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복을 벗은 라오바이싱
서명수 지음 / 아르테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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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라오바이싱, 우리말로 하면 일반서민쯤? 하지만 일반 서민으로는 라오바이싱이란 단어에 담긴 역사성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다고 했다. 중국어 사전에 의거, 군인 및 공무원과 구별되는 주민이라는데 공산주의 성격이 더 강한 중국에서 군인과 공무원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라오바이싱일 것이다. 화자의 말처럼 고위 공직자와 당 고급간부를 제외한 모두가 라오바이싱이라는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점차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중국의 모습을 보았고 인민복을 벗은 라오바이싱이란 제목에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내가 뭐 저명한 지식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치를 하는 사람도 아니고 기업을 하는 기업인도 아닌데 무슨 두려움을 그리도 크게 느낄 수 있을까마는 딴은 이렇다. 변해가는 중국의 모습, 아니 이것은 분명하게 말해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이념과 체제가 가랑비에 옷젖듯이 그렇게 서서히 변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일전에 읽었던 <중국사의 수수께끼>에서는 그들이 왜 변하려고 하는가를 보았다면 여기 이 책에서는 이제는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그들의 모습이 보인다는 거였다. 내가 두려운 건 아니다. 앞으로 그들과 맞서야 할 우리의 아이가 겪어야 할 시대가 두렵다는 거다. 왜일까? 그만큼 아무것도 아닌 아줌마의 시선임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보여지지 않는 우리의 모습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국가가 나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이 있느냐. 중국 정부가 무엇을 하든 나와는 상관이 없다. 나에게는 나와 가족밖에 없다. 가족이 잘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국가는 나에게 돈을 주지 않는다. 공산당과 국가는 존경하는 아버지를 빼앗아 갔을 뿐 우리 가족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세상이 바뀌었다. 돈을 벌어야 한다." .. 책표지에 있는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중국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도 하다. 참 무서운 말이 아닐수가 없다. 이 책을 통해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땅덩어리가 아니라 그 땅덩어리위를 걸어다니며 그 위에서 삶을 만들어가는 그들의 생활이었다. 모두를 위한, 모두의 것에서부터 이제는 개인을 위한, 개인의 것으로 변화하기 위해 몸살을 앓고 있는 그들의 모습. 과감하게 탈이념화를 향해 달려가기로 작정한듯이 보여지는 그들의 모습.. 이 책속에는 그들이 변해가고 있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또한 그렇게 변해가는 그들이 만들어낼 그들의 미래가 살짝 엿보이기도 한다. 단순히 메이드 인 차이나라는 말 한마디만으로 그들을 평가해서는 안된다고 화자는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만나 인터뷰를 하며 그들의 속깊은 내면까지 짚어내고 싶어하는 화자의 안타까움이 보여지던 순간들도 군데군데 보여지고 있음이다. 

간혹 경제면을 통해 알 수 있었던 중국이란 나라의 밑그림을 다시 그려본다. 내게 중국이란 나라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이 책속에서 보여주고 있는 그들의 산업현장을 한번쯤 찾아가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우리와 너무도 닮은 모습을 하고 있는 그들의 생활사를 보면서 탄식하기도 했다. 아직도 거론되어지는, 도무지 없어질 것 같지 않은 지역감정의 병을 저들도 앓고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생겨나는 상처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면서 이미 내면으로부터 곪기 시작한 것들은 말만으로는 도저히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저들이 농촌을 살리기 위해 우리의 새마을 운동을 카피하여 저들에게 맞게끔 수정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놀라움이었다. 자본주의가 아닌 사회주의 체제에서 과연 가능할까 싶기도 했지만 왠지 저들이라면 해내고야 말 것이란 생각이 나보다 한발 앞서나가니 왠일인가!  인구억제정책으로 인하여 황제같은 대접을 받고 있다는 저들의 아이들이 짊어져야 할 미래.. 부모들이 1명의 자녀를 낳고, 그 외아들 외동딸이 결혼하고, 그들이 낳은 외아들과 외동딸은 결국 양가의 부모를 포함, 6명의 노인을 부야해야 하는 결과(185쪽).. 라는 말은 정말이지 뜨끔하다. 그래서 중국의 1자녀 정책이 수정되거나 완화될 수 밖에 없는 사정이라는 말은 그냥 그 말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속에는 그들이 그래서 움직이는 변화를 선택할 수 밖에 없다는 말도 된다. 문제는 어떠한 상황이 닥쳐왔을 때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애써 외면하느냐의 차이점일 뿐이다. 노령화를 대처하는 자세에 대한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를 다시한번 되짚어 볼 일이다. 2006년에 이미 700만대 이상을 생산하여 미국 일본 독일에 이어 세계 4대 자동차 생산 대국에 진입했다는 말도 나를 놀라게 했다. 그럼 우리는? 5위다. 중국... 참 놀랍게 변화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한국은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많은 것 같다. 경제발전이 아니라 대장금이란 드라마에서 보여주듯 중국이 잃어버린 유교와 가족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어서 참 좋다"... 화자가 여행중에 만난 노교수의 말이다. 과연 그럴까? 나는 늘 이 유교적인 문화라는 말앞에만 서면 은근짜로 화가 치민다. 유교를 전해주었던 그들도 이제는 우리에게서 그것들을 배워야 한다고 말할정도라니... 경제발전을 배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란다, 내게만큼은 이제는 그들이 우리보다 앞서 나갈 준비를 확실하게 하고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저력있는 민족이란 말은 우리에게 붙여진 이름이 아니었던가 하는 의구심이 생겨난다. 우습게도. 이념이든 체제든 그것이 확고하든 변화를 하든, 현실과 현재는 배고프다. 그래서 변화에 대해 흘끔거리며 가까이 다가가려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현장감 있는 인터뷰내용과 곁들여진 사진이 중국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화자의 강의를 내실있게 받쳐주었던 것 같다. 한바탕, 그야말로 긴장하면서 특강을 듣고난 기분이다. 멋진 특강이었다. 너무 딱딱하게 경직되어진 내용이 아닐까 우려되어 좀 망설였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특강이라면 한번쯤 더 신청해 볼 만하겠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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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머리만으로 살다 보면,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정리해버리고, 쾌락도 고통도 모두 상상의 세계에서 맛보게 된다. 마침내 그는 논리의 미로에 빠져들어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인간은 육체라는 피드백 장치가 없으면, 파멸하게 되어 있다. 한편 육체만으로 살아가면,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 보통 사람은 그런 광인과 짐승의 경계를 어슬렁거린다.- 오늘 읽은 책, '나는 모조인간' 중에서 -

거북이처럼 가야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빨리 달리고 싶어한다.
이제 시작일 뿐인데...
조급함에 시달리는 시간들이 싫다.
초조함과 불안감속에서 어쩌지 못하는 굼뜬 동작들이 나를 슬프게 한다.
미친듯이 책을 읽는다.
그 속에서 나는 나와 다시 만난다.
질책과 자학이 이어진다. 아무도 모를...
모두에게 편안함으로 다가서고 싶은 욕심을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욕심은 그저 욕심일 뿐이다.
욕심속에 또다른 욕심이 자라고 있음을 본다.
그렇게 나는 파멸되어가고 있는것일까?
나의 하루는 언제난 미안함으로 막을 내리고 있다.
모두에게 미안하기만 하다.../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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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조인간
시마다 마사히코 지음, 양억관 옮김 / 북스토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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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심코 걸어가던 아이가 돌부리에 채여 넘어졌다. 아이는 크게 울기 시작했다. 엄마가 달려와 이렇게 말했다. "떼찌, 떼찌 왜 우리 아가를 울리는거냐 응? 떼찌!" .. 그리고 엄마는 아이를 달랬다. 아이는 신기하게도 울음을 그쳤다. 누가 옳을까? 아니 누가 아이이고 누가 어른일까? .. 책을 읽으면서 나는 문득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캄캄한 세계에서, 어느날 지진 비슷한 것이 일어나고 곰 발바닥 같은 산부인과 의사의 손에 붙잡혀 어머니의 자궁 밖 세계로 끌려나오면서 나의 세상은 시작되어진다. 우리 부모와 그 주변사람들에게는 첫아이였음으로 나는 세상의 중심이었다. 어른이라면 누구나 나를 안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근시안에다가 냄비에 눌어붙은 된장 찌꺼기 같은 여학생이 나를 안으려고 손을 내밀 때 몸을 뒤로 뺄수 있을만큼의 심미안도 생겼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나와 비슷한 것이 생겨난 것을 알았고 그것으로 인해 나는 나의 자리를 빼앗겼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처음부터 나를 아주 제 손아귀에 쥐고 흔들양인가 보다. 냄비에 눌어붙은 된장 찌꺼기 같은 얼굴은 어떤 얼굴일까 생각하며 박장대소를 하게 만든다. 이렇게 나는 태어났다. 그리고 하나 둘씩 세상이 나의 의식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왜 아쿠마 카즈히도야?"
"카즈히도는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밖에 없기 때문이야"
"아빠와 엄마가 없어도, 세상 모든 사람이 사라져도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강한 어린이가 되었으면 해서 지은 이름이란다"... 이렇게만 보면 모든 부모의 욕망은 똑같은건가? 세상 어디를 간다고 해도?
나의 이름은 아쿠마 카즈히도.. 불행하게도 나의 이름중 아쿠마는 악마惡魔 와 같은 발음이다. 그리고 카즈히도는 一人이다. 결국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악마인 것이다. 글자를 모르던 어린시절엔 그래도 괜찮았다. 단지 소리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니까. 하지만 초등학교를 들어가는 순간부터 나, 아쿠마 카즈히도는 부모의 그 심오한 뜻과는 다르게 惡魔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나는 진정 악마가 되기로 결심하고 곧이어 행동으로 옮겨 요주의인물이 되기로 한다. 만지면 부풀어오르던 고추를 가지고 장난을 하던 초등학생 시절부터 나는 나외의 '나'가 더 있음을 알게 되고 그 나외의 '나'와 모든 시간을 함께 한다. 그렇게 우리는 늘 그림자같은 나의 내면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거라고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그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사실조차도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마치도 내 안에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며 한 사건을 두고도 '예스'와 '노'를 동시에 외쳐대는 아이러니를 겪는것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그래서 나는 또다른 나와 만나게 될까 노심초사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책속에서 나를 이끌어가고 있는 나는 '책속의 나'가 아닌 '책을 읽는 나'일수도 있다. 어쩌면 그리도 내속을 박박 긁어대는지... 현실이란 건 어디서 마주쳐도 두려운 존재인 것 같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다가오는 세상이란 굴레는 나의 덩치만큼씩 함께 커져가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안에서 내가 찾아 헤매야 하는 것들은 비슷비슷하다. 사랑도 있을테고, 우정도 있을테고, 믿음도 있을테고, 배신도 있을테고, 행복이란 감정도 있을테고, 불행이란 감정도 있을테고... 우아하게 살고 싶다는 내면속에는 그저 되는대로 막살고 싶다는 욕망도 함께 자리한다. 무엇을 택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단지 내가 택하고 남은 것들이 또다른 나를 만들어낸다는 거다. 나의 그림자로 나와 똑같이 살아간다는 거다. 그러니 내가 어디를 가든 늘 나와 함께일수 밖에 없다는 거다.

인간이 머리만으로 살다 보면,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정리해버리고, 쾌락도 고통도 모두 상상의 세계에서 맛보게 된다. 마침내 그는 논리의 미로에 빠져들어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인간은 육체라는 피드백 장치가 없으면, 파멸하게 되어 있다. 한편 육체만으로 살아가면,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 보통 사람은 그런 광인과 짐승의 경계를 어슬렁거린다.(40쪽)

참 무섭다. 머리만으로도, 그렇다고 육체만으로도 살아서는 안되는 인간이라는 동물.. 포유류중에서 가장 고등한 위치에 있는 것이 인간이란 동물이라고 했던가?  인간에게 있어 진화라는 것은 단지 자신의 삶에 맞추어 변화하는 것일뿐이라던 어떤 영화속의 자막이 떠오른다. 지금은 어떤 시대일까? 내가 보기엔 육체만으로 살아가던 시대를 벗어나 머리만으로 살아가는 시대로 접어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어쩌면 태어나는 인간 모두에게도 바코드를 찍어야 할지 모른다는 말들이 공중을 떠다니고 있다. 그래, 어쩌면, 정말, 그렇게 될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 책속에서 흐느적거리는 두명의 아쿠마 카즈히도처럼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 어느쪽에 머물러 있는지조차 헤아리지 못하는 그런 순간이 올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나는 보통사람일까?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는 보통사람의 범주에 들기 위해서 애를 쓰며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말씀이야, 인간은 모두 미완성의 모조품이지. 옛날 사람들의 패러디를 하면서 살아가는 것 같단 말이야. 나도 그래. 나는 누군가의 패러디다.(199쪽)

또하나의 아쿠마 카즈히도와 마주치기 위해, 아니 어쩌면 나 자신을 찾기 위해 성인이 된 아쿠마 카즈히도는 암벽을 타기로 한다. 그렇다고 내가 끝내주는 클라이머일 것이라는 생각은 마시라... 두 개의 칸테(암벽이 튀어올라온 부분)를 넘어서고 릿지를 오르며 죽을지도 모른다는 상황과 마주치게 된다. 죽음이란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고 그 와중에서도 고독이란 놈이 찾아와 나는 나자신과 끝도 없이 싸움을 한다. 여전히 나를 비웃고 있는 또하나의 아쿠마 카즈히도..  인간은 죽음 직전에 이르러 과거를 일순간 이해하게 된다고 한다(299쪽)... 하지만 나는 살았다. 죽음 5초전까지 체험하면서.. 그 순간 나는 아쿠마 카즈히도가 무엇인가를 알아버리게 된다. 결국 내가 또다른 나를 이기는 순간이다.  이 책속의 아쿠마 카즈히도는 책을 읽는 모두의 모습일거라는 생각을 한다. 누구나 그렇게 살아가지 않을까? 불현듯 신화속의 남자가 떠오른다. 시지프스.. 무거운 바위를 굴리며 언덕을 올라야만 하는 우리의 시지프스.. 다 올랐다싶으면 다시 떨어져 내리는 바윗돌.. 우리에게는 우리가 올라야 할 정상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알 수 없는 정상을 향해 서로 짓밟고 짓밟히며 올라야 하는 애벌레탑처럼 그렇게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작가가 말해주고 있는 (그게 아니라면 정말 끝내주는 번역가의 말일수도 있겠지만) 인간에 대한 정의를 다시한번 곱씹어 보면서 나는 책장을 덮기로 한다. 아쿠마 카즈히도의 여운이 길---게 내게 남아 있을것만 같아 두렵기도 하지만... /아이비생각

 '나'는 유전자나 단백질의 번역기계, 유기적인 기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모조인간은 타인의 의식속에 사는 '나'의 환상이며, '나'의 의식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타인들의 환상이다. 인간은 이 두가지 부분이 꼬여 있기 때문에 이상해지는 것이다. '나'의 중추나 다른 기관들은 '나'의 의식속에서 살아가는 타인들의 환상작용 없이는 활동하지 않고, 타인의 의식속에 사는 '나'의 환상은 '나'의 중추나 다른 기관의 활동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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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
기욤 뮈소 지음, 전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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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요정이었던가?  가난한 노부부 앞에 나타나 세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던 것이? 그래서 그 노부부는 세가지 소원을 말했었다. 배가 고프니 우선 소세지나 좀 먹게 해 달라고, 그까짓 소세지를 소원으로 말해? 당신 코에나 붙어버려! 이제 소원은 한가지만 남았다. 노부부는 고민을 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마지막 소원을 말했다. 그 소세지가 코에서 떨어질 수 있게 해 달라고.. 누구나 꿈꾸는 소망 하나씩은 가지고 산다. 그 소망은 어디서부터 생겨나는가? 물론 그 사람이 처해있는 현실이 어떠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또한 사람들이 가슴속에 품고 있는 소망이기도 하다.  동화속이건 우화속이건 이야기속에서 소원을 말하라고 하는 일이 생겨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착한 일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착한 일을 한 댓가로 받는 소원풀이는 그야말로 멋진 환상이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덮으면서 의아했다. 이렇게 황당할수가!  정말 황당했다. 운명을 바꾸고자 과거로 돌아갔다던 이야기는 많이 회자되어지기도 했고, 시간 여행을 했다는 이야기 또한 많이 들어왔던 바이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황당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었다. 이상하리만치 억지스러웠던 이 느낌들을 어이할까나.

예순살의 엘리엇은 평생 사랑했으나 자신의 미욱함으로 인하여 그녀를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과거를 잊지 못한채 살아가고 있다. 캄보디아에서의 의료활동이 끝나던 날 차마 떨쳐내지 못했던 작은 눈망울을 바라보면서 끝내 돌아가지 못한채 선행을 하게 되었던 엘리엇에게 노인이 찾아와 말했다. 아이를 구해줘서 고맙다고. 그리고... 꼭 해보고 싶은 소원이 있느냐고. 그래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대답을 했다. 노인에게서 받은 황금색 알약 10개... 그 황금색 알약은 과거의 자신에게로 데려다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미 예순이 되어버린 엘리엇이 서른의 엘리엇을 만나러 시간 여행을 떠난다는...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운명은 거스를수가 없다고, 감히 운명을 거스르려하지 말라고. 하지만..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엘리엇은 정말 기가막히게도 운명을 거스른다. 자신의 운명을 되바꿔 놓을 수 있다는 이야기 전개과정은 정말이지 나에게 어설픈 억측처럼만 들려왔다. 그것도 타인이 나의 운명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설정과 먼 과거속으로 들어간 타인의 손에 의하여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었다는 설정 앞에서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뭔가 크게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그 잘못을 은폐시키기 위하여 만들어내는 그런 거짓말을 듣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은 왜일까?  차라리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와 신경과민인 어머니 사이에서 살얼음을 밟고 살아가는 듯 했다던 엘리엇의 어두운 성장과정이야기가  그 이야기속에서 없어져 버렸으면 했다. 왜 그랬을까?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의 얼굴표정을 떠올려 보았다. 어쩌면 그 기대와는 너무 어긋나버린 이야기전개때문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 안타까움을, 그 아련함을 어쩌지 못한채 차마 떠날 수도, 있을 수도 없는 표정으로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라고 말을 한다면 그것은 정말 슬픔일게다. 하지만 이 책속에서는 한점의 슬픔조차도 느끼질 못했다. 모르겠다. 기욤 뮈소라는 작가의 작품을 선택하게 되었던 동기는 내가 파울로 코엘료라는 작가와 만나게 된 것과 비슷했다. 신문지면을 활짝 펼쳤을 때 그 지면의 반쪽을, 그야말로 대문짝만하게 들어나는 그 광고를 보게 되었을 때의 느낌을 뭐라고 표현해야만 할까?   책장을 덮으니 책표지가 내 앞에 우뚝 선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시간의 반대방향에서 거꾸로 가고 있는 그림. 그리고 책 제목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 사랑도 아니고, 슬픔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련함을 전해주는 애달픈 이야기도 아니고...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문을 열고 나왔을 때는 예순이었던 엘리엇이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나왔을 때는 서른의 엘리엇이었던 그 설정이 나에게 주고 간 것은 무엇이었을까?  제목만큼이나 나를 서글프게 했던 책이었다. /아이비생각

당신의 은신처는 당신 자신이다.
다른 곳은 없다.
당신은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당신 자신만 구월할 수 있을 뿐이다.
- 싯다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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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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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세상으로 들어가면 나는 산책하는 것보다 달리기 하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추리소설의 경우에는 그런 현상이 더욱 더 두드러지곤 한다. 600쪽이 넘는 추리소설을 만났을때는 거의 오래달리기 수준이니 심적으로 오는 압박(?)감을 어쩌지 못한다.  준비운동과 심호흡을 한채 책장을 열어 책속 세상으로 들어서니 스밀라라는 이름의 여인이 나를 맞이한다. 스밀라.. 참 부드럽다. 느낌이 좋다. 함께 가자고 내민 손을 잡으니 영 내달릴수가 없어 답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스밀라는 내게 말했다. 천천히 가자고. 아주 천천히 내가 보여주는 것만 보며 따라와 달라고. 서두르지 말자고.

스밀라의 어린 친구 이사야의 죽음으로부터 스밀라의 이야기는 시작되어진다. 지붕에서 떨어져 죽은 어린 친구의 죽음 앞에서 스밀라는 그자리에 단지  '소년의 죽음'만이  존재했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고소공포증이 있었던 어린 친구의 죽음이라고는 볼 수 없었던 스밀라.. 단지 그것뿐이었다. 추락사가 아닌 죽음으로 몰아갔을 무엇인가가 분명하게 있다고 믿었던, 그래서 그것만을 알아내면 된다고, 단지 그것만 알아내면 되는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었다. 하지만 한겨울의 눈내린날, 단순한 추락사가 아니라고 말해주었던 그 눈의 이야기가 그녀를 그렇게 엄청난 모험속으로 끌어들일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조차도.

이해하고 싶다는 것은 잃어버린 무언가를 되찾고자 하는 시도다. (55쪽)

스밀라.. 이누이트족 어머니와 유럽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여자. 이누이트족이라 함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 에스키모다. 캐나다 인디언이 '날고기를 먹는 인간'이란 뜻으로 붙여준 이름처럼 그들의 생활은 주로 수렵과 고기를 잡는 것에 있다. 그녀의 속성이 자연과 함께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어린 시절을 어머니와 함께 이누이트족으로 자랐지만 어머니의 죽음 후 아버지에게로 가게 된다.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음은 눈으로 보지 않아도 훤히 알 수 있음이다. 눈과 얼음속에서 함께 공존하며 살았던 그녀는 역시 눈과 얼음에 관한 공부로 자신을 무장하게 되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어린 친구였던 이사야의 죽음을 단순하게 볼 수 없었던 아이러니가 생겨난걸 보면 우리의 삶은 그렇게 마음먹은대로만 움직여주지는 않은 모양이다.

사람들은 시계를 도구로 삼아 서로의 삶을 묶는다. (85쪽)

결코 추락사가 아니라고 그녀는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니 다시한번만 더 수사를 해 줄수는 없는거냐고 그녀는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녀에게 거짓말을 했다. 수사는 해보겠지만 당신은 빠져줄 수 없느냐는 무례를 범해가면서..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다. 또한 마음을 열 수 있다는 것 역시 누군가를 '믿을 수 있다'는 감정하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닐까?  그녀, 스밀라에게는 언제부터인가 이사야의 죽음을 둘러싼 모든 것들에게서 믿음을 지워버린다. 무언가 있다! 그렇다면 그 무언가는 과연 무엇일까?  왜 이사야의 죽음속에서 그 무언가 알 수 없는 것들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일까?  하나둘 밝혀지는 사건의 과정들을 앞에 두고서 문득 그녀앞에 우뚝 선 남자 수리공 페터.. 이사야라는 어린 친구를 함께 공유했었던 또 한사람의 등장이기도 한 동시에 그녀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감정의 사슬이기도 한 수리공 페터의 존재는 책을 읽어가는 내게조차도 상큼한 등장처럼 느껴졌었다.  서른이 훌쩍 넘어선 노처녀의 감정속으로 서서히 들어오는 페터와, 그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었던 이사야의 기억처럼 스밀라는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무언가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손을 잡게 된다. 이쯤에서부터 나는 스밀라의 손을 놓고 나혼자 앞서 달려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스밀라는 끝까지 내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함께 가야 한다고. 그래서 내게 힘을 실어주어야만 한다고 그녀가 말하고 있는것만 같았다.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한가지 방법이 있다. 실제로 살아보는 것. 그 문화속으로 이사하여, 손님으로 받아달라고 부탁해서 언어를 배운다. 어떤 순간이 되면 이해가 찾아온다. 이해는 언제나 비언어적이다. 무엇이 낯선 것인지 이해하게 되는 순간, 설명하려는 충동을 잃어버린다.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그 현상과 거리를 두는 것이다. (259쪽)

스밀라에게 있어 그녀의 아버지는 또다른 아픔이었고, 믿음이었으며, 사랑이었는지도 몰랐다.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기를 소망하되 서로에게 어쩔 수 없는 간격을 두고 그 거리를 좁혀갈 수 없다. 아버지에게는 젊은 무용수가 있다. 하지만 나중에야 스밀라가 알게 되는 진실.. 자신을 향한 혹은 어머니를 가슴에 둔 아버지에게는 그 젊은 무용수조차도 찾고 싶은 사랑을 대체할 수 없었다는 것을.. 수리공 페터에게서 알 수 없는 안정과 '행복'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게 되었던 스밀라의 가슴속에도 어쩌면 거부해야만 하는 것처럼 여겨왔던 그 감정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체성을 드러냈을 때의 당혹스러움이라니.. 나는 이쯤에서 눈치챘어야 했다. 어린친구 이사야와의 친분을 통해 부여잡고 싶어했었던 그녀의 가슴 저 아래쯤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던 그 깊은 고독을... 그 고독을 끌어안은 채 살아왔을 그녀의 서른 일곱해의 많은 시간들에 대해서...

어떤 사람속에는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고 관대하며 믿을 만한 개인이지만, 뼛속까지 썩어버린 상습범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어렴풋한 모습밖에는 빛 속으로 나오지 않는 사람. (486쪽)

사실 사건은 하나였을 뿐이다. 그 무언가의 정체는 빙산과도 같았다. 보여지는 부분은 물위로 솟아오른 일각일 뿐, 그 아래로 더 많은 부분을 숨기고 있는.. 한사람씩 차례대로 등장해 주었다면 나는 아마도 오랜 기다림에 목말라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숨겨진 부분을 움켜쥐고 있는 손들은 많았다. 공동체 의식을 치루듯이 그렇게 그들은 하나의 의식처럼 한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던 거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이미 과거에도 있었던 일이었다면 그것은 현재일까, 과거일까?  그 과거가 죽은 시간이 아닌 살아남은 시간으로 그녀에게로 걸어와 작은 소년의 죽음이 있어야만 했던 진실속으로 그녀를 몰아갔다. 그녀는 이미 내재되어져 있는 그녀안의 은밀한 감각을 되살려 바다로 나갔고, 그 바다를 거쳐 다시 얼음이 있는 세계속으로 되돌아갔다. 태초의 모습, 그녀를 있게 해주었던 그 태초의 세계로 다시 돌아갔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 자연앞에서 작아질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욕망은 무너져 내린다. 무엇이 문제인가를 묻고 있는 자연앞에서 인간은 정말이지 비협조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자연이라는 이름의 엄마에게서 그동안 받았던 것들은 모두 잊어버린채 다시 또 달라고 손내미는 어린 아이처럼 자연앞에서 인간의 모습은 참으로 가련하기만 하다. 얼음동굴속에서 행해지던 그 파렴치한 인간의 너절한 핑게거리라니... 하지만 우리의 스밀라는 자신 스스로가 얼음이 되어 그런 인간의 오만함을 단죄하기로 한다. 그렇다면 사랑은 남아 있어줄까?  마지막 믿음까지 소멸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끝내는 자신이 처한 현실과 스밀라의 말을 인정하며 자신의 얄팍한 욕망을 버릴 수 있었던 수리공 페터처럼.  그녀와 그의 사랑이 마지막 남은 사랑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나의 생각이 스밀라에게 들켜버리지 않았으면 한다. 사랑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우리를 배신해서는 안되는 것일테니까. 

옮긴이의 말을 빌어보자. 이누이트들은 눈雪을 여러가지 이름으로 부른다는.. 이름을 알게 되는 순간, 어떤 사물도 더이상 같지 않다는 뜻이라는.. 다른 이름은 다른 세상을 보는 다른 눈眠을 의미한다는...
그렇게 보면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은 하나의 처세술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름을 알게 되는 순간 더이상 같지 않을 모든 것들에 대한 감각.. 그 감각이 발달할수록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는 많아진다. 동물적이라는 말은 어쩌면 자연적이라는, 자연에 좀 더 가깝다는 말도 될테니 말이다. 그녀에게서 볼 수 있었던 동물적 감각 또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상황판단능력이라고 밖에는 볼 수가 없다. 현실속에서 그 현실만을 가슴에 안아들고 사는 사람과, 현실속에서 그 현실안에 자연의 힘을 들여놓고 그 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의 차이점은 상당할 것이다. 사실 이 책속 세상에서는 내가 빨리 달려나가고 싶어도 달려나갈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광범위한 작가의 지식과 체험들이 어울어져 있는 까닭이기도 했다. 내가 모르는 세계가 이 책속에는 너무도 많았던 까닭이기도 했다. 책표지에 장황하게 써놓았던 어느 소설가의 당부처럼 그녀에게 더 많이 더 자주 입을 맞춰주고 싶었지만 나는 그럴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에게서 입맞춤을 당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스밀라... 이누이트족이 쓰는 자연을 닮은 의미와 유럽식 의미가 합쳐졌던 그녀의 이름.. 내면적으로는 자연속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우리의 아픈 소망이 담겨져 있던 그녀의 이름... 나는 이 책을 놓아버린 후에도 스밀라라는 이름을 사랑하게 될 것만 같다. 내게 그녀의 그 깊은 내면을 그려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시간에 관계치않는 영화 한편을 만들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녀, 스밀라를 위하여..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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