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둥이에의 키스
프랑소와 모리악 지음 / 지성문화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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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자에게 보내는 키스

- 당신과 나의 허물어진 처녀성을 위해 남겨진 어느 고독한 이의 몸뚱이 하나

 

 

 

  쟝 펠루이에르와 에이미 그리고 기독교적 정념과 육체적 정욕, 연민과 소외, 니체의 선과 악, 그리고 문둥이에게 키스를 하는 성자의 일그러진 표정과 문둥이의 냉소... 너무나 모든 것이 한꺼번에 뭉뚱그려져, 대체 어디서부터 이 글을 풀어가야 할지 모르겠다. 오히려 너무 많은 물음들은 이 글의 자연스러운 구도와 설정, 그리고 상황 그 자체에서 빚어지는 "어쩔 수 없음"을 어색하게 각색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여, 천천히 쟝 펠루이에르를 따라 글을 다시 읽어 내려 가보고자 한다.

 

 

  우리의 쟝 펠루이에르는 비록 좋은 가문에 상속자이지만,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존재이다. 그의 얼굴에는 거역할 수 없는 형벌의 흔적이 있으며, 그의 전존재는 패배를 위해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그런 소외와 절망은 그의 기독교적 정신의 바탕 아래 경도당한 니체의 물음 가운데 있다.

 

 

  "선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있어서, 권력의 감정을, 권력의 의지를, 권력 그 자체를 양양 시키는 모든 것이다. 악이란 무엇인가? 허약함에 근거를 두고 있는 모든 것이다. 약자와 낙오자는 멸망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소멸을 촉진시키도록 힘을 도와야 할 것이다! 모든 악덕 중에서도 가장 유해한 것은 무엇인가? 낙오자나 약자들에 대한 연민의 행위 즉, '그리스도교'이다."

 

 

  그가 단 한 번이라도 언제 초인을 꿈꾸어 본 적 있단 말인가? 혹은 권력에의 의지를 믿을 만큼 그는 강인한 존재였던가? 오히려 지독한 패배주의자이며, 끔찍스러운 자기혐오덩어리인 그였건만, 그는 왜 니체의 이 경구들에 경도되었던 것일까? 어쩌면 바로 그 것, 자기의 나약함과 그 끔찍함, 그러하기에 연민에 목이메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그 종교적 중독성을 그는 철저한 죄악이라 느꼈을 지도 모른다. 아니, 그는 자신의 태어날 때부터 못생긴 외모를 자신의 원죄라 느꼈고, 그러하기에 그것은 콤플렉스나 소외보다 원죄의식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에이미란 존재가 나타난다. 생명에 불타면서 풀잎처럼 싱싱한, 그러하기에 너무나도 순결한 육체의 소유자, 그리고 지극한 연정의 소유자... 사건의 전말이 어떠했든 간에 에이미는 쟝을 사랑해야만 했고, 쟝은 에이미를 사랑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했는가? 매일 밤, 원죄의식에 시달리는 쟝은 에이미를 강렬히 원하면서도 손 끝 닿지 못한 채 돌아눕는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철저한 자기소외에 서러워 마른 눈물을 흘리면, 에이미는 벌레처럼 끔찍한 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한 과정 중간에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지고 있다. 과연 문둥이들이 그들의 곪은 상처 위에 와서 닿는 성자들의 입김(혹은 키스)을 느끼며, 행복을 느꼈겠는가? 쟝은 끝내 견디지 못하고, 에이미의 그런 동정의 키스와 포옹을 뿌리친다. 그리고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침잠의 세계, 죽음으로 내려가진다. 그렇다면 남겨진 에이미는 어떻게 되는가? 그녀 또한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끔찍한 죄의식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고 이제 처녀가 아닌 그녀의 몸은 이러한 죄의식과 정욕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그리고 소설은 이 절망스러운 상황 가운데서도 마지막 장면을 통해 이들의 구원의 가능성을 남겨둔다.

 

 

  "약간 둔중한 이 부르주와 여인은 자기 자신을 초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그녀에게는 체념 이외에는 모든 길이 다 닫혀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부터, 파리가 들끓는 소나무 숲속에서 그녀는 죽은 사람에 대한 정절이 자신의 겸허한 영광이 되리라는 것과, 그것을 피한다는 것은 그녀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노에미는 히드 숲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달리다가 구두 속에 모래가 괴어 무거워지고 온 몸에 힘이 빠지자, 그녀는 발을 멈추고 장 펠루에이를 닮은 어느 시커먼 떡갈나무 한 그루를 껴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죽었으면서도 불같은 태양의 입김에 몸을 떨고 있는 꺼칠한 나뭇잎들을 달고 있는 왜소한 한 그루의 떡갈나무였다."

 

 

  사실, 프랑수아 모리악을 단순히 현대의 가톨릭 작가로 규정한다는 것은 너무 도식적인 공식이 아닌가 싶다. 다만 그는 떼레즈 떼께루와 밤의 종말, 그리고 이 문둥이에게 보내는 키스와 같은 작품들을 통해서 결코 구원이 가 닿을 수 없는 절망적 상황에 집착해 왔고, 꾸준히 그 절망적 상황 가운데 구원과 연민의 시선을 펜 끝을 통해 불어넣고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러한 그 자신의 글들 속에서의 주인공들은 그러한 연민의 시선을 매몰차게 거부하고 있다. 아마도 그는 바로 이와 같은 철저한 모순을 통해 기독교가 이 땅에서 지닌 실존성에 대해 묻고자 했던 것 같다. 기독교는 사랑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은 끊임없이, 절망을 구원해내려 하고, 거기에 대해 관심을 쏟는다. 그러나 절망의 이름은 그 자체로 어떤 구원도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절망은 단지 절망일 뿐이지, 구원해야 할 무엇이거나 그러한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우리는 여기서 갈등하게 된다. 설령 에이미가 진심으로 쟝을 사랑했다고 치자, 그렇다고 쟝이 자신의 원죄의식을 쉬 포기할 수 있었겠는가? 자신의 전존재를 통해 가장 특수하고 그런 이유로 가장 본질적인 그 추함을, 그 원죄를 그 자신은 쉽게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포기하는 순간 그에겐 아무런 존재 가치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대한 갈망이 절망 가운데 없다 말할 수 있는가? 쟝은 끊임없이 에이미의 육체를 꿰뚫고, 그녀의 영혼의 한 귀퉁이에서 안착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신의 영혼을 내어주는 에이미의 키스를 배신하고서, 단지 에이미의 육체에만 깃들기를 원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정말로 오직 그런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절망의 실존적 상황... 끊임없이 구원을 갈망하는 만큼 배신하는 절망의 본질... 이 소설은, 그리고 이 소설의 저자인 모리악은 늘 여기에 관심이 있었던 거 같다. 그리고 그 자신도 어이할 줄 몰라, 서성이기도 하고, 어쩔 땐 고통 속에서 에이미와 같이 연민의 시선을 보내기도 하지만... 결국은 도저히 풀지 못하는 숙제처럼 남겨둔 채 글을 마친다. 그러나 단 한 가지 그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모든 것은 은총이며, 종국엔 구원에 이르는 과정임을... 물론 이 은총의 신비와 구원의 신비에 대해 인간은 건드릴 수 없기에, 그가 늘 되풀이해서 보여주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은총이었으면 하는, 구원의 여정이었으면 하는, 인간의 도저히 풀 수 없는 절망적 상황밖엔 없다. 그러하기에 그는 쟝과 에이미의 정념과 정욕 그리고 육체와 정신의 갈등을 해결하지 않고서 그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들은 풀지 못하는 신비 자체로 우리에게 남겨진 것들이며, 바로 그 이유로 구원과 은총의 여정 속에 놓여 있기에... 그 자체로 우리의 중요한 존재의 이유가 되어준다.

 

 

  모든 것은 은총이다! 비록, 에이미의 허물어진 처녀성의 버거운 자위의 대상으로써 시커먼 떡갈나무 한 그루 밖에 남은 것이 없을 지라도, 거기엔 반드시 무언가 존재의 이유가 있고, 그 무언가에게로 향하고 있는 또 다른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P.S.

 

 내가 이 책을 접했을 때는 90년대 후반쯤이었다. 시중에 프랑스 모리악 책 자체가 많이 없었는데, 특히 이 책의 경우가 그랬다. 그래서 성바오로 출판사의 '고독한 자에게 보내는 키스'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책을 어렵게 구해서 읽었다. 하지만 원제는 '문둥이에게 보내는 키스'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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