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상속
키란 데사이 지음, 김석희 옮김 / 이레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인도의 소설을 읽은 기억이 없는 거 같다. 따지고 보면 인도라는 나라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얼마나 되며 그나마도 깊이 있게 그들의 생활이나 문화를 이해한 적이 있었던가. 바가바드 기타나 요가, 오쇼 라즈니쉬 같은 철학자와 명상 등에만 관심이 있었던 때도 있었지만 역시 한 발짝 떨어져 무심하게 지켜본 거 같다. 그래서일까. 어떠어떠한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을 때고라도 <상실의 상속>이라는 제목, 그리고 인도의 젊은 여성작가라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흥미를 느꼈다.  

 먼저 책의 두께에 놀랐다. 제목도 우울한 감이 없지 않은데 선뜻 손이 가지 않아서 뒤늦게 잡았지만 실제로 가독성은 꽤 좋았다. 인도의 역사와 혼란을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이 주인공들의 자의식만 따라다녀도 시간은 금방이었다. 이질적인 느낌이 아닌 공감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주목할만하다. 신분제도는 인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현대사회에도 보이지 않는 신분이 엄연히 존재하며 신분상승을 위해 사람들은 날마다 분주하게 하루를 쪼개고 있다. 또한, 혼란스런 사회와 피 흘리는 투쟁. 어느 편에 서야 할지조차 모르는 사람들과 흐름에 몸을 맡기거나 반대로 역행하는 이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우리의 역사에도 그런 부분이 없지 않으니 이들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다. 그러니 이 책이 아무리 두껍다 한들 거대한 대서사시의 화려함으로 포장된 게 아닌, 담담하고 때로는 우울하지만 재미까지 포함한 읽기 편한 책이 되었다. 그러나 우울함이나 시대적 배경을 극복(-혹은 포장)하고자 지면을 늘인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렇게까지 길 필요가 있었을까. 조금 잘라내도 좋았을 걸 싶다.

 세계는 화합보다 충돌의 시간이 많았다. 현재진행형인 충돌 그 속의 인도. 그리고 그곳의 사람들. 그들의 떠다니는 자아를 세밀하게 보여주는데 가족이란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사이라는 소녀는 부모님의 죽음 후에 외할아버지네 집에서 함께 살게 된다. 외할아버지는 은퇴한 판사였고 애완견에만 애정을 표현하는 과묵한 노인이며 요리사와 함께 생활한다. 요리사는 전형적인 피지배층으로, 아들이 미국에서 성공해 자리 잡았다고 떠벌이는 낙으로 사는 인물이다. 아들 비주는 사실 불법으로 미국생활을 하며 어렵고 힘든 생활을 하지만 아버지와의 유일한 매개수단은 편지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을 들자면, 사이의 가정교사 지안인데 그는 사이와의 아기자기한 사랑놀이와 민족성 사이에서 고민하는 청년. 이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상황으로 자연스레 끌어가는 전개는 인물이 부각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체성이란 것에 관해 고민하게 된다. 운명이 이미 정해졌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정해진 룰에서만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박차고 나오려고 시도하며 거부할 것인지. 아무리 노력해도 이들에게 대물림되는 누릴 수 없는 것들을 움켜쥘 수 있는 시간은 올 것인지. 사회문제를 떠나 개인의 마음에서 잃어버린 건 어떤 것인지 묻는다. 

 계급의 아래에 있는 사람들 즉, 하층민의 삶은 얼마나 비루한가. 가난해서 비루한 게 아니라 꿈조차 꾸지 않고 포기하는 것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진정으로 비루했다. 갑자기 예전에 읽은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 떠올랐다. 특히나 책에서 판사가 젊은 시절 영국에서 보낸 시절을 이야기할 때와 요리사의 아들 비주가 미국에서 일하는 모습에서 더욱 극명하게 겹쳤다. 물론 판사는 죽도록 노력해서 안락함을 얻었지만 사실 그는 요리사의 아들 비주보다 환경이 좋았고 그래서 가능성이 더 있었던 것이다.



시간은 흘러야 돼.
나처럼 시간이 지나가지 않는 인생을 살려고 하지 마라.
그건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충고야.

(170쪽. 노니가 사이에게 해주는 말.)


 작가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정치와 유머감각은 유쾌할 수 있다. 이들의 안고 있는 문제를 드러내며 거기서 사는 이들의 행복하거나 외로운 혹은 고통스럽거나 신물 나는 삶의 이야기가 짙게 드리운 소설이 여기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지면을 조금 짧게 줄여도 무방할 거 같은 두껍지만 가독성 좋은 이 책을 인도작가의 시선으로 느끼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는 것도 괜찮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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