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 1
이민진 지음, 이옥용 옮김 / 이미지박스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책장을 덮으며 나는 생각한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은 희망일까? 좌절일까?.. 그것을 먹느냐 먹지않느냐의 단순한 차이일뿐일까?  책을 읽는내내 왠지 나는 가슴을 졸여야만 했었다. 그건 또 무슨 까닭일까?  그녀 케이시 한의 끝없을것만 같았던 일탈들이 나는 부럽기도 했고 두렵기도 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오랜 관습의 희생양이 되는게 싫었을거라는 생각도 해본다. 아니 어쩌면 자기 앞에 주어져 있는 삶의 모티브들이 싫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야만 한다'거나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거나 하는 식의 명제는 우리 스스로가 앞세우면서 살아가고 있는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책띠의 뒷면에 보면 이런 말이 있었다. 이 책이 진작 나왔다면 '조승희 비극'을 막았을 수도... 라는 말. 하지만 나는 결코 그것과는 다른 시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승희라는 젊은이와 여기 우리의 그녀 케이시 한이 안고 살았을 그 정체성에는 무언가 확연한 차이가 있었을거라는 생각을 바꿀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단 한사람만으로, 아니 극소수의 사람들만으로 다수를 다 폄훼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앞섰던 까닭이기도 했다. 누구나 안고 살아가야하는 문제점 앞에서 오직 나혼자만의 아픔이 더 클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자신에게 주는 자기만의 위안일 뿐이테니 말이다.

이민 2세들의 힘겨움을 나는 잘 모른다. 미국이란 나라가, 혹은 미국이란 나라가 만들어내는 사회적인 현상을 내가 직접 체험해보지 않았으니 이렇게나마 만나지는 그들만의 세계를 내가 깊이 이해한다고는 말할 수 없을것이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그들의 삶에는 즐거움보다는 힘겨움이 더 많은 듯 하다.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자기의 존재적 위치가 아마도 그들을 더 힘겹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이시 한이라는 여성을 통하여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일상적인 생활속에서 묻어나던 내면의 고통이었다. 그들의 부모뿐이었을까? 아니 그건 아니었을 것이다. 단순히 자식의 성공의 잣대가 자신들의 삶에 귀착점이라도 되는 양 살아냈던 것은 이민을 간 사람이나 여기 한국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나 부모라는 위치에서라면 당연시했을 문제였을 것이다. 같은 자매이면서도 한국적인 것으로부터 놓여나고 싶어하는 케이시와  한국적인 것과 타협점을 찾아내 안정감을 얻고 싶어하는 티나의 확연히 다른 삶의 방식속에 녹아있는 유교적인 관습과의 악연들.. 아니 어쩌면 그것은 한국적인 사고의 틀이기도 하겠지만 너무도 오랜세월의 아픔을 함께 해 왔던 관습이었기에 힘겨울 때마다 그안으로 숨어들 수 있었던 또하나의 방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길들여진 것은 편안함을 주기 때문이라는 모순이 아닐수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케이시가 그녀가 사랑이라고 믿었던 제이와 다시 맺어지기를 바랬다. 그녀가 그토록 힘겨워하던 부모세대 틀에서 형식적으로나마 완벽하게 탈출할 수 있기를 바랬던 것도 같다. 그것이 탈출이었든 아니든 그녀가 택한 삶의 길이 그녀와 동화되어졌으면 했다. 하지만 현실은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만 흘러가주지는 않는다는 것이 또한 정답이다. 그녀의 현실을 무시한 일탈은 그녀의 뜻대로만 흘러가주지 않을테니...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살아갈 힘을 주는가?" 라는 질문에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몸을 지배하는 미국사회가, 정신을 지배하는 한국사회가 그녀에게는 아무런 것도 베풀수 없었다는 게 현실일테니 말이다. 그녀가 진정으로 원했던 그것이 무엇이었든간에 성공을 향해 꿈이라도 꾸어야 했던 그 현실이 우선이었던 까닭이기도 하다. 성공이라는 열쇠를 움켜쥐고 눈앞에서 흔들며 따라오라고 외쳐대던 사빈느의 그 유혹조차도 그녀에게는 위안이 되지 못했다. 하루 그리고 매순간마다 선택을 해야 했던, 그리고 그 선택뒤에 선물처럼 따라오던 그녀의 좌절앞에서 중요한 것은 네 인생이야,라고 아무리 큰소리로 외쳐댄다한들 그 인생의 길이 보이는 것은 아닐테니 말이다. 

인생이 뜻하는 대로 되어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원래부터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렇게 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들을 못 해내기 때문에 그것을 이룰 수 없는 것일까? (187쪽)   누구나 알고 싶어하고 또한 케이시가 알고 싶어했던 저 문제의 해답은 어떤 것이었을까? 원래부터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다는 것은 쉽게 말해 운명이라는 것일테다. 그 운명은 스스로 바꿀수도 있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정말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자신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보여지던 케이시에게는 자신을 향한 믿음이 아주 현저하게 낮은 수치였던 까닭이기도 하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들을 그녀는 최대한 하려고 노력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노력했던 결과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했다. 확실하게 믿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기자신을 향한 칭찬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찾아왔던 수많은 좌절의 순간들이 그녀에게 자신을 되돌아보아야만 한다고 속삭이고 있었던 아니었을까?  그 속삭임은 관심이었을까, 질책이었을까 나는 묻고 싶어진다.

결국 한국남자 은우를 만나 사랑이란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케이시를 통해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같은 한국사람이라는 동질성이 아니라 한사람의 정체성이, 한사람의 일생을 좌우하게 될 하나의 사고가 그리 쉽게 만들어지고 무너져내릴 수는 없다는 거였다. 삶에 대한 상실감을 이겨내지 못한 채 모든 것을 다 잃은 은우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 싶어하는 케이시에게 남은 것은 서로를 그리워했던 마음 하나뿐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마지막 두줄을 통하여 그들에게 희망을 부여해 주고 있다. 아니 희망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게다. 케이시와 은우가 함께 엮어가야 할 사랑만큼이나 그들이 살아내야 할 앞으로의 삶 또한 쉽지는 않겠지만 케이시가 그려놓은 꽃 주위에 기다란 풀을 그려 넣었던 은우와  그 꽃잎에 색칠을 하기 시작한 케이시가 함께 그렸던 푸르른 나무처럼 그들에게도 그런 앞날이 펼쳐지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대해 본다.

이 책속에는 성공을 위해 달려가는 사람과 성공이라는 것을 이미 움켜쥔 사람들의 이야기가 칡넝쿨처럼 서로 얽혀있다. 하지만 그들 모두에게는 마음에 생겨난 빈자리를 안고 살아간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외로웠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완전할 것 같은 빈틈을 안고 살아간다. 그런 것들이 아주 촘촘하게 잘 엮여져 있어 읽는 나로 하여금 그들의 외로움을, 그들의 힘겨움을 모른 척 하면 안될 것만 같은 느낌을 갖게 해 주었다. 낯선 곳에서 서로 부딪히며 살아가야 할 부모와 자식간의 갈등이 얼만큼의 크기로 다가오는지, 인종과 문화의 차이가 한사람에게 얼만큼 깊이있는 이해를 원하는지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해 주었다. 케이시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어하는 미국사회의 실리적이고 독립적인 사고방식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아직 힘겨운 난제인지도 모르겠다. 많은 경우의 수를 예로 들어주는 갈등 구도를 이해하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이민사회라는 것을 내가 이해하기는 힘들겠지만 모든 갈등 구도의 끝에는 서로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바탕으로 한 이해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책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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