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저넌에게 꽃을
다니엘 키스 지음, 김인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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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책을 평가하는 기준에 별이 다섯개밖에 없다는 게 오늘따라 싫다. 내가 무슨 전문 평론가는 아니지만 이 책은 정말이지 가슴속을 흥건하게 적셔주는 무언가가 있다. 나는 아무래도 자연주의자인 모양이다. 이렇게 과학이나 어떤 인위적인 믿음에 반기(?)를 드는 듯한 느낌이 오는 글을 좋아하는 걸 보면 말이다. 과학조차도 인위적인 믿음이라고 생각할수밖에 없는 내가 너무 우습기도 하지만 왠지 무조건적인 믿음을 내세우는 광신도와 자신이 믿어 마땅한 그 무엇에 대한 열정으로 꽉 채워진 학자들의 믿음이 어쩌면 동일한 선상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오늘은 검사가 잇엇다. 나는 실패햇다고 생각하기 때무네 틀림업시 나를 써주지 안을 것 같다... 박사님은 생각한 것 하고 일어난 일을 자꾸자꾸 쓰라고 합니다 이제 생각나지 안키 때무네 쓸 것이 업서서 오늘은 여기서 그만 하겟다....안녕히 게세요 찰리 고든 이제 막 글을 배우기 시작하는 어린 꼬마의 말투로 시작되어지는 이 책을 펼쳐보면서 나는 나의 선택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책을 통해 알게 되어 선택되어진 나의 두번째 책이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찰리의 시선으로 책속 세상을 함께 거닐었다면 거짓말일까? 

앨저넌과 찰리.. 책속의 주인공은 둘이다. 내가 두명이라고 쓰지 않는데는 이유가 있다. 앨저넌은 흰쥐이기 때문이다. 32살이지만 일곱살 어린아이 같은 지능을 가진 채 살아가고 있는 찰리.. 여기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IQ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흰쥐를 이용해 실험하는 인간의 자아도취현상 또한 그리 위대해 보이지 않는다. 일종의 조건반사라고 나는 보기 때문이다. 뜨거워지는 물을 느끼지 못한 채 서서히 죽어가는 개구리 현상과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곱살의 찰리가 서른 두살의 찰리로 변해가는 과정은 눈물겹다. 아니 눈물겹도록 처절하다. IQ가 얼마나 낮고 높은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과학이라는 초현실적인 자만심 앞에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돋보기를 쓰고 보는 것처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이 책속의 찰리가 너무 불쌍하다. 이제 막 글쓰기를 배우는 아이처럼 세상을 대하던 찰리가 뇌수술을 받고 난 이후 IQ180의 천재가 되었지만 그가 마음속에서 하나 둘 잃어가고 있는 것들에 대해 나는 마음이 아팠다. 실험실에서 앨저넌을 처음 보았던 어린 찰리.. 그야말로 백치같았던 찰리가 어느 순간 천재가 되어 앨저넌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바라보며 자기 자신의 변화를 예측할 때는 정말 가슴이 아팠었다. 하지만 그 예상되는 변화를 받아들이며 자신에게 닥쳐올 미래를 묵묵히 인정하는 찰리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기회가 된 듯 하다.

찰리 고든이 백치인가 천재인가 하는 것에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을... 천재가 된 후에야 알게된 찰리가 자신을 천재로 만들어준 박사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뭐든지 해 주었지요, 인간으로 취급하는 것만 빼고는.. 나를 위해 당신이 해준 것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나를 실험용 동물처럼 다룰 권리를 없다고...(276쪽)  적어도 빵가게에서 일하던 어린 찰리에게는 친구가 있었고 외로울 때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있었으며 이렇게까지 고독하지는 않았었다고 천재찰리는 생각한다. 자신의 실제적 자아관념이 어린 찰리로 보여지며 끝내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것을 종용하는 상황에서조차 천재 찰리는 어쩌면 자신에게 주어진 지금의 현실을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게다. 아니 어쩌면 그런 것들을 포기한다는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수술의 후유증으로 정서적인 변화를 보여주던 앨저넌을 바라보면서 앨저넌이 겪고 있을 변화가 천재찰리에게는 공포로 다가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천재찰리는 그 순간부터 자기 자신의 변화에 대한 리포트를 작성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자신을 체크하며 연구하는 아이러니다. 

서른 두살의 어른이 되어버린 찰리에게 어린찰리는 그가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었던 아주 먼 기억들을 하나씩 끄집어내어 보여주고 싶어한다. 태어남, 그리고 그에게서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아니 어쩌면 집착의 끈으로 자신을 옭아매어버린 엄마의 모습. 동생 노마가 태어나고 엄마로부터 버림을 받은 채 공동시설로 들어가야 했던 찰리는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을 잃었다. 문득 나는 얼마전에 읽었던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가 생각났다. 지극히 평범한 부모로부터 다섯째 아이로 태어났던 벤도 저능아였었다. 찰리처럼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야 했던 벤이 어쩌면 찰리보다는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랑이 필요했던 시기에 벤에게는 이기적이지 않은 엄마의 보호가 있었던 까닭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싶어했던 엄마의 관심이 있었다. 시설에 버려졌으나 다시 가족 곁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벤과 뇌수술로 천재가 되어 가족을 찾아갔던 찰리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버림 받지 않고 가족곁에서 살아갈 수 있었다면 오히려 행복했을지도 모를 찰리가 다시 바보가 되어가는 그 여정속에는 정말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함께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은 지금 타인의 마음에 대해 제멋대로 말하고 있어요. 당신이 뭘 알겠어요? 내가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느끼며, '왜' 그렇게 느끼는지"(148쪽).. 찰리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자 앨리스가 찰리를 향해 절규하며 뱉어냈던 이 말은 어쩌면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던지는 작가의 마음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이 되어 있는지 알았다.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인간. 찰리와는 달리 친구도 사귈 수 없고 타인과 타인의 문제를 생각해 줄 수도 없다. 그리고 자기자신 외에는 흥미가 없다. 거울과 마주한 그 오랫동안 나는 찰리의 눈을 통해 나 자신을 보고 내가 실제로 어떤 인간이 되었는지 깨달았다. 나는 부끄러웠다.(280쪽)... 과학이, 우리가 믿고 싶어하고 끝없이 존경해마지 않는 과학의 힘이 우리를 점점 외로움의 늪으로 인도하고 있는것은 아닌지.. 끝없이 변화하고 싶고 그 변화에 기쁘게 순응하고 싶어하는 우리가 과연 나 자신에 대해 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은 얼만큼이나 되는지.. 터럭만큼도 없을 우리 마음의 여유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  천재찰리의 고독은 어쩌면 당연함으로 치부될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다 할지라도 그것만큼은 당연시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박사에게 심리요법을 받던 천재찰리가 다시 어린 찰리로 돌아가면서 묻고 있다. 백치한테는 본능이 있을까요?...라고. 

어째서 나는 언제나 인생을 창문 너머로 들여다 보는 것일까? (328쪽)
이제는 시간이 없다고 느끼며 과거를 떠올리려 하지 않는 찰리가 자신이 써놓았던 논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단계가 되어 있을 때 인생에 대한 시점을 논한다는 건 서글프다. 이미 손에 쥐었던 것을 놓아버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불가항력적인 힘이 가해진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같은 뇌수술로 아주 똑똑한 천재쥐였던 앨저넌이 죽었을 때 나는 오, 하느님! 제발...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심정이었다. 제발 찰리만큼은 그렇게 되지 않기를...  어쨋든 나는 과학을 위해 중요한 것을 발견한 최초의 바보인간인 것은 확실하다. 나는 무언가를 햇지만 그게 뭔지 생각나지 안는다.(344쪽) 그때가 오면 다시 시설로 되돌아가야 하는 그 때가 오면 혼자서 가고 싶다던 어린 찰리에게 환영같은 그림자로 보여지는 천재찰리.. 그 사람은 얼굴도 나하고 다르고 말투도 다르지만 나하고 달믄 것 같튼데 그래도 그 사람이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내가 창문에서 그 사람을 보고 잇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343쪽) 그래, 그래도 나는 친구를 찾아 떠나는 바보찰리가 더 좋다. 옛날에는 천재였지만 지금은 읽을 줄도 쓸줄도 모르는 바보천재를 아무도 상관하지 않은 곳을 가려고 하는 나의 찰리에게 박수를.. 그의 긴 여정이 너무 힘겹지 않기를.. 그의 마지막 말을 들려주고 싶다. 인간으로 살았으나 인간취급을 당해야 했던 그의 아픔을 함께 느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리고 그의 여정에 터럭같은 마음 한자락 나눠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아이비생각


P.S. 니머 교수님한테 꼭 전해주세요. 사람이 선생님을 비웃어도 그러케 화를 내지 말라고요. 그러케 하면 선생님한테는 더 만은 친구가 생길 거니까. 남이 웃도록 내버려두면 친구를 만드는 것은 간단합니다. 나는 이제부터 갈 곳에서 친구를 만이 만들 생각입니다.

P.S. 어쩌다 우리 집을 지나갈 일이 잇으면 뒤뜰에 잇는 앨저넌의 무덤에 꼿을 바쳐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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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 촬영법 Outdoor Books 10
송기엽 지음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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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동안을 산에 오르면서 자연의 숨결을 제대로 느꼈던 때가 얼만큼이나 될까 생각해 보았다. 아주 오래전 산악회 동료들과 점봉산을 오르던 길에 만났던 얼레지의 향연을 나는 지금까지도 잊지 못한다. 얼레지 군락지를 지나면서 행여나 한송이라도 밟을까 모두들 얼마나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었는지... 계절별로 다른 모습을 하는 산이 좋아서, 작년 모습과 올 해의 느낌이 또 달라서 산을 오를 때마다 나름 작은 설레임을 느끼곤 했었지만 철마다 피어나는 꽃송이들이나 봄이면 연초록으로부터 시작되어 짙은 녹음으로까지 번져가는 그 초록의 변화무쌍함이 경이로워서 갈 때마다 나는 환호성이었다. 산을 내려오면 들길을 따라 쭈욱 나를 따라오던 들꽃들은 또 어떠했었는지... 그랬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 자연을 내안에 품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풀 한포기, 꽃 한송이가 왜 그리도 아름답고 소중하게 느껴졌었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들 하나하나마다 간직하고 있었을 이름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던거다. 뒤늦게 디카를 소장하게 되었던 그 순간의 환희를 말해 무엇할까마는 나는 지금도 무작정 디카 들이대는 것을 엄청 좋아한다.  그렇다고 내가 사진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고 사진에 관한 책을 단 한권도 따로이 본 적이 없으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나는 사진에 관해서는 정말 문외한이라해도 틀린 말은 아닐 듯 싶다. 그저 이쁘고 좋아서 그런 시간을 갖고자 하는 것 뿐이다. 그것들을 바라보고 잠시 마음을 빼앗겨보는 그 순간이 그저 황홀할 뿐이다. 그러던 중 내눈에 띄는 꽃과 풀의 이름이 궁금해 미칠지경이 되었을 때 내게 온 이 책은 마치도 구세주와 같았다고나 할까?  산을 오르거나 들길을 걷다보면 흔하게 마주치는 작은 꽃들이 서로 비슷비슷한 생김새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각각의 이름을 갖고 있있었는데도 내 눈에 다름이 느껴질 여유가 없었던 듯 한데 이 책을 만나게 됨으로써 비로서 동의나물이나 양지꽃이나 애기똥풀의 차이를 이제는 조금 알 수도 있으려니 한다.

책속에는 사진에 관한 이야기들도 많지만 그 사진을 어떻게 자연과 조화시켜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더 많다. 일단은 꽃에 대한 정보부터 훓어보기로 했다. 참 많기도 하다. 봄,여름,가을,겨울 계절별로 피는 꽃이 다르고 아침에 피고 저녁에 피는 모습 또한 달랐다. 날씨에 따라 흐린 날, 맑은 날, 비오는 날, 눈오는 날이면 제각각 때에 맞춰 피어나는 꽃이 달랐고 산에 피고 들에 피니 그 모습 또한 달랐다. 그런가하면 큰 꽃,작은 꽃, 따로 피고 모여피고.... 나는 언제쯤이면 이 많은 꽃들과 인사나누게 될까 하는 욕심이 앞섰다. 그런 꽃들을 어떻게 찍어야 좀 더 이쁘고 멋지게 그리고 저마다의 특성을 살려 제대로 찍어 사진에 담아 낼 수 있는지까지도 이 책의 저자는 잘 말해주고 있다.  사진을 볼 때마다 내가 가장 욕심이 났던 것은 접사였다. 초근접 촬영편을 보면서 나도 제대로 된 카메라 장비와 사진 공부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났다. 디카여서 편한 것도 있지만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던 점들이 많았던 까닭이기도 하다. 사진의 구도를 설명하는 부분과 주제와 부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가에 대한 부분이 나올 때는 아주 외울 작정으로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지난 주 일요일 청계산에 올랐을 때 산능선에 피어있던  좀비비추의 모습을 한번 찍어보았다. 물론 책에서 배운대로 구도에 신경을 써보았지만 역시 많이 부족하다. 이 꽃은 사실 산에 갈 때마다 여러번 보았던 기억이 있지만 이 책을 통해서야 이름을 알 수 있었다고 말한다면 꽃이 서운하려나?  아카시아 향내를 맡으며 내려오던 하산길의 애기똥풀을 내내 양지꽃이라고만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조금 부끄럽기도 하다.  책자가  간편하게 소지할 수 있도록 작게 나온 탓인지 내 욕심만큼 많은 꽃을 알 수는 없었지만 나에게는 정말 고마운 책이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해야 했다. 아마도 내가 외출할 때마다 가방속에서 늘상 나와 함께 해주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인덕원역쪽으로 하산을 하였던 탓에 역 근처의 화훼단지를 거쳐야 했다. 와, 그 많은 꽃들이 나를 반기며 웃고 있는데 그 유혹을 어찌 모른 척 할까?  많은 꽃들과 인사를 나누면서도 이 책속에 배웠던 내용들이 자꾸만 나를 망설이게 했다. 그야말로 어설픈 도둑이 된 것 같았다고나 할까? 이름도 모르는 꽃들의 화장한 얼굴이 너무 고와서 한참을 그곳에 머물렀었다.  그 중 환상적인 빛깔로 나의 혼을 쏙 빼놓았던 꽃수국과 이름을 아직 알지 못한 꽃송이들을 아직은 부족한 솜씨겠지만 여기에 잠시 소개해 볼까 한다.



오래전에 마이크로 코스모스란 영화가 있었다. 아주 작고 미세한 세상을 카메라에 담아 정말 놀라운 장면들을 보여주었던 영화였다. 너무 좋아서 바로 비디오를 구입, 지금은 보고 싶을 때마다 한번씩 보고 있지만 역시 볼 때마다 눈이 커지고 가슴이 설레인다. 그 아름다움을 좀 더 많이 알고 싶고 좀 더 많이 배워보고 싶다. 나중에라도 시간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어느정도의 여유가 생겨난다면 제대로 된 카메라 장비를 구입하여 자유롭게 자연속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져보고 싶다.  물론 사진찍기에 대한 공부도 열심히 해야하리라.. 작은 책, 정말 가방안에 쏙 들어갈만큼 작은 책이었지만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큰 것을 안겨준 책이었다. 이렇게 글을 쓰며 다시한번 책을 펼쳐보고 있으려니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진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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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 1
이민진 지음, 이옥용 옮김 / 이미지박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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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장을 덮으며 나는 생각한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은 희망일까? 좌절일까?.. 그것을 먹느냐 먹지않느냐의 단순한 차이일뿐일까?  책을 읽는내내 왠지 나는 가슴을 졸여야만 했었다. 그건 또 무슨 까닭일까?  그녀 케이시 한의 끝없을것만 같았던 일탈들이 나는 부럽기도 했고 두렵기도 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오랜 관습의 희생양이 되는게 싫었을거라는 생각도 해본다. 아니 어쩌면 자기 앞에 주어져 있는 삶의 모티브들이 싫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야만 한다'거나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거나 하는 식의 명제는 우리 스스로가 앞세우면서 살아가고 있는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책띠의 뒷면에 보면 이런 말이 있었다. 이 책이 진작 나왔다면 '조승희 비극'을 막았을 수도... 라는 말. 하지만 나는 결코 그것과는 다른 시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승희라는 젊은이와 여기 우리의 그녀 케이시 한이 안고 살았을 그 정체성에는 무언가 확연한 차이가 있었을거라는 생각을 바꿀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단 한사람만으로, 아니 극소수의 사람들만으로 다수를 다 폄훼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앞섰던 까닭이기도 했다. 누구나 안고 살아가야하는 문제점 앞에서 오직 나혼자만의 아픔이 더 클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자신에게 주는 자기만의 위안일 뿐이테니 말이다.

이민 2세들의 힘겨움을 나는 잘 모른다. 미국이란 나라가, 혹은 미국이란 나라가 만들어내는 사회적인 현상을 내가 직접 체험해보지 않았으니 이렇게나마 만나지는 그들만의 세계를 내가 깊이 이해한다고는 말할 수 없을것이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그들의 삶에는 즐거움보다는 힘겨움이 더 많은 듯 하다.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자기의 존재적 위치가 아마도 그들을 더 힘겹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이시 한이라는 여성을 통하여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일상적인 생활속에서 묻어나던 내면의 고통이었다. 그들의 부모뿐이었을까? 아니 그건 아니었을 것이다. 단순히 자식의 성공의 잣대가 자신들의 삶에 귀착점이라도 되는 양 살아냈던 것은 이민을 간 사람이나 여기 한국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나 부모라는 위치에서라면 당연시했을 문제였을 것이다. 같은 자매이면서도 한국적인 것으로부터 놓여나고 싶어하는 케이시와  한국적인 것과 타협점을 찾아내 안정감을 얻고 싶어하는 티나의 확연히 다른 삶의 방식속에 녹아있는 유교적인 관습과의 악연들.. 아니 어쩌면 그것은 한국적인 사고의 틀이기도 하겠지만 너무도 오랜세월의 아픔을 함께 해 왔던 관습이었기에 힘겨울 때마다 그안으로 숨어들 수 있었던 또하나의 방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길들여진 것은 편안함을 주기 때문이라는 모순이 아닐수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케이시가 그녀가 사랑이라고 믿었던 제이와 다시 맺어지기를 바랬다. 그녀가 그토록 힘겨워하던 부모세대 틀에서 형식적으로나마 완벽하게 탈출할 수 있기를 바랬던 것도 같다. 그것이 탈출이었든 아니든 그녀가 택한 삶의 길이 그녀와 동화되어졌으면 했다. 하지만 현실은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만 흘러가주지는 않는다는 것이 또한 정답이다. 그녀의 현실을 무시한 일탈은 그녀의 뜻대로만 흘러가주지 않을테니...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살아갈 힘을 주는가?" 라는 질문에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몸을 지배하는 미국사회가, 정신을 지배하는 한국사회가 그녀에게는 아무런 것도 베풀수 없었다는 게 현실일테니 말이다. 그녀가 진정으로 원했던 그것이 무엇이었든간에 성공을 향해 꿈이라도 꾸어야 했던 그 현실이 우선이었던 까닭이기도 하다. 성공이라는 열쇠를 움켜쥐고 눈앞에서 흔들며 따라오라고 외쳐대던 사빈느의 그 유혹조차도 그녀에게는 위안이 되지 못했다. 하루 그리고 매순간마다 선택을 해야 했던, 그리고 그 선택뒤에 선물처럼 따라오던 그녀의 좌절앞에서 중요한 것은 네 인생이야,라고 아무리 큰소리로 외쳐댄다한들 그 인생의 길이 보이는 것은 아닐테니 말이다. 

인생이 뜻하는 대로 되어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원래부터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렇게 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들을 못 해내기 때문에 그것을 이룰 수 없는 것일까? (187쪽)   누구나 알고 싶어하고 또한 케이시가 알고 싶어했던 저 문제의 해답은 어떤 것이었을까? 원래부터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다는 것은 쉽게 말해 운명이라는 것일테다. 그 운명은 스스로 바꿀수도 있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정말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자신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보여지던 케이시에게는 자신을 향한 믿음이 아주 현저하게 낮은 수치였던 까닭이기도 하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들을 그녀는 최대한 하려고 노력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노력했던 결과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했다. 확실하게 믿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기자신을 향한 칭찬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찾아왔던 수많은 좌절의 순간들이 그녀에게 자신을 되돌아보아야만 한다고 속삭이고 있었던 아니었을까?  그 속삭임은 관심이었을까, 질책이었을까 나는 묻고 싶어진다.

결국 한국남자 은우를 만나 사랑이란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케이시를 통해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같은 한국사람이라는 동질성이 아니라 한사람의 정체성이, 한사람의 일생을 좌우하게 될 하나의 사고가 그리 쉽게 만들어지고 무너져내릴 수는 없다는 거였다. 삶에 대한 상실감을 이겨내지 못한 채 모든 것을 다 잃은 은우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 싶어하는 케이시에게 남은 것은 서로를 그리워했던 마음 하나뿐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마지막 두줄을 통하여 그들에게 희망을 부여해 주고 있다. 아니 희망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게다. 케이시와 은우가 함께 엮어가야 할 사랑만큼이나 그들이 살아내야 할 앞으로의 삶 또한 쉽지는 않겠지만 케이시가 그려놓은 꽃 주위에 기다란 풀을 그려 넣었던 은우와  그 꽃잎에 색칠을 하기 시작한 케이시가 함께 그렸던 푸르른 나무처럼 그들에게도 그런 앞날이 펼쳐지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대해 본다.

이 책속에는 성공을 위해 달려가는 사람과 성공이라는 것을 이미 움켜쥔 사람들의 이야기가 칡넝쿨처럼 서로 얽혀있다. 하지만 그들 모두에게는 마음에 생겨난 빈자리를 안고 살아간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외로웠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완전할 것 같은 빈틈을 안고 살아간다. 그런 것들이 아주 촘촘하게 잘 엮여져 있어 읽는 나로 하여금 그들의 외로움을, 그들의 힘겨움을 모른 척 하면 안될 것만 같은 느낌을 갖게 해 주었다. 낯선 곳에서 서로 부딪히며 살아가야 할 부모와 자식간의 갈등이 얼만큼의 크기로 다가오는지, 인종과 문화의 차이가 한사람에게 얼만큼 깊이있는 이해를 원하는지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해 주었다. 케이시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어하는 미국사회의 실리적이고 독립적인 사고방식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아직 힘겨운 난제인지도 모르겠다. 많은 경우의 수를 예로 들어주는 갈등 구도를 이해하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이민사회라는 것을 내가 이해하기는 힘들겠지만 모든 갈등 구도의 끝에는 서로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바탕으로 한 이해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책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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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 개정판
조나단 스위프트 지음, 신현철 옮김 / 문학수첩 / 199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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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통하여 책을 알게 된 케이스다. 그저 평범한 동화였을거라고 믿었던 걸리버여행기에 대해 다시한번 읽게 되었던 동기를 부여해주게 되었다는 건 나에게 큰 의미를 갖게 하기도 했다. 사실 큰사람들의 나라에 갔던 걸리버나 작은 사람들의 나라에 갔던 걸리버의 모습은 하나도 새롭지 않았다. 하지만 하늘을 나는 섬의 나라와 말들의 나라를 여행했던 걸리버의 모습은 또하나의 놀라움이었다. 읽기에 쉽지 않았던 이 책이 왜 어린이만을 위한 이야기로 소개되어져야만 했을까? 책속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세상은 큰사람들의 나라나 작은 사람들의 나라조차도 받아들이기에 편한 것만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게 가장 큰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 하늘을 나는 섬의 나라였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독한 팬임을 자처하는 나로써는 <천공의 성, 라퓨타>의 원작이 어찌 궁금하지 않았겠는가 말이다. 애니메이션은 곧잘 아이들만의 전용으로 치부되어지기도 하지만 하야오 감독의 작품은 차라리 어른들만을 위한 애니메이션이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많은 것을 던져주며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주는 그의 작품이 나는 참 좋기 때문이다.

일단은 이 책속의 세상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나는 허둥대야했다. 발음하기조차 힘겨운 지명이나 인명들이 우선을 껄끄러웠고 이야기속에 감춰둔 의미들이 너무 무겁기만 했다. 이 책을 이해하며 읽는다는 게 그리 쉽지 않았다. 그저 이야기의 흐름에 나를 맡긴 채 슬쩍 묻어가려고 했지만 그것조차도 쉽지 않았다. 특히나 하늘을 나는 섬의 나라를 여행할 때에는 내가 도대체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잊으면 안되는 것들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사람이 진정한 사람으로써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되짚어주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말들의 나라에서 돌아오고 싶어하지 않았던 걸리버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었던 것일까? 말들의 나라에서 내가 배웠던 것은 참으로 많았던 것 같다. 그렇다고해서 그 나라의 수준을 다 이해했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파내도 파내도 알 수 없을 것 같은 그 무엇들을 이 책은 너무나도 많이 안고 있다.

뒷부분의 해설에서 보면 이 소설의 잉태기간이 약 15년이었고 실제로 집필에 종사한 것도 5년 이상이 걸렸다고 하니 작가의 심적 무게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 책속에는 정치적인 배경이 참 많이 나온다. 그 모든 것들이 작가가 집필하는 동안에 일어났던 일이라고 하니 작금의 정치현실과 비교해볼 때  참 아이러니다. 작가가 성직자였다는 말에 또한번 놀란다. 책속에서 느껴지는 인간에 대한 폄훼나 혐오감은 그럼 뭐란 말인가.. 자연앞에 작아져야 할 인간의 오만함을 찍어 누르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직설적인 표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어내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특히나  과학의 세계를 보여주고 싶어했다고 느껴지던 하늘을 나는 섬의 나라편에서는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일종의 풍자소설일까? 부정부패가 난무하는 정치세계를 비꼬아 주고 싶었던 것일까?  마지막 여행지였던 말들의 나라에서 돌아와 말처럼 살기를 원했던 걸리버.. 그 걸리버의 마음으로 다시한번 힘겨운 여행길에 도전해 보고 싶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이 책을 읽고 난 뒤의 감상노트를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무엇이 어떻게 나에게 다가왔었는지, 무엇을 어떻게 내가 따라 갔었는지를 잘 알지 못하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책이 단순하게 어린이용 도서로 읽혀졌다는 것이 이해할 수 없다는 거다. 작자가 의도하고 있었던 그 무엇, 너무도 깊고 단단했던 그 무엇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걸리버는 돌아왔지만 나는 아직도 그 여행길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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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아름다운 것들이 참 많다.
보아주지 않아도 소롯이 제 몫을 다하는 아름다움의 미학..
세상엔 아름다워야 할 것들도 참 많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오롯이 제 몫을 다할 때의 아름다움..

살다보면 가끔씩 아름다워야함에도 불구하고 아름답지 못함을 볼 때가 있다.
그런 날이면 예고없이 마주치는 아름다움의 의미앞에서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저마다의 가슴속에 살아있을 아름다움이
때로는 삶의 여정속에서 퇴색되어진 채 버려질 때가 있다.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저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를 탓하고자 한다.
어린 아이들마져 동심을 잃어가고 있는 이 세상을 살아내는게 그리 녹녹치만은 않을것이기에
그저 세상탓을 하며 허허 웃고 말아야지 한다.
저 어린 아이들의 색동옷속에 묻혀진 잃어버린 날의 추억은 어디로 갔을까?
무심하게 그저 무의식의 순간속에서 하나씩 잃어가고 있는 우리의 그 무엇..
그 무엇떄문에 오늘 나의 가슴이 오후 내내 서늘했다.
아직은 저마다의 욕심이 아름답게 보여지지 않았던 탓이다.

꼭두각시춤이 시작되었을 때 사진기를 들이대며 운동장으로 몰려가던 학부모들의 모습이 나를 슬프게 했다 몇번씩이나 반복되어지던 말, 운동장밖으로 나가 주세요 아이들의 안전이 우려됩니다.... 겨우 몇걸음 움직였을 뿐이다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저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를 탓하고자 할뿐, 그저 세상탓을 하며 허허웃고 말뿐..../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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