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니카의 이중생활 SE (2DISC) - 일반 킵케이스
이렌느 야곱 외,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 AltoDVD (알토미디어)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 우리가 존재하기 위해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도플갱어(Doppleganger=Double Goer), 분신, 또는 생령. 살아있는 사람의 또 다른 닮은꼴로서, 때에 따라 에고가 되기도 하고 도덕적 카운터파트로 표상되기도 한다. 정확히 일치하는 외모를 가지고 있으나 당사자 아니면 알아 볼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만나는 자는 곧 죽는다! 독일의 민담분석에서 처음 사용된 개념이지만, 이와 유사한 모티브는 세계 어디서나 발견되고 있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언뜻 제목만 들었을 때는, 그리고 청순하기 그지없는 이렌느 야곱의 알몸이 슬며시 보이는 영화 스틸을 보아도, 또 영화의 소재가 도플갱어에 착안했다는 점만 들어보아도, 분명 나는 이 영화가 아주 야한 영화이거나, 아니면 인간 심리의 한 요소를 파고드는 스릴러물일 거라고 쉽게 단정지었다. 그런데 이 영화의 감독이 키에슬로프스키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을 때, 순간 나는 '배신'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을 통해 이런 기대에 대한 배신을 철저히 맛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는 10분도 채 안 되어, 그 배신의 전모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전혀 무시되어버린 인과율, 도저히 내러티브를 잡을 수 없는 몽롱한 대사들과 배우들의 돌출적인 행동들, 표정들... 그런데도 가슴은 알 수 없는 슬픔 비슷한 감격들로 벅차올라, 영화 내내 울려 퍼졌던 단조의 애잔한 선율이 각인되어 버리는 기이한 현상... 그러하기에 맨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나는 머리와 가슴이 극심하게 이중적으로 분리되어 버리는 현상에 도저히 그 무엇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어쩌면, 단지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란 영화에서 얻은 여운의 연장선상 정도로만 이해하려고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요 근래, 우연히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모든 영화 음악을 관장했던 쯔비그유 프라이즈너의 음악을 찾아 듣다가, 다시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을 보게 됨으로써, 나는 그 이전의 내 알 수 없는 감정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이 정리될 필요성과 함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때처럼 내 마음에 오래 남겨지기를 소망하게 되었다.

 

 

  마치, 어릴 적 사라졌지만 가장 소중했던 기억들의 한 부분인양 빛바랜 영상들... 영화는 처음 그런 영상 속에서 폴란드에서 태어난 한 귀여운 소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마치 당연한 귀결과도 같이, 어떤 전조와 예감들로 가득 찬 몽롱한 장면들과 대사들이 스쳐지나간다.

 

 "기다렸던 별이 왔다. 저 아래 뿌연 것, 이제 곧 크리스마스 축제가 시작될 거란다. 보이니? 보여줘? 저기 안개가 아닌 희미한 별빛들.."

 

 "첫 잎이다. 봄이 왔구나. 이제 나무는 잎사귀로 가득 찰 거란다. 솜털 같이 연한 잎맥들.."

 

 

  성장한 베로니카에겐 이제 사라져버린 어머니의 목소리를 통해 영화는 그 서두를 이렇게 꺼내고 있다. 그런 다음, 다 자란 베로니카의 갑작스런 정사신과 함께 베로니카의 사랑과 희망들, 뭐 그런 것들에 대해 보여주기 시작한다.

 

 

  베로니카... 베로니카는 성악에 재능이 있지만, 홀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가난한 처지이기 때문에 그 재능을 피우지 못하고 있는 조금은 불쌍한 처녀이다. 그러나 매우 착한 심성의 소유자로 아버지를 끔찍이도 사랑하고 있고, 또 자신을 끔찍이 생각해 주는 안텍이라는 한 남자를 사랑하고 있기에 행복한, 이런 의미에선 다소 평범한 처녀이기도 하다. 그런데 조금은 먼 지방에 혼자 살고 있는 숙모의 건강이 안 좋아진 이유로 베로니카는 이 두 사람을 남겨두고서 떠나야만 될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우연히도 이제까지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았던 그녀에게 있어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기회로 연결된다. 왜냐하면 베로니카는 친구가 일하고 있는 한 오페라 악단에 우연히 찾아갔다가, 어느 선생의 눈에 들게 되어, 테스트를 받은 후, 예외적으로 발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베로니카에게는 한 가지 지병이 있었다. 무엇이냐 하면 심장이 약하다는 사실이었는데, 호흡이 중요한 오페라의 소프라노에게 있어서 그것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꿈을 위해 베로니카는 그 사실을 숨기고서, 오페라 공연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이런 베로니카의 죽음이 예견이라도 된 듯, 우연히 관광을 와, 시위 현장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베로니카의 도플갱어, 베로니크와의 대면을 담아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베로니카는 자신의 영혼의 쌍생아 베로니크를 단 번에 알아보고, 자신의 죽음에 대해 예견하게 되지만, 베로니크는 베로니카를 보지 못하고, 사진만 찍음으로써 그 죽음의 운명을 피해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베로니카가 자신이 사랑하던 아버지와 안텍 곁을 떠나면서 예정되어졌던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영화 속에서 베로니카는 자신의 방에서 어떤 꿈이라도 꾼 듯, 갑작스레 놀란 모습으로 일어나서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자신과 늘 함께 하고 있는 존재에 대한 예감을 고백하고, 그러하기에 이 세상에선 자신이 외롭지 않다는 이야기를 유언과도 같이 남기고선, 여행을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베로니카는 이미 아버지와 안텍의 곁을 떠나던 그 순간, 자신의 운명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오히려, 자신에게 있어 오페라라는 것이 너무나도 위험함을 알고 있었지만, 과감하게 그 무대 위로 올라서기를 결심하게 된 것이었다. 결국 모든 것은 예정되어져 있었고, 영화 속에선 그 모든 예정의 클라이맥스로써 베로니카가 주연 소프라노로 노래하게 될 음악 콘서트무대를 설정하고 있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정중한 무대 위에선 지휘자의 지휘봉이 내려가고, 모든 악사들은 장중하면서도 슬픈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메조소프라노의 비정한 독주가 울려 퍼지고, 곧이어 너무나도 아름다운 처녀 베로니카의 천상의 소리가 꿈을 꾸듯 그에 화답하기 시작한다. 서서히 메조소프라노라는 무대 뒤로 멀어져 간다. 그리고선 이젠 베로니카만이 무대의 중앙에 남아, 천상을 꿰뚫고 올라서려는 듯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러나 희미해지는 목소리는 힘을 잃어가면서, 베로니카의 표정은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주는 계속되어지고, 지휘자는 더욱 거세게 베로니카에게 노래하도록 지휘봉을 휘두른다. 다 죽어 가는 한 마리 새에게 어떤 숨겨진 힘이 있었을까? 마지막 나래를 펴는 노래는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울려 퍼지지만, 결국 베로니카는 견디지 못하고서 그대로 쓰러져 버린다. 그렇게 모든 것은 예정된 대로 다 이루어진다.

 

 

  영화가 시작한 지 30분도 안되어, 주인공이 죽어버린다면, 이제 영화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베로니카가 부활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제 본격적인 고스트 장르로 반전되는 것일까? 하지만 영화는 잔인하게도, 그대로 관속에 묻어지는 베로니카의 모습을 담아내면서, 다시는 베로니카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젠 갑작스레 프랑스로 넘어가, 그의 영혼의 쌍생아, 똑같은 외형에, 똑같은 습관들 그리고 똑같은 꿈을 가지고 있던 베로니크에게로 시선을 돌려버린다.

 

 

  베로니크... 처음, 베로니카를 잡을 때 그의 남자 친구와의 정사신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갑자기 영화는 베로니크의 정사 신을 잡아내고 있다. 그리고 이제 막 절정에 달아오른 모습을 비쳐준 후, 그 뒤에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슬픔에 견디기 힘들어하는 베로니크의 모습을 담아낸다. 같이 함께 있던 남자 친구는 영문도 모르고, 베로니크의 슬픔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는 방법조차 없기에 떠나버리고, 베로니크는 홀로 남겨져, 자신의 까닭 모를 슬픔의 원인들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다 불현듯 다시 장면이 바뀌어, 베로니크는 아마 자신의 성악 지도 선생이라고 생각되는 한 노인에게 찾아가, 모든 것을 포기하겠노라고, 고백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제 전혀 새로운 베로니크의 사랑과 꿈에 대해 천천히 그 이야기를 시작한다.

 

 

  베로니크 역시 홀아버지를 끔찍이 사랑하며, 성악에 재능이 있는, 착하기 그지없는, 다만 베로니카와 달리 폴란드가 아닌 프랑스에 사는 평범한 처녀이다. 하지만 어떤 남자와의 정사 도중 갑작스레 느낀 커다란 상실감과 부재감은 베로니크 심경에 변화를 주어, 꿈꾸던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들어버리고, 이젠 조용히 조그만 학교에서 음악선생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 운명으로 바꾸어 버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베로니크는 무언가 정체 모를 존재에 대한 예감들을 통해 알렉산드로라는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베로니크는 알렉산드로를 전혀 모르고 있다. 단지, 그는 자신의 학교에서 우연히 인형극 공연을 한 사람일 뿐이다. 그렇지만 단 한번뿐이었던 우연한 그의 인형극은 베로니크 자신에게 무언가 알 수 없는 예감을 가지게 하였고, 그것은 인형극의 주인공이었던 알렉산드로에 대한 불확실한 사랑의 감정으로까지 번지게 된 것이었다.

 

 

  다시 공연이 시작되었다. 무대는 온통 까맣고, 파리해 보이는 한 무용수 인형과 함께, 인형을 움직이고 있는 손만이 보이고 있다. 그리고 어떤 대사도 없이 무용수 인형은 자신을 움직이는 손에 의해 춤을 추기 시작한다. 마치 날고 싶은 듯, 아름답고, 처연하게... 그런데 그만 무용수는 다리가 부러져 버렸는지, 더 이상 춤을 출 수 없게 되어버리고, 급기야 슬픔에 빠져 죽어버리게까지 된다. 인형극을 보던 모든 관객들은 슬픔에 빠져 버리고, 인형극은 마치 끝이라도 난 듯, 춤과 함께 어우러졌던 음악도 꺼져 버린다. 그런데 무용수 인형이 나왔던 조그만 상자 속에서 한 남자 인형이 나오더니, 죽은 무용수 인형에게 고이 잠들라고 담요를 덮어주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그 담요 속에 완전히 가려져, 이제 영원히 잠든 줄만 알았던 무용수 인형이 날개를 달고, 나비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선 하늘 위를 훨훨 날며, 다시 춤을 추면서, 인형극은 끝을 맺는다.

 

 

  인형극 내내 인형을 조정하던 알렉산드로를 바라보았던 베로니크는 그때부터 알렉산드로와 수수께끼 같은 사랑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이 역시, 인형극과 비슷하여 조정하는 쪽은 알렉산드로가 되고, 베로니크는 마치 무용수 인형처럼 조정하는 알렉산드로를 따라 춤을 추게 되는 것이다.

 

 

  한 밤 중에 울려 퍼지는 갑작스런 전화, 그리고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먼저 끊어 버리는 남자의 거친 숨결... 갑작스레 배달되기 시작한 발신지가 적혀 있지 않은 소포들, 구두끈, 담배가 들어있지 않은 버지니아 담배 케이스, 어디인지 알 수도 없는 이상한 곳에 소리들이 녹음된 테이프... 알 수 없는 존재에게로부터 전해지는 이 수수께끼를 통해 베로니크는 조금씩 자신에게 상실되었던 존재감들을 되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우편물의 대상자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예를 들면, 구두끈은 알렉산드로가 쓴 소설책과 연관이 되어 있다든지, 이상한 곳에 소리들이 녹음된 테이프는 지금 알렉산드로가 있는 장소를 가리킨다던지... 그리고 교묘하게도 동시에 그것은 폴란드에서 존재했던 자신의 영혼의 쌍생아 베로니카의 흔적들과 연관되어 있기까지 하다. 그러하기에 그러한 조그만 물건들에도 베로니크는 알 수 없는 영혼의 떨림을 느끼게 되어, 더욱 알렉산드로에게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 수수께끼를 하나하나 풀어냄으로써 베로니크는 운명과도 같은 알렉산드로와 대면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영화는 전혀 다른 반전을 염두에 두고 있다. 바로 무엇이냐 하면, 알렉산드로의 존재가 베로니크의 예상과 달리, 자신의 영혼의 안내인과 같은 신비스러운 존재가 아닌 그저 평범한 한 남자, 그것도 매우 속물인지도 모를, 그저 그런 남자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제껏 알렉산드로가 베로니크에게 그러한 소포물을 보내고, 한밤에 갑작스런 전화를 걸고서 한 마디도 안한 행위들을 한 것은 자신의 소설 속에 일이 실제로 가능할까에 대한 실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즉, 한마디로 말해서, 알렉산드로는 베로니크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설을 위한 실험대상으로써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 사실을 안 베로니크는 충격을 먹고, 알렉산드로와 있던 자리를 그대로 박차고 나온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에게서 도망을 친다. 그러나 알렉산드로는 그런 베로니크에게 갑작스레 사랑을 느꼈는지, 베로니크를 쫓아간다. 그리고 결국, 알렉산드로는 베로니크를 만나 사랑을 고백하고, 둘은 같이 동침하게까지 된다. 그리고서 이제 둘은 서로에 대해 알고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는데, 거기서 우연히 알렉산드로는 베로니크가 폴란드에 관광을 하러 갔을 때 찍은 사진들을 보다가, 베로니카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베로니크는 이제까지의 자신의 상실감의 원인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바로, 자신의 영혼의 쌍생아 베로니카에 존재에 대해... 그리고 영화는 이상하게도 이 때문에 처절하게 울음을 터뜨리는 베로니크를 달래는 알렉산드로와의 갑작스런 정사신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베로니카의 죽음의 순간, 크나큰 상실감을 맞이하여 정사를 중단하였던 베로니크의 지난 정사를 만회하기라도 하고 싶은 듯. 여하튼 그렇게 해서 베로니크와 알렉산드로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고, 베로니카라는 존재에 대해 알게 된다. 그리고 다시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베로니크는 알렉산드로의 무용수 인형이 하나가 아닌 둘임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알렉산드로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인형극이 격렬하기 때문에 여분으로 하나 더 만든 것이라고 하지만, 베로니크는 거기서도 무언가 알 수 없는 슬픔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영화는 그러한 슬픔을 느끼는 베로니크가 알렉산드로의 손에 이끌려 한 무용수 인형을 춤추게 하는 모습과 그 밑에 누워서 버려진 다른 무용수 인형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줌으로써 베로니크와 베로니카에 존재에 대해 어슴푸레 짐작하게 한 후, 알렉산드로가 쓰고 있는 소설의 내용을 베로니크의 읽어 주는 장면을 통해 베로니크와 베로니카의 관계에 대해 무언가 설명 해준다.

 

 

  "1966년 11월 23일, 이 둘은 각기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다. 둘 다 검은색 고수머리에 고동색 눈을 가졌다. 두 살 때, 한 아이가 난로에 손을 데었고, 며칠 후 다른 한 아이가 손을 댈 뻔했다."

 

 

  영화의 마지막은 알렉산드로의 소설의 이 대사를 통해서 확실히 베로니카의 존재에 대해 알게된 베로니크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집 앞에 아직 봄을 맞지 못하고 죽어 있는 듯한 나무 밑동에 가만히 손을 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베로니카의 죽음의 순간 불렀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나는 이 영화의 내용이 이렇다는 둥 저렇다는 둥 이야기를 많이들은 편이었다. 영혼의 쌍생아 개념들, 그리고 키에슬로프스키가 이러한 개념을 통해 블루, 레드, 화이트 때처럼 유럽통합에 대한 풍자를 하였다는 둥, 진정한 자아 찾기에 관한 영화라는 둥, 기타 둥둥.. 하지만 오히려 이런 선입관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내 머릿속을 어지럽혀, 감성적이고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영화의 이미지들에 대해서 의미에 집착하게 만들어 버림으로써,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머리와 가슴을 분리시켜 놓는 기이한 현상만 일으키게 했다. 가령 예를 들면 구두끈에서 연결되는 베로니카와 베로니크의 연결고리에 대해 집착한다던가, 인형극의 의미에 대해 과대해석 한다던가... 하지만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게 됨으로써, 의미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눈을 감아, 가만히 울려 퍼지는 영화 속에 아름다운 선율들을 들었을 때, 비로소 나는 이 영화가 가 닿고자 하는 지점을 발견해 낼 수 있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우리를 대신해 사라져 간 것들... 우리 몰래 우리를 지탱해 준 소리 없는 침묵의 존재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소설 '분신'에서 골랴드낀이라는 인물이 자신의 분신에게 가정과 직장 그리고 나머지 모든 삶을 빼앗기면서 파멸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보이지 않는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어떤 공포들을 느끼고 있는 지,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비단, 그의 소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무의식 가운데 자신의 또 다른 이중 존재라고 생각되어지는 영혼들에 대해 깊은 공포를 느껴왔다. 그러하기에 정신분석학에서 도플갱어라는 용어가 지니는 의미가 죽음을 의미하고, 망령 혹은 원혼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하등 이상할 이유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가깝게, 우리들의 공포 영화만 생각해 보아도 우리는 우리의 공포의 대상이 얼마나 우리를 닮아 있는가를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던져보는 것은 왜 그 형체들이 그토록 우리 자신을 닮아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히치콕이나 다른 어떤 이들은 새와 개 등의 형상을 통해 우리 공포의 원형을 그려내기도 하긴 하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새와 개 자체도 매우 의인화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는 늘 우리를 닮은 것들에 대해 깊은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것이다. 그것은 대체 왜일까?

 

 

  어떤 의미에서 살아있다는 것은 죽어있는 것들 위에 서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모두가 알다시피 생명이란 건 죽음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반드시 생명엔 죽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하기에 만약 생명에게 죽음이 없다면 그건 이미 생명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원이라 감히 말 할 수도 없는,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이름 붙여보지 못한 미지일 뿐일 것이다. 즉, 그러하기에 우리는 늘 우리라는 존재감 밑에 깔려진 죽음이란 그림자를 떨쳐 낼 수가 없다. 한 번 생각해 보자. 왜 우리는 누군가의 혼령과 원혼을 보았다 하고, 그를 보고서 공포를 느끼는가? 그리고 왜 우리는 까닭도 없이 그 망령들이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가? 혹 우리는 거기서 앞으로 다가올 우리 자신의 죽음의 그림자 아니면, 자신의 생명을 위해 던져진 죽음의 의미를 대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하기에 그들이 자신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생명과 그 모든 것을 되찾고자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대체 우리를 위해 죽어간 것들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우리를 위협할 수 있단 말인가?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위의 물음들을 떠안고 있다. 그런데 키에슬로프스키는 도스토예프스키와 달리 그러한 우리의 공포의 대상인 분신을 통해 파멸이 아닌 생명의 길로, 그리고 소통의 길로 가닿고자 몸부림친다. 아련한 영상의 이미지들, 고인 웅덩이를 밟으며 뛰어가는 베로니카의 모습, 한 사회가 몰락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마르크스 동상이 철거되어 운반되어지는 모습, 아직 가득 잎사귀를 이루지 못하고 뜯겨진 연한 잎맥의 여릿함들... 그리고 다시 자기도 모르게 베로니크를 위해 죽어간 베로니카 그 자신... 그의 다 못 이룬 성악가로써의 꿈, 다리가 부러진 무용수 인형의 하늘 위로까지 춤추고 싶은 그 강한 열망들...

 

 

  베로니크는 사실 영화 속에서 전혀 베로니카와 상관없이 알렉산드로에게로 이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 어쩌면 그러하기에 이 영화는 매우 평범한 일상, 하지만 다소 우연이 남발하는 일상에 대해 그린 그런 영화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아무것도 아닌 일상 속에서 베로니크는 자꾸 베로니카의 흔적들을 발견해 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사랑의 대상인 알렉산드로에게로 향해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와의 만남을 통해 그 대상의 존재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면서, 베로니크는 참을 수 없는 슬픔 가운데 알렉산드로와의 격렬한 정사를 나눔으로써 사랑을 완성하게 된다. 즉, 영화는 무언가 하나가 이루어짐에 있어, 잃어버리게 되거나 소외되어버리는 것들에 대해 줄곧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 베로니크의 사랑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권리이다. 그것은 아무리 그 누가 자신을 대신해 죽어갔다 하더라도 쟁취해야할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당연함 가운데서 너무나 많은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하나의 사랑을 위해 잃어버리게 되는 것들, 상실된 것들... 그런 것들에 대해 단 한 번도 떠올려볼 생각을 하질 않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네들이 없었다면, 과연 우리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우리가 살아있고, 우리가 호흡하고, 입맞춤하는 이 것, 이것은 과연 우리만의 힘으로 스스로 얻어진 것이라 우린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 존재들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정말로 베로니카는 존재하는 것일까?

 

 

  봄을 맞이하기도 전 죽어버린 고목의 밑동에 가만히 손을 대어 보자. 가슴에 약동하는 호흡이 없다면, 양 볼을 그 마른 가지 끝에 부비며 울어도 보자. 그래도 떨어질 눈물 하나 없다면 온 몸으로 부둥켜안고서, 그 썩은 나무뿌리가 뽑히도록 서러워도 해보자. 어쩌면, 그렇다면 어쩌면, 그러한 존재들을 우리는 느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젠 그러한 존재들이 우리들의 공포가 아닌, 우리를 대신해 죽어간 사랑으로 느껴질 수 있을지도, 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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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13 0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을 워낙 좋아하다보니..
와...와!^^ 그 때야 감독보다는 배우를 좋아한 셈인데..먼저 블루,레드, 화이트.
제가 고등학생때..부터 봤다.고 하면 이런 발칙..!할지도..모르겠어요.좀 더 영화보기가 쉬워진건 졸업후이지만 ..그 땐 친구방에 비디오를 볼수있는 작은 TV와 지금은 거의 쓸일 없어 저 역시 유물로 간직하고있는 비디오..가 생기고부터.. 잠 못자던 이 밤을 건너 다니며 영화를 흡수하던 시기...
저는 원치 않아도 일찍 독립인생이었으나..막 집을 떼어내고 민달팽이가되어..사회구성원이 되고자하던 외롬을 몹시 타던 친구때문에 그 녀석의 잠머리를 지켜 주느라..한 길 건너면 내 집..내 방을 두고 새벽이슬을 맞고 골목을 다니던 계집이었으니..덕분에 취향과 상관없이 많은 영화를 봤었노라고..
우린 이따금..그리워..서로 그러면서 과거를 추억하는데..ㅋ또 빠질 수없는게...옛 영화와..커피와..칵테일..등등..이라고..
베로니카의..는 블루 보다 한참 이전..영화.로 알고있다고. 블루 포스터 아래.위..어려운 발음으로 존재하던 그의 이름..크쥐시토프..는 대충 뭉게고 키에슬롭스키..라고 읽어 대며..라빠르망과..데미지와..줄리엣 비노쉬를 사이에 두고...아슬아슬하게 그를 읽어나가던..사회초년생시절까지...몽땅..
베로니카..가..불러들이는 시간의 증거들.!ㅎㅎㅎ 모처럼..옛 일기를 복기하듯..즐거웠네요..저의 이중 생활..속
영화보기가...

몽원 2015-01-14 15:56   좋아요 0 | URL

한 때 저도 이 감독의 영화를 좋아해서 모두 찾아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 그건 저의 대학 초년 시절쯤... 군대를 제대하고 23~24살, 이 정도일 때쯤인 듯. ㅎㅎ 그러면서 마구 영화를 폭식하던 시기였던 거 같습니다. 소화도 안 되는데... 별별 이계에서 온 예술이란 장르의 영화들을 ㅎㅎ 지금은 집중력도 딸리고, 졸려서 보지도 못할 그런 영화들을요. ㅎㅎ 그래도 가끔은 그때가 그립습니다. 무언가 마구 폭식할 수 있었던, 그래서 게워내야 하는데 목구멍에 내내 걸려 고통스러웠던 그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