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묘지 민음사 세계시인선 4
발레리 지음, 김현 옮김 / 민음사 / 1973년 12월
평점 :
품절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 - 바다에서 불어오는 거친 마파람을 맞으며

 

 

  우리에게 시인 그 자체보다 ‘바람이 분다. 이제 살아야겠다.’라는 경구로 더 잘 알려진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를 이해하는 것은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 동양인의 사고구조로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시라는 것이 어떤 아름다움과 서정성 그리고 진실을 향한 외침이거나 사회적 개혁을 위한 울림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프랑스 시인들, 특히 이 발레리의 사변적인 사고들을 어떻게 시로 받아들여야만 할까? 게다가 이 종자들은 어떻게 된 게 사변을 그냥 사변으로 말하지 않고 풍경을 빌려 사변을 표현한다던가, 갑자기 전혀 이해도 되지 않는 사물에 상징성을 부여한 후, 그것을 시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물론, 해변의 묘지에서 죽음을 상징하고 있는 ‘바다’는 우리도 자주 사용하는 아주 흔한 상징이다. 그렇지만 그 풍경과 어울려져 세세히 표현한 상징들과 흐름들을 잡아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비둘기들 노니는 저 고요한 지붕은

  철썩인다 소나무들 사이에서, 무덤들 사이에서.

  공정한 것 정오는 저기에서 화염으로 합성한다

  바다를, 쉼없이 되살아나는 바다를!

  신들의 정적에 오랜 시선을 보냄은

  오 사유 다음에 찾아드는 보답이로다!

 

 

  섬세한 섬광은 얼마나 순수한 솜씨로 다듬어내는가

 

  .....................(중략)....................

 

  오 나의 침묵이여! 영혼 속의 신전,

  허나 수천의 기와 물결치는 황금 꼭대기, 지붕!

 

 

  단 한 숨결 속에 요약되는 시간의 신전,

  이 순수경에 올라 나는 내 바다의

  시선에 온통 둘러싸여 익숙해 진다.

  또한 신에게 바치는 내 지고의 제물인 양,

  잔잔한 반짝임은 심연 위에

  극도의 경멸을 뿌린다.

 

 

 

  비단, 자신의 선조들이 묻혀 있고, 자신도 묻혔다는 자신의 고향에 있는 해변의 묘지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문득 사유로 가득한 삶에 지쳐 바다로 아무런 이유 없이 달려가고 싶을 때가 있다. 그 바다가 무엇을 줄 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꿀 지, 기대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바다 앞에 선 순간 우리는 고요해 진다. 그리고 바다의 풍경 앞에 매료된다. 시인은 여기 3연까지 그러한 시인의 마음과 바다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4연에서 그는 불현듯, 그 계속되는 파도의 잔잔함에 경멸을 뿌린다. 왜? 대체 바다의 무엇이 그에게 어떤 경멸을 품게 만든 것일까?

 

 

 

  과일의 향락으로 용해되듯이,

  과일의 형태가 사라지는 입 안에서

  과일의 부재가 더없는 맛으로 바뀌듯이,

  나는 여기 내 미래의 향연을 들이미시고,

  천공은 노래한다, 소진한 영혼에게,

  웅성거림 높아가는 기슭의 변모를.

 

  .....................(중략)......................

 

  나는 이 빛나는 공간에 몸을 내맡기니,

  죽은 자들의 집 위로 내 그림자가 지나간다

  그 가여린 움직임에 나를 순응시키며

 

 

  지일의 횃불에 노정된 영혼,

  나는 너를 응시한다, 연민도 없이

  화살을 퍼붓는 빛의 찬미할 정의여!

  나는 순수한 너를 네 제일의 자리로 돌려놓는다.

  스스로를 응시하라!...... 그러나 빛을 돌려주는 것은

  그림자의 음울한 반면을 전제한다.

 

 

 

  그렇다! 우리의 벅찬 가슴으로 달려간 바다에서 우리는 때론 신물을 느낀다. 비단, 그것은 우리가 전날 얼굴도 모르는 우리와 같은 여행객과 밤새 술을 마시며, 자기도 모를 가슴 속의 말들을 지껄이며 회포를 풀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바다의 짭조름한 내음, 생선의 비린내, 그 모든 것들이 우리들에게 때론 욕지기를 일으키게도 하지만, 정작 우리가 바다에게서 느끼는 욕지기는 그런 사소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죽음의 냄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응시하게 된다. 바다의 잔잔한 파도 위에 튕겨져 나온 반짝이는 눈부신 햇살에 눈을 감으며, 우리의 그 음울한 내면을 응시하게 되는 것이다.

 

 

 

  오 나 하나만을 위하여, 나 홀로, 내 자신 속에,

  마음 곁에, 시의 원천에서,

  허공과 순수한 도래 사이에, 나는

  기다린다, 내재하는 내 위대함의 반향을

 

  .....................(중략)...................

 

  대리석이 망령들 위에서 떠는 이곳이 나는 좋아.

  여기선 충실한 바다가 나의 무덤들 위에 잠잔다!

 

 

  찬란한 암캐여, 우상숭배의 무리를 내쫓으라!

  내가 목자의 미소를 띄우고 외로이

  고요한 무덤의 하얀 양떼를,

  신비로운 양들을 오래도록 방목할 때,

  그들에게서 멀리하라 사려 깊은 비둘기들을

  헛된 꿈들을, 조심성 많은 천사들을!

 

 

  여기에 이르면 미래는 나태이다.

  정결한 곤충은 건조함을 긁어대고,

  만상은 불타고, 해체되어, 대기 속

  그 어떤 알지 못할 엄숙한 정기에 흡수된다.......

 

  ...................(중략).................

 

  완벽한 두뇌여, 완전한 왕관이여,

  나는 네 속의 은밀한 변화이다.

 

 

  너의 공포를 저지하는 것은 오직 나뿐!

  이 내 뉘우침도, 내 의혹도, 속박도

  모두가 네 거대한 금강석의 결함이어라.......

  허나 대리석으로 무겁게 짓눌린 사자들의 잠에,

  나무뿌리 감긴 몽롱한 사람들은

  이미 서서히 네 편이 되어버렸다.

 

 

 

  시인은 그리고 우리는 바다가 주는 근원적 고요함 속에서 명상에 잠긴다. 이곳에서 미래에 대한 헛된 열망들과 두려움들은 모두 나태이거나 거짓일 뿐이다. ‘가장 본질적이다.’라는 그 말, 그 자체는 어쩌면 향수적인 언어이다. 고향을 그리고 있는 과거적인 언어이다. 그리고 그 과거의 근원은 언제나 죽음과 맞닿아 있다. 그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늘 숙연하다. 그리고 명료해 진다. 그러나 그 감당할 수 있는 깊이는 때론 우리를 너무 휘감아 우리는 산 자의 편이 아닌 죽은 자의 편이 되기도 한다.

 

 

 

  사자들은 두터운 부재 속에 용해되었고,

  붉은 진흙은 하얀 종족을 삼켜버렸으며,

  살아가는 천부의 힘은 꽃 속으로 옮겨갔도다!

 

  .....................(중략)...................

 

  간지린 소녀들의 날카로운 외침,

  눈, 이빨, 눈물 젖은 눈시울,

  불과 희롱하는 어여뿐 젖가슴,

  굴복하는 입술에 반짝이듯 빛나는 피,

  마지막 선물, 그것을 지키려는 손가락들,

  이 모두 땅 밑으로 들어가고 작용에 회귀한다.

 

  .......................(중략)......................

 

  자기에 대한 사랑일까 아니면 미움일까?

  구더기의 감춰진 이빨은 나에게 바짝 가까워서

  그 무슨 이름이라도 어울릴 수 있으리!

  무슨 상관이랴! 구더기는 보고 원하고 꿈꾸고 만진다!

  내 육체가 그의 마음에 들어, 나는 침상에서까지

  이 생물에 소속되어 살아간다!

 

 

  제논! 잔인한 제논이여! 엘레아의 제논이여!

  그대는 나래 돋친 화살로 나를 꿰뚫었어라

  진동하며 나르고 또 날지 않는 화살로!

  화살 소리는 나를 낳고 화살은 나를 죽이는도다!

  아! 태양이여...... 이 무슨 거북이의 그림자인가

  영혼에게는, 큰 걸음으로 달리면서 꼼짝도 않는 아

킬레스여!

 

 

 

  시인과 우리는 무력하다. 모든 것을 갉아먹는 구더기의 힘 앞에서 그리고 모든 시간을 정지시켜 버리는 제논의 화살에게서. 우리는 그것을 피할 길이 없다. 심지어 이미 우리는 그것에 소속되어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잔인한 시시포스 신화의 마치 다른 버전처럼 매일 구더기에게 갉아 먹히고서 다음 날은 새로운 육체로 또 갉아 먹히기 시작하거나, 혹은 매일 제논의 화살을 맞고서 심장의 구멍이 났다가, 다음 날이면 다시 화살을 맞기 위해 심장이 되살아나는 것처럼.

 

 

 

  아니, 아니야!........ 일어서라! 이어지는 시대 속에!

  부셔버려라, 내 육체여, 생각에 잠긴 이 형태를!

  마셔라, 내 가슴이여, 바람의 탄생을!

  신선한 기운이 바다에서 솟구쳐 올라

  나에게 내 혼을 되돌려준다...... 오 엄청난 힘이여!

  그래! 일렁이는 헛소리를 부여받은 대해여,

  아롱진 표범의 가죽이여, 태양이 비추이는

  천만가지 환영으로 구멍 뚫린 외투여,

  짙푸른 너의 살에 취해,

  정적과 닮은 법속 속에서

  너의 번뜩이는 꼬리를 물고 사납게 몰아치는 히드라여,

 

 

  바람이 인다!....... 살려고 애써야 한다!

  세찬 마파람은 내 책을 펼치고 또한 닫으며,

  물결은 분말로 부서져 바위로부터 굳세게 뛰쳐나온다.

  날아가거라, 온통 눈부신 책장들이여!

  부서라, 파도여! 뛰노는 물살로 부숴 버려라

  돛배가 먹이를 쪼고 있던 이 조용한 지붕을!

 

 

 

  수많은 생명을 품고서, 또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을 근원의 공간, 그래서 죽음과도 너무 닮아 있는 이 공간은 때론 너무 고요하여, 우리는 착각을 하곤 한다. 우리가 이미 바다 속에 있거나, 아니면 태초에 바다에서 어떤 생물이 기어 나오기 전, 그 생물이 지느러미 같은 형상도 갖추기 전, 그 전부터 이곳에서 살고 있었노라고. 그러나 진짜 바다를 겪어 보게 되면 안다. 바다는 그런 추상적인 공간이 결코 아니다. 거센 바람이 일고, 그 바람에 맞부딪쳐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만 하는 곳이다. 그러하기에 그곳의 시간은 결코 미래일 수 없지만, 결코 과거도 아닌 것이다. 그러하기에 바다의 표상을 우리는 쉬 죽음으로만은 단정시킬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시인은 이제 그러했던 바다의 표상 그 자체를 전복시키려 하고 있다. 바다는 결코 죽음의 공간이 아닌, 삶의 공간이다. 그리고 몸부림의 공간이다.

 

 

 

 

P.S.

 

  여름부터 가을 내내 무언가 알 수 없는 외로움에 봉착했다. 처음으로 느낀 거 같다. 외로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혼자 삼 시 세 끼 밥을 먹고, 혼자 산책을 하고, 혼자 영화를 봐도, 그 게 외로움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외롭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외로움 앞에서 내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된, 사춘기적부터 지금까지 줄곧, 나는 파도가 거꾸로 들이치는 수평선 너머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나의 열망들 때문에 나는 한 번도 제대로 지상에 발을 붙이고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문득 아무런 까닭도 없이 나는 외로워지고, 그 외로움 앞에서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기간 동안 일종의 공황상태에 있었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고,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 번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를 통해 이러한 나를 극복해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너무 급하게 글을 써내려가느라 정작 내 자신에 관해 돌이켜 볼 수 있었는지 아무런 확신이 서질 않는다. 다만, 이제 기대는 것은 이 차가운 바람의 느낌이다. 볼 살로 느껴지는 이 겨울의 느낌.......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본다. 온 몸으로 온 감각으로 느껴보기 위해....... 그렇다! 볼 살을 찢을 듯한 차가운 바람이 분다! 어떡하든 살아내야 할 겨울이란 이름의 삶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