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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촌수필
이문구 지음 / 솔출판사 / 1997년 7월
평점 :
절판
때로 마음이 심란할 때는 생각지 못한 것에서 위안을 받을 때가 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계획하지 않
았던 책읽기로 말미암아 위안을 받을 때가 더러 있다. 내게는 현기영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도 그랬
으며 이문구의 책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중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관촌수필>을 빼놓을 수 없겠다.
- 이문구식 토박이 글투
작가의 특징으로 대표되는 외적인 것에는 흔히 문체(스타일)라고 부르는 글투가 있다. 화려하거나 감성
적이거나 차갑거나 등으로 떠오르는데 이문구의 글투는 과히 구수하다. 그가 사용하는 단어와 글을 자
꾸만 소리 내 읽어보았다. 내게 없는 ㅡ 사실 억지로 끌어쓴다 해도 천부당만부당하겠지만 ㅡ 부분으
로 구수하게 글을 쓰는 이들을 보면 부럽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구수하게만 끝나는 것이
아닌 그 속에 강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전통이, 역사가, 순우리말 그리고 사투리로 불리
며 다소 가볍게 치부되어 온 토박이말이 옹골게 들어앉아 있다.
몇해전 토박이말을 그네들이 정해버린 표준어 아래로 취급하며 저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토박이말의 중요성과 역사성을 말하던 어느이의 외침이 떠올랐다. 문학적인 가치로 따져도 응당 보존
해야할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단지 옛언어를 쓴다고해서라기 보다 그 안에 깃든 세월의 강줄기를 지
켜가자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듯 강단있게 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나처럼 그저 좋다고 생각하는
부류도 있을터이니 반성하고 관심을 가질 일이다. 다만, 무조건적인 국수주의적 성향은 배제해야 될터
이다.
- 고향 그리고 변화
고향이란 곳은 언제나 마음에 간직한 대로만 있는 곳일까. 세상 어디가 변해도 결코 그대로일 것만 같
은 곳이 바로 고향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화하듯 고향도 그 바람을 막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작가가
수필이라고 말하며 소설과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자연스레 녹여둔 관촌정경에는 언제나 주변
인물이 가득했고 그들은 작가의 성장기를 가득 채우며 함께 성장했다.
세월은 지난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새로 이룬 것을 보여줄 뿐이다. 나는 날로 새로워진 것을 볼 때
마다 내가 그만큼 낡아졌음을 터득하고 때로는 서글퍼하기도 했으나 무엇이 얼마만큼 변했는가는 크게
여기지 않는다. 무엇이 왜 안 변했는가를 알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관촌
부락을 방문할 때마다 더욱 절실하게 느껴졌다. ㅡ 258쪽, 관산추정(關山芻丁)
무엇이 왜 안 변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가. 나 역시도 변한 것이 먼저 눈에 들어왔으며 변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무심하기만 했다. 변화된 관촌마을 그리고 떠나는 이들과 이미 과거에서 사라진
이들. 작가를 중심에 두고 하나의 원을 그려나간다면 주변인들은 작가를 포함하며 하나씩 늘어날 것이
다. 결국, 작가 혼자만의 관촌부락이 아닌 그들 모두의 관촌마을이며 우리 모두의 고향이 된다. 시대만
바뀔 뿐이다. 6.25 그리고 좌익사상, 미군등장... 급변하는 시대의 조류는 그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도 얼마든 불어올 변화에서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관심이 절실히 필요하다.
- 작가와 함께 성장한 그들의 이야기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사뭇 다른 가치관을 지닌 이들로 작가에게 영향을 주지만 충돌은 없었다. 그들만
의 특징이 고스란히 기억에 남아있다. 또한 옹점이, 대복이, 석공 등도 작가의 유년을 풍부하게 키워준
이들로 파란만장한 삶을 산다. 가난한 여러 등장인물은 박태원의 <천변풍경>에서도 여지없이 풀려나
오는데 이처럼 다채로울 수 있는 것은 그들이 풍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삶 자체가 고난이며
무심이며 전부이다. 읽으며 마음이 동했던 장면을 옮겨본다.
이번만은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하리라고 작정하고 있었다. (중략) 이젠 준비해두었던 말로 고별
인사를 하며 손을 내밀어 악수로 영결(永訣)해야 될 차례였다. (중략) 석공이 먼저 꺼져가는 음성으로,
"잘들 사는 걸 보구 죽으야 옳을 텐데, 이대루 죽어서 미안하네…… 부디 잘들 살어……" 하며 움직
여지지 않는 손으로 악수를 청했다. 나는 울었다. ㅡ 220쪽, 공산토월(空山吐月)
역경을 디디며 거뜬히 그 삶을 살아내던 석공이 백혈병으로 죽어가며 했던 말이 안타깝다. 그리고 마지
막의 '나는 울었다.'라는 짧은 글이 메아리치며 길게 마음으로 퍼지고 있었다. 나는 울었다…… 결
국, 나도 울었다…… 마음으로 말이다.
- 기억하고 싶은 구수함
한자어도 있고 고어(古語)도 있지만 순우리말이 주는 포근함이야말로 품어 안고 싶었다. 차근하게 하나
씩 그러고 싶다. 어부바라는 말도 실로 오랜만에 들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께서 해주시던 어부바 놀이
는 당시 어린 내게 최고의 놀이였다. 매일 해도 지겹지 않아 자꾸만 해달라고 했던 어부바.
비단 글투뿐 아니라 남의 일에 발벗고 나서던 정겨운 마음 하며 또 그때를 글로 남기는 수고를 기꺼이
감수한 작가에게 받은 미묘한 정이야말로 이 책에서 풍기는 맛이 아닐까 싶다.
나는 변해야 한다며 자꾸만 마음을 다잡고 있던 시기에 다시 읽은 <관촌수필>은 고향의 은행나무가 여
름빛 나뭇잎으로 변해가듯 조용하게 나를 다독였다. 그곳의 은행나무에게 소리없는 인사를 전한다.
*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관촌수필을 예전에 읽고 다시 솔출판사의 책을 읽다. 현재 솔은 절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