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맥주 한 모금
필립 들레름 지음, 정택영 그림, 김정란 옮김 / 장락 / 1999년 12월
평점 :
절판


 작가와 만난 첫 책은 <고독하지 않은 홀로되기, 동문선/2001>였다. 그때처럼 짧고 의미있는 감성이
이 책에도 가득하다. 물론 그때보다 글은 더 길어졌다. 몇 줄의 글이 아닌 단편의 수필이 모여있기
때문이다.

 소소한 일상에서 순간을 들여다 볼 줄 아는 능력 그리고 따뜻하고도 예쁜 시선. 작가는 이런 감각을 가
진 섬세한 사람이다. 개인적으로 모나지 않은 예쁜 글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그럼에도 그의 글에서
잃어버린 순간을 돌아보는 방법을 알게 되었으니 감사할 뿐이다.

 진한감동 대신 느껴지는 것은 일상의 재미였다. 순간은 지나가는 시간이기보다 행복의 한 단면을 구성
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계속 일상의 순간을 집요한 사진작가처럼 포착해서 보여준다. 몇몇 글은 일
상을 지나 마음을 적신다. 그래서 몇 번이고 읽기도 했다. 마음에 간직하기 위해서...


완두콩 깍지를 까는 시간은 이러쿵저러쿵 설명을 늘어놓기 위한 시간이 아니다.
그냥 가볍게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22쪽, 완두콩 깍지 까는일 돕기)



 이렇듯 작가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십 번도 더 되풀이하는 평범한 행동 등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 책도 완두콩 깍지를 까듯 늘 해오던 일과 마주하듯 천천히 읽으면 되는 것이다.

 사과 냄새에 관한 글에서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드렌이 겹쳐질 만큼 닮았다. 냄
새와 함께 저장된 유년의 추억은 달콤하게 아련하다.


내면적인 냄새, 나보다 더 나은 나의 냄새이다. 그 냄새 안에는 초등학교 시절의 가을이 갇혀 있다..(중
략)..사과 향기는 추억 이상의 무엇이다..(중략)..사과 냄새는 고통스럽다. 그것은 한층 더 강렬한 삶,
이제 더 이상 우리가 우리의 것으로 누릴 수 없는 느림의 냄새이다. (26~27쪽, 사과 냄새)



 <잘하면 정원에서 밥 먹어도 될 것 같은데>도 정말 좋았다. 또, <맥주 첫 잔>의 이미지의 감각적 묘사
와 그 속에서 찾는 시처럼 떨리는 느낌도 잊을 수 없다. 글로 옮기기에는 길어질 거 같아 생략하지만 직
접 느껴보면 동감하리라 생각한다.

 보고, 듣고, 마시고, 냄새 맡고, 만져보는 그의 섬세함이 놀라웠다. 그래서 우리가 놓치고 사는 작은 것
들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ㅡ 억지가 아닌 ㅡ 알려준다. 나름대로 관찰력 있다고 생각했는데 작가의 표현
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배우고 싶은 섬세함을 지닌 사람이다.

 그의 책은 편하게 대할 수밖에 없다. 순서 없이 읽는다거나 혹은 새벽에 일찍 깬 시간에 반쯤 덮인 눈으
로 읽을 때에도 그 느낌은 변함없었다. 강렬한 유화보다 투명한 수채화를 닮은 작가. 필립 들레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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