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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용실에서의 환영 

 

 

머리를 자른다.

길게 치렁거리는 머리카락에 숨어있는

무력한 박테리아균을 분절시키고

뾰족하게 눈을 찔러 들어오는

발작적인 히스테리균을 가다듬는다.

 

머리를 감는다.

관자놀이 근처를 박박 긁어

남은 좀벌레들을 말살시키고

눈자위 위를 꾹꾹 눌러

마지막 어른거리는 환영을 까뒤집는다.

 

샴푸 거품이 소독약처럼 하얗게 뻐끔거린다.

 

머리를 씻는다.

지난날들에 맺혀있던 모든 나쁜 피들을

모근을 쥐어뜯지 않고 펑펑 쏟아내 훌훌 털어낸다.

 

머리를 빗는다.

새색시 마냥 한 올 한 올 단정하게 가꿔

어데 좋은 곳으로 떠나지라고 한 자락 한 자락 고이 눕혀낸다.

 

거울 속에 잘린 머리가 두 눈을 치켜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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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전시회

 

 

 

 

1.피에타

 

 

고도를 기다리는 이유로 바람에 옷가지가 휘날리도록 해진 신발로

밤새도록 걸어 다니는 당신, 아, 그러나 당신은 모르십니다. 당신의

너른 옷가지가 바람에 휘날릴 적마다 떠올려보는 단추 구멍 사이

들어갈 바늘귀에 걸린 가는 실의 힘겨운 허물벗기와 당신의 구멍

난 신발밑창 숨겨진 단단한 굳은살에 갇혀버린 아직 여물지 못한

당신의 속살에 기대었던 내 한 숨을, 그래도 고도만을 기다리겠노라

고 마법의 주문을 걸듯 읊조리는 당신, 아, 그러나 당신은 아직도 모

르십니다. 고도를 기다리기 전 당신의 해진 옷자락 사이 드러난 하이

얀 살들이 모진 날씨에 모든 촉각을 잃어버려 당신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당신은 느낄 수도 없음을, 아, 당신, 당신은 단추를 잠그고

신발 끈을 동여매는 법부터 배웠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고도를 기다리겠노라고 파리한 목마름으로 떨리는 당신의 메

마른 목소리

 

 

 

 

 

 

2. 샘

 

 

화장실 변기 속에서

은밀한 샘을 발견해냈어

그 속에 물결친

모나리자의 백만 불짜리 미소엔

눈썹 대신 콧수염이 붙어있었어

그녀의 엉덩이는 뜨거웠어

상상만으로 곧추선 성기들은

정액을 뿜어대고 있었어

화장실 변기 속에서 흩어져가는

정액을 뿜어대고 있었어

모든 삶은 그렇게 멋진 시였어

변기 통 속에 쳐 박혀 영영

헤어 나올 수 없는 멋진 시였어

물을 내리면 모든 게 끝나는

간결하고 멋진 시였어

너.무. 잔.혹.하.다.고?

그렇다면 변기통을 거꾸로 매달아 봐

다시는 처박혀 허우적대지 않도록

변기통을 거꾸로 매달아 봐

버려버린 모든 것들이 쏟아져 내리도록

변기통을 거꾸로 매달아 봐

 


 

 

 

 

3. 침묵의 눈

 

 

단단하고 거대한 성을 쌓을 거예요

벽돌은 금강석으로 하고

천장은 특수 알루미늄으로 덮어

빛 하나 새지 않도록 밀봉을 할 거예요

그래도 걱정은 마세요

컥컥 숨을 토해낼 수는 있을 거예요

내부 구조는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미로로 만들 거예요

입구는 있어도 출구는 없는

동굴로 만들 거예요

그래도 걱정은 마세요

컥컥 숨을 토해낼 수는 있을 거예요

바닥은 음습한 동굴에서 흐르는 지하수에

사막의 모래를 섞을 거예요

거기에 화사한 금빛 가루를 덧입혀

영영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으로 만들 거예요

그래도 걱정은 마세요

컥컥 숨을 토해낼 수는 있을 거예요

장식은 언어란 기호와 예수란 상징을

주로 사용할 거예요

그 위에 당신의 혼돈된 꿈의 이미지들을

비밀로 붙여 놓을 거예요

그래도 걱정은 마세요

컥컥 숨을 토해낼 수는 있을 거예요

마지막으로 오직 당신을 위해서

촛불 하나만은 보이지 않게 숨겨 놓을 거예요

만약 당신이 그 촛불로 불지를 수 있다면

기꺼이 뜨거운 불구덩이가 되어 드리겠어요

그래도 걱정은 마세요

컥컥 숨을 토해낼 수는 있을 거예요

 


 

 

 

 

4. 푸른 서커스

 

 

태초에 그러니까 박테리아들이 우글거리기 전

오직 거친 바다와 숨 쉴 수 없는 대기만이

존재하던 그 때 그 어느 날처럼

깊고 푸른 심해의 어느 깊은 곳에서

죄여오는 숨통을 움켜쥐며

바닥으로 고꾸라지며 미꾸라지며

뻐끔뻐끔 담배 연기 같은 거품을 뿜어대며

어둠 속에 시야를 빼앗겨 더욱 빛나는 발광체처럼

너는 춤을 추고 있었어

보이지 않는 관객들 앞에서 더욱 빛나는 곡예사처럼

말과 말 사이를 오가며

말 밑으로 내려갔다 순식간에 말 위로 올라와

아찔한 그네와 그네 사이를 오가며

그네들을 모두 놓으며

우글거리는 박테리아들처럼

해면으로 겨우 기어올라선 어느 양서류처럼

하늘 위로 날려 푸닥거리는 어느 파충류처럼

어느 깊고 푸른 심해 속에서 춤을 추고 있었어

시작만 존재하고 끝은 없는 푸른 서커스를

다시 시작하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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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팅과 수작 사이에서 '사랑의 진실'에 관해

 

 

밤새 채팅으로 수작을 오간 여자와

새벽 6시쯤 통화를 하였습니다.

1주일 내내 감기에 걸려 코 먹은 소리를

내는 거라며 여간 곰살궂게 굴며

여자는 내게 ‘사랑의 진실’에 관해 말했습니다.

너무 우스워 연방 헛웃음을 쏟아내자

뭐가 그리 우습냐며 타박하며

여자는 내게 ‘사랑의 진실’을 믿어라 말했습니다.

길길이 쏟아지는 웃음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나는 여자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하냐고 내가 원하는 건

그쪽이랑 만나서 맘에 들면 자고 싶은 것

단지 그뿐이라고 하자

여자는 내게 어떻게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하냐고 그쪽은 내게

정말 미.안.해.야. 한다고 말하고선

전화를 뚝 끊어버렸습니다.

온종일 아니 며칠 동안

그 말에 가슴이 버성기어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문득, 당신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하룻밤에 달콤한 정사를 꿈꾸던

여자가 아닌, 당신에게

정말 미.안.해.야. 한다는 '사랑의 진실'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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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버스 정류소에서

 


길은 오돌토돌 외진 샛길

인적 드물어 고요하기만한 이곳

그대 아시기는 하는 건지

그대 언제 오실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떠나온 사람

기다림은 나의 몫입니다.

 

돌밭을 밟으며 자분자분

종일 굽은 걸음으로

하루해 땅거미가 질 때

그대 오신다 하여도

그대 어디로 가실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떠나온 사람

잘못된 길도 나의 몫입니다.

  

해가 지고 깊은 밤이 오고

눈 비 내려 오돌오돌 떨며

기다려 보아도

끝끝내 그대 아니 오시고

내 생에 그대 없다 하여도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떠나온 사람

주저앉아 견디는 것도 나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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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여는 풍경

 


누군가 야트막한 담장 너머

여닫이창문을 활짝 열고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다가서는 이의 걸음에서도

환한 미소가 스며 번진다.

언제였더라? 어머니였던가?

몸집만한 가방을 메고

집에 돌아올 때를 기다리던

어머니의 창문이 그러했을까?

아니다!

우리 집은 다세대 공동주택에

미닫이창문이었다!

아마 알프스 산자락에 걸쳐있는

나라를 배경으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는 그런 영화에서나

보았을 법한 풍경일 게다.

그래도 좋다! 여닫이든 미닫이든

누군가 활짝 창문을 열고서

내가 다가서기를 기다리는 이 있다면

나 아쉬운 마음에 종종걸음으로

그대에게 뛰어라도 갈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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