할 일은 우리의 몫이 아닐지 자문하고 있었던 것이다.


- 기아, 소리조차 낼 수 없는 죽음

 그렇다. 한쪽에서는 차고 넘쳐 다이어트를 한다거나 과식 탓에 건강까지 해치고 있으나 지구 반대편
혹은 가까이 있는 누구는 ㅡ 특히 어린이들! ㅡ 모자라고 헐벗어 급기야 그것으로 죽어가고 있다. 이미
알고 있으나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실을 장 지글러는 책에서 극명하게 말하고 있다. 전쟁보다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나 기아보다 전쟁에 더 관심이 많다. 어느 것이 우선일 수는 없으나 둘 다
관심 받아 마땅한 대상임은 틀림없다.


미국이 생산할 수 있는 곡물 잠재량만으로도 전세계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고, 프랑스의 곡물생산으로
유럽 전체가 먹고 살 수 있는 전세계적 식량과잉의 시대에 수많은 어린이 무덤이 생겨난다는 사실을 우
리는 과연 제 정신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16쪽)



- 기아에 관해 쉽고 다양하게 접근

 더 많은 사람이 알아야 하는 문제 중 하나인 기아. 정작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인데 도무지 쓸모없는 문
제에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사실은 반성해야 할 것이다. 막연하게만 생각하던 기아문제를 저자가 아
들에게 말해주는 방식으로 쉽게 풀이했다. 기아가 자연적인 수단으로 과잉인구를 조절하고 있다는 자
연도태설을 말하는 이들의 무의식에는 인종차별주의(특히 백인우월주의)가 담겨있다. 즉, 자신들은 절
대 굶어 죽지 않음을 자신만만해 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 주장을 말한 이가 종교인이라는 사실! 기아는
다만 의례 일어나는 현상 중 하나로 치부하고 있다. 또 안다고 해도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않는 관심 밖
의 일이다.


- 간단하지 않은 기아문제①

 기아에 허덕인다. 그렇다면, 음식을 주면 괜찮지 않으냐는 답변을 흔히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음식을
조달하는 것만이 문제해결이 아니며 전문인력 공급이 시급한 과제이다. 오래도록 굶주려 몸의 소화기
관 등이 제 기능을 못하므로 함부로 음식을 먹으면 오히려 독으로 작용한다. 전문 의료인 등을 비롯해
약품 등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관심이 필요하다. 책을 읽으며 후원금의 투명성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었던 월드비전도 떠올랐다. 정치 등과 관련한 문제로 기아는 쉬운 문제가 아니기에 쉽게 풀어갈 수도
없었다.

 가난한 낙농국가의 이들은 죽기만을 기다리지는 않았다. 소용돌이가 있는 곳에는 혁명이 있듯 아옌데
와 상카라의 이야기가 상징하는 바가 크다. 칠레의 아옌데는 다국적 기업인 네슬레와 미국의 닉슨 대통
령 보좌관 헨리 키신저 그리고 CIA가 군부쿠데타를 도와(조정) 결국 아옌데를 살해한다. 살해된 이유
는 그의 대통령 공약 때문이었다. 15세 이하 아이들에게 하루 0.5리터 분유를 무상으로 배급하겠다는
것으로 대통령이 되었던 것이다. 또 부르키나파소의 상카라는 소아과 의사출신의 정치인으로 4년 만에
식량 자급자족이 가능한 국가를 만들었으나 역시 외국세력의 조정을 받은 자국 군부에 의해 살해된다.
고결한 자들의 나라라는 뜻의 부르키나파소는 결국 고결하지 못한 나라에 그들의 희망을 강탈당한
것이다.


- 간단하지 않은 기아문제②

 기아가 생기는 원인에 대해 생각해 본적조차 없다. 아니 후원만 하면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만을
가졌을 뿐이었다. 원인 모를 기아와 낙관적이기만 한 희망.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것이 내가 이 책을 읽
기 전의 의식이었다. 한마디로 무지하다. 지금도 크게 나아진 바는 아니나 기아라는 꽤 복잡한 문제에
얽힌 세계의 현상은 알았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막연한 희망은 버리고 세계가 안고 있는 또 다른 문제
임을 간파하고 대처해야겠다.

 그 대처란 것은 구호활동을 한다는 것은 아니나 현실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으로 알게 된
사실을 알리자는 것이다. 만나는 이들에게 한 번씩만 말해도 또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만이라도 전파하
는 것이다. 저자는 직접적인 활동도 하며 책으로 또 한 번 전하고 있듯 나는 소심하게나마 전하고자 한
다. 어떠한 사실을 인식한다는 일은 생각보다 쉽고도 어려운 일임을 새삼 느낀다.


- 실종된 인간애의 재확인

 세계를 구성하는 아니 주도하는 의식은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이냐에 따른 결과만 보아도 축복이 될
것인지 저주가 될 것인지 알 수 있다. 전쟁, 기아, 환경오염, 권력의 남용….원한다면 그 방향으로 향
하는 기차를 갈아타면 될 것이나 문제는 폭주기관차처럼 서지 않고 무모하게 달리기에 해결이 어
렵다. 적어도 개인의 힘보다는 국가나 이념집단 혹은 부나 권력을 가진 이들이 개입하는 것이 빠르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이 언제나 걸림돌이 되어 진행을 더디게만 한다.

 실종된 인간애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왜 학교에서는 이런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
을까. 이 책을 읽었다 해도 역시 막연한 것은 많다. 자꾸만 생기는 의문과 분노는 조금씩 사그라지겠지
만 더는 기아가 그저 못하는 나라의 가엾은 일만이 아님을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제목에서 묻듯 왜 세
계의 절반은 굶주리는지 인식하는 것은 상식의 연장이 아니며 곧 인간애의 재확인이다. 그렇다면, 그래
도 아직은 희망에 기대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쉽게 쓴 내용임에도 그 내용의 소리없는 외침이 무거워서 기아를 가볍게 여긴 내 마음을 무너뜨린다.
한 번에 너무 깊게 생각에 빠질 필요는 없다. 아는 만큼 기억하고 이를 조금씩 풀어가야겠다. 북한과 가
까운 곳의 굶주리는 사람을 생각해 보는 일도 잊지 말아야겠다. 크리스마스나 신년에만 그럴 것이 아님
을 반성한다. 문제는 역시 언제나 실천이며 의식의 전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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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11-18 21:42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갈라파고스 2007년 11월 도서목록에 있는 책으로 2007년 11월 8일 읽은 책이다. 관심분야의 책들 위주로 읽다가 알라딘 리뷰 선발 대회 때문에 선택하게 된 책인데, 이런 책을 읽을 수록 점점 내 관심분야가 달라져감을 느낀다. 총평 물질적 풍요로움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이기에 이 책에서 언급하는 "기아의 진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막연하게 못 사..
 
 
잉크냄새 2007-06-07 13:05   좋아요 0 | URL
막연한 희망처럼 불안한 것도 없을겁니다. 그 속에 내재된 절망이 언뜻 비치면...
특히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기아에 대한 문제는 막연한 희망과 동정심이 아니라 현실을 사무치도록 느끼게 해주나 보네요.
근데 이 글을 왜 이제야 보게 되는지...

은비뫼 2007-06-08 05:55   좋아요 0 | URL
동감합니다. 기아에 대해 그렇게도 무심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 모두를 관심 가질 수는 없더라도 기아는 잊혀지기엔 너무 무겁습니다.
 
관촌수필
이문구 지음 / 솔출판사 / 1997년 7월
평점 :
절판


 때로 마음이 심란할 때는 생각지 못한 것에서 위안을 받을 때가 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계획하지 않
았던 책읽기로 말미암아 위안을 받을 때가 더러 있다. 내게는 현기영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도 그랬
으며 이문구의 책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중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관촌수필>을 빼놓을 수 없겠다.


- 이문구식 토박이 글투

 작가의 특징으로 대표되는 외적인 것에는 흔히 문체(스타일)라고 부르는 글투가 있다. 화려하거나 감성
적이거나 차갑거나 등으로 떠오르는데 이문구의 글투는 과히 구수하다. 그가 사용하는 단어와 글을 자
꾸만 소리 내 읽어보았다. 내게 없는 ㅡ 사실 억지로 끌어쓴다 해도 천부당만부당하겠지만 ㅡ 부분으
로 구수하게 글을 쓰는 이들을 보면 부럽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구수하게만 끝나는 것이
아닌 그 속에 강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전통이, 역사가, 순우리말 그리고 사투리로 불리
며 다소 가볍게 치부되어 온 토박이말이 옹골게 들어앉아 있다.

 몇해전 토박이말을 그네들이 정해버린 표준어 아래로 취급하며 저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토박이말의 중요성과 역사성을 말하던 어느이의 외침이 떠올랐다. 문학적인 가치로 따져도 응당 보존
해야할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단지 옛언어를 쓴다고해서라기 보다 그 안에 깃든 세월의 강줄기를 지
켜가자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듯 강단있게 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나처럼 그저 좋다고 생각하는
부류도 있을터이니 반성하고 관심을 가질 일이다. 다만, 무조건적인 국수주의적 성향은 배제해야 될터
이다.


- 고향 그리고 변화

 고향이란 곳은 언제나 마음에 간직한 대로만 있는 곳일까. 세상 어디가 변해도 결코 그대로일 것만 같
은 곳이 바로 고향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화하듯 고향도 그 바람을 막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작가가
수필이라고 말하며 소설과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자연스레 녹여둔 관촌정경에는 언제나 주변
인물이 가득했고 그들은 작가의 성장기를 가득 채우며 함께 성장했다.


세월은 지난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새로 이룬 것을 보여줄 뿐이다. 나는 날로 새로워진 것을 볼 때
마다 내가 그만큼 낡아졌음을 터득하고 때로는 서글퍼하기도 했으나 무엇이 얼마만큼 변했는가는 크게
여기지 않는다. 무엇이 왜 안 변했는가를 알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관촌
부락을 방문할 때마다 더욱 절실하게 느껴졌다. ㅡ 258쪽, 관산추정(關山芻丁)



 무엇이 왜 안 변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가. 나 역시도 변한 것이 먼저 눈에 들어왔으며 변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무심하기만 했다. 변화된 관촌마을 그리고 떠나는 이들과 이미 과거에서 사라진
이들. 작가를 중심에 두고 하나의 원을 그려나간다면 주변인들은 작가를 포함하며 하나씩 늘어날 것이
다. 결국, 작가 혼자만의 관촌부락이 아닌 그들 모두의 관촌마을이며 우리 모두의 고향이 된다. 시대만
바뀔 뿐이다. 6.25 그리고 좌익사상, 미군등장... 급변하는 시대의 조류는 그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도 얼마든 불어올 변화에서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관심이 절실히 필요하다.


- 작가와 함께 성장한 그들의 이야기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사뭇 다른 가치관을 지닌 이들로 작가에게 영향을 주지만 충돌은 없었다. 그들만
의 특징이 고스란히 기억에 남아있다. 또한 옹점이, 대복이, 석공 등도 작가의 유년을 풍부하게 키워준
이들로 파란만장한 삶을 산다. 가난한 여러 등장인물은 박태원의 <천변풍경>에서도 여지없이 풀려나
오는데 이처럼 다채로울 수 있는 것은 그들이 풍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삶 자체가 고난이며
무심이며 전부이다. 읽으며 마음이 동했던 장면을 옮겨본다.


이번만은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하리라고 작정하고 있었다. (중략) 이젠 준비해두었던 말로 고별
인사를 하며 손을 내밀어 악수로 영결(永訣)해야 될 차례였다. (중략) 석공이 먼저 꺼져가는 음성으로,
"잘들 사는 걸 보구 죽으야 옳을 텐데, 이대루 죽어서 미안하네…… 부디 잘들 살어……" 하며 움직
여지지 않는 손으로 악수를 청했다. 나는 울었다. ㅡ 220쪽, 공산토월(空山吐月)



 역경을 디디며 거뜬히 그 삶을 살아내던 석공이 백혈병으로 죽어가며 했던 말이 안타깝다. 그리고 마지
막의 '나는 울었다.'라는 짧은 글이 메아리치며 길게 마음으로 퍼지고 있었다. 나는 울었다…… 결
국, 나도 울었다…… 마음으로 말이다.


- 기억하고 싶은 구수함

 한자어도 있고 고어(古語)도 있지만 순우리말이 주는 포근함이야말로 품어 안고 싶었다. 차근하게 하나
씩 그러고 싶다. 어부바라는 말도 실로 오랜만에 들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께서 해주시던 어부바 놀이
는 당시 어린 내게 최고의 놀이였다. 매일 해도 지겹지 않아 자꾸만 해달라고 했던 어부바.

 비단 글투뿐 아니라 남의 일에 발벗고 나서던 정겨운 마음 하며 또 그때를 글로 남기는 수고를 기꺼이
감수한 작가에게 받은 미묘한 정이야말로 이 책에서 풍기는 맛이 아닐까 싶다.

 나는 변해야 한다며 자꾸만 마음을 다잡고 있던 시기에 다시 읽은 <관촌수필>은 고향의 은행나무가 여
름빛 나뭇잎으로 변해가듯 조용하게 나를 다독였다. 그곳의 은행나무에게 소리없는 인사를 전한다.

*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관촌수필을 예전에 읽고 다시 솔출판사의 책을 읽다. 현재 솔은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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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맥주 한 모금
필립 들레름 지음, 정택영 그림, 김정란 옮김 / 장락 / 1999년 12월
평점 :
절판


 작가와 만난 첫 책은 <고독하지 않은 홀로되기, 동문선/2001>였다. 그때처럼 짧고 의미있는 감성이
이 책에도 가득하다. 물론 그때보다 글은 더 길어졌다. 몇 줄의 글이 아닌 단편의 수필이 모여있기
때문이다.

 소소한 일상에서 순간을 들여다 볼 줄 아는 능력 그리고 따뜻하고도 예쁜 시선. 작가는 이런 감각을 가
진 섬세한 사람이다. 개인적으로 모나지 않은 예쁜 글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그럼에도 그의 글에서
잃어버린 순간을 돌아보는 방법을 알게 되었으니 감사할 뿐이다.

 진한감동 대신 느껴지는 것은 일상의 재미였다. 순간은 지나가는 시간이기보다 행복의 한 단면을 구성
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계속 일상의 순간을 집요한 사진작가처럼 포착해서 보여준다. 몇몇 글은 일
상을 지나 마음을 적신다. 그래서 몇 번이고 읽기도 했다. 마음에 간직하기 위해서...


완두콩 깍지를 까는 시간은 이러쿵저러쿵 설명을 늘어놓기 위한 시간이 아니다.
그냥 가볍게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22쪽, 완두콩 깍지 까는일 돕기)



 이렇듯 작가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십 번도 더 되풀이하는 평범한 행동 등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 책도 완두콩 깍지를 까듯 늘 해오던 일과 마주하듯 천천히 읽으면 되는 것이다.

 사과 냄새에 관한 글에서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드렌이 겹쳐질 만큼 닮았다. 냄
새와 함께 저장된 유년의 추억은 달콤하게 아련하다.


내면적인 냄새, 나보다 더 나은 나의 냄새이다. 그 냄새 안에는 초등학교 시절의 가을이 갇혀 있다..(중
략)..사과 향기는 추억 이상의 무엇이다..(중략)..사과 냄새는 고통스럽다. 그것은 한층 더 강렬한 삶,
이제 더 이상 우리가 우리의 것으로 누릴 수 없는 느림의 냄새이다. (26~27쪽, 사과 냄새)



 <잘하면 정원에서 밥 먹어도 될 것 같은데>도 정말 좋았다. 또, <맥주 첫 잔>의 이미지의 감각적 묘사
와 그 속에서 찾는 시처럼 떨리는 느낌도 잊을 수 없다. 글로 옮기기에는 길어질 거 같아 생략하지만 직
접 느껴보면 동감하리라 생각한다.

 보고, 듣고, 마시고, 냄새 맡고, 만져보는 그의 섬세함이 놀라웠다. 그래서 우리가 놓치고 사는 작은 것
들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ㅡ 억지가 아닌 ㅡ 알려준다. 나름대로 관찰력 있다고 생각했는데 작가의 표현
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배우고 싶은 섬세함을 지닌 사람이다.

 그의 책은 편하게 대할 수밖에 없다. 순서 없이 읽는다거나 혹은 새벽에 일찍 깬 시간에 반쯤 덮인 눈으
로 읽을 때에도 그 느낌은 변함없었다. 강렬한 유화보다 투명한 수채화를 닮은 작가. 필립 들레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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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건축가 111인
케스터 레튼버리.로버트 베번.키어랜 롱 지음, 이준석 옮김 / 국제 / 200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건축에 대해 일자무식이다. 그저 미술책을 보다가 건축 책까지 보게 되었는데 이 책은 읽을지 말지
를 나름대로 제법 고심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111인의 건축인을 총 망라한 이 책을 과연 재미있게 볼까
볼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낮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수많은 건축가 중 111인을 선별하는데 많은 고심을 했다고 머리말에서 말하듯 굉장한 수고를 거쳐 책이
엮였음이 느껴진다. 한 건축가에 거의 한 장의 지면을 할애하는데 그나마도 한편에는 이미지를 반대편
에는 건축가를 소개한다. 그러니 지루할 수도 있다. 결코, 한번에 정독할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저자의 의도가 가이드북의 성격이니 그를 이용하는 것이 최선이리라. 여기서 마음에 든 건축가가 있다
면 그 건축가를 찾아보는 몫은 독자의 숙제이니 말이다. 사실 내가 알고 있는 건축가를 찾기란 어려웠
다. 알고 있는 건축가가 적으니 말이다. 또 우리 건축가가 없다는 것이 약간 아쉬웠지만 언젠가는 개정
판이나 제2의 책에 들어 있기를 소망해 본다. 사실 우리나라의 눈에 띄는 건축 대부분이 외국 건축가
가 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때의 실망감이 떠오르기도 했다.

 가까운 일본의 예를 들자면 내가 유일하게 아는 건축가는 다다오 안도(tadao ando)이다. TV를 통해 그
의 건축을 보고 감탄한 기억 때문이다. 토마무의 물의 교회(church of the water, 1988)와 오사카의 빛
의 교회(church of the light, 1989)는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웅장하지 않고 소박하며 화려한
재료가 아닌 콘크리트를 이용해 심플한 매력을 끌어낸 것이다. 빛과 물의 조화도 멋졌다.

다다오 안도의 빛의 교회 이미지는 아래의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 http://blog.naver.com/tree4338/70017574805

또한 물의 교회 이미지는 아래의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 http://blog.naver.com/tree4338/70017574811


 개인적인 건축 취향을 말하자면 소박하고 모던한 환경친화적인 건축이 좋다. 그러나 책을 보면서 하이
테크적인 건축도 멋지다는 생각을 했다. 화려한 것은 싫으나 그 미래지향적 느낌이 인상적이다. 물론
아직도 나는 심각하게 아방가르드적인 건축은 별로이다. 비록 아방가르드를 좋아한다 해도 말이다. 추
상화는 좋아해도 건축물이 추상적이거나 은유적일 때는 조금 난감하다. 위태로운 비대칭은 내게 불안
감을 주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건축은 안정적이어야 한다는 기대심리의 편견 때문이리라. 그러나 기능
면에서 우수하다면 할 말은 없다. 결국, 취향의 차이를 인정하는 수밖에.

 건축가들의 철학이 반영된 창조물을 뜯어보니 과연 내가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던가 싶다. 창의력과 표
현력에 적잖이 놀라기도 하면서... 어느 예술에서나 발상의 전환은 신선하며 개성적이다. 그러나 역시
진부하거나 의구심이 드는 것도 존재한다.

 외국 건축물을 보며 느낀점 또 한가지는 나무 한 그루도 함부로 자르지 않는다는 배려이다. 나무를 위
해 건물의 한 부분을 들여짓거나 그 부분에 구멍을 내거나 하는식의 방법을 고안하는 것이다. 과거 우
리의 한옥과도 닮은 배려다. 그러나 그 배려를 계승하지 못하는 현실은 안타까울 뿐이다.

 건축을 보며 꿈을 꿀 수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가우디의 책을 보면서 느꼈던 한 건축가를 깊이
이해하기 위함의 시간도 좋지만 가이드북을 통해 마음의 파장이 맞는 건축가를 찾아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마지막 책장을 읽은 날 새벽, 실제로 꿈을 꾸었다. 끝도없이 기다란 직선의 길이 꺾여있었고 그
길에는 추상적인 물방울 모양의 수많은 색으로 채워져 역동한다. 그것은 창조의식일지도 모른다.

 건축관련인에게는 지침을 일반인에게도 꿈을 주는 책이었다. 그래서 이 책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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