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피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뜨거운 피 구질구질한 글쓰기에 관해

 

 

 요새 은행에서 남는 시각에 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곤 했다. 왜 이렇게 글들이 구질구질할까? 똑같은 말을 또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또 말만 바꿔 미화하고, 비하하고. 그렇게 장수를 늘려가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그렇다 해서, 내가 근래 읽은 책들이 결코 단편이었던 건 아니다. 대부분 철학, 심리학, 인류학책이었다. , 육백에서 칠백 가까운 그 서적들을 읽고 나면,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해 소설을 읽었다. 그런데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또 꼭 무식하게 삼사백 페이지씩 되는 책들을 읽었다. 그 책들이 의미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그동안 사회주의 사회에 대해 기반 지식이 전혀 없던 내 개인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암흑의 핵심은 읽는 내내 나름 긴장감을 느끼기는 했다. 하지만 그 외 무엇이 더 있었는지에 대해 말하라고 하면, 글쎄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다른 철학, 심리학, 인류학책이 내 지적 호기심 이외에 뭘 더해주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물론, 최근 잘난 척한다고, 오랜 시간 보류해 두었던 보르헤스 전집을 읽으면서, 구질구질한 글쓰기에 대한 의문이 더 구체화 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보르헤스 또한 괜히 어려운 말들과, 숱한 주석으로 패러디를 해, 얼마나 많은 독자를 당황케 했던가? 결국, 글이란 게 구질구질함을 벗어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뜨거운 피는 이런 구질구질함에 정점에 있는 책이다. 글 내용도 그렇고, 글의 서사와 페이지 수 모두 구질구질하다. 그렇지만 단 한 순간도 책을 쉬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긴장감을 준다. 왜일까?

 

 이 책의 주인공 희수는 건달이다. 구암 앞바다의 만리장 호텔의 지배인으로, 한마디로 말하자면, 구암 앞바다의 이인자다. 이십 년 동안 희수는 손영감 밑에서 일을 해왔다. 손영감의 스타일은 정말 구질구질함의 극치이다. 건달임에도 결코 손에 피를 묻히려고 하지 않으며, 돈이 되는 위험한 불법 밀수를 벌이려 하지 않는다. 고작 하는 사업이란 게, 조상에게 물려받은 만리장 호텔과 그 앞바다의 관리, 그리고 중국산 고춧가루를 국내산으로 위장하는 정도로, 소액의 일거리 정도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매사에 쩨쩨하다. 멋지게 아랫사람을 챙기는 일도 없고, 보호해주는 일도 거의 없다. 그가 오직 관심 있는 건 구암 앞바다의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데도 그 손자 도다리는 안하무인으로 설쳐대면서, 여러 사람의 삥을 뜯고, 벤츠를 몰고 다니면서 띵가띵가 하는 꼬락서니란, 정말 못 볼 지경이다. 그에 비해 주인공 희수는 온갖 구암 앞바다의 자질구레한 사업들을 중재하고, 처리할 뿐 아니라, 가장 더러운 일까지 도맡아 처리해야만 한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삼억이라는 사채로 가진 빚이 있다. , 그가 사랑하는 여자인 인숙 또한 술집을 차리면서 사채로 빚을 가지고 있고, 그녀의 아들 아미도 술집 여자를 내오기 위해 빚을 졌다. 이십 년 동안 손영감에게 몸 바쳐 충성했지만, 빚 말고는 남은 게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이런 때 그의 전임자였던, 만리장 호텔의 지배인이었던 양동이 성인 오락실을 하자며 새로운 사업 제안을 해온다. , 아무리 털어도 더 나올 것 없는, 손영감의 그늘막에서 벗어나, 홀로서기를 제안한 것이다. 너무나 달콤한 제안이었다. 이 제안을 통해 그의 새 가족의 사채로 쓴 빚이 모두 탕감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달콤한 것들엔 항상 가시가 있고, 독이 있는 법이다. 막상 새로 사업을 시작하려니, ‘희수는 그동안 몰랐던 손영감의 거대한 영향력과 버팀목의 역할을 깨닫게 된다. 돈이 되는 사업에 꿀을 빨기 위해 너도나도 달려들었고, 언제라도 살얼음판을 걷는 모양새가 되었다. 새로운 성인 오락실 사업에 파친코 사업을 하던 이들과 다툼이 일어났고, 양동의 보드카 밀매 사업은 기존의 전농동 일대 포주들과 마찰을 일으켰다. 여기에 불에 기름을 붓는 격으로 양동은 손영감과 달리, 앞뒤 안 재고, 무조건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었다. 그 틈새에서 그의 양아들 아미가 전농동 포주 일당들에게 습격을 당해 칼에 찔렸다. 전쟁의 서막이 불붙은 것이었다. 양동은 바로,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구암 앞바다의 건달들을 모아 반격을 가했다. 그러다 전국구 깡패인 달호파의 조카를 죽이게 되었다. 이제 전쟁은 걷잡을 수 없는 서막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예견된 것처럼 전국구 건달인 달호파와 그 본가 계열인 남가주파까지 이 싸움에 끼어든다는 게, ‘희수는 영 탐탁지 않았다. 문제의 핵심은 보다 더 큰 권력 간의 다툼에 있었다. 새로운 항구의 개발로 밀매 사업 루트가 막힌 남가주파가 구암 앞바다에 눈독을 들이면서 생긴 일이었다. 손영감은 이미 이 일에 대해 예견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 말 하지 않고, ‘희수를 내보내고, 양동의 무리한 사업 확장을 수수방관한 것이다. 아마 그 특유의 성향상, 끝까지 전쟁을 피하기 위한 체념이었으리라 추측해본다. 하지만 더 이상 전쟁을 피할 순 없게 되었다. 한 번 불법 밀매 사업이 들어오면, 구암 앞바다의 그 구질구질한 서민들의 삶을 되돌이킬 수 없게 된다. 손영감은 결심하고, ‘희수는 다시 그의 칼이 되어 전쟁의 전면에 뛰어든다. 하지만 건달 세계에 의리란 있을 수 없다. 거짓과 배신이 난무하는 가운데, 그는 양아들 아미를 잃고, 사랑하던 인숙마저 떠나보내게 된다. 사실, 그 자신도 죽은 것과 진배없는 상황이었는데, ‘희수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손영감이 자신의 만리장 호텔을 바로 희수의 등기 앞으로 올려놓아 살 수 있게 되었다. 이십 년 동안 죽 쒀 개 준 줄만 알았건만, 손영감은 희수자신도 모르게, ‘희수를 양아들로 입적해놓았다. 이제 모든 전쟁은 끝났다. ‘희수의 만리장 호텔 인수와 함께 손영감은 교통사고로 위장된 공격을 받아 병원 신세고, ‘희수는 사랑하던 마지막 정붙이었던 새 가족을 모두 잃었다. 그렇게 남가주파의 승리로 자축하는 파티가 부산 앞바다 멍텅구리배 안에서 벌어졌다. 여기서 모든 셈이 끝나면, 남가주파는 자유롭게 구암 앞바다에서 밀매 사업을 시작할 것이고, ‘희수는 손영감을 대신하여 구암 앞바다의 주인이 될 것이다. 하지만 셈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희수는 그동안 죽기보다 더 싫어하고 미워했던 달호파와 손을 잡고, 그 자리에서 다섯 발의 총성을 울리며, 남가주파의 중요 인물들을 몰살한다. 승리의 주인이 남가주파에서 달호파로 바뀌는 것뿐이지만, 진정한 배후를 제거했다는데, 의의를 둔 걸까? 병원에서 돌아온 손영감은 달호파와 잘 공생할 것을 당부하며, 그의 머저리 같은 손자 도다리를 희수에게 부탁한다. 그리고 며칠 후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이 모든 사건의 배신 속에 도다리가 있었다는 걸 손영감은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손영감이 죽은 후, ‘희수도다리를 조용히 처리하고, 새로운 만리장 호텔 주인이 되면서, 이 글은 끝을 맺는다.

 

 이 글의 장점은 첫째도, 재미이고, 둘째도, 재미이다. 글을 읽는 몰입감이 너무 좋았다. 더불어 건달의 세계를 통해 구질구질한 바닥의 삶들, 예를 들어, 바닷가 앞 건어물 가게, 노래방 가게, 횟집 등의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교훈이나 감동에 대해선 사실 잘 모르겠다. 그저 잡힌 지 얼마 안 된 횟감처럼 통통 튀어 오르는 글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그런 삶을 잘 표현했다고 해야 할지, 이런 점에선 배울 점이 많았다. 결국, 글쓰기에 첫째가 만약에 재미와 몰입도라면 이 글은 단연 최고급의 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취향 따라 다르겠지만, 여하튼 그런 측면에서는 괜찮다. 하지만 이런 재미와 몰입감이 과연 얼마나 오랫동안 여운으로 남을지, 그 점은 사실 잘 모르겠다. 아쉬운 점은 바로 그 하나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