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세계사 시인선 66
최승호 지음 / 세계사 / 199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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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예전에 지인에게 받은 시집이 있었다. 여러 시인의 시가 담겨 있었는데 그중 기억에 남는 시들은 따로 리스트를 만들어서 후에 찾아 읽기로 했었다. 그 시작이 최승호 시인이다.  
 <북어>라는 시가 주는 강렬함은 붉은색처럼 날카롭진 않았지만 대신 시인의 표현처럼 귀를 먹먹하게 했다. 그것도 오래도록 말이다. 물론 나중에 알았지만 <북어>라는 시는 민음사에서 발간된 <<대설주의보>>란 시집에 실려 있다. 1995년도 발행이었다. 내가 만난 그의 첫 시집인 <<눈사람>>은 1996년 세계사 발행. 시집도 많고 산문집도 있는 다작하는 시인인 거 같다.  

사막에서 발굴된 거대한 북어여,

고고학자들이 너를 다시 냉장고에 넣는구나. 

(타클라마칸의 미이라. 44쪽.)
 

 이번 시집에서 짧지만, 북어라는 단어가 나오자 반가움이 앞섰다. <<대설주의보>>와 <<눈사람>>은 제목에서부터 보이듯 어쩌면 동일한 연장선에 있을지도 모른다. <<대설주의보>>도 구해서 읽어봐야겠다. 

 겨울이 지나는 길목에서 눈사람이라는 제목만으로 집어 들었다. 이번 겨울에는 한 번 정도만 제대로 흠뻑 눈을 맞았던 거 같다. 그래서 더 눈이 아쉬웠는지도 모른다. 누구는 세상을 하얗게 만든다고 했고, 누구는 녹으면서 지저분하다고 말하는 눈(雪). 내게는 세상과 마음을 포근하게 덮어주는 눈인 동시에 모든 소음을 빨아들여 적막하고 고요하게 만드는 게 눈이었다. 흔적없이 녹는 모습은 내성적인 사람 같아서 정이 갔던 그런 존재.  


종이로 만드는 책에

눈을 담는다

누가 눈송이뿐인 책을 볼까

마음의 눈보라 그 먼길 헤아릴까 

(자서 전문.) 

 첫 장을 펴들고 얼마 못 읽고 덮는 시집들도 있지만, 이 시집은 를 읽을 만큼 오래도록 붙잡았다. 긴 호흡이 필요하기보단 재미있고, 시인이 말하는 눈의 의미를 쫓다 보니 금방이었다. 입가에 잘게 웃음이 이는 시도 있었고, 제목처럼 눈에 관한 시도 있지만, 시집이 넘어갈수록 조금씩 흥미는 떨어졌다. 기대치가 커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하나의 시만을 읽고 그것이 좋다 하여 전부가 그럴 수는 없는 것을 깜박했다. 그렇다 해도 누군가가 눈에 대해 이렇듯 생각을 글로 풀어둔 것을 발견한 건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이 만든 지상의 예술 가운데 가장 순결한 걸작들' 눈사람이라 말하는 시인은 눈이지만 사람이라 불리는 눈사람에 대해 조금씩 이야기한다. 

 보다 구체적이었다면 좋겠지만, 눈이 내리고 녹아 사라지듯 허무함을 준다. 허무의 끝에 무엇이 있느냐는 질문을 시인은 받지 않는다. 다만, 시집의 마지막 시인 뿔쥐에서 '헛살았다고 중얼대는 것은 흔해빠진 일이다/그 다음을 말하기가 어려울 뿐이지.'라는 말에서 언뜻 보이는 것처럼 그래서 다음을 말하진 않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눈(雪), 재미, 불교적인 느낌, 현실풍자. 이 시집의 느낌이다. 마음그물의 코를 넓히면(100쪽. 마음의 그물코에서 인용.) 거치적거리는 것도 사라지겠고 그만큼 거르지 않고 받아들일 것도 많을 세상이다. 시집에서 얻는 것도 그러하리라. 누군가의 뼛속 같은 언어로 이루어진 책들을 별 몇 점으로 점수 매기기가 어렵다. 아쉬움은 남지만, 다시 겨울이 오면 그때도 이 시집을 만지작거릴 수도 있을 것이다. 단단하게 뭉쳐서 녹지 않을 거 같아도 결국 녹아 사라지듯 마음에 내리는 진눈깨비도 깨끗이 막아내고 싶다.  

-4342.02.26.나무의 날. (09013_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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