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의 여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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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 카프카와는 다른 묘한 에로티시즘의 향기



 야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를 사기 위해 처음으로 직장 근처에 있는 알라딘 중고서점 매장에 들렸다. 보통 온라인상에서 편하게 구매를 했는데, 왠지 오랜만에 서점에서 직접 오래된 책 냄새를 맡고 싶다는 기분이 든 탓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요즈음처럼 깔끔하게 잘 정돈된 서점에서 예전 헌 책방에서 느꼈던 그럼 정겨움을 느껴볼 수 없으리란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계문학전집 사이에 비치된 ‘모래의 여자’를 찾는 과정에서 그간에 봐왔던, 그렇지만 다소 오래 전에 알고 지냈던 정겨운 이름들을 함께 발견할 수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 스탕달, 마르케스, 베케트, 이문열, 밀란 쿤데라, 카프카 등등, 윤동주가 ‘별헤는 밤’에서 복잡한 심경으로 별 하나에 그리운 이름들과 함께 나열했던 어느 시인들의 이름처럼 내 가슴을 먹먹하게 했던 것까지는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그동안 내가 너무나 오랫동안 이 이름들을 잊고 살아왔다는 생각을 새삼 떠올려보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글쓰기 모임에서 활동한지 어언 6년,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이 6년 동안은 확실히 지난 십 몇 년의 내 문학에 대한 관심과 관점을 변하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이 글쓰기 모임이 등단이라는 특정한 목적과 수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까닭에? 그렇다고 하기엔, 그동안 내가 이 모임에서 등단 목적으로 글을 제출해본 것은 신춘문예에 고작 두세 번 정도이다. 나머지 숱한 등단을 위한 글쓰기 대회에도 관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나는 ‘엽서시’라는 특정한 문학공모 정보 제공 사이트를 알고 있음에도, 근 1년 동안 들어가 본 적도 없고, 이 글쓰기 모임을 참여하는 동안에도 손가락에 겨우 꼽을 정도로 방문해봤을 정도다. 그러니 당연히 다른 공모전에 글을 내본 적도, 아니 어느 공모전이 어떤 형식의 글을 원하는지조차 거의 알지를 못한다. 그래도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모임에서 원하는 등단용 작품에 대해 나도 모르게 의식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세계문학전집에서 내 시선도 한국문학전집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렇게 시나브로 젖어들었다. 그런데 지난 번 모임에서 선택한 ‘몰락하는 자’와 이번에 선택된 ‘모래의 여자’를 통해 그간에 잊혔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뭐랄까? 달콤하면서 독한 관념과 에로티시즘에 대한 탐미의식이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아니면, 강한 자의식과 그에 대한 거부반응이 일으키는 집요한 집착에 대한 동경이라고 해야 할까?



 처음, ‘모래의 여자’ 몇 장을 읽어가면서 느낀 점은 문장의 집요함이었다. 번역서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어와 우리네 문장의 서술형식이 같은 까닭인지, 문장에서의 집요함과 어떤 집착이 끈적하게 달라붙어왔다. 그럼에도 한 가지 기묘했던 것은 문장이 끈덕지게 늘어져 있지도 않았고, 간결했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는 한 가지 간과하지 못할 내용상의 이야기가 있기는 하다. 글속 주인공의 벌레에 대한 집착, 그것도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모래 속에 사는 벌레에 대한 집착, 좀길앞잡이. 그리고 그와 함께 딸려서 전해지는 모래에 대한 집착. 그런데 왜 하필 모래와 좀길앞잡이일까? 주인공은 여기서 갑자기 유체역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열한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모든 과학시간이면, 특히나 물리 시간이면 더욱 생경하여 잠을 자거나 공상의 나래로 멍을 때리던 나로선,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여기서 가공할만한 정보력으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의 무지함을 한층 빛내주는 인터넷의 검색엔진을 이용해보았다. 그런데 더욱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과 함께, 유체역학이 기체와 액체에 관련된 운동에너지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정의가 나왔다. 즉, 한 마디로, 유체역학이란 것은 기체가 액체로 변해도 원래의 성질을 유지하는 현상에 대한 연구이거나, 혹은 그와 관련된 연구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왜 주인공은 고체인 모래에 대해 유체역학을 들먹인 것일까? 물론, 글속에서 주인공은 모래가 지닌 특수성에 대해 나름의 논지를 펼치기는 한다. 먼저, 모래가 다른 흙과 암석과 달리 일정한 크기인 1/8mm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러면서 그 크기가 다른 암석 파편의 입자와 달리 바람이라는 유체에 의해 가장 멀리 이동될 수 있는 크기의 입자라는 정의를 덧붙인다. 그와 함께, 이 모래의 유동성에 의해 많은 찬란한 문명들이 매몰되어갔음을 글 중간에 살짝 언급한다. 즉, 이제까지 모래는 모든 사물들이 사라져도 바람과 함께 그 입자가 지닌 특유의 고유성으로 인해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이 세상에 존재해왔다는 측면에서 주인공은 모래를 유체역학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초반부에 이 글은 다소 난해한 모래와 좀앞길잡이에 대한 이야기로 거의 전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리고서 갑자기 주인공이 이 좀앞길잡이를 찾아들어온 사구에 정착해 있는 어느 마을에 갇히게 되면서 글은 전혀 다른 국면으로 뒤바뀌어 간다. 사실, 원래 직업이 학교 선생인 주인공은 이 사구에 살고 있는 ‘좀앞길잡이’ 중에 다소 변이종을 찾기 위해 며칠 간의 휴가를 냈을 뿐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마을의 한 집에 묵었을 뿐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그는 그 집에 감금되게 된다. 그것도 여자 혼자 살고 있는. 처음에는 주인공은 이 모든 사실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유를 알고 나서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유라는 것이 고작 모래 속에 파묻혀 지은 집인 이유로 날마다 모래를 퍼내지 않으면 집이 무너질 수 있다는 까닭이다. 즉, 여자 혼자서는 그 집에서 날마다 해야 하는 중노동과 가사를 전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거다. 아니, 앞으로 불어닥칠 바람이 세찬 날의 위험을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이유란 말인가? 그렇게 살기 힘든 구조의 집이라면 그냥 나오면 되지 않는가? 그리고 마을 사람들 모두 이 척박한 환경에서 벗어나 조금 더 나은 환경이 주어진 도심이나 마을로 가서 살면 되지 않는가? 하지만 여자와 마을 사람들은 주인공의 그 어떤 항변에도 묵묵부답일 따름이다. 때문에 주인공은 마을을 빠져나가기 위해 여러 수단을 강구해본다. 처음엔 꾀병으로 아픈 척을 해서 자신이 얼마나 노동력으로써 무가치한지를 입증해보려 한다. 하지만 그래봤자 마을 사람들은 애초에 그 모든 것을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는 건지, 남자를 그대로 방치해둘 뿐이다. 그래서 두 번째로 남자는 작정을 변경하여, 마을에 적응하고 있는 척하다 마을 사람들이 여자의 집에 생필품 물자를 공급해주는 날에 여자를 인질로 해서 자신을 그 집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 역시 마을 사람들은 귓등으로 듣지도 않고, 오히려 물 배급을 중단함으로써 결국, 주인공이 마을 사람들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게 만든다. 이 과정을 통해 남자는 결국 마을 사람들과의 어떤 교섭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절망감으로 인해, 아니 사실은 오랫동안 해묵은 여자와의 섹스를 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여자의 삶의 방식과 마을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남자 그 자신도 그 생활방식에 본격적으로 동참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자가 그 마을을 탈출할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해와 수긍이라는 측면에서일 뿐이지, 본질적으로 그 자신의 자유의 박탈에 대한 부당함이 해결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이번에는 다소 오랜 시간을 걸쳐 탈출 계획을 세운다. 마치 남자 자신이 마을에 다 적응한 것처럼 시간도 들이고, 여자와 관계도 가지면서, 마을의 구조에 대해 넌지시 여자에게 물어 물어서, 머릿속에 마을에 대한 전체적인 윤곽을 그리고서, 도주를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남자가 끊임없이 도주한 길은 어찌된 일인지 마을로 다시 회귀하는 길이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도주가 들켜, 반대 길로 남자는 열심히 달아나본다. 하지만 남자는 모래 늪에 빠지게 되고, 결국엔 다시 마을 사람들에게 구조를 요청하게 된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생활은 다시 지속된다. 매일 똑같이 바람에 실려 날려 오는 모래를 치우는 일을 하면서, 부업으로 구슬을 꿰매는 일을 하면서 언젠가 라디오를 집에 들일 날을 꿈꾸면서....... 하지만 그래도 남자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집 앞 한 귀퉁이에 모래 덫을 만들어, 까마귀가 잡힐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는 거기에 ‘희망’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왜냐하면 잡힌 까마귀에 자신이 편지를 달아, 그 까마귀가 멀리 날아가 어느 누군가에게 자신의 부당한 처지의 이야기가 전해질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까마귀의 생활권이 인간의 생활권과 밀접하기에 그 편지가 십중팔구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질 것이라는 사실쯤은 그 자신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시간이 또 흘러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었다. 그 자신이 이제 그 마을에 온지 반 년쯤 된 것 같다. 그동안 여자는 임신을 했고, 자신이 ‘희망’이라 명명한 모래 덫에는 잡히라는 까마귀는 잡히지 않고, 어이된 일인지 물이 솟아올랐다.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모래의 모관 현상 때문인 것 같다. 그때부터 남자는 자신의 ‘희망’의 지표를 까마귀에서 유수현상에 대한 연구로 바꾸게 된다. 왜냐하면 잘만하면 그 유수현상의 연구를 통해 얻은 물로 마을 사람들에게 협박을 할 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제 남자의 목표는 탈출보다는 마을 사람들을 향한 협박으로 자연스레 바뀌게 된다. 어차피 그 모래의 유수현상에 대한 연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물로 세상에 이야기해봤자 누가 자신을 알아주겠는가? 그 사실을 알아주고 들어줄 청중은 이제 마을 사람들 밖에 없다는 그 자명한 사실을 이제야 주인공은 깨닫게 되는 것이다.



 글을 처음 읽을 때는 문장의 묘한 집요함에 끌렸지만,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그러니까 주인공 남자가 여자의 집에 강금되면서부터 문득,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 떠올랐다. ‘마의 산’의 주인공의 원래 계획과 달리 어느 요양소에 방문하게 되었다가 그 자신이 폐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7년 동안 강금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폐병이 어쩌면 그 자신에게 원래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요양소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으로부터 시작되는 그 끊임없는 관념과 독설들이 왠지 모르게 이 글의 시작점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절 읽었던 책들이 대다수 관념으로 점철되어 있던 글이었기에 이 글 ‘모래의 여자’에서 등장하는 사구의 마을의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점이 많았다. 우선, 이 글은 그런 관념들보다는 사구의 마을 중에서도 특히 과부인 여자의 집에 갇히게 되는 매우 불합리하지만 특정한 현상에서 벌어지는 주인공의 개인적인 체험을 생생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오히려 카프카 식의 글쓰기와 매우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카프카의 ‘굴’에서의 강금처럼, 이 글 속의 주인공은 모래의 마을과 여자에 강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 스스로의 강금이었던 카프카의 ‘굴’과는 전혀 상이한 구조이지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강금과 풍유의 구조들이 사뭇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책을 다 읽고서, 일부러 미뤄두었던 작가 연보를 보니, 이 야베 코보라는 사람이 일본의 카프카라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야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는 토마스 만과도 그리고 카프카와도 달랐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처음부터 드러내놓지는 않지만 감춰진 에로티시즘의 향기가 났다고 말하면 좋을까? 사실, 카프카는 토마스 만의 ‘마의 산’과 달리, 한 마디로 그 이전의 서양 작가들과 달리, 근원적인 관념과 그 관념에 대한 끝없는 나열들의 형식인 글쓰기가 아닌, 근원적인 불안과 생에 대한 허무이거나 허위의식을 풍유적으로 표현하는 글쓰기를 했다. 그렇지만 역시 서양 작가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완전히 관념적인 글쓰기에서 벗어났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그 근원적인 불안이거나 허무의식조차 관념의 역작용이거나 파생일 확률이 높은 까닭이다. 하지만 이 야베 코보의 경우 역시 성진국인 일본 작가인 까닭일까? 처음부터 등장하는 좀앞길잡이서부터 모래, 그리고 모래의 여자와 마을, 모두 에로티시즘적인 요소를 다분히 갖추고 있었다. 아니, 거의 대놓고 전면에 드러내놓았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러하기에 글속에서도 그는 모래의 여자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좀앞길잡이의 유혹 행위와 비슷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아울러 왜 하필 제목이 모래의 여자란 말인가? 글속 주인공이 계속 벗어날 수 없는 모래의 마을 그 자체를 여자가 대변하고 있기에, 제목을 그렇게 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 즉, 한 마디로 말해서, 처음부터 글속 주인공은 다소 생경한 좀앞길잡이의 변종을 찾아 사구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다소 특이한 변종인 여자를 찾아 사구의 마을로 들어섰던 것 아닐까? 그러한 이유로 이 모래의 여자에 야베 코베는 자신의 성적인 판타지와 여성에 대한 이미지를 불어 넣었으리라 예상해본다. 정신적 강간이라는 새로운 병에 시달리는 현대 여성이 아닌 자연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원초적 여자의 이미지로써.......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는 혹은 내 개인은 한 가지 의문에 부딪치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성적인, 그리고 나름 완벽한 이미지의 여인을 판타지로 그려놓았다면, 왜 주인공이 거기서 벗어나려고 발악한단 말인가? 그것도 마지막쯤엔 거의 덧없는 혹은 허무와 같은 이름의 ‘희망’이라는 이름에 기대어 글속 주인공 스스로는 자기 자신이 끝끝내 마을 사람들과 상이한 자아일 것임을 끊임없이 주문을 외우듯 읊조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한 마디로 이것은 이율배반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나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두 가지 양면성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첫 번째는 이율배반의 첫 이유가 되는 모래의 여자이다. 모래의 여자는 말 그대로 모래라는 늪이다. 사실, 남자가 가진 여자의 성적 판타지이거나, 고유한 이미지는 그동안 물이거나 바람의 속성과 관련되어서 이해되어져 왔다. 그런데 저자는 특이하게도 이 글에서 여자를 모래로 표현했고, 모래가 가진 유체역학적 이미지, 그러니까 그동안 우리가 줄곧 사용해온 물과 바람의 이미지를 동시에 모래에 투영시켰다. 거기에 덧붙여, 모래의 속성이 지닌 잔인함과 공포를 끊임없이 묘사하고 있다. 즉, 우리 남성들이 투영시킨 여성의 판타지에 스스로 갇혀버린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역으로 여성이라는 희망의 덧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거나 혹은 이 주인공 남자가 이 판타지를 벗어나 어디 갈 데가 있단 말인가? 사실, 글속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남자의 어떤 탈출도 성공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 모든 길들은 모래의 여자에게로 되돌아오는 길 뿐이다. 그리고 종국에 가서 주인공은 거기에 완전히 빠져서 여자를 임신시키게 되고, 유수현상과 관련하여 덧없는 ‘희망놀이’에 빠져있을 뿐이다. 즉, 끝내 이 모래의 여자라는 희망에 사로잡혀 빠져나올 수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임신이라는 짧은 언급을 통해, 주인공 자신은 전혀 희망이라 명명하지 않았지만, 여자에 대한 희망이 긍정적인 측면으로 계속 전개되어져 감을 은근히 말하고도 있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은 주인공 혼자만의 ‘희망놀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동어반복일지는 모르겠지만, 희망의 근본적인 속성이 지닌 허상과 덧없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함과 동시에, 그럼에도 그 허상이 존재해야 인간이 존재할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어떤 측면에서 이 글은 여자에 대한 에로티시즘에 관한 글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희망에 관한 글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 이 글을 정리해보려 한다. 오랜만에 본 세계문학전집의 이 책을 통해 잠깐 관념의 세계에 빠져본 기분이다. 물론, 나는 이 글이 처음부터 관념보다는 에로티시즘에 가깝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 글을 해석하는 내 자신이 너무 관념적이기에, 결국엔 관념적으로 빠졌던 것 같다. 그래도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다. 왜냐하면 때로는 허무하지만, 그래서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만, 관념에 빠지는 것 그 자체에 살아있는 기분을 느낄 때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야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의 남자가 하는 그 덧없는 희망놀이처럼 허무한 관념놀이도 때로는 누군가에게는 삶의 충분한 이유가 되어주기도 하니까. 그렇게 잠깐 혼잣말을 중얼거려보며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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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안 미로 특별전을 다녀와서 - 너저분한 여백에 관한 단상

 

 

  사실, 이제까지 미술 전시회에 가본 적은 거의 없다. 이번을 포함해서 한 세 번쯤? 그것도 한 번은 과거 여친이랑 그냥 잘 모르는 회랑에 들려서 거의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다른 한 번은 르네 마그리트 전시회였는데, 기대가 컸는지 실망감이 오히려 더 컸다. 그래서 전시회에 대한 내 기억은 거의 전무하다. 다만, 스무 살 때 한 선배의 선물로 ‘루오’ 화집을 선물 받아, 그때부터 다소간 그림에 대한 관심이 생긴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 미술에 대한 관심이란 건 고작, 루오의 ‘거울 속에 비친 나부’를 보면서 느낀 자기연민과 유사하다. 그래서 피카소를 처음 이해할 수 있었던 것도 ‘우는 여인’이란 작품을 통해서였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입체적으로 내 개인의 감정을 투영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호안 미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사실, 거의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이가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것과 똑같은 소리일 것이다. 다만, 이전에도 그랬고 또 지금도 그럴 수밖에 없기에, 여전히 나는 내 개인적 투영을 심하게 담은 전시회 소감을 적으려 한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그래도 무언가 스스로 간과할 수 없는 단상을 얻은 까닭이다.

    

 

  이번 전시회를 나는 크게 세 가지 그림 영역으로 분류하고 싶다. 첫째는 유아성에서 비롯한 추상적 세계에 대한 표현이고, 둘째는 그림의 시적 형상화에 관한 부분이고, 마지막으로 서양화된 동양화의 관점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여기서 두 번째와 마지막 이야기는 다소 연결되어 있다. 때문에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 첫 번째 이야기를 아주 짧게 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별로 할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말이 좋아 유아성에 비롯한 추상적 세계에 대한 표현이지, 그냥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계의 세계를 화폭에 담아 놓은 느낌이었다. 그것도 제목도 없이 거의 무제로 벌려놓아서, 도무지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게다가 개중에 몇몇은 피카소와 친분이 있어서 그런지, 피카소의 ‘빨간 의자에 앉아 있는 여인의 누드’의 형상과 닮아 있는 그림이 아주 많았다. 물론, 그냥 딱 봐도 닮았다는 게 아니라, 어떤 그런 여인의 형상을 다소 과장되게 그린 선들이 호안 미로의 형상에서도 많이 보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목이 없어서 그게 대체 뭘 그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설령, 제목이 있던 몇몇 작품들은 ‘새’나 ‘여인’이란 제목을 달고 걸어놓았지만, 거기서 개인적으론 어떤 단상을 떠올릴만한 것은 없었다. 아마 이 부분은 그림에 대해 거의 문외한인 나 같은 사람의 경우 대다수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다만, 중간에 스페인의 유명한 건축가 ‘가우디를 위한 도안들’이란 작품들은 개인적으로 가우디의 건축물에 대한 인상이 남아 있어 비교해보는 재미는 있었다. 그렇지만 이 역시 내 개인의 어떤 단상을 끄집어내기엔 어려웠다. 때문에, 지금부터는 내 개인적인 단상과 연결된 두 번째 세 번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둘째로 내가 분류해놓은 ‘그림의 시적 형상화’에 대한 부분은 호안 미로의 개인적 견해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호안 미로는 그림과 시의 경계를 특별하게 두지 않고, 시가 글로써 어떤 형상화된 작업을 추구한다면, 그림은 어떤 선과 형태로써 형상화된 작업을 추구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전시회 중간에 보면 어떤 문자들 옆에 형상들이 나란히 붙어있는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처음엔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불어였다. 사실, 스페인 화가라 불어를 썼으리라 전혀 예상하지를 못했는데, 뜻밖에 불어여서 그나마 해석하면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물론, 내 불어 실력이란 게 애초에도 없는데다 아주 녹슬어, 앱으로 깔아놓은 사전을 겨우겨우 찾아가며 해석해야 하는 실력이지만, 그래도 그 덕에 조금은 옆에 형상들과 문자들의 관계에 대해 유추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이 역시 쉬운 작업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호안 미로의 경우 문자 자체도 그림으로 이해한 탓에 너무나 흘려 그려서 알아보기 힘든 문자도 많은데다, 또 바로 그 이유로 문자의 의미 자체보다는 문자의 형상에 초점을 맞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어떤 단상의 단초는 얻을 수가 있었다. 그림이라는 형상의 시적 가능성에 대한 단상을. 하지만 만약 내가 호안 미로의 동양적 시도의 그림들을 보지 못했다면, 이 또한 단초란 의미 그대로 감겨있거나 헝클어진 실의 첫머리일 뿐이었을 것이다. 불이 붙여지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도 없고, 쓸데도 없는, 그래서 애초에 그랬듯이 혼돈의 형태로밖에 영영 남을 수 없는.

    

 

  호안 미로는 동양에서 서예를 하는 작업을 보고서 큰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중간에서부터 후반 마지막까지 그렇게 동서양을 아우르는 작품들이 대거 등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동양의 서예와 많이 다른 것은 그 기법의 너저분함에 있다. 여기서 대다수가 느끼겠지만 이 말은 완전히 모순된다. 왜냐하면 동양의 서예란 무릇 여백을 담아내는 작업인 까닭이다. 즉, 완전히 깨끗하고 숭고하게 비어진 공간을 통해 담겨진 문자를 보여주는 작업이 동양의 서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웬 너저분함이란 말인가? 사실, 그림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이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이를 설명하기 위해 나는 다소 동양적 서예의 역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앞에서 말한대로 동양의 서예는 여백이라는 완전무결한 빈 공간을 창조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호안 미로가 서양인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를 못했는지, 아니면 애초에 관념이 달랐는지, 호안 미로의 그림의 여백은 물감이 줄줄 흘러있고, 심지어는 여기저기 손바닥 자국까지 나타나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앞에서 말한 그대로 ‘너저분함’ 그 자체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러한 ‘너저분함’이 동양의 서예를 보고서 탄생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가장 세밀하고 정밀하게 무언가를 표현한다는 일본의 서풍을 보고서. 사실, 이 부분에 대해 내가 알 수 있는 길도 없고, 설명할 수 있는 바도 전혀 없다. 때문에, 질문을 내 개인적 투영으로 바꾸어보고자 한다. 어떻게 ‘너저분함’이 여백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왜 이제까지 ‘너저분함’을 여백으로 이해하지 못한 걸까?

    

 

  우선, 위의 질문을 던지기 위해 내 개인적인 여백에 대한 이해에 대해 잠깐 밝히려 한다. 사실, 여백이란 단어를 떠올리기 전 내가 먼저 거쳐 간 단어는 ‘길 옆’이란 단어였다. 그리고 그 시작은 스무 살 때 혼자만의 여행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무작정 혼자 걸으면서 무언가 인생의 커다란 질문에 대해 생각하고, 깨달아 보려 했다. 그런데 그냥 걷는데, 어떻게 무언가가 막 떠오르고 심지어 해결되기까지 하겠는가? 다만, 무식하게 부산까지 걸으니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만은 알게 되었다. 정작 보름간 길을 걸었지만 그때까지 내가 본 것은 ‘길’이 아니라 ‘길 옆’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사실은 ‘길’을 존재케 하는 것은 ‘길’이 아닌 ‘길 옆’이란 사색을 해볼 수가 있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여백에 대한 집착이 생겨났다. 온전하게 옆자리에 비어 있음으로 문자와 그림들을 더 온전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여백이란 미, 아마 이 부분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동양화를 자연스레 많이 접한 이유가 작용했을 것이다. 여하튼 그래서 여백에 집착하기 시작했는데, 이게 말이 좋아 여백이지, 정말 뜬구름 잡는 소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너무 고결하고 온전해서 다가서고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표현하면 좋을까? 때문에, 내게 있어 여백은 곧 허무덩어리로 전락해버렸고, 더 이상 다가설 수 없는 자리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호안 미로의 여백의 너저분한 표현을 보고서, 왜 내가 여백을 그토록 고결하게만 생각했는지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의 한계에 대해 성찰하게 된 것이다. 사실, 여백의 집착에 대한 단초가 되었던 내 개인적 여행에서 본 ‘길 옆’은 그렇게 고결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사람내 푸근하게 풍기는 시골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얼굴이었고, 혹은 길가를 진동하는 거름내였다. 그런데 어찌돼먹은 내 관념이란 놈은 그런 것은 싹 잊어버리고, 모든 것을 고상하고 이상적으로만 포장하려고 하였는지, 지금에 와선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사실, 너저분한 것은 너저분한 것이고, 그렇다 해서 그것이 더럽거나 추한 것이 아닌 것을. 왜 모든 것을 극단으로만 추구하려 들었던 것일까? 물론, 호안 미로의 경우 나와 같은 사유의 경로를 통해 그러한 그림들을 그렸던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림의 시적 형상화라는 궁극적인 지점에서 바라봤을 때, 호안 미로에게 있어 굳이 여백이 동양의 서예나 그림처럼 완전무결하게 비어 있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즉, 아마도 그는 즉물적으로 여백이란 공간을 해석함으로써, 여백의 너저분함과 모순들을 자연스럽게 표현했으리라 본다. 그리고 시란 결국 그러한 즉물적인 해석이거나 표현이라고 본다면, 그가 추구한 선과 모형의 시적 형상화는 분명 시라 말해도 좋은 것은 아닌지 잠깐 생각해보며, 동시에 나도 그러한 시를 꿈꿔보며, 전시회 다녀온 소감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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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우산의 꿈

 

 

아직도 설운 추위 다 가시지 않은

3月의 초 봄날

꽃샘추위보다 더 꽃 센 바람에

샛노란 우산 하나 두둥실

사무실 창가 맞은편 나무 위에

자리를 틀었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나뭇가지 위 우산 내려앉지 않고

샛노란 빛깔이 잿빛 되어 녹빛 되어

어느 5月의 푸르른 날 아무 빛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토록 바라던 푸른 나무가 되는 꿈

이루어 두둥실 하늘로 올라간 걸까요?

아니면 그대로 나뭇가지가 되어

나무와 함께 대지에 뿌리내린 걸까요?

그러나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냥 어느 무심한 바람결에 떨어져

쓰레기통에 처박혀버렸을

구깃하고 꾀죄죄한 노란 우산의 꿈을.

하지만 시는 모든 이룰 수 없는

꿈의 노랫말이며

쓰레기통속에서도 푸르게 피어나야할

한 줄기 나뭇가지에 대한

덧없는 희망의 미련이거나 음률이기에

아직도 저는 눈감고

당신의 노란 꿈을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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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강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0
오정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오정희의 ‘불의 강’ - 그토록 생생한 적의와 마주하여

 

 

  오정희의 단편집을 읽어가는 동안 내내 ‘별사’와 ‘어둠의 집’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때문에 오히려 오정희의 다른 글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유독 그와는 별개로 ‘불의 강’이란 글이 지금도 내 머릿속을 휘젓고 있다. 그렇다고 그 글이 ‘별사’와 ‘어둠의 집’과 비견될 정도로 뛰어났느냐하면, 그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개인적으론 ‘동경’을 읽으면서 5년 전 내가 쓴 품평이 얼마나 설익고, 또 얼마나 ‘동경’을 설읽었는지를 자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옛우물’의 글들 경우엔 개인적으로 완연한 노년 작가의 풍모를 엿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불의 강’일까? 지금부터 내가 할 해석이 특별하기 때문에? 아니다.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부터 내가 해석하려는 방식은 개인적으로 다소 금기시하는 상징적 해석의 방식인 까닭이다. 그럼에도 내가 굳이 이러한 방식을 취해 이 작품에 대해 해석을 시도하려는 까닭은 이 글 가운데 단 하나의 단어 ‘생생한 적의’란 그 단어에 나도 모르게 몰입되어버렸기 때문이다.

 

  11평짜리 아파트 6층 꼭대기에서 살고 있는 부부는 몇 해 전 아이가 죽고서, 적적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몇 년이란 시간만으로 갑자기 둘은 모든 것에 시들해지면서, 늙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아이가 죽고서 한 동안 남편은 밤늦도록 일하면서, 집에서 혼자 적적할 부인을 걱정해 자주 전화를 걸어주곤 하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곳은 그들이 결혼 초에 가끔 저녁 산책을 나가곤 했던, 하얗게 뻗은 강둑이 강줄기를 따라 U자로 휘어 도는 구비에 솟아 있는 오래된 발전소 건물이다. 잿빛 우중충한 3층 구조인 그 건물은 비교적 작은 화력 발전소였으나, 설립한지 얼마 되지 않아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폐쇄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 원래 목적과 달리 해산물의 하치장으로 쓰이다, 제빙업자에 의해 얼음 창고로도 쓰였다가, 제빙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자 다시 비어있게 되었고, 지금은 때때로 갱 영화의 촬영 현장으로 쓰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남편은 언젠가부터 늘 그곳에 시선을 두기 시작했고, 동시에 밤마다 외출을 나갔다. 그리고 담배도 피지 않는 그가 성냥갑을 늘 몸에 지니고서, 밤늦게 불에 탄 재 냄새를 흠씬 풍기고서 돌아왔다. 하지만 부인은 남편의 그런 잦은 외출을 막을 자신이 없다. 물론, 너무나 심약한 남편이기에, 만약 그녀가 몇 마디만 한다면 그는 당장 밤 외출을 중단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그 시간 동안 남편과 어떻게 시간을 메울지 자신이 없다. 때문에 그녀는 차라리 그녀 몰래 시를 쓰던 남편을 떠올린다. 그렇게 자신의 터뜨리지 못한 발화를 삼키던 그의 시라는 발화를 그리워한다. 동시에 그 때문에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숨겨지지 않는 모든 발화의 전조에 대해 불안해한다. 대체 그는 밤마다 어디서 자신의 타오르지 못한 불꽃을 터뜨리는 것일까? 남편이 나간 동안 그녀는 현관 문틈 사이에 잠깐 외출을 나갔다 오겠다는 메모를 남기고서, 밖으로 나선다. 그리고 그 모든 시발점인 발전소로 걸음을 옮긴다. 그녀는 기억하고 있다. 발전소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그녀의 알 수 없던 생생한 적의를. 남편은 처음에 발전소에 대해 소개하면서, 어릴 적 전쟁 직후 발전소가 그와 같은 아이들의 눈에 얼마나 대단해보였는지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동시에 그 거대함 때문에 발전소에 대한 이야기가 아이들에게 온갖 소문들로 한없이 부풀려져, 자신에게 어떻게 견고한 적의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를 설명했다. 그 때문에 그는 결국 단 한 번도 발전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고백과 함께. 그런 발전소가 이제 곧 헐리게 된다. 어차피 달리 용도도 없는 건물이 오십년 가까이 버려져 있었기에 당연한 일일 것이다. 발전소의 군데군데 판자가 떨어진 창에서 불빛이 새어나와 발전소 내부를 비추고 있다. 내부의 나선형으로 비틀려 올라간 가파른 층계를 뛰어오르는 남자들의 모습이 먼눈에도 확실히 잡혀오고 모여선 사람들의 윤곽이 불빛에 드러난다. 영화 촬영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남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온다. 역시 남편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오늘도 그녀는 혼자서 선잠을 자다가 첫닭이 울기 전 들어온 남편을 껴안고서야 자리에 온전히 누울 수 있게 될 것이다. 스르르 긴장이 풀린 그녀는 잠시잠깐 잠에 빠져 꿈을 꾼다. 꿈속에서 그녀는 사막 한복판에 꽃을 들고 있는 그를 본다. 그의 손에선 진한 자줏빛 꽃이 뚝뚝 떨어져 내린다. 사막은 붉은색 셀로판지를 통해 보듯 온통 붉은빛이다. 그 사막을 그녀는 그와 함께 건넌다. 그렇게 먼 길을 떠나는 그와 그녀를 위해 어느 술집 주인이 술 한 병을 건네준다. 하지만 그 사막을 다 건넌 후 마른 목을 축이고자 병을 땄을 때 병속에 든 술은 뜨거운 물이 되어 수증기로 피어오른다. 그때 그가 말한다. 마른 동남풍의 바람이 알맞게 분다고. 동시에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온다. 그 소리에 그녀는 꿈에서 깬다. 그리고 불에 탄 재 냄새를 풍기며 현관 앞에 서 있는 남편을 본다. 남편은 발전소에서 불구경을 하다 겨우 빠져나왔다고 한다. 그녀는 그런 그를 자신의 가슴 깊숙한 품으로 안으며 그를 잠재우면서, 꽃보다 더 진한 어둠 속에서 메마른 목소리로 울고 있는 한 마리 삵을 보고 있는 듯한 쓸쓸함에 짐짓 소리 내어 우는 시늉을 한다.

 

  처음에 내가 이 소설을 다 읽었을 때 떠올랐던 단 한 가지는 앞에서 말한 그토록 ‘생생한 적의’였다. 그리고 동시에 그 적의의 대상인 발전소에 대해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왜 하필 발전소였을까? 그것도 더 이상 아무런 생산도 하지 못하는 발전소, 그리고 처음부터 유독 눈에 거슬렸던 굴뚝이란 단어... 사실, 여기에 내 나름 내용을 요약한 줄거리에는 굴뚝에 관한 이야기는 빠져있다. 그렇지만 소설 속에서 여자는 처음 발전소에 대해 이야기할 때, 먼 강둑이 강줄기를 따라 U자로 휘어 도는 구비에 발전소가 자리 잡고 있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그 굴뚝이 마치 자신의 6층 아파트 창 아래 바짝 다가와 창과 굴뚝 꼭대기가 직선으로 그으면 몇 미터 거리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생각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즉, 어릴 적 너무나 거대하게 보여서 적의의 상징으로 남편에게 발전소가 자리 잡았던 것처럼, 부인인 여자에게도 역시 굴뚝으로 대변되는 발전소는 창을 가릴 만큼의 생생하고 거대한 적의로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게다가 남편과 달리 굴뚝이라는 강조점에서 이상하게도 나는 남자의 성기를 떠올렸다. 아마 모양의 유사성 때문일 것이다. 사실, 앞에서 이야기한 내가 개인적으로 금기시하는 상징적 해석이 바로 이 부분이다. 하지만 발전소와 남자의 성기가 계속 무언가를 생산해내야 한다는 점에서의 유사성은 이 소설에서 무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가장 결정적으로 이 소설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하나의 주된 무거운 분위기는 이 부부 사이에 아이가 없다는 사실로부터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소설은 은근히 더 이상 무언가를 생산할 수 없는 발전소에 빗대어 더 이상 아이를 생산할 수 없는 남편의 무력함을 피력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남편에게서 발화의 욕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남편은 더 이상 아이를 생산할 수 없는 그 이유로 더욱 발화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그 발화는 더 이상 무언가를 생산할 수 없는 발전소의 마지막 폭발처럼 자기 파괴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여기서 발화는 억압으로부터 발생한 폭력 그 자체이다. 때문에 남편과 부인 모두 생생한 적의로 대면할 수밖에 없고, 결국엔 발화는 생생한 적의에 대한 폭발이 아닌, 생생한 적의의 폭발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그런데 그럼에도 어떻게 그녀와 남편은 그 생생한 적의의 한 가운데서 화해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 조금도 뜨겁지 않은 화염 속에 누워서 서로 품으며 짐짓 우는 시늉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사실, 이 소설의 적의의 폭발과 화해에 대해 나는 쉬 설명할 길을 찾지 못했다. 그 때문에 어쩌면 오래도록 뇌리 속에서 이 글이 잊히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화자가 그녀가 아닌 내 자신이 되어, 조금은 그 방향을 달리 밝혀보고 싶다. 사실, 내게 있어서도 아무것도 생산해내지 못하는 내 생식기는 말 그대로 나의 치부이며, 그 까닭으로 생생한 적의의 대상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생산해오지 못한 이 생식기의 발화의 욕망은 어쩔 수 없는 그 존재이유이기도 하다. 마치 화력 발전소가 불을 뿜고, 그렇게 발화를 하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듯이. 내게 있어서 나의 성기가 늘 발화를 소망하는 것은 당연한 본능일 것이다. 그런데 왜 생생한 적의를 느끼게 되는 것일까? 분명, 아무것도 생산해내지 못한다는 열패감이 자의식에 쌓여, 발화 그 자체가 자위란 이름으로 자기 파괴의 형태이거나 혹은 사랑 없는 섹스란 이름 아래 폭력으로 변해버린 까닭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미 이렇게 변해버린 생생한 적의의 대상인 발화의 욕구를 어떻게 폭파시켜 없애버릴 수 있단 말인가? 다시 말해서, 발화의 욕망을 생생한 적의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어떻게 포장할 수 있냐는 말이다. 말 그대로 발화의 욕망은 발화의 욕망 그 자체로 본능일 뿐이고, 생생한 적의는 그 욕망 너머에 존재하는 생명의 창조로 가지 못하는 열패감에서 기인한 것뿐인데, 어떻게 발화의 욕망이 생생한 적의가 아니라고 명명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오정희의 소설 속의 여자도 남편의 방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품을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 물론, 완전한 이상 속에서 발화의 표현인 방화가 폭력이 아닌, 사랑으로 명명될 수는 있을 것이다. 쉽게 예를 들어서, 연인 간에 아이가 없더라도 끊임없이 애정표현으로 하는 섹스를 그 누구도 폭력이라 부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연인이 아닌 다른 여자들과 발화의 욕망을 풀 수밖에 없던 나 같은 남자들 혹은 여자들의 방화에 대한 엄연한 현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너무도 당연하게 그러한 방화가 이 사회에서 불륜이거나, 성매매란 이름의 범죄로 불리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여기서 아주 작은 한 걸음만 더 나가게 되면 강간이거나 성폭력이 되어, 극도로 위험한 강력범죄가 될 것이다. 이 때문에 사회에서 불륜과 성매매에 대해 생생한 적의를 느끼고, 그러한 방화에 범죄란 이름을 붙이는 것은 너무나 지극히 자명한 일일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 나는 이 부분을 부인할 어떤 이론도 논리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다만, 그 생생한 적의의 대상인 방화가 인간의 본능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그리고 내 개인의 지극히 부끄러운 치부라는 점을 떠올려볼 때, 이와 화해할 방법들을, 아니 방화의 작은 숨구멍들을 트여줄 방법들이 있어야한다고 믿고 있다. 그것이 비록 짐짓 우는 시늉밖에 되지 않을지라도, 그렇게 조금도 뜨겁지 않은 화염 속에서 서로를 품고 있는 인간의 기이하기 짝이 없는 동물적 행위밖에 되지 않을지라도, 거기서도 누군가는 메마른 목소리로 울고 있는 한 마리 삵을 볼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인간은 저열한 자기모습을 타인을 통해 바라보며 연민하며 잠시잠깐 외로움을 달래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들이니까. 그것이 바로 내 자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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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뜰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4
오정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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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희의 ‘어둠의 집’ - 공포의 근원 ‘적요’에 대하여



 오정희의 ‘별사’를 다 읽은 후 나는 마치 내 자신이 혼령이 된 것처럼 여겨져 선뜩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그리고서 바로 다음 페이지에 나오는 ‘어둠의 집’을 읽어 내려갔다. 사실, 평소 같았으면 어떤 커다란 파장을 준 글을 읽고서, 또 다시 다른 글에 손을 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둠의 집’이란 제목은 내게 있어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무엇이었다. 똑같은 제목의 자작시가 한동안 내 자아를 구축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무언가 ‘어둠의 집’이 ‘별사’와 연결될 것 같은 예감 또한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선 여기에 ‘어둠의 집’과는 별개로 내 개인의 자작시를 올린 후, 내 ‘어둠의 집’이 어떻게 오정희의 ‘어둠의 집’에 압사 당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 대해 써내려보고 싶다.



어둠의 집


단단하고 거대한 성을 쌓을 거예요

벽돌은 금강석으로 하고

천장은 특수 알루미늄으로 덮어

빛 하나 새지 않도록 밀봉을 할 거예요

그래도 걱정은 마세요

컥컥 숨을 토해낼 수는 있을 거예요

내부 구조는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미로로 만들 거예요

입구는 있어도 출구는 없는

동굴로 만들 거예요

그래도 걱정은 마세요

컥컥 숨을 토해낼 수는 있을 거예요

바닥은 음습한 동굴에서 흐르는 지하수에

사막의 모래를 섞을 거예요

거기에 화사한 금빛가루를 덧입혀

영영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으로 만들 거예요

그래도 걱정은 마세요

컥컥 숨을 토해낼 수는 있을 거예요

장식은 언어란 기호와 예수란 상징을

주로 사용할 거예요

그 위에 당신의 혼돈된 꿈의 이미지들을

비밀로 붙여 놓을 거예요

그래도 걱정은 마세요

컥컥 숨을 토해낼 수는 있을 거예요

마지막으로 오직 당신을 위해서

촛불 하나만은 보이지 않게 숨겨 놓을 거예요

만약 당신이 그 촛불로 불지를 수 있다면

기꺼이 뜨거운 불구덩이가 되어 드리겠어요

그래도 걱정은 마세요

컥컥 숨을 토해낼 수는 있을 거예요



 누구나 느끼겠지만, 이 시에서 어둠은 화려하다. 왜냐하면 어둠 그 자체에 대한 형상화보다는 감각적인 표현들로 어둠에 대한 반대적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금강석, 특수 알루미늄, 금빛가루, 예수, 부처, 촛불 등의 어둠과 상충되는 많은 단어들이 이 시에서 어둠을 생성하거나, 어둠에 감싸인 집안에 장식으로써 사용되고 있다. 때문에 이 집에서의 어둠은 무언가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심지어 어둠을 조성하는데 사용된 단어들인 미로, 동굴, 늪, 기호, 이미지, 불구덩이조차 어둠 그 자체에 대한 형상화와는 전혀 무관하다. 어떤 의미로 이 단어들은 유희에 대한 집착을 드러낸 단어들이다. 그러니 이곳에선 컥컥 숨을 토해낼 수 있는 숨구멍이 여기저기에 존재한다. 아마 이 주된 이유는 내게 있어 절망이란 또 다른 이름인 어둠이 결코 어둠 그 자체여서는 안 된다는 강박이 나도 모르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오정희의 어둠은 나와는 전혀 상반되게 어둠 그 자체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그리고 무언지모를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다. 사실 처음에 나는 그 공포감의 연유를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그저 ‘별사’에서 진행된 남편의 부재와 이제 다 커버린 아들의 부재로부터 연유한 어떤 외로움이 아닐까하는 생각정도에 머물러 있었을 따름이다. 그런데 동시에 이상하게도 그것과는 별개로 방수가 안 된 천장에서 똑, 똑, 똑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에 대한 기억만이 뇌리에 남았다. 왜냐하면 그 어떤 외로움으로 기인한 불면의 밤에도 똑, 똑, 똑 떨어지는 물소리에 대한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것은 내게 있어서 일종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향수에 가깝다고 말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어릴 적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을 대야로 받으며 재밌게 바라보았던 기억 혹은 역시 오래 전 다 잠기질 않는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대한 기억이 전부니까. 하지만 단 한 가지, 외로움 가운데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나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윤락업소에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집에 들어갈 시간이 애매하여, 그곳 수면실에서 잠을 청하던 때였다. 아무리 자려고 하여도 그 방에 바로 딸려있는 화장실에서 어딘지 누수가 되어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에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물방울 소리들은 내게 온갖 상념들을 일으켰다. 물론, 윤락업소라는 다소간의 열패감이 드는 장소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떠나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불면의 밤 유독 크게 들리는 시계의 초침소리와는 전혀 다른 상념을 불러일으켰다. 시계초침소리가 신경을 건들면서 정신에 무언가 작용을 일으키는 소리라면, 하나하나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가슴을 건들면서 감정에 끊임없이 작용하여 상념을 불러일으키는 소리에 가까웠다. 그러하기에 그 밤 나는 결국 잠들지 못하고 뜬눈으로 지새우고, 새벽에 쓸쓸히 집으로 발걸음을 옮겨야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어떤 공포와 결부된 감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껏 계속 이야기해온 외로움 혹은 그리움으로 포장된 허무함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차라리 공포라면 시계초침소리가 더 공포에 더 어울리는 소리일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오정희의 ‘어둠의 집’을 처음에 읽었을 때, 어떤 공포의 감정을 예감하고, 그 공포가 내게 어떤 전율을 가져다주리라 막연하게 믿었던 것일까? 처음에도 지금도 계속 외로움에 대해 말하고 있으면서.


 이번 오정희의 ‘별사’와 ‘어둠의 집’을 품평하기 위해서 나는 다시 두 작품을 먼저 읽지 않았다. 그냥 오정희의 다른 작품들을 먼저 쭉 찾아보았다. ‘바람의 넋’, ‘불꽃놀이’, ‘옛우물’까지 그녀의 단편집을 모조리 읽은 후, 다시 ‘별사’와 ‘어둠의 집’을 찾아 읽었다. 품평을 위해서 그렇게 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만큼 그녀의 글 자체에 홀려버린 까닭이 컸다. 하지만 내가 기대했던 만큼의 오정희가 그곳에 내내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대부분 지루하기 짝이 없거나 진부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중국인 거리’, ‘동경’, ‘옛우물’, ‘불의 강’ 등의 몇 작품을 빼고는 그다지 흥미롭게 읽지 못했다. 그런데 그 작품들 가운데 하나 ‘적요’가 내가 ‘어둠의 집’에서 느낀 공포에 대한 근원의 의문을 꿰뚫고 관통하였다.


 사채놀이로 돈을 벌고 있는 노인은 가정부를 하나 고용하고 있다. 그런데 보름이 지나도록 그녀에게 월급을 주질 않는다. 월급을 받는 순간 더 이상 가정부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까닭이다. 누구도 냄새나는 노인의 시중을 들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행여 노인 시체라도 치워할 날이 오면 어쩌겠는가? 그리고 이 노인네 얼마나 괴팍하기 그지없는지, 입안에 낀 이물질을 거리낌 없이 닦아주려는 가정부의 손가락을 아무 이유없이 피나도록 깨물기까지 하는데, 어느 누가 그 기분을 어떻게 알고 다 받아줄 수 있겠는가? 그 때문이었을까? 가정부는 모레쯤 온다고 말하고 노인네를 혼자 내버려두고서 떠나버린다. 하지만 노인은 그것은 모레가 아니라 앞으로 쭉 계속될 가정부의 외출이라 생각한다. 늘 그래왔다. 어릴 적 어여쁘기 그지없던 딸도 더 이상 찾아오지 않고, 그 누구도 더 이상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다. 혼자선 제대로 설 기운도 없는 그의 집안엔 그저 무겁고 어두운 적막감만 감도는 가운데, 이젠 수도꼭지에서 뚝, 뚝, 뚝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이 공간을 점유하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그 무거운 적요가 지겨워 그는 가정부의 손가락을 깨무는 것으로 응석을 부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또 감내해야할 혼자만의 시간을 그는 어떻게 보내야할까? 노인은 사탕 한 줌을 손에 쥐고서 놀이터로 향한다. 거기서 따돌림을 받아서 구석에서 혼자 놀고 있는 한 아이를 발견하다. 그는 사탕을 주면서 그 아이를 자신의 집으로 유인하다. 그리고 TV에서 나오는 만화를 보여주면서 아이를 조금 더 오래 머물도록 한다. 하지만 점점 밖은 어둑해지고, 이제 아이는 집으로 가야할 시각이다. 노인은 아이에게 복숭아를 주면서 좀 더 있으라 한다. 그리고 아이에게 가정부가 나가면서부터 온종일 계속 똑, 똑, 똑 물방울이 떨어지던 수도꼭지를 잠가달라고 부탁한다. 아이가 수도꼭지를 잠그러 간 사이 노인은 오렌지 분말을 물에 타서 주스를 만든다. 그리고 아이에게 주스를 건넨다. 그 주스에는 수면제 한 봉지가 섞여있다. 아이는 주스를 마신 후 몽롱한 정신 가운데 자신의 개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지난 장마 때 솔밭에서 새끼를 낳은 개였다. 아이는 그 개에게 음식을 늘 훔쳐다주었다. 그런데 어른들이 낮에 자신의 개에게 복숭아를 주고선, 끌고 가버렸다. 그리고서 나뭇가지에 목을 매달은 후, 끓는 물에 넣어버렸다. 자신에게도 복숭아 세 개를 주고서 그만 가라고 했다. 아이는 그것을 먹은 이야기를 차마 다 하지 못한 채 손에 든 복숭아를 떨어뜨려버리고 그만 잠에 빠져든다. 아이가 깨문 복숭아의 선홍빛 자국은 시들어, 수분이 말라가고 그곳에 끈질기게 파리떼가 달라붙고 있다.


 이 소설을 읽자마자 나는 ‘어둠의 집’에서 느낀 공포의 근원을 불현듯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것은 외로움이 아닌 적요였다. 물론, 어떤 의미로 두 단어는 같은 뜻을 포함하고 있는 이름만 다른 단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 외로움이란 어휘는 이제껏 공포와 연관된 의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쓸쓸함 혹은 허무함과 비슷한 감정을 담은 어감에 가까웠다. 하지만 적요라고 했을 때는 전혀 그 의미가 달라진다. 왜냐하면 이제껏 나는 그런 감정을 제대로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엔 적요란 단어 자체가 생경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물론, 의미 자체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무언가 버석거리는 느낌에 사전을 찾아보기까지 하였다. 말 그대로 적적하고, 고요하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얼마나 적적하고, 고요하기에 아이에게 수면제를 먹이기까지 할 수 있는가이다. 사실, ‘어둠의 집’에서 적요는 구체적이지 않은 구석이 많다. 그저 물방울 소리에 연관되어 수돗물을 틀어놓고서 바닥을 흠뻑 적실 때까지 넋을 놓았다거나, 잔디를 깎다 갑자기 튀어 오른 물에 잔디들을 뿌리 채 뽑았다는 등의 장면을 묘사해놓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계속 어둠속에서 느끼던 어떤 시선의 정체에 대해서 예견하는 표현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예견이거나 예감일 뿐, 적요 그 자체에 대해 드러내놓고 정면으로 대응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글 거의 대부분은 분위기 자체를 통해서 어떤 공포에 대한 예감을 조성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적요’에서는 정면으로 그 공포와 마주하고 있다. ‘어둠의 집’에서 예견된 공포가 거의 실질적으로 표현된 아이의 죽음을 통해 바깥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아니, 노인이 만든 어둠의 집에서 영영 감추어질 죽음으로, 그러하기에 내면으로 삼켜질 폭발로 끝을 맺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여기서 나는 두 가지 사실에 크게 전율했다. 하나는 적요가 가져다주는 공포 그 자체였다. 한 번도 조우해본 적 없기 때문에 더욱 공포스럽게 여겨지는 적요란 또 다른 공포의 이름에 대해 나는 전율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오정희의 뛰어난 실험정신이었다. 사실, 나는 오정희가 어떤 개인적인 체험을 했는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가 어떠한 체험을 했던지 간에, 이러한 극대화된 적요를 체험하기는 힘들었을 거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는 글을 통해서 ‘어둠의 집’에서 시작된 적요란 공포의 예감을, ‘적요’란 소설을 통해 직접적으로 마주하고, 구체적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 풀어내고 있다. 아마 이를 통해 그녀는 그녀가 느낄 수 있는 적요의 끝을 그녀 자신의 내면으로 삼키고, 소화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돌고 돌아 방만하게 떠벌렸던 글을 정리해보아야겠다. 사실, 처음에 나는 이 글을 통해 내 속에 감춰진 공포에 대해 까발리고, 앞으로 그 공포와 어떻게 조우해야 할지에 대해 쓰고 싶었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아직은 경험해보지 못한 그 감정들을 다루기엔 너무 커서,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사실, 공포란 말 자체가 너무나 추상적이기에 그것을 평으로 써낸다는 발상 자체가 어불성설일 것이다.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하나의 이야기와 실험으로써 체화시켜야 한다는 단 하나의 깨달음만을 여기에 우선 남겨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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