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샤의 식탁 - 시간을 담은 따뜻한 요리
타샤 튜더 지음, 공경희 옮김 / 윌북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한 달에 한 권씩 만나는 타샤의 책. 1월은 <타샤의 집>, 2월은 <타샤의 식탁>. 3월은 <타샤의 정원>을 읽을 생각이다. 처음 <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를 만났을 때 이미 정해버렸다. 아껴서 읽으며 음미해야 하니 한 번에 다 읽지 말고 나눠서 읽자고. 점차 세부적이며 한 분야의 책으로 나뉜 타샤의 삶을 만나면서 정말이지 이 사람은 헛된 시간을 살지 않는 구나를 실감했다. 무언가 목숨 걸고 할만한 일이 없더라도 이렇게 평온하게 삶을 가꾸는 모습 또한 열정의 다른 모습이겠다. 전력질주로 이루는 삶도 있는 거고 이렇듯 물 흐르듯 이루는 삶도 있는데 나는 후자의 삶을 닮고자 노력한다. 

 <타샤의 집>은 그녀의 핸드메이드 라이프를 소재로 쓴 책인데 아들 세스가 3년이나 걸려서 만들었다고 한다. 어떠한 일손이나 전기 장비의 도움 없이 타샤가 원하는 복고풍으로 천천히 지었다. 큰 뼈대를 이루는 집뿐 아니라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타샤가 직접 만들었다. 핸드메이드를 좋아하지만 타샤처럼은 감히 손도 댈 수 없겠다 싶었다. 그중 가장 어려워 보였던 건 염색과 베틀질이다. 정성과 시간은 기본이며 그것을 인내할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다면 십중팔구 해내지 못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틈틈이 바구니, 비누, 인형 등을 만들고 허브를 직접 키워서 요리재료도 사용하는 등의 일은 타샤에게는 일상이지만 내게는 먼 이야기. 그럼에도, 그녀의 부지런한 모습은 억척스럽거나 괴상하기보다 행복하고 즐거워 보인다. 집의 개념에 행복이 빠진다면 이미 그것은 죽은 공간이다. 온기를 불어넣는 타샤의 손길에서 삶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 핸드메이드 이야기를 읽는 재미도 쏠쏠했지만 집을 하나의 행복추구로 실현한 그녀의 방식이 역시나 매력적이었다.  

 <타샤의 식탁>은 한참 살림이 귀찮아져서 의욕이 떨어지는 시기에 읽게 되었다. 아니 반대인가? 의욕이 사라져서 살림도 귀찮았던 것인지도. 매일 음식을 하지만 늘 즐거웠고 옆지기나 초대한 친구를 놀래주는 건 재미있는 일이었다. 아직 1년도 되지 않았지만, 요즘은 식탁 차리기에 대한 의욕이 사라졌다. 그래서 주방살림이 손에 잡히지 않는 시점에서 그녀의 식탁을 들여다보며 봄을 맞았다. 효재가 쓴 추천 글을 읽으며 내심 동감했다. 서양요리보다 한식을 좋아하는 나는 실제로 이 책의 요리 중 몇 가지만 골라서 하겠지만 그래도 가끔 들춰 볼 것 같았다. 책에는 요리뿐이 아닌 음식을 대하는 타샤의 따뜻함이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그렇다. 상대는 타샤 튜더! 무엇이든 대충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언제나 많은 손길을 요구한다. 빵 반죽 하나에도 얼마나 정성이 들어가는지 빵을 주로 만드는 사람은 알 것이다. 또한, 귀찮아서 드레싱을 마트에서 사다 먹었는데 이참에 프렌치 드레싱을 잔뜩 만들어 두고 사용해야겠다. 이 책에서 가장 부러웠던 것은 타샤의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요리책이었다. 엄마도 음식을 잘하는 분으로 나름의 노하우가 많은데 이제부터라도 잘 배워서 우리 집안의 요리책을 만들어야겠다는 계획도 생겼다. 내게는 기껏해야 낙서처럼 끼적인 손 노트에 레시피가 있지만, 엄마의 레시피는 온라인출판으로 깔끔하게 만들면 좋겠다. 그래야 나도 오래도록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 어쨌든, 이 책으로 주방살림을 다시 즐겁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봄나물의 향연을 즐겨야 할 때도 왔으니 이를 놓칠 수는 없지 않은가~  


훌륭하고 가치 있는 모든 것은 모두 시간과 공이 들게 마련이지요. 

- 타샤 튜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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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샤의 집 - 손으로 만드는 따뜻한 세상
타샤 튜더.토바 마틴 지음, 공경희 옮김, 리처드 브라운 사진 / 윌북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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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달에 한 권씩 만나는 타샤의 책. 1월은 <타샤의 집>, 2월은 <타샤의 식탁>. 3월은 <타샤의 정원>을 읽을 생각이다. 처음 <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를 만났을 때 이미 정해버렸다. 아껴서 읽으며 음미해야 하니 한 번에 다 읽지 말고 나눠서 읽자고. 점차 세부적이며 한 분야의 책으로 나뉜 타샤의 삶을 만나면서 정말이지 이 사람은 헛된 시간을 살지 않는 구나를 실감했다. 무언가 목숨 걸고 할만한 일이 없더라도 이렇게 평온하게 삶을 가꾸는 모습 또한 열정의 다른 모습이겠다. 전력질주로 이루는 삶도 있는 거고 이렇듯 물 흐르듯 이루는 삶도 있는데 나는 후자의 삶을 닮고자 노력한다. 

 <타샤의 집>은 그녀의 핸드메이드 라이프를 소재로 쓴 책인데 아들 세스가 3년이나 걸려서 만들었다고 한다. 어떠한 일손이나 전기 장비의 도움 없이 타샤가 원하는 복고풍으로 천천히 지었다. 큰 뼈대를 이루는 집뿐 아니라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타샤가 직접 만들었다. 핸드메이드를 좋아하지만 타샤처럼은 감히 손도 댈 수 없겠다 싶었다. 그중 가장 어려워 보였던 건 염색과 베틀질이다. 정성과 시간은 기본이며 그것을 인내할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다면 십중팔구 해내지 못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틈틈이 바구니, 비누, 인형 등을 만들고 허브를 직접 키워서 요리재료도 사용하는 등의 일은 타샤에게는 일상이지만 내게는 먼 이야기. 그럼에도, 그녀의 부지런한 모습은 억척스럽거나 괴상하기보다 행복하고 즐거워 보인다. 집의 개념에 행복이 빠진다면 이미 그것은 죽은 공간이다. 온기를 불어넣는 타샤의 손길에서 삶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 핸드메이드 이야기를 읽는 재미도 쏠쏠했지만 집을 하나의 행복추구로 실현한 그녀의 방식이 역시나 매력적이었다.  

 <타샤의 식탁>은 한참 살림이 귀찮아져서 의욕이 떨어지는 시기에 읽게 되었다. 아니 반대인가? 의욕이 사라져서 살림도 귀찮았던 것인지도. 매일 음식을 하지만 늘 즐거웠고 옆지기나 초대한 친구를 놀래주는 건 재미있는 일이었다. 아직 1년도 되지 않았지만, 요즘은 식탁 차리기에 대한 의욕이 사라졌다. 그래서 주방살림이 손에 잡히지 않는 시점에서 그녀의 식탁을 들여다보며 봄을 맞았다. 효재가 쓴 추천 글을 읽으며 내심 동감했다. 서양요리보다 한식을 좋아하는 나는 실제로 이 책의 요리 중 몇 가지만 골라서 하겠지만 그래도 가끔 들춰 볼 것 같았다. 책에는 요리뿐이 아닌 음식을 대하는 타샤의 따뜻함이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그렇다. 상대는 타샤 튜더! 무엇이든 대충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언제나 많은 손길을 요구한다. 빵 반죽 하나에도 얼마나 정성이 들어가는지 빵을 주로 만드는 사람은 알 것이다. 또한, 귀찮아서 드레싱을 마트에서 사다 먹었는데 이참에 프렌치 드레싱을 잔뜩 만들어 두고 사용해야겠다. 이 책에서 가장 부러웠던 것은 타샤의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요리책이었다. 엄마도 음식을 잘하는 분으로 나름의 노하우가 많은데 이제부터라도 잘 배워서 우리 집안의 요리책을 만들어야겠다는 계획도 생겼다. 내게는 기껏해야 낙서처럼 끼적인 손 노트에 레시피가 있지만, 엄마의 레시피는 온라인출판으로 깔끔하게 만들면 좋겠다. 그래야 나도 오래도록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 어쨌든, 이 책으로 주방살림을 다시 즐겁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봄나물의 향연을 즐겨야 할 때도 왔으니 이를 놓칠 수는 없지 않은가~  


훌륭하고 가치 있는 모든 것은 모두 시간과 공이 들게 마련이지요. 

- 타샤 튜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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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세계사 시인선 66
최승호 지음 / 세계사 / 199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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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지인에게 받은 시집이 있었다. 여러 시인의 시가 담겨 있었는데 그중 기억에 남는 시들은 따로 리스트를 만들어서 후에 찾아 읽기로 했었다. 그 시작이 최승호 시인이다.  
 <북어>라는 시가 주는 강렬함은 붉은색처럼 날카롭진 않았지만 대신 시인의 표현처럼 귀를 먹먹하게 했다. 그것도 오래도록 말이다. 물론 나중에 알았지만 <북어>라는 시는 민음사에서 발간된 <<대설주의보>>란 시집에 실려 있다. 1995년도 발행이었다. 내가 만난 그의 첫 시집인 <<눈사람>>은 1996년 세계사 발행. 시집도 많고 산문집도 있는 다작하는 시인인 거 같다.  

사막에서 발굴된 거대한 북어여,

고고학자들이 너를 다시 냉장고에 넣는구나. 

(타클라마칸의 미이라. 44쪽.)
 

 이번 시집에서 짧지만, 북어라는 단어가 나오자 반가움이 앞섰다. <<대설주의보>>와 <<눈사람>>은 제목에서부터 보이듯 어쩌면 동일한 연장선에 있을지도 모른다. <<대설주의보>>도 구해서 읽어봐야겠다. 

 겨울이 지나는 길목에서 눈사람이라는 제목만으로 집어 들었다. 이번 겨울에는 한 번 정도만 제대로 흠뻑 눈을 맞았던 거 같다. 그래서 더 눈이 아쉬웠는지도 모른다. 누구는 세상을 하얗게 만든다고 했고, 누구는 녹으면서 지저분하다고 말하는 눈(雪). 내게는 세상과 마음을 포근하게 덮어주는 눈인 동시에 모든 소음을 빨아들여 적막하고 고요하게 만드는 게 눈이었다. 흔적없이 녹는 모습은 내성적인 사람 같아서 정이 갔던 그런 존재.  


종이로 만드는 책에

눈을 담는다

누가 눈송이뿐인 책을 볼까

마음의 눈보라 그 먼길 헤아릴까 

(자서 전문.) 

 첫 장을 펴들고 얼마 못 읽고 덮는 시집들도 있지만, 이 시집은 를 읽을 만큼 오래도록 붙잡았다. 긴 호흡이 필요하기보단 재미있고, 시인이 말하는 눈의 의미를 쫓다 보니 금방이었다. 입가에 잘게 웃음이 이는 시도 있었고, 제목처럼 눈에 관한 시도 있지만, 시집이 넘어갈수록 조금씩 흥미는 떨어졌다. 기대치가 커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하나의 시만을 읽고 그것이 좋다 하여 전부가 그럴 수는 없는 것을 깜박했다. 그렇다 해도 누군가가 눈에 대해 이렇듯 생각을 글로 풀어둔 것을 발견한 건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이 만든 지상의 예술 가운데 가장 순결한 걸작들' 눈사람이라 말하는 시인은 눈이지만 사람이라 불리는 눈사람에 대해 조금씩 이야기한다. 

 보다 구체적이었다면 좋겠지만, 눈이 내리고 녹아 사라지듯 허무함을 준다. 허무의 끝에 무엇이 있느냐는 질문을 시인은 받지 않는다. 다만, 시집의 마지막 시인 뿔쥐에서 '헛살았다고 중얼대는 것은 흔해빠진 일이다/그 다음을 말하기가 어려울 뿐이지.'라는 말에서 언뜻 보이는 것처럼 그래서 다음을 말하진 않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눈(雪), 재미, 불교적인 느낌, 현실풍자. 이 시집의 느낌이다. 마음그물의 코를 넓히면(100쪽. 마음의 그물코에서 인용.) 거치적거리는 것도 사라지겠고 그만큼 거르지 않고 받아들일 것도 많을 세상이다. 시집에서 얻는 것도 그러하리라. 누군가의 뼛속 같은 언어로 이루어진 책들을 별 몇 점으로 점수 매기기가 어렵다. 아쉬움은 남지만, 다시 겨울이 오면 그때도 이 시집을 만지작거릴 수도 있을 것이다. 단단하게 뭉쳐서 녹지 않을 거 같아도 결국 녹아 사라지듯 마음에 내리는 진눈깨비도 깨끗이 막아내고 싶다.  

-4342.02.26.나무의 날. (09013_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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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내가 그럴 줄 알았어 - 김용택 동시집
김용택 동시집, 이혜란 그림 / 창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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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때를 떠올리면 지금과는 많이 다른 그때의 나를 만나고는 한다. 그럴 때마다 새삼 놀라면서 한편으로는 정겨운 웃음이 피어난다. 초등학생 때 동시를 지어오라는 숙제를 어떻게 풀지 혼자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시라는 것의 형이상학적인 낯설임은 생각해본 적도 없지만 무언가를 창작해야 한다는 건 새롭고도 떨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창작 동시는 장난꾸러기 바람과 소녀들의 치마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중에 옆집 사는 대학생 오빠들에게 읽어주며 부끄러워하던 시였는데 사실 이 시는 완전한 창작은 아니었다. 친구와 같은 주제로 썼는데 표현이 달랐을 뿐이다. 이렇듯 어린 날의 추억이 이 시집을 읽으며 하나씩 되돌아왔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과 아이들은 따로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친근하다. 교단에서 그가 만난 아이들처럼 시인의 웃는 모습이 순수하다. 꾸밈없는 자연의 모습을 찾아내고 대화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독자까지 포용한다. 아이들이야말로 실은 꾸밈없는 자연 그 자체이다. 예쁜 시들과 그림이 마음마저 예쁘게 물들인다. 그리고 거기서 연상되는 것들이 보물처럼 쏟아져 내렸다. 잊었던 추억 한 조각, 어린 날의 나. 시인과 아이들의 이야기에 보태지는 나만의 이야기까지 끝이 없다.  

 그러나 동시가 예쁘기만 하진 않았다. 순수한 동심이 밝은 한 자락이라면 이 시집의 또 다른 한 자락은 도시의 현실만큼이나 외로운 농촌 아이들의 현실이었다. 왜 이 시대의 아이들은 도시나 농촌이나 할 것 없이 외로운 것일까. 과거에는 부모들이 먹고살기 바빠서였다고 쳐도 지금처럼 공간이 크지는 않았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갔다는 동요는 애처롭지만,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엄마와 아이의 하나 됨이 느껴졌다. 어디서건 아이들에게 사랑을 많이 주었으면 좋겠다. 그 아이들이 자라서 더 많은 사랑을 전해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아이들이 굳건하게 잘 이겨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엄마 없이 밥 먹어요

엄마 없이 옷 입어요 

엄마 없는 집에 가요 

엄마 없는 잠을 자요 

(70쪽. 엄마 전문.)   

 

여치가 운다. 

귀뚜라기가 운다. 

지렁이가 운다. 

개구리가 운다. 

먼 산에서 소쩍새가 운다. 

나는 안 운다. 

절대 안 운다. 

(75쪽. 나는 안 운다 전문.)


태성이가 엄마 빨래하는 데 따라와 

징검다리를 폴짝폴짝 뛰어다닙니다.

태성아 그러다가 물에 빠질라

태성아 그러지 마 그러다가 물에 빠질라

그래도 태성이는 징검다리를

폴짝폴짝 뛰어 건너다닙니다.

그때 비행기가 큰 소리를 내며

지나갑니다.

태성이가 하늘을 쳐다보며

징검돌을 뛰어 건너다가

풍덩 물에 빠집니다.

너 내가 그럴 줄 알았어.

 

(50쪽. 너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전문.)


  엄마의 자리가 큰아이의 외로움부터 나는 절대 안 운다는 아이의 애처로운 다짐을 보며 마음이 저렸다. 그러다가도 책 제목과 동명의 '너 내가 그럴 줄 알았어.'같은 시를 읽을 때는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리고 자연 속에서 하루를 보내며 작은 곤충 하나와도 친구가 되고 그들의 입장이 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발견한 것은 나 또한 그랬다는 사실과 어른일 때보다 어쩌면 그때가 더 남의 입장을 헤아리지 않았을까 하는 태도이다. 지금은 별거 아닌 일로도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데 이는 언제부터 굳어진 습관인지 모른다. 그래서 말랑하게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때처럼 자연스럽게 먼저 헤아릴 줄 아는 순수함이 그립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찾아가는 행복을 기억한다면 삶이 보다 풍요로워 질 것은 자명하다. 

 예쁘게, 둥글게 살고 싶다면 방법은 간단하다. 나부터 사랑하고, 나처럼 모든 것을 사랑하면 된다. 억지로 되는 일이 없듯 얼마간의 시간은 필요할 것이다. 아마도, 충분해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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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2009-02-11 20:04   좋아요 0 | URL
반가워요 잘 계시죠 얼마전 <콩, 너는 죽었다>라는 이분 동시집 읽은 기억이 나요
이 책도 참 좋을 거 같네요. 담아갑니다. 행복하세요

은비뫼 2009-02-12 14:40   좋아요 0 | URL
안녕하셨어요. ^-^ <콩, 너는 죽었다>도 읽고 싶어지네요. 저도 감사합니다. 즐거운 책읽기 이어가시기를 빕니다.
 
상실의 상속
키란 데사이 지음, 김석희 옮김 / 이레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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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도의 소설을 읽은 기억이 없는 거 같다. 따지고 보면 인도라는 나라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얼마나 되며 그나마도 깊이 있게 그들의 생활이나 문화를 이해한 적이 있었던가. 바가바드 기타나 요가, 오쇼 라즈니쉬 같은 철학자와 명상 등에만 관심이 있었던 때도 있었지만 역시 한 발짝 떨어져 무심하게 지켜본 거 같다. 그래서일까. 어떠어떠한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을 때고라도 <상실의 상속>이라는 제목, 그리고 인도의 젊은 여성작가라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흥미를 느꼈다.  

 먼저 책의 두께에 놀랐다. 제목도 우울한 감이 없지 않은데 선뜻 손이 가지 않아서 뒤늦게 잡았지만 실제로 가독성은 꽤 좋았다. 인도의 역사와 혼란을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이 주인공들의 자의식만 따라다녀도 시간은 금방이었다. 이질적인 느낌이 아닌 공감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주목할만하다. 신분제도는 인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현대사회에도 보이지 않는 신분이 엄연히 존재하며 신분상승을 위해 사람들은 날마다 분주하게 하루를 쪼개고 있다. 또한, 혼란스런 사회와 피 흘리는 투쟁. 어느 편에 서야 할지조차 모르는 사람들과 흐름에 몸을 맡기거나 반대로 역행하는 이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우리의 역사에도 그런 부분이 없지 않으니 이들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다. 그러니 이 책이 아무리 두껍다 한들 거대한 대서사시의 화려함으로 포장된 게 아닌, 담담하고 때로는 우울하지만 재미까지 포함한 읽기 편한 책이 되었다. 그러나 우울함이나 시대적 배경을 극복(-혹은 포장)하고자 지면을 늘인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렇게까지 길 필요가 있었을까. 조금 잘라내도 좋았을 걸 싶다.

 세계는 화합보다 충돌의 시간이 많았다. 현재진행형인 충돌 그 속의 인도. 그리고 그곳의 사람들. 그들의 떠다니는 자아를 세밀하게 보여주는데 가족이란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사이라는 소녀는 부모님의 죽음 후에 외할아버지네 집에서 함께 살게 된다. 외할아버지는 은퇴한 판사였고 애완견에만 애정을 표현하는 과묵한 노인이며 요리사와 함께 생활한다. 요리사는 전형적인 피지배층으로, 아들이 미국에서 성공해 자리 잡았다고 떠벌이는 낙으로 사는 인물이다. 아들 비주는 사실 불법으로 미국생활을 하며 어렵고 힘든 생활을 하지만 아버지와의 유일한 매개수단은 편지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을 들자면, 사이의 가정교사 지안인데 그는 사이와의 아기자기한 사랑놀이와 민족성 사이에서 고민하는 청년. 이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상황으로 자연스레 끌어가는 전개는 인물이 부각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체성이란 것에 관해 고민하게 된다. 운명이 이미 정해졌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정해진 룰에서만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박차고 나오려고 시도하며 거부할 것인지. 아무리 노력해도 이들에게 대물림되는 누릴 수 없는 것들을 움켜쥘 수 있는 시간은 올 것인지. 사회문제를 떠나 개인의 마음에서 잃어버린 건 어떤 것인지 묻는다. 

 계급의 아래에 있는 사람들 즉, 하층민의 삶은 얼마나 비루한가. 가난해서 비루한 게 아니라 꿈조차 꾸지 않고 포기하는 것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진정으로 비루했다. 갑자기 예전에 읽은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 떠올랐다. 특히나 책에서 판사가 젊은 시절 영국에서 보낸 시절을 이야기할 때와 요리사의 아들 비주가 미국에서 일하는 모습에서 더욱 극명하게 겹쳤다. 물론 판사는 죽도록 노력해서 안락함을 얻었지만 사실 그는 요리사의 아들 비주보다 환경이 좋았고 그래서 가능성이 더 있었던 것이다.



시간은 흘러야 돼.
나처럼 시간이 지나가지 않는 인생을 살려고 하지 마라.
그건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충고야.

(170쪽. 노니가 사이에게 해주는 말.)


 작가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정치와 유머감각은 유쾌할 수 있다. 이들의 안고 있는 문제를 드러내며 거기서 사는 이들의 행복하거나 외로운 혹은 고통스럽거나 신물 나는 삶의 이야기가 짙게 드리운 소설이 여기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지면을 조금 짧게 줄여도 무방할 거 같은 두껍지만 가독성 좋은 이 책을 인도작가의 시선으로 느끼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는 것도 괜찮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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