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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문학과지성 시인선 32
황지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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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바다에 인광을 찾아서

 

 

 

  황지우, 후배의 입에서 황지우의 시 얘기가 나왔을 때 내가 맨 먼저 떠올린 것은 그 인간만큼이나 꽤 난잡한 시들과 그의 육중한 몸뚱이 그리고 그 육중한 몸뚱이가 에로틱하다는 이인성 등이 문득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럼에도 내 기억 속에 황지우라는 시인은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라는 시로 각인되어 있는.......

 

 

  섣달 스무아흐레 어머니는 시루떡을 던져 앞 바다

의 흩어진 물결들을 달래었습니다. 이튿날 내내 청

태밭 가득히 찬비가 몰려왔습니다. 저희는 우기의

처마 밑을 바라볼 뿐 가난은 저희의 어떤 관례와도

같았습니다. 만조를 이룬 저의 가슴이 무장무장 숨

가빠하면서 무명옷이 젖은 저희 일가의 심한 살냄새

를 맡았습니다. 빠른 물살들이 토방문을 빠져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저희는 낮은 연안에 남아 있었습니다.

 

 

  자분자분 비가 내리고, 날짜를 착각해서 못 본 기말고사에서 F학점을 맞지 않기 위해 도서관에서 질척질척 몸뚱이를 비벼대며, 그래도 후배들과의 약속을 지키겠다고 처음 편 첫 장. 어떻게 된 게 첫 장부터 온통 한자투성이의 글귀들이 전면에 등장하고, 이 건 뭐 시를 읽는 것인지, 아니면 한자 찾기를 위한 것인지.......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기존에 내가 알고 있는 그의 시와 달리 겸손한 투의 이 시구들이 가슴 속에 무장무장 차오르고.......

 

 

  모든 근경에서 이름없이 섬들이 멀어지고 늦게 떠

난 목선들이 그 사이에 오락가락했습니다. 저는 바

다로 가는 대신 위안 장독의 작게 부서지는 파도 소

리를 들었습니다. 빈 항아리마다 저의 아버님이 떠

나신 솔섬 새울음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물 건너 어

느 계곡이 깊어가는지 차라리 귀를 막으면 남만의

멀어져가는 섬들이 세차게 울고울고 하였습니다.

 

 

  멀어져가는 섬들, 아버지, 그리고 솔섬의 새울음 소리, 가슴 속에 표현할 수 없는 막연한 그리움들 그렇지만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지독하게 죽음을 닮아있는 듯한 그리움의 그림자들. 그러한 죽음의 그리움에 대해 시인은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차라리 그럴 수 없는 자신의 귀를 막아 버린 것일까? 그렇게 섬이 멀어져가는 것이 아닌 자신 스스로가 섬으로부터 멀어져갔지만,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세찬 그리움은 울고, 울고 또 그렇게 울어서 자꾸 자신을 흔들어 놓는데.......

 

 

  어머니는 저를 붙들었고 내지에는 다시 연기가 피

어올랐습니다. 그럴수록 근견의 겨울 바다는 눈부신

저의 눈시울에서 여위어갔습니다. 아버님이 끌려가

신 날도 나루터 물결이 저렇듯 잠잠했습니다. 물가

에 서면 가끔 지친 물새떼가 저의 어지러운 무릎까

지 밀려오기도 했습니다. 저는 어느 외딴 물나라에

서 흘러들어온 흰 상여꽃을 보는 듯했습니다. 꽃 속

이 너무나 환하여 저는 빨리 잠들고 싶었습니다. 언

뜻언뜻 어머니가 잠든 태몽중에 아버님이 드나드시

는 것이 보였고 저는 석화밭을 넘어가 인광의 밤바

다에 몰래 그물을 넣었습니다. 아버님을 태운 상여

꽃이 끝없이 끝없이 새벽물을 건너가고 있습니다.

 

 

  지독한 죽음과 그리움의 그림자, 그렇지만 거기에 흔들리는 시인을 어머니는 붙들었고, 시인은 건널 수 없는 바다를 건너지 않은 대신 흐릿한 빛이 비추는 인광의 밤바다에 몰래 그물을 넣는다. 그러고 나서 그제야 그는 그의 아버지를 먼 바다로 떠나보낸다.

 

 

  삭망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그러나 바람 속은 저

의 사후처럼 더 이상 바람 소리가 나지 않고 목선들

이 빈 채로 돌아왔습니다. 해초 냄새를 피하여 새들

이 저의 무릎에서 뭍으로 날아갔습니다. 물가 사람

들은 머리띠의 흰 천을 따라 내지로 가고 여인들은

선생을 위해 저 우기의 청태밭 넘어 재배삼배 흰떡

을 던졌습니다. 저는 괴로워하는 바다의 내심으로

내려가 땅에 붙어 괴로워하는 모든 물풀들을 뜯어

올렸습니다.

 

 

  그 발음처럼 삭막한 죽음을 닮아있는 음력 초하루의 바람이 불고, 이미 떠나갔지만 다시 환생할 혼들을 기리며, 살아있는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를 위한 염을 하고........ 시인은 이제 그 자신에게 남아있던 모든 괴로움들을 하나하나씩 뜯어, 깨끗하게 소멸시킨다.

 

 

  내륙에 어느 나라가 망하고 그 대신 자욱한 앞바

다에 때아닌 배추꽃들이 떠올랐습니다. 먼 훗날 제

가 그물을 내린 자궁에서 인광의 항아리를 건져올

사람은 누구일까요.

 

 

  모두 살자고 바다를 배신하고 내지로 돌아갔지만, 아니러니 하게도 내륙에 어떤 나라가 어떤 인과관계도 없이 갑자기 망했다. 그리고 그 대신 앞바다에서는 때 아닌 배추꽃들이 떠오른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비 효과? 아니면 어차피 모두 죽음 앞에서는 예외가 없다는 그런 흔한 말? 그렇지만 여기서 시인은 바다로 건너가지 못한 대신 그가 넣었던 인광의 항아리를 다시 갑자기 화두로써 꺼내고 있다. 대체 무슨 연유일까.......

 

 

 

  처음, 혼자서 여행을 떠났던 것은 수능이 끝나고, 갓 스무 살이 된 해, 그러니까 아직 대학을 들어가기 전 1월 말쯤의 겨울이었다. 그 당시 나는 나 외의 모든 친구들이 재수를 해야 하는 상황, 그리고 가장 절친한 친구의 신앙에 대한 포기 선언, 게다가 그 당시 1년 중 가장 중요했던 문학의 밤 행사를 끝내고서 무언가 알 수 없는 허탈감에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사실 그렇지만 이제와 생각해 볼 때, 무엇 때문에 내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동해로 가는 밤 기차표를 무작정 끊고서, 홀로 여행을 떠났던 것인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질 않는다. 다만, 그 당시 나의 돌발적인 행보는 꽤 존재적인 질문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하기에 애초에 내 여행의 목표나 어떤 계획은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저 떠나야한다는 강박감, 그것이 나를 움직였고, 그렇게 나는 생애 처음으로 나 혼자 이제까지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동해역이라는 곳에 저녁 5시쯤 당도하였다. 사실, 무작정 동해라고 해서 표를 끊었는데, 그래서 동해에 가면 바로 바다를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동해역이라는 곳에서 바다까지 가려면 차타고 한 20분 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정말 무대책으로 온 나라 수중에 남아 있는 돈은 고작 돌아갈 때 차비와 바다로 들어갈 때의 차편 차비 외에는 1000원 남짓한 돈밖에 되질 않았다. 하지만 뭐 그게 대수랴? 내가 ‘죽느냐, 사느냐’라는 문제로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30분가량 정류소에서 기다렸다가 버스를 탔다. 그리고 당도한 곳이 바로 ‘추암 해수욕장’이었다. 날은 해가 짧은 겨울이라 그런지 벌써 어둑어둑해져 있었고, 매서운 칼바람이 달랑 마이 한 장 걸치고 온 내 몸뚱이를 후려쳤다. 그렇지만 탁 트인 바다를 보니, 정말 묵었던 가슴이 뚫리는 듯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정말로 모든 것을 여기에 던져 놓고 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1시간, 바다를 넋 놓고 원 없이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때부터 정말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로 모든 것이 돌변하기 시작했다. 일단, 점심 이 후 아무것도 먹지 못한 공복에 춥기는 얼마나 추운지, 너무 급작스럽게 와서 돈도 못 챙겨 오고, 달랑 마이 한 장 입은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런 후회도 잠시, 밤이 깊어갈수록 견딜 수 없는 추위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정말 그대로라면 사느냐가 아니라, 죽느냐로 모든 것이 변해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가진 돈 1000원을 가지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자판기 커피에서 100원짜리 유자차를 한 잔, 한 잔 퍼마시면서, 추위를 녹이고, 허기를 달래다가, 그것도 여의치 않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자동차들의 문을 건들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여기저기서 그 새벽에 커다란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하고, 개들이 마구 짓기 시작하고....... 이건 뭐 해도 해도 너무하지? 내가 뭐 자동차 훔쳐가는 것도 아닌데....... 그렇지만 다행히도 깊은 밤이라 그런지 누구 하나 깨는 이는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다시 바다로 가 모래를 덮고 잠시 누워서 견디다, 또 그것도 견딜 수가 없어서, 다시 과감하게 용기를 내어 어느 자동차 앞에 섰다. 그리고 행여 다시 경보음이 울릴까 하는 두려움으로 차문을 여는데, 이 게 어떻게 된 일인지, 나 같은 사람을 위해 누군가 맘 좋게도 문을 잠가두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차안으로 들어가 잠시 몸을 녹이는데, 역시 시동이 걸려있지 않아 그런지, 바람만 막아줄 뿐 춥기는 매한가지였다. 게다가 행여 차 주인이 올까 하는 심정에 제대로 눈을 부칠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잠깐 눈을 감았다 떠보니 시간이 후딱 1시간이 지나 버렸다. 그리고 시간은 어느덧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1시간 정도만 버티면 그토록 기다리던 동해 앞바다의 일출을 볼 수 있으리란 희망이 생겨났다. 그래서 조심스레 차 밖으로 나와 다시 바닷가로 향하였다. 그리고 그토록 까만 어둠 속에서도 희미한 빛을 내며, 변화무쌍하게 색을 달리하는 바다에 함몰될 듯 경탄하며, 그 새벽이 지나가기를 기도하였다.

 

 

  내 개인에게 있어 ‘죽음’이라고 하면, 너무 커다랗고, 막연해서, 도무지 와 닿지도 않고, 그래서 표현함에 있어 어떤 금기와도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지 잘난 맛에 사는 시인이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라는 시집 제목부터 죽음 냄새를 펄펄 풍기면서, 첫 장에 내 놓은 위의 ‘연혁’이란 시는 ‘바다’와 ‘아버지’라는 이미지를 매개로 해서 지독한 ‘죽음’의 그림자를 피워대는데....... 내 선입견 때문인지는 몰라도 왠지 역겹기 그지없었다. 맨 처음 그의 다른 시집 ‘어느 흐린 날 나는 주점에 홀로 앉아 있을 것이다’를 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자분자분 내리는 비 때문인지, 아니면 내 기억 속 밤바다의 추억 때문인지, 이 시가 가슴 속에서 떠나질 않고, 마치 어떤 숙제처럼 무언가 풀어내야함을 자꾸 속삭이는 것이다. 어두운 밤바다에서 인광의 항아리를 꺼내 올려 달라고, 아니 그 어두운 밤바다에 인광의 항아리를 반드시 집어넣어야 한다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내 뇌리 속에서 떠오른 것은 어쩌면 이 시에 짙게 자리 잡은 죽음의 바다가 죽음이 아닌 삶의 자리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다시금 해보게 되는 것이다. 선생의 자리 즉, 삶으로 돌아와져야 하는 자리, 그리고 죽음만큼 거칠고 흉포한 삶의 자리.

 

 

  청계천 2가. 횡단보도를 바삐 교차하는 사람들 사

이에서 (저쪽에서 이쪽으로) 그녀는 아이를 업고 나

타났다. 그 산이 게워낸 이물질인 듯한 하얀 안개꽃

을 아이가 쥐고 흔들어댔다. 거기서 무슨 은방울 같

은 소리가 났다. 맹인을 위한 신호 소리를 들으며

쌩쌩(生生?)한 사람들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먼저 넘

어갔다. 사라지는가 했는데 그녀는 다시 자동차 부

속품상 앞 잡상인들 틈에서 나왔다. 그녀는 한 번만

더 아이를 낳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그만두라고 했

다. 그녀는 한 번만 더 아이를 이 땅으로 보내고 싶

다고 했다. 나는 두 손을 그었다. 지금 보다시피 우

리는 서로의 발등을 밟고 있다고 나는 말했다. 뱃속

에서 아기가 죽어간다고 그녀는 화를 냈다. 이

오려면 으로 을 내려야 한다고 나는 말했다. 나

는 적십자사 헌혈차를 피해갔다. 그리고 뒤로 돌아

서서 그녀에게 정색하고 말했다. 그대 앞에 내 슬픔

이 좀 과했나보오. 그대 앞에 나의 심령과학적 자의

식이.

 

 

  ‘에서·묘지·안개꽃·5월·시외버스·하얀’이란 이 시집 가운데 시에서도 그는 5·18에서 죽은 여인을 연상시키면서 지독한 죽음에 대한 슬픔과 연민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의 그 죽음은 그냥 끝나버린 죽음이라고 하기엔 여인의 선생에 대한 욕구는 과하게 표현되어 있다. 물론, 여기서 시인은 정색하며 말한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과한 자의식이라고. 그렇지만 동시에 그는 여인에게 하나의 단서를 남긴다. 땅, 몸, 닻.

 

 

  어쩌면 죽음에 관한 깊은 시적 염을 삶이란 전혀 반대되는 이미지로 과하게 엮어내고자 나는 지금 무리한 시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내 개인의 어떤 어둔 밤바다에서 인광을 찾아내고자 하는 염과 함께 더불어 시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시를 통해 무언가를 실마리를 얻고자 하는 내 몸부림이 역시 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스무 살 그 때로 돌아가 다시 추위에 바르르 떨며 어둔 밤바다 가운데 흐릿한 빛들을 바라다본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 위에 꽃들이 둥둥 떠다니고 어떤 가련한 혼들이 잃어버린 몸뚱이로 땅에 닻을 내리는 환상을 바라다본다. 여전히 내지의 소식은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어떤 나라가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매일 어디선가 누군가는 굶어 죽어가고, 어디서는 정경들이 줄을 지어 구호를 외쳐대고....... 그런 모든 것들이 상관없다는 듯이 밤바다 위에 꽃이 피고, 서서히 날이 밝아온다. 1시간, 2시간........ 찬란할 줄만 알았던 일출... 흐릿한 날씨에 그런 일출은 도무지 나타날 기세가 없다. 땅으로 몸뚱이를 닻으로 내리려는 혼들도 이제는 밝아오는 햇살에 흐릿해져 간다. 바로 그 때 먼 구름 사이에서 붉은 햇살이 인광처럼 고개를 내민다. 그것이 무엇인지, 어떤 의미인지 도무지 알 길은 없다. 허나 왠지 모르게 가슴 속 한 켠에 저버릴 수 없는 삶의 희망의 자리를 하나 남겨 놓는다. 그리고 이제 나도 환상으로 둥둥 떠다니던 내 몸뚱이를 찾아 땅에 닻을 내린다. 집으로 돌아간다. 그렇지만 이제 매일 떠나가는 삶임을 그러한 여정임을 깨달아 안다. 마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라는 시집의 제목처럼, 새들이 뜨는 이 세상이 여전히 대지의 중력에 묶여 늘 그대로이지만, 그래서 언젠가 새들도 대지의 중력에 그대로 이 세상에서 떠버리겠지만, 하루라도 아니 지금 이 순간이라도 대지의 중력을 벗어나 떠있는 이 대기의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한 번 들이 마셔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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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13 0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풍장...과 연가와 같은 즐거운 편지˝ 사이의 그 거리..란...즐거운 편지로 만난 황지우.를
진정 내 안에 살게한 건..풍장을 알고 이후.부터..연가적 ..편지로는 가 닿지 못했던 그였다면..한 참이나..흘러..풍장을 그리는 그의 시를 알고..이후에는 편지 조차도 모두 그러안을..수있는 시인의 세계.확장.
나머지는 그저 허겁지겁..삼키기..바쁜..허기가되었다.고
 
변신.시골의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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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변신' - 변신에 관한 변명

 

 

 

 

  카프카의 변신에 대해 생각해 보기에 앞서, 보통 변신이 가지는 의미 혹은 목적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 보고 싶다. 이를 위해 잠깐, 잘 알려진 우습지도 않은 군대개그를 하나 들먹여 보고자 한다.

 

 

  군인의 운전 시, 좌석에 높은 분이 있을 경우 항상 복창 (원래는 명령을 확인했다는 의미에서 반복해서 말한다는 의미이지만) 이라고 해서, 미리 앞으로의 행동을 얘기하는 것이 철칙이다. 즉, 예를 들어 오른쪽으로 회전하기 전에 미리 "우회전하겠습니다!" 말하고 오른쪽으로 돌고, 왼쪽으로 회전하기 전에 "좌회전하겠습니다!" 말하고, 좌회전하는 식의 행동을 의미한다. 기어를 바꿀 때에는 "2단으로 변속하겠습니다!" "3단으로 변속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런데 운전병으로 군복무를 하고 있는 모 이등병에게 어느 날, 별 두 개짜리(스타=장군)를 태우고 운전을 해야 하는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일개 이등병이 장군을 태우고 운전해야 하니, 그 얼마나 떨리겠는가! 그 옆에 몇몇 대령들도 함께 할 예정이었고. 당연히 모 이등병은 그 시작부터 바짝 긴장했고, 출발하기에 앞서 겨우 떨리는 손으로 차의 핸들을 잡았다. 곧 이어 장군이 뒷좌석에 앉았고, 대령들도 자리에 함께 했다. 이윽고 이등병은 운전대를 잡고 운전을 시작했다.

 

 

  "출발하겠습니다!"

 

 

  부르릉~~

 

 

  그런데 이등병은 갑자기 변속이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당장 기어 변속은 해야 하고 또 복창도 해야겠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는 생각나는 대로 복창을 하기 시작하였다.

 

 

  "2단으로 변신하겠습니다!"

 

 

  "3단으로 변신하겠습니다!"

 

 

  ^^;;;

 

 

  옆에 탑승했던 조교의 표정은 굳어졌고, 대령들은 피식거리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군은 표정 하나 변함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해, 다들 내릴 시간이 되었다. 그때 장군이 조용히 운전병을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자네~ 합체는 언제하나?"

 

 

  우스갯소리지만 이 개그 가운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변신에 대한 목적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합체!! 비단, 어릴 적부터 우리가 즐겨 봐 온 만화에서 뿐 아니라, 우리의 무의식 가운데는 늘 이렇게 변신은 합체란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남자와 여자가 변신을 할 경우, 사실 그 둘의 궁극적인 목표는 남녀 합체이다. 그리고 어린이가 청소년에서 어른으로 변신하는 이유 역시, 그것은 이 사회와의 합체나 혹은 또 다른 의미로써의 합체를 원하기에, 변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늘 무언가 변신하기를 원하고, 또 그것을 통해서 무언가와 합체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자칫하면 이런 변신과 합체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또 무언가를 상실하기도 한다. 다시 그러한 예를 들기 위해, 또 우습지도 않은 개그를 하나 들어보기로 하자.

 

 

  이 땅에서 선하게 살다 죽어서 천국에 올라간 세 사람이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셋에게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고, 자신이 소원하는 바를 이야기 해보라고 하였다. 첫 번째 사람이 나와서 이야기하기를

 

 

  "별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그를 별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사람이 나왔다.

 

 

  "전 왕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그를 왕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사람의 차례가 왔다. 그런데 그는 조금 욕심이 많아서인지, 별도 되고 싶고, 또 왕도 되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들어, 하나님께 그 두 가지를 모두 간청하게 되었다.

 

 

  "전 별도 되고 싶고. 왕도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그를 스타킹이 (별=스타, 왕=킹 => 스타+킹=스타킹) 되게 하였다고 한다. -,-;;

 

 

  이 역시 매우 황당무계한 이야기이지만, 여기서 우리는 변신을 통한 합체라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지 않는 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다시 아주 쉽게 생각해서, 우리가 어린이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사회와의 합체라는 긍정적인 기능을 갖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그전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괴물로의 변신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가 어릴 적, 가장 증오하고 역겨워하며 두려워했던 존재인 몬스터, 바로 그 끔찍한 몬스터가 되어 있는 우리 자신을 우리는 쉬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카프카의 변신은 어떤 범주에 속한 변신일까? 이제 본 이야기로 넘어가 보기로 하자.

 

 

  카프카의 변신을 처음 읽었을 때는 고등학교 적이었다. 그 당시 나는 친구들과 함께 매 주 독서 토론회 비슷한 모임을 갖고 있었는데, 그 때 우리는 이 카프카의 변신을 택했고, 그래서 이 '변신'이란 주제를 통해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그 때는 그러한 변신에 대한 연민만 앞섰을 뿐, 정말로 카프카의 변신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 묻거나, 알기는 힘들었던 듯싶다. 그러나 대학 때, 학교에서 문학 동아리 회장이었던 나는 변신을 주제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게 되었고, 그 때문에 변신에 대한 새로운 생각들과 물음들을 가져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아직도 나는 카프카의 변신이 어떤 변신인지에 대한 물음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무엇을 위한 변신이었을까? 아니, 왜 변신한 것일까?

 

 

  사실 카프카의 변신을 읽어보면, 나의 위의 물음에 대한 어떠한 힌트도 나오고 있지 않다. 아니, 카프카는 그런 물음에 대해 거의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거나, 관심 자체를 두고 있지 않는 듯하다. 그저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보니까 그레고리는 끔찍한 벌레로 변신이 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사회에서, 가정에서 철저히 냉대 받다가 죽어 버리게 될 뿐, 거기에 별반 특이한 물음이라든가 내용은 보태어 있지 않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흔히 우리 주위의 치매 환자 이야기나 혹은 조금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카프카의 변신을 이해해왔고, 사실 어떤 의미에서, 카프카의 변신은 그것에 대한 알레고리로 한정짓는 것이 가장 합당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왜 불현듯 내게 그 변신이 그레고리 자신 혹은 카프카 자신이 가장 원하였던 변신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즉, 그 변신을 통해 사회와 가정에 철저히 냉대받기를 그레고리 그 자신이, 혹 카프카 그 자신이 원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가 늘 소외에 관해서 이야기 할 때, 소외는 내부가 아닌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이라 생각할 경우가 더러 있는 듯하다. 하지만 때론 소외라는 것은 철저히 내부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을 나는 잠시 생각해보고 싶다. 모든 사람과 다르다는 것!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매우 특별한 의미이다. 타인과 자기 자신과의 분명한 경계를 구분지음으로써, 자기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해 내는 일, 어쩌면 모든 사람과 다르다는 그 소외감이란 것은 이러한 자의식 속에서 비롯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즉, 소외라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철저히 자기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발견해 내는 일이 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프카는 왜 그러한 변신의 이유를 숨기고서, 변신을 통한 사회와 가정의 냉대에 더욱 초점을 맞춘 것이었을까?

 

 

  바로 여기서, 우리는 앞에서 이야기한 합체에 대한 의미를 떠올려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자기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해내고 싶다. 그리고 그것은 극심한 경우 타인과의 철저한 결별한 통한, 소외라는 변신을 통해서만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그러한 변신의 이유엔 항상, 그 소외의 이유엔 항상, 합체라는 목마름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철저히 자기 자신을 소외시킴으로써, 모든 타인들을 지옥으로 생각하고, 그래서 오직 자기 자신의 존재와 실존만을 이야기하고 고백한다고 하여도, 우리 뇌리 언저리에 남아 있는 합체에 대한 동경을 우리는 쉬 지울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카프카의 변신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원점으로 돌아와, 우리는 다시 차근차근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게 된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카프카를 통해서 대변되는, 우리 모든 변신의 목마름에 대한 그 변명을 감히 감행해보고자 한다.

 

 

  카프카 그 자신은, 모두가 잘 알겠지만, 비교적 이른 나이에 병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죽는 그 순간까지 치열하게 글을 썼으며, 또 그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모든 작품들을 불살라 버리고, 남은 작품들마저 친구에게 불살라 줄 것을 부탁하고 세상에 안녕을 고하였다. 그러하기에 그의 이런 점들만 살펴보았을 때는 분명히,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변신은 철저히 자기 소외를 위한 변신이었음을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의 글이란 것도 항상 깊은 굴을 파거나, 단단한 성을 지어, 그 속에 갇히는 일이 대부분이었기에, 우리는 그의 삶과 그의 글을 통해서 모두, 그의 변신에 대한 이견을 달리 붙여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왜 카프카 그 자신이 그 변신을 끔찍한 벌레로써 밖에 표현을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게 된다. 만약 그의 변신이 성공적이었다면 카프카 그 자신이 자신의 변신을 벌레라고 표현할 수 있었을까? 카프카는 낮에는 법원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철저히 자기 삶을 충실히 이행함과 동시에, 밤이면 밤마다 시간을 정해 놓고서 평생 동안 철저히 지키면서 글쓰기에 몰입했다고 한다. 달리 말하면, 그만큼 그의 변신에 관한 열망은 대단했으며, 치열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변신은 그가 어떤 합체를 꿈꾸었던 간에, 그가 생각한 바와는 달리 전개되어진 듯싶다. 그러하기에 그는 늘 자신의 작품들에 만족하지 못하였고, ‘변신’이란 글을 통해 자기 자신을 끔찍한 벌레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그런 이유들로 인해, 그는 그의 작품 '변신'에서 변신의 이유를 밝히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의 변신은 그가 결코 원하고자 했던 변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어느 날 그렇게 변신이 되어져 있었고, 그러하기에 그 어느 날 심판의 형장으로 끌려갔던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그가 최후에 선택한 죽음과의 합체를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별이 내게 묻는다.

 

 

  "언제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는 거지?"

 

 

  "넌 닿을 수 없어. 그렇기 때문에 난 너하고 하나가 될 수 없어."

 

 

  "하지만 넌 늘 나에게 닿으려 밤마다 몸짓하며, 기도했잖아."

 

 

  "아니야. 그건 너를 위한 기도가 아니었어. 그건 나 혼자 견디기 위한 자위였을 뿐이야."

 

 

  "그럼 너는 나와 하나가 되고 싶지 않은 거니?"

 

 

  "아니... 하나가 되고 싶어..."

 

 

  "그러면 이제부터 하나가 되었다고 믿으면 돼. 알겠니?"

 

 

  "............"

 

 

 

 

  별이 지고, 나는 다시 밤을 기다려 본다. 카프카가 치열하게 끔찍한 벌레로 변신을 하고, 죽음으로 내려갔던 그 밤을 별과 함께 지새워 보기 위해....... 그리고 내 자신도 언젠가는 어머니 자궁과도 같은 안온한 죽음과의 합체를 이루어 내기 위해....... 하지만 만약 치열하지 못하다면, 그러한 죽음과의 합체에서 두려워 이탈해 버릴지도, 그렇게 아무 의미 없는 죽음이 되어 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러하기에 그 밤, 조금 더 치열해지기를, 조금 더 버거워지기를... 그래서 별과 하나 될 수 있음도 믿어 볼 수 있기를, 두렵게 몸짓하며,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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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13 0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역시 변신을 고등학생때..읽었고..나중에 졸업하고 잠시 서점에서 알바를 하며 다시 ..본 기억이 있어요. 우리의 시간이 겹치지는 않겠지만..저의 글읽기는 누구와 나눌 형편이 못됐었어요.잠시 그런 때가 있긴 했지만 그 반가움..과 설렘이 내내 행복을 준 건 아니어서..그 무렵은 세계문학보단..국내 작가들편에..또..영화와..음악에..위로를 받곤..했어요.영원한 벗은..없을지도 라며..
외로워했고요. 변신에 대한 제 생각은 스스로가 벌레로...더는 누군가에게 보여지지 않기를 꿈꾸며 자유를 갈망한 카프카의 희망으로..가득차 보였어요.미세하여 번식은 끊임없이 이뤄지며..도처에 있으나 그 있음을 들키지 않음으로 생을 살아갈 수 있는게 벌레...
그도 그런 바람을 원하였다고..계속되기를..
아무도 모르게..그의 부스럭거림은 그저 못본척 외면 되어지길..그래야..연장되어갈 테니까..그도 시선에서 벗어나고싶다..한 낱 미물이 되서라도..그랬던건 아닐까..하면..너무 단세포적 접근이라고 할지요..!ㅎㅎㅎ

몽원 2015-01-13 20:52   좋아요 0 | URL

아니오. 무척이나 새로운 시각!! 같습니다. 이 글 역시 오래 전 글이라 지금 다시 카프카의 변신을 보면 저도 어떨지 기실 잘 모르겠어요~ 님의 말씀대로 합체가 아닌 벌레 그 자체에 대한 변신에 대한 갈망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혀 단세포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카프카스러운 느낌처럼 들리네요^^

[그장소] 2015-01-13 0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단.삼단..보면 일단 벌레이길 희망하다.보다..더 근본의 뭔가 있었겠지만..오늘은 일단까지만...합니다.

[그장소] 2015-01-13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프카..를 연상케하는 국내 작가들이 간혹 있어요.잠깐씩 비춰지는 광각이긴 하지만.. 그래서 변신은 여러번 곱씹게 되더라고..하지만 이미 제 안에서 변태한 카프카를 그라고 믿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몽원 2015-01-13 21:12   좋아요 0 | URL
음.. 제가 아직 소천해서 국내작가들을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기호의 <수인>이란 작품을 읽으면서, 그리고 서유미의 <당분간 인간>이란 단편집을 보면서 카프카를 떠올리긴 했습니다. 하지만 님 말씀대로 이 역시 제 마음속 카프카가 변태해서 마음대로 투사한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네요^^;
 

 

 

 

늙은 창녀의 노래 - 참을 수 없는 구토증에 대하여

 

 

  90년대 중반쯤, 그러니까 내가 대학에 입학해서 얼마 안 된 그 때, 대학가에선 한 연극 한편이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양희경이 혼자 나와서 독백으로 연극을 하는 모노드라마인데, 엄청나게 감동적이고 짠하다고 들었다. 하지만 원래 연극 관람 같은 것은 팔자에 없던 탓에, 나는 원작 소설로 된 '늙은 창녀의 노래'를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원작자인 송기원에 대해 그 자신의 표현대로 참을 수 없는 욕지기를 느끼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은 도리어, 송기원이란 사람에 대한 끌림의 다른 표현이었는지, 나는 그 후로도 내 마음 속에서 '늙은 창녀의 노래'를 쉬 지우지 못했고, 그 소설과 함께 거의 동시에 출간된 송기원의 '마음속 붉은 꽃잎'이란 시집을 연방 입안으로 되뇌게까지 되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그것이 나의 정직성에 대한 문제와 함께 흐드러지는 꽃잎처럼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기에, 이쯤에서 늙은 창녀로 대변되는 그의 고백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고자 한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10년이란 세월동안 창녀촌을 떠돌며 방황하던 한 남자가 어느 날 우연히, 목포 뒷골목에서 하룻밤을 같이 지새울 늙은 창녀를 찾게 된다. 그리고 늙은 창녀와 마주하게 되면서, 소설은 늙은 창녀의 이제까지 살아온 삶에 대한 애착과 회한에 대해, 그녀의 목소리만을 통해 일방적으로 독백을 시작한다.

 

 

 '나이 마흔이 넘응께 이런 징헌 디도 정이 들어라우. 열여덟살짜리 처녀가 남자가 뭔지도 모르고 들어와 오메, 이십년이 넘었구만이라우. 꼭 돈 뗌시 그란달 것도 없이 손님들이 모다 남 같지 않아서 안즉까장 여그를 못 떠나라우. 썩은 몸뚱어리도 좋다고 탐허는 손님들이 인자는 참마로 살붙이 같어라우.'

 

 

  이십 년 동안 창녀 생활을 했으면, 흔히 생각하기를, 닳고 닳은 회한뿐이거나, 삶에 찌든 독기뿐일 것이라고 쉬 단정하기 쉽겠지만, 어이된 게 이 순박한 아짐씨 전혀, 그런 것에 물들지 않은 채, 자신의 모진 삶 가운데서도 무언가 의미를 발견해 낸 모양이다. 그러하기에 비록 많이 배웠지만 10년 동안의 방황에, 허기로 가득 찬 손님인 남자를 다독이며, 위로해 주기위해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들을 천천히 풀어내기 시작한다.

 

 

  '열여덟 꿈꾸는 나이로, 보리밭 이랑에 앉아 나물을 캤어라우. 보리밭이나 나물만 어디 푸르렀간디요. 가난하지만 때묻지 않은 제 웃음도 푸르게 눈부셨지라. 아직 누군한테도 뵌 적 없는 젖가슴은 이랑, 이랑을 메울 듯이 부픈 것이 터질것만 같았서라우. 그래서 손님모양 맘이 허해서 떠도는 사람을 보먼 한잔 술에 스무 해 전 내 열여덟을 담아주고 싶어라우. 차갑게 식어뿐 젖가심 저 깊이 그때의 보리밭 이랑에서, 처음 가심을 열어 손님모냥 허한 맘을 채와주고 싶어라우.'

 

 

  그렇다고 그녀에게 회한이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열아홉의 나이로 멋도 모르고 서울로 상경하려다, 중간에 한 남자에게 사기를 당해 목포로 끌려가, 강제로 창녀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천성이 워낙 순박했던 그녀는 나중에 자기에게 사기를 쳐, 자신을 창녀로 만든 그 남자마저 측은히 여기고 사랑하게 된다. 심지어 그 이유로 잠시 창녀 생활을 접고서, 그 남자와 함께 살게까지 된다. 그렇지만 임신을 했다는 이유로 다시 그 남자에게서 버림받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아이만 낳으면 된다고 생각한 그녀는 그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고서, 아이 하나에 자신의 모든 존재가치를 건다. 그렇지만 무슨 놈의 팔자인지, 그만 안타깝게도 아이는 죽은 채로 태어난다. 이에 그녀는 크게 절망하여 한 동안은 실성기까지 나타내보이게 되지만, 결국은 그것마저 체념하게 된다. 그리고 이젠 누구도 잘 찾지 않는 늙은 창녀로써의 삶을 순응하면서, 살아오고 있던 것이다.

 

 

 '정을 주는 일이 인자는 무섭들 않어라우. 지아비도 자석도 없이 몸 폴아 살어온지 벌써 스무 해! 한번도 맘속 옷고름 푼 적 없이 숱한 밤과 숱한 사나들만 먼 강물모냥 흘러왔다 흘러가고 몰라붙는 개울창의 모랫바닥으로 혼자 누워 있제만 정을 주는 일이 인자는 무섭들 않어라우. 사는 일이 추와서 떠는 손님을 만나면 썩은 몸뚱어리 쩌 깊숙이 살어오는 온기... 끝끝내 맘속 옷고름 풀게 함시롱 몰라붙는 모랫바닥을 적시는 흥건한 온기...'

 

 

  아니, 심지어 그녀는 늙은 창녀로써의 삶의 순응을 넘어서,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 창녀생활을 통해 몸으로 드리는 기도와 같은 의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몸뚱어리도 인자는 어떤 의미가 되고잡어라우. 영혼이 아니고 바로 썩은 몸뚱어리 말이여라우. 누구를 사랑한다등가 사랑을 받는다등가 그런 의미가 아니고만이라우. 스스로 한번도 아께본 적이 없는 몸뚱어리제만은, 시방 왜 이리도 소중해진다요? 숨가쁜 어떤 골목에서는 썩은 몸뚱어리마자 없어서, 갈증 땀시 죽어가는 사나가 있을 것만 같어라우.'

 

 

  이제 10년 동안을 방황을 한 그녀의 손님인 남자는 그녀의 이 의미를 향한 몸짓을 통해 하나의 사랑을 깨치게 된다.

 

 

 '맘속 맺힌 매듭 풀지를 못해서, 밤마둥 헤매제만 돌아갈 디가 없어서, 헤어진 사람들은 별빛보담도 아득해서, 싸구려 막쇠주에도 취할 수가 없어서, 거리에 불빛들이 웬수보담도 짚어서, 내딪는 걸음마둥 끝끝내 허방을 짚거든, 짓뭉게덱기, 짓뭉게덱기, 나라도 기억해라우. 역전 뒤 힛빠리 골목에 누워, 스무 해 동안 아직까장 지달리고 있는 나라도 기억해라우.'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남자는 한 남자가 아닌 그녀를 스치고 간 모든 남자로써, 사랑의 폭과 넓이가 온 세상으로 확장된다.

 

 

 '내 몸뚱어리를 스치고 지나간 그 많은 남자들이 단 한 남자로만 밝아오는 저 환장한 보름달!'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내려 간 후, 내가 느낀 감정은 글의 서두에 밝힌 욕지기였다. 원작가인 송기원 역시 '마음속 붉은 꽃잎' 이란 시집을 통해서, 자신이 늙은 창녀를 처음 보았을 때 심한 욕지기를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내게도, 그리고 송기원에게도, 나아가 늙은 창녀를 읽고 본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이 토할 것 같은 메슥메슥한 느낌은 단순히 역겹다는 차원에만 머문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히 구토라는 차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눈물 그리고 회한, 나아가 자기 모든 존재의 '토함'이라는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이 소설을 끝까지 다 읽고 나서, 나의 감정은 사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복잡다단함 그 자체였다. 그렇지만 역시, 처음 느꼈던 소설 속에 손님인 남자로 대변되는 '송기원'에 대한 역겨움은 쉬 지울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이유가 어찌됐든 10년 동안이나 창녀촌을 일부러 돌아다니며,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해 내려 했던 그에 대해 도저히 심정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송기원은 1980년에 광주민주화운동을 주도한 배후세력으로 신군부에 의해 고 김대중 대통령, 고 문익환 목사 등과 함께 소위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투옥된다. 그로 인해 그의 어머니가 월문리에서 자진함으로써, 자신 안에 심각한 어머니의 부재를 창녀들을 통해 찾고 싶었을는지도, 그리고 그 극심한 자괴감에 자신을 밑바닥 진창에 뒹굴도록 놓아버리고 싶었을는지도,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창녀를 통해 그러한 어머니의 부재와 자신의 존재를 찾고자 했던, 그 행위 자체는 역겹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그가 물랭 루주를 그린 19C 유명한 인상파 화가 로트레크처럼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인 불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원래부터 그런 밑바닥 생활에 길들여진 사람도 아닌데, 일부러 거기로 가서 자신의 존재의 기반을 찾는다는 발상 그 자체가 얼마나 치기 어린지....... 게다가 감히 그 치기 어린 어릿광대짓을 통해 늙은 창녀로 대변되는 밑바닥 인생의 짠한 고백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도용하다니....... 어떻게 그 모든 작태들을 역겹지 않다 말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지만 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차마 그를 욕할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역겨움이 아닌, 다른 무언가 알 수 없는 뜨거운 감정으로 그를 대면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바로 송기원이 늙은 창녀를 통해 자신의 얼굴을 보았듯이, 송기원이란 사람을 통해 나는 내 자신의 진실과 욕망을 본 까닭이었다.

 

 

  스무 살 적, 친구와 친구의 여자 사이에서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그 둘을 배신하고서, 친구의 여자와 관계를 가졌던 나는 결국, 그 친구의 여자와 헤어지게 되면서, 이상스런 체험을 하나 가지게 되었다. 아마 견딜 수 없는 극심한 죄책감과 상실감이 뒤섞여,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정말 기이하기 짝이 없는 체험이었다.

 

 

  군대를 조기 제대한 나는 그녀를 만나서 그녀가 다시 나의 친구에게로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하지만 어차피 늘 관계를 맺으면서도 그녀와 나는 서로 친구임을 다짐하던 사이였기에, 나는 그것을 당연한 귀결처럼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그간 그 친구를 마음속에 품고서도, 그녀가 나와 일종의 연민 때문에 관계를 맺어왔다는 사실은, 내 자신을 매우 비참한 기분으로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그 때문에 조금 취하고 싶은 기분에, 그 날 나는 혼자서 술을 들이켰다. 소주 한 반병이나 마셨을까? 원래 주량이 소주 2~3병 가뜬했던 나이기에 전혀 취기도 돌지 않았고,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면서, 모든 것이 선명해 지는 것이 더욱 씁쓸한 기분만 가득하였다. 하지만 뭉실하게 헝클어지는 드가의 그림처럼 흐느적거리는 세상의 자태를 보고 싶어, 나는 취한 척 거리를 내달렸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 그대로 잠이 들었다 깨어났는데, 갑자기 구토가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구토가 다소 평소와 그 성격이 달랐던 것은 한 번 두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십 번으로 이어졌고, 내 감정에 따라서 계속되어졌다는 점이다. 사실 술을 별로 마신 것도 없었기에 나올 것도 없어, 나는 연방 헛구역질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다시 조금만 슬픈 감정이라던가, 이상한 맘이 들면, 계속 구토가 치미는 것이었다. 나올 것이 없는데도 계속, 끊임없이,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다 사람이 죽을 때 보인다는, 이제까지의 모든 삶들의 영상들이, 한 찰나에 수십 컷의 필름이 돌아가는 것처럼 환영으로 나타나지고, 다시 참을 수 없는 구토증이 치밀어 올라, 변기통에 헛구역질을 시작하는데, 뚝뚝 피가 떨어졌다. 그리고 변기통에 핏방울이 천천히 스며들면서 나는 안정을 되찾게 되었고, 그 지루했던 몇 시간의 구토를 멈추게 되었다. 훗날 그것이 나의 젊은 날의 나쁜 피가 빠져나간 것이라고 스스로 결론짓기는 했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왜 나는 구토를 참을 수 없었을까? 그리고 왜 나는 내 자신의 피가 흐르기까지 그 구토를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던 것일까?

 

 

  사르트르는 자신의 소설 '구토'를 통해서 세계에 대한 한 개인의 구토증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워낙 지루하고 어려운 소설이었기에, 사실 내가 그것을 감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 분명한 것은 우리는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참을 수 없는 구토증 아래 놓여있다는 것이다. 프로이드를 통해선, 이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세계의 본질적 원리로써 제시되어지고 있다. 남자가 여자를 보며 느끼는 구토증, 그리고 남자든 여자든 배설하고 싶어 하는 구토증 등등. 그러하기에 우리는 글쓰기를 하나의 배설이며, 멈출 수 없는 구토증이라고도 한다. 아니, 비단 글쓰기 뿐 아니라, 요즘 시대에서 우리의 모든 것은 소비라는 구토증 혹은 성적 욕망의 구토증으로 대변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이 구토증이 한 번으로 끝나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구토증을 불러일으키는 중독현상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저히 멈춰지지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하기에 어떤 이들은 이런 멈출 수 없는 구토에 대한 염려와 기우로, 그것을 참아내고, 자신에게 하나의 응어리처럼 만들어, 의미가 되어 질 때 구토할 것을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그 누가 우리에게 광기를, 그 구토증을 참고 견딜 길을 가르쳐 준 적 있단 말인가? 아니, 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그 구토증을 참아내고, 하나의 의미되는 몸짓으로 토해내어야 한단 말인가?

 

 

  위의 물음들은 나의 오래된 화두들이다. 그렇지만 실상 나는 구토에 대한 그 괴로움과 역겨움을 너무나 두려워한 나머지, 이제껏 피해왔고, 지금 이 순간도 분명 그 이유로, 구토가 아닌 하나의 의미되는 아름다움을 머릿속으로 계산해 놓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찌됐든 간에 구토를 하지 않고서는 그것이 난잡함인지 혹은 아름다움인지조차 확인할 길이 없다는 점이다. 바로 이 때문에 송기원의 구토에 대한 그 욕망은 사실 나로서는 부럽기 짝이 없는 용감함이었다고 감히 고백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구토를 당하는 대상자에 대해선 묵인한 생각임에는 분명하다. 사실 당연히 우리는 송기원의 구토의 행위를 변태적이고, 편협한 것이라고 보아야만 한다. 그러나 그가 그 스스로 수십 번 게워 내면서, 모두에게 감히 보여 준 늙은 창녀를 통한 구토는 결코 추잡하지 않았다. 이것이 비단 나의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나에게는 그것은 아름다운 구토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연방 허방을 짚어내며 헛구역질을 하던 나의 구토와는 달리, 자기 자신의 모든 존재의 '토함'이었고, 그러하기에 늙은 창녀와 함께 어우러진, 멈출 수 있는 구토였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늙은 창녀를 처음 보고서 느낀 그 욕지기대로 바로, 조급하게 그녀에게 구토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만 집착했다면, 그는 그녀의 모든 존재의 구토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수년간 계속 게워 낸 그 구토 끝에, 그는 늙은 창녀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게 되었고, 아울러 구토를 멈춰내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구토가 끝났다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젠 그 참을 수 없는 구토증에 대해 참고 견딜 길을, 그리고 그 난자하게 헝클어진 토사물 가운데에서도 무언가 아름다움이 있음을 그는 깨달았던 것이다. 바로 그래서 그는 그 늙은 창녀를 통해, 자신이 감옥에 가 있을 동안 자진한 어머니를 보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자신의 씻을 수 없는 恨을 감히, 그 모든 것이 사랑이었다고 그 늙은 창녀를 통해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여기에 의문은 남는다. 무엇이냐 하면, 위에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구토의 대상이었던 늙은 창녀 바로, 우리들의 어머니들에 대한 철저한 희생의 강요에 관한 문제이다.

 

 

  오랫동안 나는 자기 자신의 욕망에 대해 정직해 져야 한다는 것에 대해 거부반응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스무 살 적 그녀에게 뱉어내고 싶었던 그 구토들을 나는 다하지 못하고, 혼자서 게워 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게도 된다. 그리고 아직도 연방 허방을 짚으며, 헛구역질만을 계속하는 내가 도저히 이 구토를 참아내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구토에 대한 나의 욕망들에 대해서 너무나 정직하지 못했다는 것, 바로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구토라는 끔찍한 토사물들을 보기엔 나는 그 동안 너무나 아름다움에 집착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란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가 닿지 못하는 이상에 대해 동경한다는 것, 바로 거기서 오는 비극적 아름다움이었다.

 

 

  우리는 흔히 이상이라 할 때 이데아라는 세계를 떠올려 보곤 한다. 불완전한 이 세계에 완전한 형상이며, 실체, 그리고 완벽함 그 자체.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그것은 이 세계에 보이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들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아름답고, 고결하다 말한다. 그리고 심지어 자신은 그 길을 못 가더라도, 당신들은 그 길로 가서 끝까지 목마르고 비극적이어 달라고 바라기까지 한다. 그러하기에 그 길을 가는 당신들은 늘 아름다워 보이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 사랑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하고서, 그 길을 끝까지 가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그 길 위에서 목마름으로 사라져 버리곤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당신들이 바라던 것이었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을까? 그 길에서 사라지기까지 당신들은 수십 번 아니 수만 번 구토를 하고 싶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멈추기를 간절히 바라지 않았을까? 당신들의 본질이 정녕 그렇게 아름답고 고결한 것이라 당신들은 감히 말할 수 있었던 것일까? 당신들은 정말 누군가의 희생과 상처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완벽함 가운데 있을 수 있었단 말인가?

 

 

  숱한 물음들과 의문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지금 나는 다시금 스무 살 때와 같은 구토증을 느껴 보게 된다. 비록 이젠 그녀라는 대상도 없고, 누군가처럼 늙은 창녀라는 대상도 없지만, 구토증은 참을 길이 없고, 그것은 아직까지 내 관념에선 추잡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렇지만... 그렇지만... 아무 의미 없는 헛구역질이라도 나는 이제 구토를 시작해야 할 것만 같다. 그리고 그것이 비록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하는 것일지라도 정직하게 다가서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그래서 그 지저분하고 더러운 모든 토사물을 토해내고 게워내어, 거기서 참고 견딜 길을 배우고, 또 하나의 사랑을 배워서, 나도 누군가의 허기와 토사물들을 받아 낼 수 있는 썩은 몸뚱아리가 될 수 있기를, 그러한 몸짓이라도 될 수 있기를, 염치없게도 자꾸 바래보게 된다.

 

 

 

 

기도

 

 

제 몸뚱어리도 이제 어떤 의미가 되고 싶습니다.

영혼이 아니고 바로 썩은 몸뚱어리입니다.

누구를 사랑한다거나 사랑을 받는 그런 의미가 아닙

니다.

스스로 한번도 아껴본 적이 없는 몸뚱어리지만, 지

금 왜 이리 소중해지는지요.

숨가쁜 어느 골목에서는 썩은 몸뚱어리마저 없어,

갈증에 죽어가는 이가 있을 것만 같아요.

 

-------송기원의 '마음속 붉은 꽃잎'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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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묘지 민음사 세계시인선 4
발레리 지음, 김현 옮김 / 민음사 / 197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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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 - 바다에서 불어오는 거친 마파람을 맞으며

 

 

  우리에게 시인 그 자체보다 ‘바람이 분다. 이제 살아야겠다.’라는 경구로 더 잘 알려진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를 이해하는 것은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 동양인의 사고구조로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시라는 것이 어떤 아름다움과 서정성 그리고 진실을 향한 외침이거나 사회적 개혁을 위한 울림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프랑스 시인들, 특히 이 발레리의 사변적인 사고들을 어떻게 시로 받아들여야만 할까? 게다가 이 종자들은 어떻게 된 게 사변을 그냥 사변으로 말하지 않고 풍경을 빌려 사변을 표현한다던가, 갑자기 전혀 이해도 되지 않는 사물에 상징성을 부여한 후, 그것을 시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물론, 해변의 묘지에서 죽음을 상징하고 있는 ‘바다’는 우리도 자주 사용하는 아주 흔한 상징이다. 그렇지만 그 풍경과 어울려져 세세히 표현한 상징들과 흐름들을 잡아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비둘기들 노니는 저 고요한 지붕은

  철썩인다 소나무들 사이에서, 무덤들 사이에서.

  공정한 것 정오는 저기에서 화염으로 합성한다

  바다를, 쉼없이 되살아나는 바다를!

  신들의 정적에 오랜 시선을 보냄은

  오 사유 다음에 찾아드는 보답이로다!

 

 

  섬세한 섬광은 얼마나 순수한 솜씨로 다듬어내는가

 

  .....................(중략)....................

 

  오 나의 침묵이여! 영혼 속의 신전,

  허나 수천의 기와 물결치는 황금 꼭대기, 지붕!

 

 

  단 한 숨결 속에 요약되는 시간의 신전,

  이 순수경에 올라 나는 내 바다의

  시선에 온통 둘러싸여 익숙해 진다.

  또한 신에게 바치는 내 지고의 제물인 양,

  잔잔한 반짝임은 심연 위에

  극도의 경멸을 뿌린다.

 

 

 

  비단, 자신의 선조들이 묻혀 있고, 자신도 묻혔다는 자신의 고향에 있는 해변의 묘지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문득 사유로 가득한 삶에 지쳐 바다로 아무런 이유 없이 달려가고 싶을 때가 있다. 그 바다가 무엇을 줄 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꿀 지, 기대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바다 앞에 선 순간 우리는 고요해 진다. 그리고 바다의 풍경 앞에 매료된다. 시인은 여기 3연까지 그러한 시인의 마음과 바다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4연에서 그는 불현듯, 그 계속되는 파도의 잔잔함에 경멸을 뿌린다. 왜? 대체 바다의 무엇이 그에게 어떤 경멸을 품게 만든 것일까?

 

 

 

  과일의 향락으로 용해되듯이,

  과일의 형태가 사라지는 입 안에서

  과일의 부재가 더없는 맛으로 바뀌듯이,

  나는 여기 내 미래의 향연을 들이미시고,

  천공은 노래한다, 소진한 영혼에게,

  웅성거림 높아가는 기슭의 변모를.

 

  .....................(중략)......................

 

  나는 이 빛나는 공간에 몸을 내맡기니,

  죽은 자들의 집 위로 내 그림자가 지나간다

  그 가여린 움직임에 나를 순응시키며

 

 

  지일의 횃불에 노정된 영혼,

  나는 너를 응시한다, 연민도 없이

  화살을 퍼붓는 빛의 찬미할 정의여!

  나는 순수한 너를 네 제일의 자리로 돌려놓는다.

  스스로를 응시하라!...... 그러나 빛을 돌려주는 것은

  그림자의 음울한 반면을 전제한다.

 

 

 

  그렇다! 우리의 벅찬 가슴으로 달려간 바다에서 우리는 때론 신물을 느낀다. 비단, 그것은 우리가 전날 얼굴도 모르는 우리와 같은 여행객과 밤새 술을 마시며, 자기도 모를 가슴 속의 말들을 지껄이며 회포를 풀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바다의 짭조름한 내음, 생선의 비린내, 그 모든 것들이 우리들에게 때론 욕지기를 일으키게도 하지만, 정작 우리가 바다에게서 느끼는 욕지기는 그런 사소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죽음의 냄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응시하게 된다. 바다의 잔잔한 파도 위에 튕겨져 나온 반짝이는 눈부신 햇살에 눈을 감으며, 우리의 그 음울한 내면을 응시하게 되는 것이다.

 

 

 

  오 나 하나만을 위하여, 나 홀로, 내 자신 속에,

  마음 곁에, 시의 원천에서,

  허공과 순수한 도래 사이에, 나는

  기다린다, 내재하는 내 위대함의 반향을

 

  .....................(중략)...................

 

  대리석이 망령들 위에서 떠는 이곳이 나는 좋아.

  여기선 충실한 바다가 나의 무덤들 위에 잠잔다!

 

 

  찬란한 암캐여, 우상숭배의 무리를 내쫓으라!

  내가 목자의 미소를 띄우고 외로이

  고요한 무덤의 하얀 양떼를,

  신비로운 양들을 오래도록 방목할 때,

  그들에게서 멀리하라 사려 깊은 비둘기들을

  헛된 꿈들을, 조심성 많은 천사들을!

 

 

  여기에 이르면 미래는 나태이다.

  정결한 곤충은 건조함을 긁어대고,

  만상은 불타고, 해체되어, 대기 속

  그 어떤 알지 못할 엄숙한 정기에 흡수된다.......

 

  ...................(중략).................

 

  완벽한 두뇌여, 완전한 왕관이여,

  나는 네 속의 은밀한 변화이다.

 

 

  너의 공포를 저지하는 것은 오직 나뿐!

  이 내 뉘우침도, 내 의혹도, 속박도

  모두가 네 거대한 금강석의 결함이어라.......

  허나 대리석으로 무겁게 짓눌린 사자들의 잠에,

  나무뿌리 감긴 몽롱한 사람들은

  이미 서서히 네 편이 되어버렸다.

 

 

 

  시인은 그리고 우리는 바다가 주는 근원적 고요함 속에서 명상에 잠긴다. 이곳에서 미래에 대한 헛된 열망들과 두려움들은 모두 나태이거나 거짓일 뿐이다. ‘가장 본질적이다.’라는 그 말, 그 자체는 어쩌면 향수적인 언어이다. 고향을 그리고 있는 과거적인 언어이다. 그리고 그 과거의 근원은 언제나 죽음과 맞닿아 있다. 그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늘 숙연하다. 그리고 명료해 진다. 그러나 그 감당할 수 있는 깊이는 때론 우리를 너무 휘감아 우리는 산 자의 편이 아닌 죽은 자의 편이 되기도 한다.

 

 

 

  사자들은 두터운 부재 속에 용해되었고,

  붉은 진흙은 하얀 종족을 삼켜버렸으며,

  살아가는 천부의 힘은 꽃 속으로 옮겨갔도다!

 

  .....................(중략)...................

 

  간지린 소녀들의 날카로운 외침,

  눈, 이빨, 눈물 젖은 눈시울,

  불과 희롱하는 어여뿐 젖가슴,

  굴복하는 입술에 반짝이듯 빛나는 피,

  마지막 선물, 그것을 지키려는 손가락들,

  이 모두 땅 밑으로 들어가고 작용에 회귀한다.

 

  .......................(중략)......................

 

  자기에 대한 사랑일까 아니면 미움일까?

  구더기의 감춰진 이빨은 나에게 바짝 가까워서

  그 무슨 이름이라도 어울릴 수 있으리!

  무슨 상관이랴! 구더기는 보고 원하고 꿈꾸고 만진다!

  내 육체가 그의 마음에 들어, 나는 침상에서까지

  이 생물에 소속되어 살아간다!

 

 

  제논! 잔인한 제논이여! 엘레아의 제논이여!

  그대는 나래 돋친 화살로 나를 꿰뚫었어라

  진동하며 나르고 또 날지 않는 화살로!

  화살 소리는 나를 낳고 화살은 나를 죽이는도다!

  아! 태양이여...... 이 무슨 거북이의 그림자인가

  영혼에게는, 큰 걸음으로 달리면서 꼼짝도 않는 아

킬레스여!

 

 

 

  시인과 우리는 무력하다. 모든 것을 갉아먹는 구더기의 힘 앞에서 그리고 모든 시간을 정지시켜 버리는 제논의 화살에게서. 우리는 그것을 피할 길이 없다. 심지어 이미 우리는 그것에 소속되어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잔인한 시시포스 신화의 마치 다른 버전처럼 매일 구더기에게 갉아 먹히고서 다음 날은 새로운 육체로 또 갉아 먹히기 시작하거나, 혹은 매일 제논의 화살을 맞고서 심장의 구멍이 났다가, 다음 날이면 다시 화살을 맞기 위해 심장이 되살아나는 것처럼.

 

 

 

  아니, 아니야!........ 일어서라! 이어지는 시대 속에!

  부셔버려라, 내 육체여, 생각에 잠긴 이 형태를!

  마셔라, 내 가슴이여, 바람의 탄생을!

  신선한 기운이 바다에서 솟구쳐 올라

  나에게 내 혼을 되돌려준다...... 오 엄청난 힘이여!

  그래! 일렁이는 헛소리를 부여받은 대해여,

  아롱진 표범의 가죽이여, 태양이 비추이는

  천만가지 환영으로 구멍 뚫린 외투여,

  짙푸른 너의 살에 취해,

  정적과 닮은 법속 속에서

  너의 번뜩이는 꼬리를 물고 사납게 몰아치는 히드라여,

 

 

  바람이 인다!....... 살려고 애써야 한다!

  세찬 마파람은 내 책을 펼치고 또한 닫으며,

  물결은 분말로 부서져 바위로부터 굳세게 뛰쳐나온다.

  날아가거라, 온통 눈부신 책장들이여!

  부서라, 파도여! 뛰노는 물살로 부숴 버려라

  돛배가 먹이를 쪼고 있던 이 조용한 지붕을!

 

 

 

  수많은 생명을 품고서, 또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을 근원의 공간, 그래서 죽음과도 너무 닮아 있는 이 공간은 때론 너무 고요하여, 우리는 착각을 하곤 한다. 우리가 이미 바다 속에 있거나, 아니면 태초에 바다에서 어떤 생물이 기어 나오기 전, 그 생물이 지느러미 같은 형상도 갖추기 전, 그 전부터 이곳에서 살고 있었노라고. 그러나 진짜 바다를 겪어 보게 되면 안다. 바다는 그런 추상적인 공간이 결코 아니다. 거센 바람이 일고, 그 바람에 맞부딪쳐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만 하는 곳이다. 그러하기에 그곳의 시간은 결코 미래일 수 없지만, 결코 과거도 아닌 것이다. 그러하기에 바다의 표상을 우리는 쉬 죽음으로만은 단정시킬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시인은 이제 그러했던 바다의 표상 그 자체를 전복시키려 하고 있다. 바다는 결코 죽음의 공간이 아닌, 삶의 공간이다. 그리고 몸부림의 공간이다.

 

 

 

 

P.S.

 

  여름부터 가을 내내 무언가 알 수 없는 외로움에 봉착했다. 처음으로 느낀 거 같다. 외로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혼자 삼 시 세 끼 밥을 먹고, 혼자 산책을 하고, 혼자 영화를 봐도, 그 게 외로움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외롭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외로움 앞에서 내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된, 사춘기적부터 지금까지 줄곧, 나는 파도가 거꾸로 들이치는 수평선 너머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나의 열망들 때문에 나는 한 번도 제대로 지상에 발을 붙이고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문득 아무런 까닭도 없이 나는 외로워지고, 그 외로움 앞에서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기간 동안 일종의 공황상태에 있었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고,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 번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를 통해 이러한 나를 극복해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너무 급하게 글을 써내려가느라 정작 내 자신에 관해 돌이켜 볼 수 있었는지 아무런 확신이 서질 않는다. 다만, 이제 기대는 것은 이 차가운 바람의 느낌이다. 볼 살로 느껴지는 이 겨울의 느낌.......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본다. 온 몸으로 온 감각으로 느껴보기 위해....... 그렇다! 볼 살을 찢을 듯한 차가운 바람이 분다! 어떡하든 살아내야 할 겨울이란 이름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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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7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방곤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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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 - 그 참을 수 없는,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스무 살이라는 새로운 경험, 기대, 사랑 그리고 절망. 그 모든 상징과 더불어 줄곧 내 뇌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 가지 이름이 있었다. 실존주의. 그 이름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통과 고뇌의 아우라! 그리고 ‘삶이 본질보다 우선 한다’는 경쾌하면서도 울림이 있는 경구! 키르케고르, 까뮈, 사르트르, 사무엘 베케트 등등, 마치 윤동주가 별 헤는 밤에서 숱한 이름을 헤며 그 이름들을 동경하였듯, 나 또한 그 이름들을 동경하며, 어느새 나는 나도 모르게 실존주의의 깊은 사상 속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까뮈의 ‘이방인’의 뫼르소가 단지 햇볕의 따가움으로 총성을 울리던 날, 나는 실존주의의 끔찍한 모순을 보았고, 동시에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엇이, 그 어떤 점이 나를 두렵게 만든 것일까?

 

 

  주인공 앙투안 로캉탱은 무력한 지식인이다. 비록 중앙유럽, 북아프리카, 그리고 극동 지방까지 여행을 다니며 연구를 하고, 몇몇 저서들로 어느 정도의 인지도를 쌓았지만, 그 자신은 정작 허무하기 그지없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닷가에서 만진 조약돌을 통해 그는 구토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3년 동안 지내왔던 부빌의 삶 하나, 하나에 대한 구토증으로 확장되어져간다. 아무런 의미 없는 말들을 내뱉어 대는 상류사회의 인간들, 일요일마다 대성당에 가기위해 광장으로 군집하는 군중들....... 그 구토의 덩어리들을 뒤로 하고, 그는 어느 카페에서 한 여자 종업원의 자연스러운 존재를 통해 그곳에 함께 동참하고 있는 충실한 하나의 인간으로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이 그동안 하나의 현실이 아닌, 얼마나 모험의 감정에 집착하였는지, 그리고 그것이 떠나가 버렸을 때 얼마나 허무한 존재이었는지, 그러하기에 그의 모든 삶이 온통 가짜이거나 실패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자신의 존재에 대한 생각으로 점점 천착해 들어간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자각에 빠지면 빠져들수록 그는 그동안 그를 지탱해 왔던 그 무언가 의미를 계속 상실하게 된다. 이제 오직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삶을 연명하는 일뿐! 비록, 잠시 그의 옛 여자친구인 안니에게서 온 갑작스러운 편지로 인해 그녀와의 만남에 대한 기대가 그의 부빌에서의 삶을 지속시켜 나가지만, 결국 안니 또한 삶을 연명할 뿐,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그녀에게 기대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부빌을 떠나며 소설은 끝을 마친다.

 

 

  찾을 수 없는 스토리라인, 그리고 산재해있는 생각의 흔적들, 그리고 작가 본인이 추구했던 삶과는 너무나도 괴리감을 주는 존재에 대한 천착적인 소설....... 아마, 이러한 점들로 인하여 이십대 초반 이 소설을 접했을 때 나는 구토증 말고는 다른 그 어떤 말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소화가 되지 않아, 게워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금도 이 난해한 소설을 미필한 몇 자로 정리한다는 발상 자체가 무모한 도전 그 자체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와 ‘지식인을 위한 변명’ 등을 토대로 구토에서의 그의 생각들을 조금은 들쳐볼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해보게 된다.

 

 

  먼저, 구토증에 관한 이야기이다. 비단, 이 소설 뿐 아니라 사르트르는 여러 다른 단편에서도 그의 참을 수 없는 구토증에 대해 종종 화두를 꺼내고 있다. 인간 자체에 대해 환멸을 느껴 어느 날 권총을 구입하여 사람을 죽이는 ‘에로스트라트’에서도 그는 인류가 말하는 휴머니즘에 대해 인간애에 대해 구토를 느낀다고 말하고 있다. 더불어, 사형 당하기 전날 밤의 한 인간의 심리 상태를 그린 ‘벽’에서도 그는 주인공이 아닌 다른 인물을 통해 슬며시 구토증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즉, 그의 소설의 전반적인 시작은 바로, 이 ‘구토증’, 혹은 ‘인간이나 살아있는 것에 대한 욕지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야 말로 바로, 존재에 대한 의문의 시작이며, 의심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존재에 관한 문제이다. 구토에서 시작된 사르트르의 의문부호는 결국 존재라는 문제로 귀결하게 된다. 그리고 이 존재로 귀결하는 과정은 데카르트의 코키토와 매우 흡사하다. 그러하기에 ‘구토’에서도 역시 로캉탱은 한 마로니에 나무뿌리를 통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유추를 하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을 계속 반복한다. 그리고 동시에 ‘드 롤르봉 후작 역사연구’를 하고 있는 자신의 무용한 행위에 대해 깨닫는다. 아니, 모든 존재 이면에 감추어진 무용성을 그는 감지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생각하고 있고, 고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도무지 어쩔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어쩔 수 없는 문제 존재의 의미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설에서 로캉탱은 자신의 분명한 존재의식을 자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어떠한 존재의미도 찾아내지 못한다. 그러기는커녕 그의 생각은 존재의 무용성에 오히려 더욱 가닿아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어쩔 수가 없다. 그러하기에 소설 말미에 그는 그저 연명하노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굳이 왜 존재의 의미에 의문을 느끼는 구토를 하고, 존재에 대한 숱한 고뇌들 끝에 존재의 자각을 밝혀낸 것일까? 아무 소용이 없는데....... 사실, 소설 속에서 해답을 찾기란 어렵다. 아니, 기실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소설 속의 로캉탱은 그저 무력하고, 모순적인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의 한계이며, 이 소설 속에서 부여받은 그의 임무이자, 역할이다. 그러나 이는 사르트르 그 자신의 삶에 비추어 봤을 때, 매우 괴리감을 느끼게 한다. 사르트르가 어떠한 인물이었던가? 세계대전에 몸소 참전하고, 이 후 지성계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드골의 독재 정치에 당당하게 맞섰고, 1960년대 베트남에서 자행되는 미국의 만행을 고발하였으며, 말년 실명했으면서도 68혁명 운동정신을 통해 혁명정신을 고무하려하였던 행동하는 지성인, 앙가주망의 대표이자 분신 그 자체가 아니었던가? 그러한 그이기에 그의 분신이라 칭해지는 로캉탱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써 여기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렇지만 동시에 바로 이러한 모순-로캉탱 자체의 모순 그리고 로캉탱과 사르트르 사이의 모순-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실존주의 그리고 지식인에 대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사르트르는 한 가지 실례를 들고 있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한 학생이 고민이 있어 찾아 왔는데, 그의 모든 형제들이 전쟁으로 인해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하기에 그의 어머니는 마지막 남은 자식인 자신에 대해 끔찍하게 염려하고 있고, 늘 자신이 전쟁에 나설까 노심초사 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젊은이로서 그 또한 조국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어, 전쟁터에 나서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까지 어머니 곁을 떠나게 되면, 이미 두 아들을 전쟁터에 잃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어머니가 그만 돌아가시지 않을까 염려가 되어, 어떻게 할지 도무지 판단할 수가 없다고 사르트르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 때 사르트르는 그에게 답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전쟁터에 나서는 것도 옳고, 어머니를 곁에서 돌보는 것도 옳다고 그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진정 원했던 답은 그 자신 안에 있는 것이기에 만약 그가 전쟁터에 가고 싶었다면, 어떤 장군에게 상담하러 갔을 것이고, 만약 어머니 곁에 머무르고 싶었다면, 신부를 찾아갔을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즉, 그는 이러한 선택의 모순적 상황 속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이며, 그러하기에 단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닌 인류애로써의 선택은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그 학생은 어머니 곁에 남기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사르트르는 같은 혁명이라는 노선을 추구하던 공산주의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들어야만 했다. 왜 인간을 허무하고 부패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규명하여, 인류애가 아닌 어떤 여지의 가능성을, 개인적 선택의 모순성을 남겨둔단 말인가?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상류층의 이데올로기에 따르지 않고, 하급계층의 사상을 대변하는 자로서, 그러나 하급계층의 근시안적인 시각이 아닌, 미래에 대한 그 어떤 초월에 대한 희망을 가진 자로서, 그렇지만 어떤 노동력의 기능을 상실한 모순적인 존재로서 규명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모순 속에서 지식인의 역할과 기능을 설명하려 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식인은 실제로 태생이 하급계층이 아니기에 어떤 노동력이 없고, 그러하기에 늘 초월적인 이데올로기에 관심을 표명하면서도,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상류층에 의해 조정당하는 것을 묵과할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지닌 이러한 태생적인 모순이야말로 그들의 기능이며, 역할이라는 것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과 소설로 돌아와 보자. 로캉탱은 무력하고 모순적인 지식인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르트르라는 이제는 고전이 된 그 이름과 더불어 우리들에게 그러한 무력함과 모순을 계속 환기시키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무력함 혹은 무용성이라는 모순은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인간조건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사르트르가 그 말을 싫어할지라도.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로 무력하고 모순적인 인간존재 속에서 나온 인류애를 향한 앙가주망의 선택이야말로 분명 고귀한 선택이 될 것이다. 그러나 더불어 이는 우리에게 늘 허무와 무의미라는 공포를 그 밑바탕으로 삼게 한다. 까뮈의 ‘이방인’의 뫼르소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그것은 누군가 말한 어떤 반항이나, 모든 법칙에 대한 도전인 동시에, 한 인간 생명에 관한 무의미, 허무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늘 우리를 공포스럽게 한다. 아니, 나를 공포스럽게 한다. 비록, 이러한 모순 속에서만이 어떠한 우리 삶의 신비, 선택의 거룩함이나 정당성을 확증 받을지라도, 그 언치에 맴도는 허무와 무의미를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나와 당신이 인간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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