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니카의 이중생활 SE (2DISC) - 일반 킵케이스
이렌느 야곱 외,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 AltoDVD (알토미디어)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 우리가 존재하기 위해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도플갱어(Doppleganger=Double Goer), 분신, 또는 생령. 살아있는 사람의 또 다른 닮은꼴로서, 때에 따라 에고가 되기도 하고 도덕적 카운터파트로 표상되기도 한다. 정확히 일치하는 외모를 가지고 있으나 당사자 아니면 알아 볼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만나는 자는 곧 죽는다! 독일의 민담분석에서 처음 사용된 개념이지만, 이와 유사한 모티브는 세계 어디서나 발견되고 있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언뜻 제목만 들었을 때는, 그리고 청순하기 그지없는 이렌느 야곱의 알몸이 슬며시 보이는 영화 스틸을 보아도, 또 영화의 소재가 도플갱어에 착안했다는 점만 들어보아도, 분명 나는 이 영화가 아주 야한 영화이거나, 아니면 인간 심리의 한 요소를 파고드는 스릴러물일 거라고 쉽게 단정지었다. 그런데 이 영화의 감독이 키에슬로프스키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을 때, 순간 나는 '배신'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을 통해 이런 기대에 대한 배신을 철저히 맛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는 10분도 채 안 되어, 그 배신의 전모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전혀 무시되어버린 인과율, 도저히 내러티브를 잡을 수 없는 몽롱한 대사들과 배우들의 돌출적인 행동들, 표정들... 그런데도 가슴은 알 수 없는 슬픔 비슷한 감격들로 벅차올라, 영화 내내 울려 퍼졌던 단조의 애잔한 선율이 각인되어 버리는 기이한 현상... 그러하기에 맨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나는 머리와 가슴이 극심하게 이중적으로 분리되어 버리는 현상에 도저히 그 무엇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어쩌면, 단지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란 영화에서 얻은 여운의 연장선상 정도로만 이해하려고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요 근래, 우연히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모든 영화 음악을 관장했던 쯔비그유 프라이즈너의 음악을 찾아 듣다가, 다시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을 보게 됨으로써, 나는 그 이전의 내 알 수 없는 감정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이 정리될 필요성과 함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때처럼 내 마음에 오래 남겨지기를 소망하게 되었다.

 

 

  마치, 어릴 적 사라졌지만 가장 소중했던 기억들의 한 부분인양 빛바랜 영상들... 영화는 처음 그런 영상 속에서 폴란드에서 태어난 한 귀여운 소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마치 당연한 귀결과도 같이, 어떤 전조와 예감들로 가득 찬 몽롱한 장면들과 대사들이 스쳐지나간다.

 

 "기다렸던 별이 왔다. 저 아래 뿌연 것, 이제 곧 크리스마스 축제가 시작될 거란다. 보이니? 보여줘? 저기 안개가 아닌 희미한 별빛들.."

 

 "첫 잎이다. 봄이 왔구나. 이제 나무는 잎사귀로 가득 찰 거란다. 솜털 같이 연한 잎맥들.."

 

 

  성장한 베로니카에겐 이제 사라져버린 어머니의 목소리를 통해 영화는 그 서두를 이렇게 꺼내고 있다. 그런 다음, 다 자란 베로니카의 갑작스런 정사신과 함께 베로니카의 사랑과 희망들, 뭐 그런 것들에 대해 보여주기 시작한다.

 

 

  베로니카... 베로니카는 성악에 재능이 있지만, 홀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가난한 처지이기 때문에 그 재능을 피우지 못하고 있는 조금은 불쌍한 처녀이다. 그러나 매우 착한 심성의 소유자로 아버지를 끔찍이도 사랑하고 있고, 또 자신을 끔찍이 생각해 주는 안텍이라는 한 남자를 사랑하고 있기에 행복한, 이런 의미에선 다소 평범한 처녀이기도 하다. 그런데 조금은 먼 지방에 혼자 살고 있는 숙모의 건강이 안 좋아진 이유로 베로니카는 이 두 사람을 남겨두고서 떠나야만 될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우연히도 이제까지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았던 그녀에게 있어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기회로 연결된다. 왜냐하면 베로니카는 친구가 일하고 있는 한 오페라 악단에 우연히 찾아갔다가, 어느 선생의 눈에 들게 되어, 테스트를 받은 후, 예외적으로 발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베로니카에게는 한 가지 지병이 있었다. 무엇이냐 하면 심장이 약하다는 사실이었는데, 호흡이 중요한 오페라의 소프라노에게 있어서 그것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꿈을 위해 베로니카는 그 사실을 숨기고서, 오페라 공연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이런 베로니카의 죽음이 예견이라도 된 듯, 우연히 관광을 와, 시위 현장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베로니카의 도플갱어, 베로니크와의 대면을 담아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베로니카는 자신의 영혼의 쌍생아 베로니크를 단 번에 알아보고, 자신의 죽음에 대해 예견하게 되지만, 베로니크는 베로니카를 보지 못하고, 사진만 찍음으로써 그 죽음의 운명을 피해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베로니카가 자신이 사랑하던 아버지와 안텍 곁을 떠나면서 예정되어졌던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영화 속에서 베로니카는 자신의 방에서 어떤 꿈이라도 꾼 듯, 갑작스레 놀란 모습으로 일어나서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자신과 늘 함께 하고 있는 존재에 대한 예감을 고백하고, 그러하기에 이 세상에선 자신이 외롭지 않다는 이야기를 유언과도 같이 남기고선, 여행을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베로니카는 이미 아버지와 안텍의 곁을 떠나던 그 순간, 자신의 운명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오히려, 자신에게 있어 오페라라는 것이 너무나도 위험함을 알고 있었지만, 과감하게 그 무대 위로 올라서기를 결심하게 된 것이었다. 결국 모든 것은 예정되어져 있었고, 영화 속에선 그 모든 예정의 클라이맥스로써 베로니카가 주연 소프라노로 노래하게 될 음악 콘서트무대를 설정하고 있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정중한 무대 위에선 지휘자의 지휘봉이 내려가고, 모든 악사들은 장중하면서도 슬픈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메조소프라노의 비정한 독주가 울려 퍼지고, 곧이어 너무나도 아름다운 처녀 베로니카의 천상의 소리가 꿈을 꾸듯 그에 화답하기 시작한다. 서서히 메조소프라노라는 무대 뒤로 멀어져 간다. 그리고선 이젠 베로니카만이 무대의 중앙에 남아, 천상을 꿰뚫고 올라서려는 듯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러나 희미해지는 목소리는 힘을 잃어가면서, 베로니카의 표정은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주는 계속되어지고, 지휘자는 더욱 거세게 베로니카에게 노래하도록 지휘봉을 휘두른다. 다 죽어 가는 한 마리 새에게 어떤 숨겨진 힘이 있었을까? 마지막 나래를 펴는 노래는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울려 퍼지지만, 결국 베로니카는 견디지 못하고서 그대로 쓰러져 버린다. 그렇게 모든 것은 예정된 대로 다 이루어진다.

 

 

  영화가 시작한 지 30분도 안되어, 주인공이 죽어버린다면, 이제 영화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베로니카가 부활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제 본격적인 고스트 장르로 반전되는 것일까? 하지만 영화는 잔인하게도, 그대로 관속에 묻어지는 베로니카의 모습을 담아내면서, 다시는 베로니카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젠 갑작스레 프랑스로 넘어가, 그의 영혼의 쌍생아, 똑같은 외형에, 똑같은 습관들 그리고 똑같은 꿈을 가지고 있던 베로니크에게로 시선을 돌려버린다.

 

 

  베로니크... 처음, 베로니카를 잡을 때 그의 남자 친구와의 정사신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갑자기 영화는 베로니크의 정사 신을 잡아내고 있다. 그리고 이제 막 절정에 달아오른 모습을 비쳐준 후, 그 뒤에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슬픔에 견디기 힘들어하는 베로니크의 모습을 담아낸다. 같이 함께 있던 남자 친구는 영문도 모르고, 베로니크의 슬픔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는 방법조차 없기에 떠나버리고, 베로니크는 홀로 남겨져, 자신의 까닭 모를 슬픔의 원인들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다 불현듯 다시 장면이 바뀌어, 베로니크는 아마 자신의 성악 지도 선생이라고 생각되는 한 노인에게 찾아가, 모든 것을 포기하겠노라고, 고백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제 전혀 새로운 베로니크의 사랑과 꿈에 대해 천천히 그 이야기를 시작한다.

 

 

  베로니크 역시 홀아버지를 끔찍이 사랑하며, 성악에 재능이 있는, 착하기 그지없는, 다만 베로니카와 달리 폴란드가 아닌 프랑스에 사는 평범한 처녀이다. 하지만 어떤 남자와의 정사 도중 갑작스레 느낀 커다란 상실감과 부재감은 베로니크 심경에 변화를 주어, 꿈꾸던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들어버리고, 이젠 조용히 조그만 학교에서 음악선생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 운명으로 바꾸어 버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베로니크는 무언가 정체 모를 존재에 대한 예감들을 통해 알렉산드로라는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베로니크는 알렉산드로를 전혀 모르고 있다. 단지, 그는 자신의 학교에서 우연히 인형극 공연을 한 사람일 뿐이다. 그렇지만 단 한번뿐이었던 우연한 그의 인형극은 베로니크 자신에게 무언가 알 수 없는 예감을 가지게 하였고, 그것은 인형극의 주인공이었던 알렉산드로에 대한 불확실한 사랑의 감정으로까지 번지게 된 것이었다.

 

 

  다시 공연이 시작되었다. 무대는 온통 까맣고, 파리해 보이는 한 무용수 인형과 함께, 인형을 움직이고 있는 손만이 보이고 있다. 그리고 어떤 대사도 없이 무용수 인형은 자신을 움직이는 손에 의해 춤을 추기 시작한다. 마치 날고 싶은 듯, 아름답고, 처연하게... 그런데 그만 무용수는 다리가 부러져 버렸는지, 더 이상 춤을 출 수 없게 되어버리고, 급기야 슬픔에 빠져 죽어버리게까지 된다. 인형극을 보던 모든 관객들은 슬픔에 빠져 버리고, 인형극은 마치 끝이라도 난 듯, 춤과 함께 어우러졌던 음악도 꺼져 버린다. 그런데 무용수 인형이 나왔던 조그만 상자 속에서 한 남자 인형이 나오더니, 죽은 무용수 인형에게 고이 잠들라고 담요를 덮어주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그 담요 속에 완전히 가려져, 이제 영원히 잠든 줄만 알았던 무용수 인형이 날개를 달고, 나비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선 하늘 위를 훨훨 날며, 다시 춤을 추면서, 인형극은 끝을 맺는다.

 

 

  인형극 내내 인형을 조정하던 알렉산드로를 바라보았던 베로니크는 그때부터 알렉산드로와 수수께끼 같은 사랑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이 역시, 인형극과 비슷하여 조정하는 쪽은 알렉산드로가 되고, 베로니크는 마치 무용수 인형처럼 조정하는 알렉산드로를 따라 춤을 추게 되는 것이다.

 

 

  한 밤 중에 울려 퍼지는 갑작스런 전화, 그리고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먼저 끊어 버리는 남자의 거친 숨결... 갑작스레 배달되기 시작한 발신지가 적혀 있지 않은 소포들, 구두끈, 담배가 들어있지 않은 버지니아 담배 케이스, 어디인지 알 수도 없는 이상한 곳에 소리들이 녹음된 테이프... 알 수 없는 존재에게로부터 전해지는 이 수수께끼를 통해 베로니크는 조금씩 자신에게 상실되었던 존재감들을 되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우편물의 대상자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예를 들면, 구두끈은 알렉산드로가 쓴 소설책과 연관이 되어 있다든지, 이상한 곳에 소리들이 녹음된 테이프는 지금 알렉산드로가 있는 장소를 가리킨다던지... 그리고 교묘하게도 동시에 그것은 폴란드에서 존재했던 자신의 영혼의 쌍생아 베로니카의 흔적들과 연관되어 있기까지 하다. 그러하기에 그러한 조그만 물건들에도 베로니크는 알 수 없는 영혼의 떨림을 느끼게 되어, 더욱 알렉산드로에게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 수수께끼를 하나하나 풀어냄으로써 베로니크는 운명과도 같은 알렉산드로와 대면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영화는 전혀 다른 반전을 염두에 두고 있다. 바로 무엇이냐 하면, 알렉산드로의 존재가 베로니크의 예상과 달리, 자신의 영혼의 안내인과 같은 신비스러운 존재가 아닌 그저 평범한 한 남자, 그것도 매우 속물인지도 모를, 그저 그런 남자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제껏 알렉산드로가 베로니크에게 그러한 소포물을 보내고, 한밤에 갑작스런 전화를 걸고서 한 마디도 안한 행위들을 한 것은 자신의 소설 속에 일이 실제로 가능할까에 대한 실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즉, 한마디로 말해서, 알렉산드로는 베로니크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설을 위한 실험대상으로써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 사실을 안 베로니크는 충격을 먹고, 알렉산드로와 있던 자리를 그대로 박차고 나온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에게서 도망을 친다. 그러나 알렉산드로는 그런 베로니크에게 갑작스레 사랑을 느꼈는지, 베로니크를 쫓아간다. 그리고 결국, 알렉산드로는 베로니크를 만나 사랑을 고백하고, 둘은 같이 동침하게까지 된다. 그리고서 이제 둘은 서로에 대해 알고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는데, 거기서 우연히 알렉산드로는 베로니크가 폴란드에 관광을 하러 갔을 때 찍은 사진들을 보다가, 베로니카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베로니크는 이제까지의 자신의 상실감의 원인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바로, 자신의 영혼의 쌍생아 베로니카에 존재에 대해... 그리고 영화는 이상하게도 이 때문에 처절하게 울음을 터뜨리는 베로니크를 달래는 알렉산드로와의 갑작스런 정사신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베로니카의 죽음의 순간, 크나큰 상실감을 맞이하여 정사를 중단하였던 베로니크의 지난 정사를 만회하기라도 하고 싶은 듯. 여하튼 그렇게 해서 베로니크와 알렉산드로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고, 베로니카라는 존재에 대해 알게 된다. 그리고 다시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베로니크는 알렉산드로의 무용수 인형이 하나가 아닌 둘임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알렉산드로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인형극이 격렬하기 때문에 여분으로 하나 더 만든 것이라고 하지만, 베로니크는 거기서도 무언가 알 수 없는 슬픔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영화는 그러한 슬픔을 느끼는 베로니크가 알렉산드로의 손에 이끌려 한 무용수 인형을 춤추게 하는 모습과 그 밑에 누워서 버려진 다른 무용수 인형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줌으로써 베로니크와 베로니카에 존재에 대해 어슴푸레 짐작하게 한 후, 알렉산드로가 쓰고 있는 소설의 내용을 베로니크의 읽어 주는 장면을 통해 베로니크와 베로니카의 관계에 대해 무언가 설명 해준다.

 

 

  "1966년 11월 23일, 이 둘은 각기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다. 둘 다 검은색 고수머리에 고동색 눈을 가졌다. 두 살 때, 한 아이가 난로에 손을 데었고, 며칠 후 다른 한 아이가 손을 댈 뻔했다."

 

 

  영화의 마지막은 알렉산드로의 소설의 이 대사를 통해서 확실히 베로니카의 존재에 대해 알게된 베로니크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집 앞에 아직 봄을 맞지 못하고 죽어 있는 듯한 나무 밑동에 가만히 손을 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베로니카의 죽음의 순간 불렀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나는 이 영화의 내용이 이렇다는 둥 저렇다는 둥 이야기를 많이들은 편이었다. 영혼의 쌍생아 개념들, 그리고 키에슬로프스키가 이러한 개념을 통해 블루, 레드, 화이트 때처럼 유럽통합에 대한 풍자를 하였다는 둥, 진정한 자아 찾기에 관한 영화라는 둥, 기타 둥둥.. 하지만 오히려 이런 선입관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내 머릿속을 어지럽혀, 감성적이고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영화의 이미지들에 대해서 의미에 집착하게 만들어 버림으로써,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머리와 가슴을 분리시켜 놓는 기이한 현상만 일으키게 했다. 가령 예를 들면 구두끈에서 연결되는 베로니카와 베로니크의 연결고리에 대해 집착한다던가, 인형극의 의미에 대해 과대해석 한다던가... 하지만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게 됨으로써, 의미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눈을 감아, 가만히 울려 퍼지는 영화 속에 아름다운 선율들을 들었을 때, 비로소 나는 이 영화가 가 닿고자 하는 지점을 발견해 낼 수 있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우리를 대신해 사라져 간 것들... 우리 몰래 우리를 지탱해 준 소리 없는 침묵의 존재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소설 '분신'에서 골랴드낀이라는 인물이 자신의 분신에게 가정과 직장 그리고 나머지 모든 삶을 빼앗기면서 파멸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보이지 않는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어떤 공포들을 느끼고 있는 지,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비단, 그의 소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무의식 가운데 자신의 또 다른 이중 존재라고 생각되어지는 영혼들에 대해 깊은 공포를 느껴왔다. 그러하기에 정신분석학에서 도플갱어라는 용어가 지니는 의미가 죽음을 의미하고, 망령 혹은 원혼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하등 이상할 이유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가깝게, 우리들의 공포 영화만 생각해 보아도 우리는 우리의 공포의 대상이 얼마나 우리를 닮아 있는가를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던져보는 것은 왜 그 형체들이 그토록 우리 자신을 닮아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히치콕이나 다른 어떤 이들은 새와 개 등의 형상을 통해 우리 공포의 원형을 그려내기도 하긴 하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새와 개 자체도 매우 의인화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는 늘 우리를 닮은 것들에 대해 깊은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것이다. 그것은 대체 왜일까?

 

 

  어떤 의미에서 살아있다는 것은 죽어있는 것들 위에 서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모두가 알다시피 생명이란 건 죽음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반드시 생명엔 죽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하기에 만약 생명에게 죽음이 없다면 그건 이미 생명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원이라 감히 말 할 수도 없는,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이름 붙여보지 못한 미지일 뿐일 것이다. 즉, 그러하기에 우리는 늘 우리라는 존재감 밑에 깔려진 죽음이란 그림자를 떨쳐 낼 수가 없다. 한 번 생각해 보자. 왜 우리는 누군가의 혼령과 원혼을 보았다 하고, 그를 보고서 공포를 느끼는가? 그리고 왜 우리는 까닭도 없이 그 망령들이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가? 혹 우리는 거기서 앞으로 다가올 우리 자신의 죽음의 그림자 아니면, 자신의 생명을 위해 던져진 죽음의 의미를 대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하기에 그들이 자신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생명과 그 모든 것을 되찾고자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대체 우리를 위해 죽어간 것들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우리를 위협할 수 있단 말인가?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위의 물음들을 떠안고 있다. 그런데 키에슬로프스키는 도스토예프스키와 달리 그러한 우리의 공포의 대상인 분신을 통해 파멸이 아닌 생명의 길로, 그리고 소통의 길로 가닿고자 몸부림친다. 아련한 영상의 이미지들, 고인 웅덩이를 밟으며 뛰어가는 베로니카의 모습, 한 사회가 몰락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마르크스 동상이 철거되어 운반되어지는 모습, 아직 가득 잎사귀를 이루지 못하고 뜯겨진 연한 잎맥의 여릿함들... 그리고 다시 자기도 모르게 베로니크를 위해 죽어간 베로니카 그 자신... 그의 다 못 이룬 성악가로써의 꿈, 다리가 부러진 무용수 인형의 하늘 위로까지 춤추고 싶은 그 강한 열망들...

 

 

  베로니크는 사실 영화 속에서 전혀 베로니카와 상관없이 알렉산드로에게로 이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 어쩌면 그러하기에 이 영화는 매우 평범한 일상, 하지만 다소 우연이 남발하는 일상에 대해 그린 그런 영화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아무것도 아닌 일상 속에서 베로니크는 자꾸 베로니카의 흔적들을 발견해 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사랑의 대상인 알렉산드로에게로 향해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와의 만남을 통해 그 대상의 존재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면서, 베로니크는 참을 수 없는 슬픔 가운데 알렉산드로와의 격렬한 정사를 나눔으로써 사랑을 완성하게 된다. 즉, 영화는 무언가 하나가 이루어짐에 있어, 잃어버리게 되거나 소외되어버리는 것들에 대해 줄곧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 베로니크의 사랑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권리이다. 그것은 아무리 그 누가 자신을 대신해 죽어갔다 하더라도 쟁취해야할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당연함 가운데서 너무나 많은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하나의 사랑을 위해 잃어버리게 되는 것들, 상실된 것들... 그런 것들에 대해 단 한 번도 떠올려볼 생각을 하질 않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네들이 없었다면, 과연 우리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우리가 살아있고, 우리가 호흡하고, 입맞춤하는 이 것, 이것은 과연 우리만의 힘으로 스스로 얻어진 것이라 우린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 존재들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정말로 베로니카는 존재하는 것일까?

 

 

  봄을 맞이하기도 전 죽어버린 고목의 밑동에 가만히 손을 대어 보자. 가슴에 약동하는 호흡이 없다면, 양 볼을 그 마른 가지 끝에 부비며 울어도 보자. 그래도 떨어질 눈물 하나 없다면 온 몸으로 부둥켜안고서, 그 썩은 나무뿌리가 뽑히도록 서러워도 해보자. 어쩌면, 그렇다면 어쩌면, 그러한 존재들을 우리는 느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젠 그러한 존재들이 우리들의 공포가 아닌, 우리를 대신해 죽어간 사랑으로 느껴질 수 있을지도, 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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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13 0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을 워낙 좋아하다보니..
와...와!^^ 그 때야 감독보다는 배우를 좋아한 셈인데..먼저 블루,레드, 화이트.
제가 고등학생때..부터 봤다.고 하면 이런 발칙..!할지도..모르겠어요.좀 더 영화보기가 쉬워진건 졸업후이지만 ..그 땐 친구방에 비디오를 볼수있는 작은 TV와 지금은 거의 쓸일 없어 저 역시 유물로 간직하고있는 비디오..가 생기고부터.. 잠 못자던 이 밤을 건너 다니며 영화를 흡수하던 시기...
저는 원치 않아도 일찍 독립인생이었으나..막 집을 떼어내고 민달팽이가되어..사회구성원이 되고자하던 외롬을 몹시 타던 친구때문에 그 녀석의 잠머리를 지켜 주느라..한 길 건너면 내 집..내 방을 두고 새벽이슬을 맞고 골목을 다니던 계집이었으니..덕분에 취향과 상관없이 많은 영화를 봤었노라고..
우린 이따금..그리워..서로 그러면서 과거를 추억하는데..ㅋ또 빠질 수없는게...옛 영화와..커피와..칵테일..등등..이라고..
베로니카의..는 블루 보다 한참 이전..영화.로 알고있다고. 블루 포스터 아래.위..어려운 발음으로 존재하던 그의 이름..크쥐시토프..는 대충 뭉게고 키에슬롭스키..라고 읽어 대며..라빠르망과..데미지와..줄리엣 비노쉬를 사이에 두고...아슬아슬하게 그를 읽어나가던..사회초년생시절까지...몽땅..
베로니카..가..불러들이는 시간의 증거들.!ㅎㅎㅎ 모처럼..옛 일기를 복기하듯..즐거웠네요..저의 이중 생활..속
영화보기가...

몽원 2015-01-14 15:56   좋아요 0 | URL

한 때 저도 이 감독의 영화를 좋아해서 모두 찾아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 그건 저의 대학 초년 시절쯤... 군대를 제대하고 23~24살, 이 정도일 때쯤인 듯. ㅎㅎ 그러면서 마구 영화를 폭식하던 시기였던 거 같습니다. 소화도 안 되는데... 별별 이계에서 온 예술이란 장르의 영화들을 ㅎㅎ 지금은 집중력도 딸리고, 졸려서 보지도 못할 그런 영화들을요. ㅎㅎ 그래도 가끔은 그때가 그립습니다. 무언가 마구 폭식할 수 있었던, 그래서 게워내야 하는데 목구멍에 내내 걸려 고통스러웠던 그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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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자에게 보내는 키스

- 당신과 나의 허물어진 처녀성을 위해 남겨진 어느 고독한 이의 몸뚱이 하나

 

 

 

  쟝 펠루이에르와 에이미 그리고 기독교적 정념과 육체적 정욕, 연민과 소외, 니체의 선과 악, 그리고 문둥이에게 키스를 하는 성자의 일그러진 표정과 문둥이의 냉소... 너무나 모든 것이 한꺼번에 뭉뚱그려져, 대체 어디서부터 이 글을 풀어가야 할지 모르겠다. 오히려 너무 많은 물음들은 이 글의 자연스러운 구도와 설정, 그리고 상황 그 자체에서 빚어지는 "어쩔 수 없음"을 어색하게 각색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여, 천천히 쟝 펠루이에르를 따라 글을 다시 읽어 내려 가보고자 한다.

 

 

  우리의 쟝 펠루이에르는 비록 좋은 가문에 상속자이지만,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존재이다. 그의 얼굴에는 거역할 수 없는 형벌의 흔적이 있으며, 그의 전존재는 패배를 위해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그런 소외와 절망은 그의 기독교적 정신의 바탕 아래 경도당한 니체의 물음 가운데 있다.

 

 

  "선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있어서, 권력의 감정을, 권력의 의지를, 권력 그 자체를 양양 시키는 모든 것이다. 악이란 무엇인가? 허약함에 근거를 두고 있는 모든 것이다. 약자와 낙오자는 멸망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소멸을 촉진시키도록 힘을 도와야 할 것이다! 모든 악덕 중에서도 가장 유해한 것은 무엇인가? 낙오자나 약자들에 대한 연민의 행위 즉, '그리스도교'이다."

 

 

  그가 단 한 번이라도 언제 초인을 꿈꾸어 본 적 있단 말인가? 혹은 권력에의 의지를 믿을 만큼 그는 강인한 존재였던가? 오히려 지독한 패배주의자이며, 끔찍스러운 자기혐오덩어리인 그였건만, 그는 왜 니체의 이 경구들에 경도되었던 것일까? 어쩌면 바로 그 것, 자기의 나약함과 그 끔찍함, 그러하기에 연민에 목이메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그 종교적 중독성을 그는 철저한 죄악이라 느꼈을 지도 모른다. 아니, 그는 자신의 태어날 때부터 못생긴 외모를 자신의 원죄라 느꼈고, 그러하기에 그것은 콤플렉스나 소외보다 원죄의식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에이미란 존재가 나타난다. 생명에 불타면서 풀잎처럼 싱싱한, 그러하기에 너무나도 순결한 육체의 소유자, 그리고 지극한 연정의 소유자... 사건의 전말이 어떠했든 간에 에이미는 쟝을 사랑해야만 했고, 쟝은 에이미를 사랑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했는가? 매일 밤, 원죄의식에 시달리는 쟝은 에이미를 강렬히 원하면서도 손 끝 닿지 못한 채 돌아눕는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철저한 자기소외에 서러워 마른 눈물을 흘리면, 에이미는 벌레처럼 끔찍한 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한 과정 중간에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지고 있다. 과연 문둥이들이 그들의 곪은 상처 위에 와서 닿는 성자들의 입김(혹은 키스)을 느끼며, 행복을 느꼈겠는가? 쟝은 끝내 견디지 못하고, 에이미의 그런 동정의 키스와 포옹을 뿌리친다. 그리고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침잠의 세계, 죽음으로 내려가진다. 그렇다면 남겨진 에이미는 어떻게 되는가? 그녀 또한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끔찍한 죄의식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고 이제 처녀가 아닌 그녀의 몸은 이러한 죄의식과 정욕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그리고 소설은 이 절망스러운 상황 가운데서도 마지막 장면을 통해 이들의 구원의 가능성을 남겨둔다.

 

 

  "약간 둔중한 이 부르주와 여인은 자기 자신을 초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그녀에게는 체념 이외에는 모든 길이 다 닫혀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부터, 파리가 들끓는 소나무 숲속에서 그녀는 죽은 사람에 대한 정절이 자신의 겸허한 영광이 되리라는 것과, 그것을 피한다는 것은 그녀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노에미는 히드 숲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달리다가 구두 속에 모래가 괴어 무거워지고 온 몸에 힘이 빠지자, 그녀는 발을 멈추고 장 펠루에이를 닮은 어느 시커먼 떡갈나무 한 그루를 껴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죽었으면서도 불같은 태양의 입김에 몸을 떨고 있는 꺼칠한 나뭇잎들을 달고 있는 왜소한 한 그루의 떡갈나무였다."

 

 

  사실, 프랑수아 모리악을 단순히 현대의 가톨릭 작가로 규정한다는 것은 너무 도식적인 공식이 아닌가 싶다. 다만 그는 떼레즈 떼께루와 밤의 종말, 그리고 이 문둥이에게 보내는 키스와 같은 작품들을 통해서 결코 구원이 가 닿을 수 없는 절망적 상황에 집착해 왔고, 꾸준히 그 절망적 상황 가운데 구원과 연민의 시선을 펜 끝을 통해 불어넣고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러한 그 자신의 글들 속에서의 주인공들은 그러한 연민의 시선을 매몰차게 거부하고 있다. 아마도 그는 바로 이와 같은 철저한 모순을 통해 기독교가 이 땅에서 지닌 실존성에 대해 묻고자 했던 것 같다. 기독교는 사랑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은 끊임없이, 절망을 구원해내려 하고, 거기에 대해 관심을 쏟는다. 그러나 절망의 이름은 그 자체로 어떤 구원도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절망은 단지 절망일 뿐이지, 구원해야 할 무엇이거나 그러한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우리는 여기서 갈등하게 된다. 설령 에이미가 진심으로 쟝을 사랑했다고 치자, 그렇다고 쟝이 자신의 원죄의식을 쉬 포기할 수 있었겠는가? 자신의 전존재를 통해 가장 특수하고 그런 이유로 가장 본질적인 그 추함을, 그 원죄를 그 자신은 쉽게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포기하는 순간 그에겐 아무런 존재 가치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대한 갈망이 절망 가운데 없다 말할 수 있는가? 쟝은 끊임없이 에이미의 육체를 꿰뚫고, 그녀의 영혼의 한 귀퉁이에서 안착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신의 영혼을 내어주는 에이미의 키스를 배신하고서, 단지 에이미의 육체에만 깃들기를 원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정말로 오직 그런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절망의 실존적 상황... 끊임없이 구원을 갈망하는 만큼 배신하는 절망의 본질... 이 소설은, 그리고 이 소설의 저자인 모리악은 늘 여기에 관심이 있었던 거 같다. 그리고 그 자신도 어이할 줄 몰라, 서성이기도 하고, 어쩔 땐 고통 속에서 에이미와 같이 연민의 시선을 보내기도 하지만... 결국은 도저히 풀지 못하는 숙제처럼 남겨둔 채 글을 마친다. 그러나 단 한 가지 그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모든 것은 은총이며, 종국엔 구원에 이르는 과정임을... 물론 이 은총의 신비와 구원의 신비에 대해 인간은 건드릴 수 없기에, 그가 늘 되풀이해서 보여주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은총이었으면 하는, 구원의 여정이었으면 하는, 인간의 도저히 풀 수 없는 절망적 상황밖엔 없다. 그러하기에 그는 쟝과 에이미의 정념과 정욕 그리고 육체와 정신의 갈등을 해결하지 않고서 그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들은 풀지 못하는 신비 자체로 우리에게 남겨진 것들이며, 바로 그 이유로 구원과 은총의 여정 속에 놓여 있기에... 그 자체로 우리의 중요한 존재의 이유가 되어준다.

 

 

  모든 것은 은총이다! 비록, 에이미의 허물어진 처녀성의 버거운 자위의 대상으로써 시커먼 떡갈나무 한 그루 밖에 남은 것이 없을 지라도, 거기엔 반드시 무언가 존재의 이유가 있고, 그 무언가에게로 향하고 있는 또 다른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P.S.

 

 내가 이 책을 접했을 때는 90년대 후반쯤이었다. 시중에 프랑스 모리악 책 자체가 많이 없었는데, 특히 이 책의 경우가 그랬다. 그래서 성바오로 출판사의 '고독한 자에게 보내는 키스'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책을 어렵게 구해서 읽었다. 하지만 원제는 '문둥이에게 보내는 키스'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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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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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remely Loud & Incredible Close

- 쌍둥이 빌딩과 함께 추락한 영혼들을 위한 염 혹은 날아오르기 위한 몸짓

 

 

  ‘Extremely Loud & Incredible Close' 제목만큼 화려한 책 표지를 보고서, 처음 안을 대강 훑어 봤을 때, 많은 그림들과 난립하는 글자들을 보고서, 하이퍼텍스트를 떠올렸다. 아마 군대를 제대하고서 복학한 후 98년이던가, 99년이던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시인, 소설가, 평론가 등 각 분야의 최고의 문인 50명 이상이 모여서 ‘21세기 문학의 나갈 방향’, 뭐 이런 주제로 포럼을 했었다. 당시, 학교 신문사에 기자로 있던 후배가 문학동아리 회장이었던 내게 초정 티켓을 주어서 나는 우연히 참여할 수 있는 행운을 누렸었다. 그때 아마 처음으로 하이퍼텍스트에 대해 들어본 것 같다. 물론, 그 전에 장 보들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이니, 자끄 데리다의 ‘해체’, ‘차연’이니 하는 풍월들을 듣기는 했지만, 문학적 접근이라기보다는 철학적 접근에 가까웠고, 그에 따른 철학적 이해에 가까웠다. 여하튼 그때 들었던 이야기 중에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이름만 들어도 다 알 듯한, 우리나라 최고의 시인, 소설가, 평론가들이 영화와 게임에 뒤처져 소외된 문학의 현실을 토로하며, 책 속에 인물에 따른 스토리 선택을 할 수 있는 설정의 소설이라든가, 문자와 함께 시각적, 청각적 기능을 병행할 수 있는 텍스트의 등장에 대해서 자못 심각하게 논의하였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그런 하이퍼텍스트 소설의 등장이 결국은 영화와 게임에 문학이 스스로 자리를 내어주고, 이 시대에 더 이상 존재가치가 없다는 것을 자인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는 격분과 토로가 함께 줄을 이었다. 당시 문학에 갓 입문한 나로서는 그 이야기가 자못 충격적이기도 하였고, 사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시가, 소설이 과연 하이퍼텍스트로 대치될 수 있을까? 지금도 나는 이 질문에 대해 무어라 대답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다만, 등단을 했던 내 친동생이 자연스럽게 먹고 살 길을 찾아, 게임 시나리오 작가가 되고, 그런 동생을 통해 많은 문인들이 비록 게임의 어법과 문법 구조를 모르지만 그들의 이름을 빌려주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을 뿐이다. 어쩌면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소설은 이런 하이퍼텍스트의 기준에 거의 초기 단계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막상 소설을 읽어 보았을 때 절감했지만, 마지막 부분을 제외하고, 중간, 중간에 나오는 그 많은 사진들과 문자들의 배치는 그저 동화책의 그림 대신 넣어진 곁가지 수준이었다. 그러하기에 지금 나는 이 글을 통해 이 소설의 하이퍼텍스트 기능이나 관점을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문학적으로 이 글의 중심과 전혀 대치되어 있는 나의 중심에 관해, 그리고 역으로 하이퍼텍스트 기능을 문학적으로 잘 흡수시킨 마지막 몇 장에 관해 잠깐 서술하고 싶을 뿐이다.

 

 

  사실, 소설 중반까지 읽어 내려가기 전까지 나는 화자가 아홉 살짜리 꼬마 여자 아이인 줄 알았다. 개인적인 기질 상 어떤 표지의 내용이나, 역자의 이야기를 먼저 읽고, 소설을 읽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탓도 있고, 아마 역자가 남자가 아닌 여자였던 탓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그렇게 착각했던 이유는 처음의 몇몇 장의 문체에서 나는 아멜리에 노통의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을 떠올렸던 데다가, 화자의 상상력이 전혀 남성적이지 않은 여성적인 것이라고 일찍 단정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반쯤 너무나도 명확하게 소년이라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 그만 어이를 상실해 버렸다. 어떻게 남자 꼬마 녀석이 그렇게 아버지한테 집착을 하고, 스포츠나 개구진 장난엔 도통 관심도 없고, 채식주의자에 무조건적인 평화주의자일 수 있는지. 그리고 취향은 또 얼마나 소녀다운지... 분홍색을 좋아하고, 노처녀 사감처럼 또래 아이들을 가르치고, 훈계하기를 좋아하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물론, 아버지의 서재에서 우연히 발견한 열쇠의 비밀을 풀기위해 모든 Black들을 찾아다니는 그 모험정신과 엉뚱함은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개구진 소년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그 외에 지나친 감성들, 숱한 강박과 두려움들은 소녀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 게다가 사실 문체도 장 콕도의 영화에 나오는 부산한 여인들의 몸짓을 얼마나 닮아있는지, 난 작가도 여자라고 단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인터넷을 뒤져보니 다소 샌님처럼 생기긴 했지만 분명히 남자였다. 대체 왜 이런 착각을 했던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물론 내 주의력의 결핍과 사전에 내용을 알려고 하지 않는 나의 습성 탓일 게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잃어버린 내 소년 적의 감수성 탓일 것이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남자는 이래야한다는 강박 속에서 나도 모르게 남자와 여자의 성역할을 구분해 왔고, 또 그 탓에 난 내게 없는 여성성에 대해 갈구하고 숭배하게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여성을 온전히 하나의 인격으로 받아들이는데 항상 장애가 되어왔다. 무언가에 대한 지나친 신격화는 역으로 그것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을 낳는다. 마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처럼. 그리고 그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를 읽고 나서였다.

 

 

  ‘금각사’, 그 책은 동생의 소개로 처음 접하게 되었다. 사실, 당시 소설보다 시에 관심이 많았던 나로서는 그렇게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첫 장을 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한 장, 한 장 넘어갈수록 그만 나는 그 소설에 함몰해버리고 말았다. 아니, 전복당해 버렸다. 소설의 주인공이 금각사를 불태우는 절정의 페이지 속에서, 함께 불살라지고, 내 속에 오랫동안 두려움으로 숨어 지내던 뫼르소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내 속엔 테러리스트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2001년 911테러가 발생했을 때, 내 입가에선 교활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마치 내가 그 쌍둥이 빌딩에 들이받기라도 한 배후세력인양. 그래서 당시, ‘테러를 꿈꾸다’라는 제목으로 시를 쓰기도 하였다. 부끄럽지만 여기에 잠깐 그 시를 올려보고자 한다.

 

 

서쪽 멀리 먼 나라

여기저기에 테러가 발생했단다.

순간 입가에 드리운 교활한 미소가

동쪽 나라 사람들 피에 흐르는

콤플렉스처럼 번져 지고

힘으로 이루어낸 평화의 상징에

들이받은 배후세력처럼

수많은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슴이 뛰고 있었다.

 

 

강 건너 남쪽 동네에선

고급 백화점이 무너진 적이 있었단다.

여기저기 기적에 굶주렸던 열망들이

부활한 영웅들에게 그리스도들에게

온갖 뉴스로 난사되어질 때

북쪽 동네에 사는 내 궁핍함은

옹졸하고 한 많은 기도로

전복을 꿈꾸는 찌든 아이처럼

모두를 경멸하고 있었다.

 

 

이마 위 살짝 번진 미열이

새어나갈 곳을 찾지 못하고

배꼽 한 치 아래 불거진

구멍을 뚫고서 폭발하고 싶단다.

여기저기 비릿한 조명 아래 늘어선

여신들의 자태를 일그러뜨리고

돋아나는 음울처럼

거세된 애욕들이

서쪽 나라와의 거리 때문에

남쪽 동네와의 차이 때문에

소외된 육체의 두려움 때문에

허공에 적을 두지 못하고

테러를 꿈꾸다

 

 

  그 당시 한 번은 또 이런 일이 있었다. 학교를 등교하기 위해 버스를 탔는데, 그 버스가 그만 신호등에서 그 스피드를 멈추질 못하고, 하얀 불로 바뀌어 길을 막 건너려는 소녀를 들이받았다. 순간, 소녀의 육체가 일그러지고, 버스기사가 밖으로 뛰쳐나갔다. 버스에 있던 모든 사람들도 그 순간 모두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모두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어느 누구 하나 감히 그 오그라든 육체를 부둥켜 울부짖을 순 없었다. 단 한 사람, 오직 그 무겁고 거대했던 스피드로 소녀를 들이받았던 버스기사를 제외하곤. 그 때, 난 불현듯 그런 생각을 했다. 누군가를 할퀴지 않는다면, 도리질 하지 않는다면 평생 누군가를 진정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문학이란 게 어쩌면 이런 것일 거라고. 그 무거운 스피드 혹은 부둥켜안은 절규, 무력감.

 

 

  그러나 정녕 그것밖에 할 수 없는 것일까? 어떤 하나의 의미가 몸짓이 되어, 누군가를 위한 기도가 되고 염이 될 순 없는 것일까? 소녀의 죽음 없이, ‘그 날 나는 버스를 타고 등교했다.’라는 그 하나의 평범한 일상만으로 소설을 말할 순 없단 말인가? 정녕?

 

 

  처음 9살짜리 꼬마의 시선 탓인지 가벼웠던 소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시선을 통해 존재와 부재의 경계선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911테러라는 그들의 끔찍했던 현존에게로 한 걸음씩 다가선다. 덩달아 비밀의 열쇠도 그 자물쇠의 주인을 찾아간다. 엄청나게 시끄럽게 찾아 헤맸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가까이 존재했던 주인에게로.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은 기막힌 우연이었을 뿐이다. 그 자물쇠의 주인이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우연히 주인공의 아버지에게 그 열쇠가 들어있던 화분을 팔았었다는 사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화분 속에 아버지의 중요한 유품이었던 열쇠가 있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는, 어쩌면 말도 안 되는 설정. 그렇지만 그로 인해 서로가 얼마나 서로를 찾아 헤맸는지 그리고 그 우연한 만남을 통해 서로에게 부재한 아버지를 발견하게 된다는 이야기. 거기에 마지막 주인공이 오랫동안 부재했던 그의 할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관 뚜껑을 열고서 아버지에게 부재했던 아버지를 만나게 해준다는, 어쩌면 거룩한 종교의식 같고, 반대로 부재 속에서 존재를 찾으려 하는 작은 몸짓 같은, 염 혹은 기도. 마지막으로 소설은 모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아담과 이브의 시대 이전 부재의 시간으로 돌아가고, 동시에 떨어지던 아버지의 표상이 날아오르는 사진을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그러나 날아오를 수 있을까? 한 장, 한 장 펼쳐지는 책장의 그 사진들처럼 그 끔찍한 상흔들을 지우려는 몸짓들이 날아오를 수 있는 걸까? 우리의 끝없는 난립하는 이 문자들이 하이퍼텍스트를 넘어서 그렇게 훨훨 비행할 수 있을까? 결국, 소녀의 죽음 대신 소설 속에선 아버지의 죽음이 존재했고, 무거운 스피드의 버스 대신 911테러라는 역사적 사실이 대치된 건 아닐까? 아직도 내게서 쉬 지울 수 없는 테러리스트의 피는 허공에 적을 두지 못하고, 생생하게 찢기며 고통스러워하는 대상을 찾아 헤매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 정녕 날아오를 수 있다면, 소녀와 아버지의 죽음을 그런 모든 상실들을 피할 수 있다면, 다시 신앙 없는 이 내 마음으로 기도하고, 염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럴 수 있다면, 정녕 그럴 수 있다면, 맘껏 추락해 볼 것이다. 날개가 돋아 오르기를 한량없이 꿈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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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예모 감독, 강문 외 출연 / 기타 (DVD)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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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 역사를 도구화하는 방법 배우기

 

 

 

 

  ‘병아리가 자라면 닭이 되고, 닭이 자라면 양이 되고, 양이 자라면 소가 되고, 소가 자라면 그 다음엔 뭐가 되는 거죠?’

 

 

  붉은 수수밭, 귀주 이야기, 책상 서랍 속의 동화 등으로 이미 중국의 대표적인 감독으로 자리 잡은 장예모 감독의 '인생'은 복잡다단했던 중국의 현대사 속에서 일반 서민들의 심리를 대변하고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 속엔 조금은 다르지만 중국과 같이 같은 아시아로서 그러한 과정을 겪었던 우리의 자화상이 그려져 있다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는 그 속에서, 모두는 아니겠지만, 역사라는 거대한 구조물의 억압 속에서도 삶에 대한 끝없는 긍정을 발견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19세기 말, 서구세력의 침략으로 주변 모든 국가에게 하늘과도 같던 중국대륙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것은 20세기에 이르러 신해혁명으로 급전되어, 무려 8000년에 이르는 중국왕조의 역사에 종결을 고하게 되기까지 이른다. 우리의 주인공 ‘복귀’는 바로 그러한 시대 가운데 태어난 사람으로서, 영화 속에선 대대로 그 지역에서 행세하던 지주로서 첫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그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기존의 지주들이 몰락했던 것처럼, ‘복귀’ 또한 몰락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그 이전의 시대와 달리, 이제 중국이란 사회는 아직 감당키 어려운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신개념의 신시대이고, 그것은 누구든지 지주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자신의 조상들이 해왔던 대로 흥청망청 노름만 하던 ‘복귀’는 그러한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노름으로 집안을 파탄에 지경에 이르게 함으로써, 늙은 자신의 아버지를 화병으로 죽게 만들고, 늙은 어머니를 병들게 하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부인을 떠나보내기에까지 이르게 된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인지, 하루아침에 변한 자신의 신세를 자각하고, (영화 속에서 ‘복귀’는 다시는 도박을 안 하겠다는 의미로 ‘부도’로 개명한다.) 새로운 사람이 된 ‘복귀’에게, 다시 그의 부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찾아옴으로써, 이제 ‘복귀’는 ‘복귀’가 아닌 ‘부도’로서 새로운 삶의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그에게 새로운 사고방식, 지주로서가 아닌 이제 일반 민중으로서, 그 무엇보다 자신의 가족이 소중하다는 의식을 심어놓게 된다. 그리고 다시, 지루했던 중일전쟁이 끝나고 난 1940년대 후반,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국공합작이 깨지면서, 내분이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고, 이 가운데 우리의 주인공 ‘부도(복귀)’ 또한 자연스럽게 엮이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우스운 것은 그가 어떤 사상이나 이념 등에 의해 어딘가에 선택을 하고, 투쟁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살기 위해 그 속에서 선택되어졌다는 사실이다. 말 그대로,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자연스럽게 엮여버린 것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중일전쟁 직후, 지방이야 어떻든 간에, 중국을 좌지우지했던 것은 국민당이었다. 그러하기에 ‘부도’는 자연 힘없는 일반 서민으로서 국민당에 끌려가,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역사가 이미 우리에게 알려주듯이, 그 당시 무능했던 국민당은 그 처음 전선의 유리했던 국면과 함께 미국을 등에 업은 풍부했던 인적, 물적 자원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에게 패하게 된다. 그러면서 애초 자신의 처자식 걱정에만 몰두하고 전혀 전쟁에 관심이 없었던 ‘부도’ 또한 공산당의 포로가 되어, 자연스럽게 다시 공산당을 위해서 일하게 된다. 여하튼 이와 같은 과정 끝에, ‘부도’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공산당의 승리로 지주세력들이 사형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면서 과거 지주세력이었던 ‘부도’는 이에 공포에 질리지만, 공산당 정권 아래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방법을 깨닫게 되고, 다시 철저히 사회에 순응해 나간다. 그런데 뜻밖에도 영화는 우리의 생각과 달리 그러한 공산당 정권 아래 사회도 살만한 사회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가령 예를 들면, 1950년대 모택동은 중국이 경제적으로 서구에 비해 낙후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경제발전을 위한 무리한 계획을 설정한다. 목표 달성을 위해 모택동은 일반 민중들의 노동력을 무리하게 착취하는데, 그 속에서도 일반서민들의 모습은 이제까지와 전혀 다를 바 없이, 삶의 갖은 즐거움들을 발견하고 찾아내는 것이다. 심지어, 1960년대 모택동의 거대한 이상의 일환이었던 문화혁명을 기점으로 시작된 모택동 숭배 속에서도 그들의 삶은 전혀 억압되어 있거나,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영화 속에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부도’의 딸의 혼인식 날, 모택동의 초상화 앞에서 모주석 어록을 들고 사진을 찍는 ‘부도’와 ‘가진(부인)’, 그리고 그의 딸과 사위의 즐거운 모습을 통해 이를 드러내고 있다. 다만, 1960년대 후반 이르러 급격해진 문화혁명의 혼돈으로 인한 사회상에 대해선 장예모는 은근히 풍자를 하고 있긴 하다. 왜냐하면 당시 문화혁명은 사회의 기존 체제의 전복이란 미명하에 모든 권위와 전통 그리고 낡은 것이라 여겨지는 모든 것을 배척하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말 못하는 ‘부도’의 딸이 임신하여 출산하던 날, 병원에는 오랜 경험으로 숙련된 늙은 의사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젊은 간호사들만이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부도’의 딸의 생명을 앗아가게 만들고 만다. 영화의 마지막은 이렇게 산모의 죽음으로 출산된 ‘부도’의 손자와 사위 그리고 그의 부인 ‘가진’이 함께 딸의 묘소를 찾은 후, 같이 소담하게 식사를 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데, 거기서 새 시대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손자는 ‘부도’에게 묻는다. 병아리가 크면 무엇이 되냐고? ‘부도’는 대답한다.

 

 

  '병아리가 자라면 닭이 되고, 닭이 자라면 양이 되고, 양이 자라면 소가 되고, 소가 자라면 네가 어른이 되지.'

 

 

  이제 이야기를 정리해 보아야 할 것 같다. 너무나도 자연스럽지만 은근히 위트 있는 영화, 아니 어쩌면 거대한 이념들에 좌지우지되는 우리 젊음에 독설을 퍼붓는 영화...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그러한 시대 변화 속에 혼돈과 투쟁정신, 아니면 진보를 향한 끝없는 갈망들 그런 것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이 영화 속에선 그러한 것들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너무나도 비굴해 보이는 ‘복귀’와 ‘가진’은 사실, 전혀 비굴하지도 그렇다고 밉살스러워 보이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삶을 묵묵히 받아내며, 그 가운데 어른이 되고, 늙어갈 뿐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 영화 속에서 공산주의니 혹은 민생주의니 왕조니 하는 것들은 그들에게 하나의 도구일 뿐, 삶 그 자체가 되어주질 못하고 있다. 물론, 닭보다는 양이 크고, 양보다는 소가 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크기의 변화일 뿐, 같은 종이 아니기에, 실질적인 변화는 아니라는 말이다. 사실 그러하기에 양이면 어떻고, 소면 어떻겠는가? 중요한 건 모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삶을 살아내는 것이고,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즉, 여기서 역사란 것은 하나의 환경일 뿐, 우리의 중심이 되고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우리가 앞으로 다가올 것이라 믿고 있는 새 우주 새 천년 시대에도 계속 될 것이라고 영화는 은근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진보를 믿고 죽어간 많은 이들에겐 미안하지만, 매우 자연스러운 우리의 모습이라고 공감하였다. 또, 진보를 향해 한없이 목말라하고 굶주려 있는 내가 이렇게 될 수 있기를, 이렇게 소담하게 어른이 되는 법들을 배워가기를, 우리 아버지들처럼 만큼만 살아지기를, 그럴 수 있기를, 지금 이 순간 잠시,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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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문학과지성 시인선 32
황지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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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바다에 인광을 찾아서

 

 

 

  황지우, 후배의 입에서 황지우의 시 얘기가 나왔을 때 내가 맨 먼저 떠올린 것은 그 인간만큼이나 꽤 난잡한 시들과 그의 육중한 몸뚱이 그리고 그 육중한 몸뚱이가 에로틱하다는 이인성 등이 문득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럼에도 내 기억 속에 황지우라는 시인은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라는 시로 각인되어 있는.......

 

 

  섣달 스무아흐레 어머니는 시루떡을 던져 앞 바다

의 흩어진 물결들을 달래었습니다. 이튿날 내내 청

태밭 가득히 찬비가 몰려왔습니다. 저희는 우기의

처마 밑을 바라볼 뿐 가난은 저희의 어떤 관례와도

같았습니다. 만조를 이룬 저의 가슴이 무장무장 숨

가빠하면서 무명옷이 젖은 저희 일가의 심한 살냄새

를 맡았습니다. 빠른 물살들이 토방문을 빠져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저희는 낮은 연안에 남아 있었습니다.

 

 

  자분자분 비가 내리고, 날짜를 착각해서 못 본 기말고사에서 F학점을 맞지 않기 위해 도서관에서 질척질척 몸뚱이를 비벼대며, 그래도 후배들과의 약속을 지키겠다고 처음 편 첫 장. 어떻게 된 게 첫 장부터 온통 한자투성이의 글귀들이 전면에 등장하고, 이 건 뭐 시를 읽는 것인지, 아니면 한자 찾기를 위한 것인지.......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기존에 내가 알고 있는 그의 시와 달리 겸손한 투의 이 시구들이 가슴 속에 무장무장 차오르고.......

 

 

  모든 근경에서 이름없이 섬들이 멀어지고 늦게 떠

난 목선들이 그 사이에 오락가락했습니다. 저는 바

다로 가는 대신 위안 장독의 작게 부서지는 파도 소

리를 들었습니다. 빈 항아리마다 저의 아버님이 떠

나신 솔섬 새울음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물 건너 어

느 계곡이 깊어가는지 차라리 귀를 막으면 남만의

멀어져가는 섬들이 세차게 울고울고 하였습니다.

 

 

  멀어져가는 섬들, 아버지, 그리고 솔섬의 새울음 소리, 가슴 속에 표현할 수 없는 막연한 그리움들 그렇지만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지독하게 죽음을 닮아있는 듯한 그리움의 그림자들. 그러한 죽음의 그리움에 대해 시인은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차라리 그럴 수 없는 자신의 귀를 막아 버린 것일까? 그렇게 섬이 멀어져가는 것이 아닌 자신 스스로가 섬으로부터 멀어져갔지만,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세찬 그리움은 울고, 울고 또 그렇게 울어서 자꾸 자신을 흔들어 놓는데.......

 

 

  어머니는 저를 붙들었고 내지에는 다시 연기가 피

어올랐습니다. 그럴수록 근견의 겨울 바다는 눈부신

저의 눈시울에서 여위어갔습니다. 아버님이 끌려가

신 날도 나루터 물결이 저렇듯 잠잠했습니다. 물가

에 서면 가끔 지친 물새떼가 저의 어지러운 무릎까

지 밀려오기도 했습니다. 저는 어느 외딴 물나라에

서 흘러들어온 흰 상여꽃을 보는 듯했습니다. 꽃 속

이 너무나 환하여 저는 빨리 잠들고 싶었습니다. 언

뜻언뜻 어머니가 잠든 태몽중에 아버님이 드나드시

는 것이 보였고 저는 석화밭을 넘어가 인광의 밤바

다에 몰래 그물을 넣었습니다. 아버님을 태운 상여

꽃이 끝없이 끝없이 새벽물을 건너가고 있습니다.

 

 

  지독한 죽음과 그리움의 그림자, 그렇지만 거기에 흔들리는 시인을 어머니는 붙들었고, 시인은 건널 수 없는 바다를 건너지 않은 대신 흐릿한 빛이 비추는 인광의 밤바다에 몰래 그물을 넣는다. 그러고 나서 그제야 그는 그의 아버지를 먼 바다로 떠나보낸다.

 

 

  삭망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그러나 바람 속은 저

의 사후처럼 더 이상 바람 소리가 나지 않고 목선들

이 빈 채로 돌아왔습니다. 해초 냄새를 피하여 새들

이 저의 무릎에서 뭍으로 날아갔습니다. 물가 사람

들은 머리띠의 흰 천을 따라 내지로 가고 여인들은

선생을 위해 저 우기의 청태밭 넘어 재배삼배 흰떡

을 던졌습니다. 저는 괴로워하는 바다의 내심으로

내려가 땅에 붙어 괴로워하는 모든 물풀들을 뜯어

올렸습니다.

 

 

  그 발음처럼 삭막한 죽음을 닮아있는 음력 초하루의 바람이 불고, 이미 떠나갔지만 다시 환생할 혼들을 기리며, 살아있는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를 위한 염을 하고........ 시인은 이제 그 자신에게 남아있던 모든 괴로움들을 하나하나씩 뜯어, 깨끗하게 소멸시킨다.

 

 

  내륙에 어느 나라가 망하고 그 대신 자욱한 앞바

다에 때아닌 배추꽃들이 떠올랐습니다. 먼 훗날 제

가 그물을 내린 자궁에서 인광의 항아리를 건져올

사람은 누구일까요.

 

 

  모두 살자고 바다를 배신하고 내지로 돌아갔지만, 아니러니 하게도 내륙에 어떤 나라가 어떤 인과관계도 없이 갑자기 망했다. 그리고 그 대신 앞바다에서는 때 아닌 배추꽃들이 떠오른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비 효과? 아니면 어차피 모두 죽음 앞에서는 예외가 없다는 그런 흔한 말? 그렇지만 여기서 시인은 바다로 건너가지 못한 대신 그가 넣었던 인광의 항아리를 다시 갑자기 화두로써 꺼내고 있다. 대체 무슨 연유일까.......

 

 

 

  처음, 혼자서 여행을 떠났던 것은 수능이 끝나고, 갓 스무 살이 된 해, 그러니까 아직 대학을 들어가기 전 1월 말쯤의 겨울이었다. 그 당시 나는 나 외의 모든 친구들이 재수를 해야 하는 상황, 그리고 가장 절친한 친구의 신앙에 대한 포기 선언, 게다가 그 당시 1년 중 가장 중요했던 문학의 밤 행사를 끝내고서 무언가 알 수 없는 허탈감에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사실 그렇지만 이제와 생각해 볼 때, 무엇 때문에 내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동해로 가는 밤 기차표를 무작정 끊고서, 홀로 여행을 떠났던 것인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질 않는다. 다만, 그 당시 나의 돌발적인 행보는 꽤 존재적인 질문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하기에 애초에 내 여행의 목표나 어떤 계획은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저 떠나야한다는 강박감, 그것이 나를 움직였고, 그렇게 나는 생애 처음으로 나 혼자 이제까지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동해역이라는 곳에 저녁 5시쯤 당도하였다. 사실, 무작정 동해라고 해서 표를 끊었는데, 그래서 동해에 가면 바로 바다를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동해역이라는 곳에서 바다까지 가려면 차타고 한 20분 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정말 무대책으로 온 나라 수중에 남아 있는 돈은 고작 돌아갈 때 차비와 바다로 들어갈 때의 차편 차비 외에는 1000원 남짓한 돈밖에 되질 않았다. 하지만 뭐 그게 대수랴? 내가 ‘죽느냐, 사느냐’라는 문제로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30분가량 정류소에서 기다렸다가 버스를 탔다. 그리고 당도한 곳이 바로 ‘추암 해수욕장’이었다. 날은 해가 짧은 겨울이라 그런지 벌써 어둑어둑해져 있었고, 매서운 칼바람이 달랑 마이 한 장 걸치고 온 내 몸뚱이를 후려쳤다. 그렇지만 탁 트인 바다를 보니, 정말 묵었던 가슴이 뚫리는 듯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정말로 모든 것을 여기에 던져 놓고 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1시간, 바다를 넋 놓고 원 없이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때부터 정말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로 모든 것이 돌변하기 시작했다. 일단, 점심 이 후 아무것도 먹지 못한 공복에 춥기는 얼마나 추운지, 너무 급작스럽게 와서 돈도 못 챙겨 오고, 달랑 마이 한 장 입은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런 후회도 잠시, 밤이 깊어갈수록 견딜 수 없는 추위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정말 그대로라면 사느냐가 아니라, 죽느냐로 모든 것이 변해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가진 돈 1000원을 가지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자판기 커피에서 100원짜리 유자차를 한 잔, 한 잔 퍼마시면서, 추위를 녹이고, 허기를 달래다가, 그것도 여의치 않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자동차들의 문을 건들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여기저기서 그 새벽에 커다란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하고, 개들이 마구 짓기 시작하고....... 이건 뭐 해도 해도 너무하지? 내가 뭐 자동차 훔쳐가는 것도 아닌데....... 그렇지만 다행히도 깊은 밤이라 그런지 누구 하나 깨는 이는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다시 바다로 가 모래를 덮고 잠시 누워서 견디다, 또 그것도 견딜 수가 없어서, 다시 과감하게 용기를 내어 어느 자동차 앞에 섰다. 그리고 행여 다시 경보음이 울릴까 하는 두려움으로 차문을 여는데, 이 게 어떻게 된 일인지, 나 같은 사람을 위해 누군가 맘 좋게도 문을 잠가두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차안으로 들어가 잠시 몸을 녹이는데, 역시 시동이 걸려있지 않아 그런지, 바람만 막아줄 뿐 춥기는 매한가지였다. 게다가 행여 차 주인이 올까 하는 심정에 제대로 눈을 부칠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잠깐 눈을 감았다 떠보니 시간이 후딱 1시간이 지나 버렸다. 그리고 시간은 어느덧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1시간 정도만 버티면 그토록 기다리던 동해 앞바다의 일출을 볼 수 있으리란 희망이 생겨났다. 그래서 조심스레 차 밖으로 나와 다시 바닷가로 향하였다. 그리고 그토록 까만 어둠 속에서도 희미한 빛을 내며, 변화무쌍하게 색을 달리하는 바다에 함몰될 듯 경탄하며, 그 새벽이 지나가기를 기도하였다.

 

 

  내 개인에게 있어 ‘죽음’이라고 하면, 너무 커다랗고, 막연해서, 도무지 와 닿지도 않고, 그래서 표현함에 있어 어떤 금기와도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지 잘난 맛에 사는 시인이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라는 시집 제목부터 죽음 냄새를 펄펄 풍기면서, 첫 장에 내 놓은 위의 ‘연혁’이란 시는 ‘바다’와 ‘아버지’라는 이미지를 매개로 해서 지독한 ‘죽음’의 그림자를 피워대는데....... 내 선입견 때문인지는 몰라도 왠지 역겹기 그지없었다. 맨 처음 그의 다른 시집 ‘어느 흐린 날 나는 주점에 홀로 앉아 있을 것이다’를 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자분자분 내리는 비 때문인지, 아니면 내 기억 속 밤바다의 추억 때문인지, 이 시가 가슴 속에서 떠나질 않고, 마치 어떤 숙제처럼 무언가 풀어내야함을 자꾸 속삭이는 것이다. 어두운 밤바다에서 인광의 항아리를 꺼내 올려 달라고, 아니 그 어두운 밤바다에 인광의 항아리를 반드시 집어넣어야 한다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내 뇌리 속에서 떠오른 것은 어쩌면 이 시에 짙게 자리 잡은 죽음의 바다가 죽음이 아닌 삶의 자리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다시금 해보게 되는 것이다. 선생의 자리 즉, 삶으로 돌아와져야 하는 자리, 그리고 죽음만큼 거칠고 흉포한 삶의 자리.

 

 

  청계천 2가. 횡단보도를 바삐 교차하는 사람들 사

이에서 (저쪽에서 이쪽으로) 그녀는 아이를 업고 나

타났다. 그 산이 게워낸 이물질인 듯한 하얀 안개꽃

을 아이가 쥐고 흔들어댔다. 거기서 무슨 은방울 같

은 소리가 났다. 맹인을 위한 신호 소리를 들으며

쌩쌩(生生?)한 사람들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먼저 넘

어갔다. 사라지는가 했는데 그녀는 다시 자동차 부

속품상 앞 잡상인들 틈에서 나왔다. 그녀는 한 번만

더 아이를 낳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그만두라고 했

다. 그녀는 한 번만 더 아이를 이 땅으로 보내고 싶

다고 했다. 나는 두 손을 그었다. 지금 보다시피 우

리는 서로의 발등을 밟고 있다고 나는 말했다. 뱃속

에서 아기가 죽어간다고 그녀는 화를 냈다. 이

오려면 으로 을 내려야 한다고 나는 말했다. 나

는 적십자사 헌혈차를 피해갔다. 그리고 뒤로 돌아

서서 그녀에게 정색하고 말했다. 그대 앞에 내 슬픔

이 좀 과했나보오. 그대 앞에 나의 심령과학적 자의

식이.

 

 

  ‘에서·묘지·안개꽃·5월·시외버스·하얀’이란 이 시집 가운데 시에서도 그는 5·18에서 죽은 여인을 연상시키면서 지독한 죽음에 대한 슬픔과 연민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의 그 죽음은 그냥 끝나버린 죽음이라고 하기엔 여인의 선생에 대한 욕구는 과하게 표현되어 있다. 물론, 여기서 시인은 정색하며 말한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과한 자의식이라고. 그렇지만 동시에 그는 여인에게 하나의 단서를 남긴다. 땅, 몸, 닻.

 

 

  어쩌면 죽음에 관한 깊은 시적 염을 삶이란 전혀 반대되는 이미지로 과하게 엮어내고자 나는 지금 무리한 시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내 개인의 어떤 어둔 밤바다에서 인광을 찾아내고자 하는 염과 함께 더불어 시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시를 통해 무언가를 실마리를 얻고자 하는 내 몸부림이 역시 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스무 살 그 때로 돌아가 다시 추위에 바르르 떨며 어둔 밤바다 가운데 흐릿한 빛들을 바라다본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 위에 꽃들이 둥둥 떠다니고 어떤 가련한 혼들이 잃어버린 몸뚱이로 땅에 닻을 내리는 환상을 바라다본다. 여전히 내지의 소식은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어떤 나라가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매일 어디선가 누군가는 굶어 죽어가고, 어디서는 정경들이 줄을 지어 구호를 외쳐대고....... 그런 모든 것들이 상관없다는 듯이 밤바다 위에 꽃이 피고, 서서히 날이 밝아온다. 1시간, 2시간........ 찬란할 줄만 알았던 일출... 흐릿한 날씨에 그런 일출은 도무지 나타날 기세가 없다. 땅으로 몸뚱이를 닻으로 내리려는 혼들도 이제는 밝아오는 햇살에 흐릿해져 간다. 바로 그 때 먼 구름 사이에서 붉은 햇살이 인광처럼 고개를 내민다. 그것이 무엇인지, 어떤 의미인지 도무지 알 길은 없다. 허나 왠지 모르게 가슴 속 한 켠에 저버릴 수 없는 삶의 희망의 자리를 하나 남겨 놓는다. 그리고 이제 나도 환상으로 둥둥 떠다니던 내 몸뚱이를 찾아 땅에 닻을 내린다. 집으로 돌아간다. 그렇지만 이제 매일 떠나가는 삶임을 그러한 여정임을 깨달아 안다. 마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라는 시집의 제목처럼, 새들이 뜨는 이 세상이 여전히 대지의 중력에 묶여 늘 그대로이지만, 그래서 언젠가 새들도 대지의 중력에 그대로 이 세상에서 떠버리겠지만, 하루라도 아니 지금 이 순간이라도 대지의 중력을 벗어나 떠있는 이 대기의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한 번 들이 마셔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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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13 0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풍장...과 연가와 같은 즐거운 편지˝ 사이의 그 거리..란...즐거운 편지로 만난 황지우.를
진정 내 안에 살게한 건..풍장을 알고 이후.부터..연가적 ..편지로는 가 닿지 못했던 그였다면..한 참이나..흘러..풍장을 그리는 그의 시를 알고..이후에는 편지 조차도 모두 그러안을..수있는 시인의 세계.확장.
나머지는 그저 허겁지겁..삼키기..바쁜..허기가되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