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길의 추억

 

 

언제나 몰래 담배를 태우러 빠져나왔던

신학교 뒷길, 나는 그 길을 사랑했다.

모두 집으로 향해가는 오후의 해 질 무렵

아무도 오지 않을 그 길에서 나는 취하고

비틀거리며 잠시 멈추어 서성거리다

미로 같은 아파트 사이사이 길을 따라

하염없이 또 걸으며

누구도 쉬 알지 못할 어느 음울한 공원과 벤치와

갓길들을 종종 헤아려보곤 하였다.

분명 그 언젠가 내게도 뒷길이 아닌

하나의 길이 있었을 터이다.

오직 그 길만을 알았고 얼마나 오랫동안

그 길을 따라 걸어 왔는지

길 밖에 길이 무엇인지 길옆이란 길이

존재할 수 있는 길인지 나는 묻지 않았다.

그저 길은 하나의 길일 따름이었다.

그 어느 날이었을까? 길옆에 오만가지 잔상들이

바람결에 흔들리고 흩어지고 있었음을

또 그 가지 사이사이로 그 얼마나 많은 뒷길들이

갓길들을 뻗어내어 다시 길로 돌아서고 있었음을

그 뒷길을, 나는 그 길을 사랑했다.

그 길을 지나쳐가는 모든 낯선 이들과

그 모든 꽃들과 나무들과 사물들을

그리고 어둠과 빛을 생명을 죽음을

그렇게 굽은 등 뒤를 내게 보여주며

유유히 사라져간

어느 노파의 그 긴 그림자 끝자락을

그 뒷길을, 나는 그 길을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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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노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보다 더 조심스럽게

하루하루 멀어지지 않도록

너무 가깝지도 않게

놓여져

누구 하나 손 끝 하나 닿지 않도록

닿으면 다시 처음부터

하나씩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보다 더 조심스럽게

하나씩

어떤 의미가 되지 못한다 하여도

고이

어떤 슬픔이 되지 못한다 하여도

고이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보다 더 조심스럽게

무너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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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곱

 

 

매일 아침 눈곱 낀 얼굴을 봅니다

생애 눈곱이 아니 낀 적은 없습니다.

젊은 적 울어내지 못한 밤마다

응어리진 눈물들이 화석화되어

아침이면 가볍게 털어냈습니다.

질게 눌어붙지도 무르지도 않은

단단한 슬픔의 결정체일 거라고

언제나 그렇게 믿어왔습니다.

지금도 눈물을 흘리는 건 아닙니다.

밤마다 울어낼 슬픔들도 울분들도

시간과 함께 묽게 희석되어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뿐입니다

대신 아침마다 무른 눈곱을 봅니다.

시간이 더 해가면 더 물러져

세면대에 눈물을 홍수처럼 쏟아내며

서럽게 울어낼 수 있을까요?

마음속에서 지워버린 흐린 기억들을

그대들의 뒷모습을 그 긴 그림자를

영롱하게 흔들리는 물기 속에서

촉촉이 마주할 수 있을까요?

매일 아침 눈곱 낀 얼굴을 봅니다.

눈곱만큼도 중요치 않던 눈곱이 고여

눈가에 이슬이 맺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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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된 시

 

 

꼭 한 번은 멈춰내는 것이

길을 가는 것이라고 배웠다.

다 뱉을 수 없는 것들이

말들이라면 가슴속에

꼭 품어두고서 고이

삭혀두는 것이라고

그렇게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뎌내는 것들이

너의 울어내지 못한 밤들을

지켜주는 것이라고

 

그러나 나는

사생아처럼 불현듯 낳아진

너를 지우지 못하고

감당할 수 없는 낯선 길 위에

쓰레기처럼 내던져버린다.

그리고

단 한 밤도 지켜내지 못한

너의 숨결을 떼어낸 힘으로

다시는

멈출 수 없는 길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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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배반 2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가져가세요.

그러나 나는 내어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라도 가져가 주세요.

그러나 나는 만지면 아스러지고

이내 시들어 버린 답니다.

 

제발 나를 꺾어 주세요.

당신의 손끝에 물들어

다시는 피어나지 못할

꽃이 되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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