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초
피에르 샤라스 지음, 홍성영 옮김 / 민음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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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초.. 짧은 시간일까? 긴 시간일까?  묻는다면 대답은 알 수 없다,이다. 왜냐하면 저마다 처해진 그때의 상황에 따라 달라질테니까 말이다. 간혹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었다.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면 무엇을 하겠느냐고, 혹은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나의 대답은 늘 이랬던 것 같다. 뭐, 별다르게 할 일은 없어. 그저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아내지 않을까? 사실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해서 내가 할 일이 뭐 있겠는가 말이다. 그러니 나는 그저 늘 해왔던 것처럼 그렇게 살아갈 뿐인 것을. 이 책속에서 말하고 싶은 19초는 어찌보면 엄청 길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 어찌보면 상당히 짧게 느껴지기도 한다. 노란 점퍼를 입은 남자가 스포츠가방을 두고 기차에서 내린다. 그 가방안에는 폭발물이 들어있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 또한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들에게는 늘 어제와 같은 오늘이 있을 뿐이다. 그런 상황을 작가는 이렇게 밀어붙인다. 이제부터 세겠다, 그러니 긴장하라. 19초, 18초,17초,16초,......5초,4초,3초,2초 그리고 1초... 하지만 폭발물이 터지는 그 순간까지도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저마다의 문제만을 가슴속에 안고 있을 따름이다.

1초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의 이야기는 하나씩 전개되어진다. 위기를 맞고 있는 중년의 부부, 가브리엘과 상드린이 그 1초속에 갇혀있고, 이제 막 사랑에 눈을 뜬 소녀 소피의 환상적인 사랑도 그 1초속에 머물러 있다. 책을 읽으면서 문득 나는 전철을 탔을 때를 떠올려 본다. 사람들의 모습을.. 저마다의 표정으로 저마다의 한순간에 몰두해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그 표정속에는 저마다의 아픔과 저마다의 기쁨도 함께 한다.  몸이 부딪힐 정도로 가까이 있지만 우리는 단지 그저 그 공간안에 함께 머물러 있다는 것일 뿐, 서로에게는 사실상 아무런 존재가치조차도 없음이다. 책속에 나타나는 소제목들에 시선이 머문다. 제우스,스틱스,하데스... 19초가 1초를 향해 달려가는 동안만큼은 제우스의 세상이다. 그리고 폭발물이 터지고 아비규환의 상태에서 작가는 우리에게 스틱스강을 건나가라고 한다. 이승과 저승사이를 흐르는 강이라고 했던가? 신화속에서 참 많은 이야기들을 잉태했었던 그 강을 건너 우리에게도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하데스... 드디어 우리는 죽었다. 다시 시작하고 싶었던 사랑도 스틱스강의 저편에 두고, 꿈결같은 환상의 세레나데를 불러줄것만 같았던 그 처음의 사랑도 거기에 놔두고, 그렇게 우리에게 1초가 다가왔던 순간, 폭발물이 터지던 그 순간부터 우리의 이야기도 죽는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19초와 1초 사이에서 방황하던 이야기들은 이제 시작이냐 아니면 마지막이냐를 묻고 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늘 시작이면서도 늘 마지막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잔인하게도.

이제 그녀는 오른쪽 다리가 없다. 피가 빠져 나간다. 목숨이 빠져 나간다... 식의 작가의 말투는 정말이지 건조하다. 폭발물이 터지고 그 고통과 절절한 회한이 머무는 순간에서조차 작가는 그 아픔과 고통을 절대로 알려주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다. 그저 고통과 아픔이 있었다,그리고 죽음이 찾아왔다, 라고 아주 간단하게 수첩에 빠른 메모를 하듯이 그렇게 적어두고 있을 뿐이다. 거기에 있었으니까 죽었을 뿐이라고 그렇게 담담하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 완전한 타인... 작가조차도 완전한 타인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다. 그 타인의 감정으로 테러리스트라 말할 수 있는 노란 점퍼의 남자조차도 죽음속으로 내몬다. 또한 그 기차를 그냥 떠나보냈던 남자 우리의 가브리엘을 통해 또하나의 노란 점퍼 사나이도 죽음으로 내몬다. 그리고 가차없이 작가는 어쩌면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을 가브리엘을 다시 죽음앞에 세워둔다. 아무도 가해자가 될 수 없으며 또한 아무도 피해자가 될 수 없음이다.

19초는 우리가 살아내야 할 혹은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현실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늘 우리를 조여오는 현실감각이란 느낌... 그래서일까? 작가의 카운트다운을 나도 함께 센다. 19초,18초,17초..... 나의 1초는 어느순간에 올까? 나의 1초가 다가온 그 순간에 내 안에서 폭발하는 것은 무엇일까? 실제적으로 세계의 대도시에서는 테러리스트에 의한 폭발사고들이 많이 일어난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언론매체를 통해서만 볼 따름이다. 그러니 그 감각 또한 멀다. 그러니 완전한 타인일수 밖에는 없음이다. 나 역시도 함께 전철을 타고 한공간속에 머무르지만 완전한 타인인 것을 어쩌랴.. 누구에게나 19초의 헤아림은 올 수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느끼는 것도 나일 뿐이다. 이 세상속에는 타인들의 시선과 타인들의 발걸음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일까? 이 책의 제목 '19초'는 왠지 서글프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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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등 이펙트 - 지금 누군가 나를 조종하고 있다!
로빈 스턴 지음, 신준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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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가스등 이펙트란 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두꺼운 책띠의 설명에 의하면 이렇다.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을 조종하려는 가해자와 그를 이상화하고 그의 관점을 받아들이는 피해자가 만들어내는 병리적 심리 현상을 뜻한다.. 가해자와 피해자란 말만 얼핏 보고 참 무섭다는 생각을 했었다. 살아가면서 얽혀지는 그많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속에서 상처를 받지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작은 것들까지 일일이 신경써가며 살아야 한다면 그 또한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속에서는 어느정도의 진실이 있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비난은 듣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얼마전에 있었던 일이다. 잘 알고 지내던 선배가 나를 불러 내가 만든 작품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도 이렇게 해봤지만 별로였다는 둥,너처럼 이런식으로 만드는 것에 대해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는 둥..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되는양 불러놓고는 나를 자신의 틀에 맞추기 위해 애를 쓰는 모습이 안스럽기도 했지만 타인의 생각에 대해서는 아주 무시하는듯한 그 선배의 태도에 엄청 화가 났었다. 그야말로 머리끝까지 치고 올라온 화를 달래며 나는 이렇게 말했었다. 선배, 사람들마다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관점은 다른거 아닌가요? 모두에게 나와 같기를 원한다는 그 자체가 무리란 생각이 드네요... 그후 그 선배를 대하는 나의 태도는 180도로 확 달라져 버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때 나는 아주 심각할 정도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고 그 모양새를 보고 있던 다른 동료들도 나를 위로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나는 이건 아니다 싶은 경우 아주 무시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것에 대해서는 두번 다시 거론하지 않으며 또한 그렇게까지 몰고간 원인제공자에 대한 마음을 깨끗하게 거두어들인다. 나는 안다. 사람이 사람과 눈길을 마주치지 않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이후 선배의 태도가 달라졌지만 나는 그 선배를 용서하지 않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나는 가해자일까,피해자일까? 나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지만 그 선배는 나에게 가해자였을까?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속에서 서로에게 알게 모르게 안겨주는 상처에 대해, 그리고 그 상처를 보듬어 안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심리적인 변화들을 꼬집어 주는 상황들을 이 책속에는 예제로 들어주고 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겠지만 파고 들어가보면 왠지 나만 손해보면서 살아가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글쓴이의 경고는 자못 심각하기까지 하다. 결코 그냥 넘어가지 말라고, 그냥 넘어가서는 안되는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가족끼리, 연인사이에, 그리고 친구 관계에서까지 일어나고 있는 정서적 침해를 그냥 묵과하지 말라고 말하는 거다. 

설명과 절충의 덫이란 소제목으로 말하고자 했던 작자의 의도는 나를 놀라게 했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들이 그안에 녹아 있었던 까닭이다. 아니 따로이 나라고 말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아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를 너무 들춰내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냥 좋은게 좋은거 아냐? 하는 식의 반론을 제기하고 싶다는 생각마져 들었다.  우리는 지나쳐가는 시간속에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잃고, 또한 너무나 많은 것들을 잊기 위해 애를 쓰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잊어서 혹은 잃어서 편한 것이 있을테고 잊어서 혹은 잃어서 불편하고 힘겨운 경우도 있을테지만 그런 것들의 경계를 확연하게 그을 수 없다는 것이 또한 문제인 듯도 싶은데.... 타인과의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하여 그 사람이 내게 행하는 언행에 대해 변호하듯이 설명하는 그리고 무언가를 두고서 서로에게 양보하듯이 절충하는 그런 덫에 걸려들었을 때 우리의 가슴은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절충의 과정 또한 스스로 느끼는 현실에 눈감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에 대해 물어보라고 작자는 충고하고 있는 것이다. 가슴 깊이 느끼고 있는 확고한 진실을 찾아내야 한다고..
 
우리를 아프게 하고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가까운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것은 사랑이란 의미안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이다. 사실 나는 사랑을 폭력이란 말로 대신하고 싶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니 사랑도 더할나위 없는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았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럴수 있는거라고, 사랑하니까 이해해야 하는거고, 사랑하니까 다 받아들여야 하는거 아니냐고 아주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는 자체가 바로 그런것이다. 더이상의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 혹은 더이상의 말다툼을 하기 싫어서 어느 한쪽이 지고 만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내가 지금 원하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말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음이다. 다시말하자면 그렇게 상황을 접어버리는 것만이 사랑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확하게 자신을 내보이며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의 정체성에 대해 인식하게 해주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아니러니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함으로 인해서 서로에게 더 나은 관계를 지속시켜줄 수 있다면 어쩌면 더 멋진 일일수도 있겠구나 싶다. 무조건적으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혹은 상대방의 관점만을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편이란 생각도 든다. 
 
책속에 예로 들어주었던 사람들의 모습속에서 내 모습을 보았다. 때로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책장을 넘기기도 했다. 가해자의 입장에서 혹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내 속에 잠재되어져 있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두 모습을 생각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가해자로 치자면 나는 정말이지 치사한(?) 매력적인 가해자인 셈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내가 나를 보는 시선과 타인이 나를 보는 시선에 대해 재정리를 하는 시간도 갖게 되었다. 혹시? 설마? 아니겠지, 뭐 이런 반응이 내 가슴속에서 살아나는 걸 보면 나 역시도 남을 많이 아프게 했고 또한 아픔을 당해왔던 것 같다. 특히나 가족인 경우와 부모와 자녀간의 경우에는 더욱 더 심각하게 보인다. 피해자가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는 아직 어린아이일 경우에는 정말 심각하다. 책의 서두에도 나와 있던 말, 부모라면 이 책을 꼭 봐야한다던.. 세상 모든 일들이 자로 잰듯이 그렇게 반듯하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가도 피식 웃음으로 무마시켜 버리고 만다.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필요성만이 아니라 과거를 치유하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사랑,우정,직업,가족 등의 관계를 갖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보살핌과 이해 그리고 인정에 목말라하는 것 같다. 그리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어쨌든 그러한 것을 제공하기를 약속한다(357쪽).. 이 말을 보면서 참으로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관계를 거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믿고 다가가기 위해 자신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하나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되는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다. 그러니 어쩌랴.. 작자가 말하고 있는 것을 명심할 수밖에 없겠다. 상대방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첫째,현실감을 가져야 한다. 불행은 매우 실재적이고 현실적이며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내가 처해있는 지금, 바로 현실이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둘째, 기꺼이 도움을 받아야 한다. 우리의 문화는 혼자 어려운 일을 이겨내는 것에 높은 가치를 두는 경향이 있지만 절대로, 모든 일을 혼자서 하려고 하지 말고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주는 사람과 함께 하라고 한다. 취미생활을 한다거나 운동을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셋째,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바라는대로 모든 것이 한순간에 변화된다면 좋겠지만 그 또한 내맘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니 숨을 돌리며 재촉하지 않아야 한다. 넷째, 동정심을 가져라. 상대방과 스스로에게 동정심을 보이는 것이 상처를 치유하는데 좋다고 한다. 나에게 선물을 하고 나를 칭찬해주어야 한다는 어떤 이의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참으로 많은 것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갖게 해준 책이다. 상대방에 관한 나의 생각을 다시한번 재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기도 했다. 무섭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던 책이다. 

가해자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상황을 좀더 통제한다는 느낌을 준다(169쪽)
자신이 옳더라도 타인의 생각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305쪽)
다른 사람의 영향력을 배제하는 삶을 영위하는 비결 중 하나는 자신의 삶의 방식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363쪽)
245쪽에 보면 누구를 당신의 세계에 들어오게 할 것인가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긴 이야기라 여기에 다 옮기지는 못하지만 나의 손과 마음은 어느새 거기로 달려가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아니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내 마음속에 그 이쁜 상상의 집을 지어보고 싶다. 그리고 작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에 대해 다시한번 꼼꼼하게 생각을 다듬어보고 싶다. 심리서의 마력에 흠뻑 빠져들게 했던 책, 가스등이펙트의 작자에게 감사한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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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 세종대왕 - 조선의 크리에이터
이상각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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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조선시대의 크고 작은 일들이 책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결국은 급작스럽게 대왕열풍이다. 시대가 바뀌는 싯점이라서라는 말도 있겠지만 뺏고 빼앗기는 악의 구축점에서 이제는 슬슬 선을 구축으로 하며 한숨 돌리고 싶어하는 현대인들의 마음이 담겨있는 현상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쩌면 누군가가 나타나 그 험난한 삶의 쳇바퀴속에서 잠시 일탈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기를 바라는 그런 거 ... 아니, 이건 순전히 나 혼자만의 생각이다.(뭐, 아님 말고!) .. 세종대왕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한글을 생각하게 되지만 나는 정말이지 부끄럽게도 한글이란 이름이 세종 이후의 먼 후대에 와서야 한글이란 이름이 붙여졌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다지 깊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말도 되겠다.  '한글'이란 이름이 최남선과 주시경 선생의 발상이란 말에 그랬었나? 그랬었구나! 하다가  한글의 '한'이 하나 또는 크다의 뜻이란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그많은 세월을 지나오면서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타까움이 밀려오기도 했다.

이 책은 '세종대왕'이라 불리웠던  한사람과, '이도'라고 불리웠던 또 한사람을 다각도로 비춰주고 있는 것 같다. 왕으로써의 입장과 왕이란 직무를 떠나서 바라보는 시선은 너무 다르다. 세종대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처세술에 능한 기회주의자라고.. 실제적으로 장남도, 차남도 아니었던 세째가 왕이 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도 장남과 차남에게 이변이 일어나지도 않은 상태에서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이미 만들어진 반석위에서 시작한 세종의 입장에서 보면 성군이 되는 것이 당연할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책속에서도 왕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세종은 자신의 속내를 숨길 줄 알아 그 때 그때 자신을 변호할 줄 알았던 것 같다. 살기 위한, 혹은 자신의 욕망을 위한 길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책속의 내용이야 별다를 건 없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인 흐름을 재조명한 것에 불과해 보인다. 단 중심축을 세종대왕에 두었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책장을 넘기던 중에 나는 문득 책표지의 글자가 떠올랐다. 조선의 크리에이터... 크리에이터라는 말에 호기심이 생겨 찾아보니 게르만 신화속 파괴의 괴물이란 설명이 보였다. 파괴의 괴물이라.. 낡은 것으로부터, 혹은 백성을 위하는 일을 위하여, 혹은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세종대왕이 버려야 했고 타파해야 했을 많은 것들을 떠올려보니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일전에 읽었던 책속의 최만리가 한글창제를 두고서 이런 말을 했었다. 백성들이 글을 알게 되면 백성을 부리는 자들이 힘들게 될 것이라고... 글을 알게 되면 얼마나 많은 말들이 생겨나겠느냐고... 그랬던 최만리의 그 기막힌 대목을 이 책속에서 또 만나게 되니 나는 문득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떠올리게 된다. 분서갱유라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 동기도 진시황이 벌이고자 하는 일에 대해 자신들이 공부해왔던 책들의 문자들을 들이대며 사사건건 반대를 했던 유생들에 대한 진시황의 분노였음이다. 무엇이 부족하여 한글을 만들어야 하느냐고 세종에게 따져 묻던 최만리의 모습을 보며 나는 왜 엉뚱하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후반부에서 보여주던 세종시대의 인물들에 관한 글은 이채롭다. 정치면에서 이만하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황희 정승이나 맹사성, 과학과 천문학쪽에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던 이 천이나 이순지 혹은 장영실등의 이야기등을 읽으면서 과연 세종대왕이구나 싶기도 했다. 과학이면 과학, 음악이면 음악, 문학이면 문학..그만큼 다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모든 것들을 현실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애썼던 왕이 있었을까?

"나는 조선에 올인한 사람이니 자식들을 생각해서 자중하시오. 오버하면 당신과도 남남이오"
"왕권을 무시하는 자들은 다 저렇게 된다. 너도 함부로 냄새피우지 마라"
"임금도 공부하고 신료들도 공부한다. 땡땡이치면 용서 없다"
무슨 말인가 하면 책속에 나타나는 대화들이다. 처음에는 역사를 다루는 내용과 저런 대화체가 너무 어울리지 않아 짜증스럽기도 했다. 이게 뭐야! 하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책을 읽어가면서 나도 모르게 그 대화체에 동화되어가는 걸 보며 슬며시 웃음이 났다. 짐짓 무거울수도 있는 책속의 내용들이 너무 쳐지지 않게 묶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다. 정말로 왕과 세자가 혹은 신하가 서로 마주보며 오버하지 마시오, 냄새 피우지 마라, 땡땡이치면 국물도 없다... 이런 식으로 대화를 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니 오히려 재밌기도 했다. 그야말로 모순 투성이인 이 인간의 마음이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터넷용어라는 말 자체를 싫어하니 다음에는 이런 대화체의 역사서를 만나고 싶지 않음이다.

책의 말미에 따로이 주석을 달아놓아 이 책을 보기에 한결 용이했다. 나름대로 역사에 대한 소소한 지식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된듯도 하니...  어찌보면 속국으로써의 면모보다는 자주적인 국가로서의 면모를 세우기 위해 한글이 창제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나라를 굳건히 세우고자 하셨던 세종대왕의 뜻이 한글이 만들어지던 그 순간에 더욱 더 불탔을 것이다.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한글을 쓰는 우리가 과연 한글에 대한 생각을 얼만큼이나 하고 있는지 그것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컴퓨터가 지배하는 세상을 살면서 그 안에서 필연적으로 만날 수 밖에 없는 망가진 한글의 모습들은 정말 많은 것 같다. 한사람, 한남자의 가슴앓이로 만들어졌던 한 시대의 모습을 보았다.  참주인을 잃어버린 채 세계 여러곳을 떠돌고 있다는 그가 만든 '우리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것 같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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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 1 - 짧은 제국의 황혼, 이문열의 史記 이야기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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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이나 위인에 관해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대체적으로 미화되었거나 신비감을 주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이 대단히 많이 보이곤 한다. 이 책속에서 만나지는 영웅들의 등장시기나 태어난 배경등도 역시 황당하다 싶은 내용들이 보인다. 아주 오래전, 아마도 학창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오빠에게서 받았던 <영웅문>이란 책이 떠오른다. 시리즈물이었던 것으로 기억되어지는데 처음엔 너무 황당하다는 생각에 이건 뭐지? 했다가 그만 영웅문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던 기억.. 그 많던 책들을 너무 재미있어 두번은 읽었을 거란 생각에 베시시 웃음이 나온다. 한다하는 무림의 고수들이 제각각의 특징을 보여주며 등장하던 배경들은 그야말로 통쾌했었다. 그 책으로 인하여 그야말로 허무맹랑하게만 보여지던 중국영화를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면 더이상 할 말 없다. 그때당시 무척이나 유행을 했었던 <백발마녀전>이란 영화의 주인공 임청하란 배우를 아직도 기억하니 말이다. 하얀 머리를 길게 늘어뜨렸던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이 영웅문에서 만났던 무림의 고수중 한명이었으니... 그 넓은 땅덩어리를 서로 차지하고자 수도없이 싸움을 했을 그들의 이야기는 읽을수록 빠져드는 매력이 있다. 

<삼국지><초한지><수호지>... 대략 읽었다고 생각되어지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비슷한 면들도 많이 보여진다. 그들 주인공들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 또한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니 뭔가 색다른 느낌이 전해져 왔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 형식으로 알고 있었던 <초한지>의 내용을 생각하면서 이 책을 읽는다면 무언가 끊어질 듯이 이어져가는 맥락이 잡혀질 것 같다. 등장인물들의 생각을 통하여 과거로 되짚어가는 형식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처음의 시작은 역시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의 대를 이었으며 등등등... 그렇게해서 황제들이 이나라를 이어왔다는 식의 이야기전개이다.  왠지 그런식의 문장을 읽다보면 고문을 당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빠지지 않은 요순선양에 관한 이야기는 다시 보아도 참 멋지다. 많은 백성을 먼저 생각하고 성자를 찾아내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그런 꿈같은 이야기가 이 시대에도 생겨날 수 있을까? 하는 우문을 한번 가져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평성대를 이어가지 못하는 걸 보면 인간이란 동물의 속성이 그리 아름답기만 한것은 아닌가보다. 그러다가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 되는 싯점이 진시황의 시대다. 진시황이란 칭호가 생겨나게 되는 유래를 읽다보니 조금은 우습기도 하다. 그야말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다.  유방이 세상에 등장하게 되는 배경은 역시 신비감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용안'이란 말의 어원이 되었다던 유방의 일화를 보면서 승자였기에 미화되어질 수 있었으리란 생각을 지울수가 없다. 거기에 비하면 오히려 진시황을 태어나게 해 주었던 등장배경(여불위라는 재상의 기치와 술수로 인하여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던 진시황의 아버지. 그 아버지가 탐했던 여인이 여불위가 총애하던 애첩이었다는...)은 그리 아름답게 그려지지 않은 것 같다. 아비가 누구인지를 모를 지경으로까지 몰아가니 말이다. 또한 그 어미의 문란한 사생활이나 추문을 왜 숨겨주지 않았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유방과 항우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아주 자연스럽게 <패왕별희>라는 영화가 뒤따라 온다. 경극을 빌어 다시 태어난 이야기지만 왠지 깊은 울림을 안고 있는 내용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걸보면 내게는 아주 강한 느낌을 심어주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 책, 초한지 1권에서는 그런 내용을 찾아보려 하지 말지어다. 이 책은 단지 앞으로 우리가 기대감을 갖고 바라보며 만나야 할 영웅들의 등장배경만을 다루고 있을 뿐이니... 또한 이 책은 내가 보건데 이야기 전개방식이 조금은 특이하다. 그냥 옛날이야기를 듣듯이  그저 술술 넘어갈거라 생각하면서 책을 읽는다면 어라? 하면서 되짚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고해서 책의 흐름이 무자르듯이 싹둑 싹둑 잘려지지는 않는다. 교묘하게 연이어주는 맛이 또한 색다른 까닭이다.  책을 읽기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초한지>의 흐름에 관한 선입견을 버린다면 훨씬 유리할 듯 하다. 유방과 항우의 등장배경을 비교할 수 있어서 나름대로는 흥미로웠다. 또한 두 영웅을 중심축으로 하여 모여들 수많은 호걸들의 등장배경도 볼 수 있었음이다.  호걸들이 자신을 알아줄 주인을 찾아 헤맸다는 이야기처럼 개인적으로는 <삼국지>의 유비를 도왔던 제갈량과 비교되었던 인물, 장량에 관한 이야기에 많은 유혹을 느낀다. 그가 유방을 도와 세상을 평정하고자 했었던 일들은 과연 어떠했을지... 또한 '토사구팽'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 한신과 유방의 관계는 어떠했을지... 흔히 알고 있는 유방과 항우에 관한 일화보다는 그들을 둘러싸고 일어났을 소소한 일들, 많이 알려지지 못한 이야기가 더 많을 것 같다. 그러니 다음 이야기가  더 궁금해진다.

'때를 기다리는 사내들'이란 소제목으로 이 책은 끝이 나지만 이문열의 <초한지>가 열권으로 태어난다니 그 열권속에 녹아내릴 영웅호걸들의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을 것 같다. 기회가 된다면 나머지 <초한지>의 목마름을 채워보고 싶다. <삼국지>의 영웅호걸들과 비교해보며 읽어간다면 몇배의 흥미로움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생긴다.  이건 그냥 여담이지만  신문지상에 연재되어질 때 꼬박꼬박 읽어둘 걸 그랬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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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 - 마음을 움직이는 힘 위즈덤하우스 한국형 자기계발 시리즈 1
한상복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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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베스트셀러였던가?  아마도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자기계발서는 사실 우리 주변에 너무도 많다. 싫증이 날 정도로.. 하지만 간혹 읽으면서 뭉클해지고 읽고나서 눈물 고여지는 그런 책이 있다. 그런 책을 만난다는 건 행운일까?  사실 이 책을 만나기 전까지도 나는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자기계발서라는 말자체가 안고 있는 의미가 너무 뻔하다는 생각을 어쩔 수 없이 내세웠던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끔씩 내 눈앞에 보여지던 이 책의 표지그림때문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작은 아이가 커다란 어른에게 우산을 내밀고 있는 그림... 쉽지 않은 상황이다. 저 작은 우산을 내밀고 있는 아이의 마음과 함께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어른의 마음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어른은... 과연 저 작은 우산을 받아 들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뒷표지 그림에서 그 궁금증이 해결된다. 아이를 업은채 그 작은 우산으로 아이를 받쳐주는 어른의 그림.. 참 따뜻하다. 아마도 작가는 우산을 내미는 아이의 마음과 그 마음을 받아 들여 아이를 업은채 우산을 받쳐주던 어른의 마음, 이 두가지 모두를 말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뒷표지의 그림이 생겨날 수 있게 해 주었던 그 잔잔한 마음의 여운을 내게도 전해주고 싶었는지 모를일이다.

근간을 뒤져보아 가장 가슴속에 깊은 여운을 남겼던 <뜨거운 관심>이란 계발서가 생각났다. 얼마나 선전을 해댔는지 내 주변 사람이라면 아마도 그 책을 다 읽었을게다. 자기 계발서의 종착역은 항상 같다. 아무리 칸 수가 많은 자기계발행 기차를 탔다고 해도 늘 종착역은 같다는 말이다. 두말할 필요없이 관심과 배려이다. 나보다는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그 타인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필요하다는 것..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오는 행복과 믿음과 사랑에 대한 설명들.. 그야말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고 눈에 짓물나도록 읽고 보았을 그런 문장들이 숲을 이루는 나무처럼 빼곡하다. 어떤 형식을 띠고 있느냐의 차이점일 뿐이다. 이 책속의 세상은 우리가 날마다 살아내고 있는 현재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굳이 구분하지 않아도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일상과 마주친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가슴을 뭉클하게 하며 눈시울을 붉히게 만든다. <뜨거운 관심>이 가족의 테두리안에서부터 시작했다면 이 책은 사회적인 테두리안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역시 가정으로, 가족으로 돌아오게 한다. 주인공 이름과 주변인물들의 이름이 참 재미있다. 위차장, 공자왈부장, 조구라, 직업조문객, 요술공주, 명함수집가... 설정된 이름만 보아도 그들의 성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을게다. 그리고 그들이 속해있는 부서이름이 프로젝트 1팀의 특수사업섹터다. 

책속의 인도자가 말해주었던 아스퍼거와 사스퍼거의 이야기는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우리의 주인공 위차장을 서서히 변하게 해 주었던 두 단어의 위력앞에서 나 역시 작아져 가고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자기 세계 속에만 갇혀서 아예 남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르킨다는 아스퍼거(Asperger) 라는 장애,  자폐증보다도 더 무서운 말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더 나아가‘사스퍼거(Social Asperger)’라는 개념까지 보여주고 있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나눌 줄 모르며,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남들에게는 무자비한 사람들, 즉 사회생활 속에서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세상속에 너무 많다는 거다. 문득 떠올랐다. 몇 해전이었는지 여의도 광장을 택시로 질주하던 사건이 있었다. 살아가야 하는 이유나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사람들.. 그런 현상들이 생겨나는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 각박해진 탓이라고도 말하지만 그 각박함을 만들어낸 사람들은 또 누구인가?  참 어려운 난제이다.

배려... 늘 가슴속에 살아 있으면서도 그림자만 밟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자문해 본다. 아주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내가 해 주고 있는 혹은 해 줄수 있는 관심과 배려는 몇 퍼센트쯤이나 될까 자문해 본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만큼 이 세상의 흐름을 바꿔놓는 것은 없다고 늘 소망하면서도 그 사람관계를 원활히 하지 못하는... 적어도 나만큼은 남을 힘들게 하지는 말자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나로 인하여 아파하며 힘들어했을 가슴들은 분명 있었을게다.  간단하고 명료한 배움앞에서는 늘 선선하게 인정하지 못하는 내 마음의 부재를 탓해본다. 어리석음이리라....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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