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토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7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방곤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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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 - 그 참을 수 없는,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스무 살이라는 새로운 경험, 기대, 사랑 그리고 절망. 그 모든 상징과 더불어 줄곧 내 뇌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 가지 이름이 있었다. 실존주의. 그 이름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통과 고뇌의 아우라! 그리고 ‘삶이 본질보다 우선 한다’는 경쾌하면서도 울림이 있는 경구! 키르케고르, 까뮈, 사르트르, 사무엘 베케트 등등, 마치 윤동주가 별 헤는 밤에서 숱한 이름을 헤며 그 이름들을 동경하였듯, 나 또한 그 이름들을 동경하며, 어느새 나는 나도 모르게 실존주의의 깊은 사상 속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까뮈의 ‘이방인’의 뫼르소가 단지 햇볕의 따가움으로 총성을 울리던 날, 나는 실존주의의 끔찍한 모순을 보았고, 동시에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엇이, 그 어떤 점이 나를 두렵게 만든 것일까?

 

 

  주인공 앙투안 로캉탱은 무력한 지식인이다. 비록 중앙유럽, 북아프리카, 그리고 극동 지방까지 여행을 다니며 연구를 하고, 몇몇 저서들로 어느 정도의 인지도를 쌓았지만, 그 자신은 정작 허무하기 그지없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닷가에서 만진 조약돌을 통해 그는 구토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3년 동안 지내왔던 부빌의 삶 하나, 하나에 대한 구토증으로 확장되어져간다. 아무런 의미 없는 말들을 내뱉어 대는 상류사회의 인간들, 일요일마다 대성당에 가기위해 광장으로 군집하는 군중들....... 그 구토의 덩어리들을 뒤로 하고, 그는 어느 카페에서 한 여자 종업원의 자연스러운 존재를 통해 그곳에 함께 동참하고 있는 충실한 하나의 인간으로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이 그동안 하나의 현실이 아닌, 얼마나 모험의 감정에 집착하였는지, 그리고 그것이 떠나가 버렸을 때 얼마나 허무한 존재이었는지, 그러하기에 그의 모든 삶이 온통 가짜이거나 실패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자신의 존재에 대한 생각으로 점점 천착해 들어간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자각에 빠지면 빠져들수록 그는 그동안 그를 지탱해 왔던 그 무언가 의미를 계속 상실하게 된다. 이제 오직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삶을 연명하는 일뿐! 비록, 잠시 그의 옛 여자친구인 안니에게서 온 갑작스러운 편지로 인해 그녀와의 만남에 대한 기대가 그의 부빌에서의 삶을 지속시켜 나가지만, 결국 안니 또한 삶을 연명할 뿐,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그녀에게 기대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부빌을 떠나며 소설은 끝을 마친다.

 

 

  찾을 수 없는 스토리라인, 그리고 산재해있는 생각의 흔적들, 그리고 작가 본인이 추구했던 삶과는 너무나도 괴리감을 주는 존재에 대한 천착적인 소설....... 아마, 이러한 점들로 인하여 이십대 초반 이 소설을 접했을 때 나는 구토증 말고는 다른 그 어떤 말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소화가 되지 않아, 게워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금도 이 난해한 소설을 미필한 몇 자로 정리한다는 발상 자체가 무모한 도전 그 자체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와 ‘지식인을 위한 변명’ 등을 토대로 구토에서의 그의 생각들을 조금은 들쳐볼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해보게 된다.

 

 

  먼저, 구토증에 관한 이야기이다. 비단, 이 소설 뿐 아니라 사르트르는 여러 다른 단편에서도 그의 참을 수 없는 구토증에 대해 종종 화두를 꺼내고 있다. 인간 자체에 대해 환멸을 느껴 어느 날 권총을 구입하여 사람을 죽이는 ‘에로스트라트’에서도 그는 인류가 말하는 휴머니즘에 대해 인간애에 대해 구토를 느낀다고 말하고 있다. 더불어, 사형 당하기 전날 밤의 한 인간의 심리 상태를 그린 ‘벽’에서도 그는 주인공이 아닌 다른 인물을 통해 슬며시 구토증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즉, 그의 소설의 전반적인 시작은 바로, 이 ‘구토증’, 혹은 ‘인간이나 살아있는 것에 대한 욕지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야 말로 바로, 존재에 대한 의문의 시작이며, 의심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존재에 관한 문제이다. 구토에서 시작된 사르트르의 의문부호는 결국 존재라는 문제로 귀결하게 된다. 그리고 이 존재로 귀결하는 과정은 데카르트의 코키토와 매우 흡사하다. 그러하기에 ‘구토’에서도 역시 로캉탱은 한 마로니에 나무뿌리를 통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유추를 하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을 계속 반복한다. 그리고 동시에 ‘드 롤르봉 후작 역사연구’를 하고 있는 자신의 무용한 행위에 대해 깨닫는다. 아니, 모든 존재 이면에 감추어진 무용성을 그는 감지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생각하고 있고, 고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도무지 어쩔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어쩔 수 없는 문제 존재의 의미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설에서 로캉탱은 자신의 분명한 존재의식을 자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어떠한 존재의미도 찾아내지 못한다. 그러기는커녕 그의 생각은 존재의 무용성에 오히려 더욱 가닿아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어쩔 수가 없다. 그러하기에 소설 말미에 그는 그저 연명하노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굳이 왜 존재의 의미에 의문을 느끼는 구토를 하고, 존재에 대한 숱한 고뇌들 끝에 존재의 자각을 밝혀낸 것일까? 아무 소용이 없는데....... 사실, 소설 속에서 해답을 찾기란 어렵다. 아니, 기실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소설 속의 로캉탱은 그저 무력하고, 모순적인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의 한계이며, 이 소설 속에서 부여받은 그의 임무이자, 역할이다. 그러나 이는 사르트르 그 자신의 삶에 비추어 봤을 때, 매우 괴리감을 느끼게 한다. 사르트르가 어떠한 인물이었던가? 세계대전에 몸소 참전하고, 이 후 지성계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드골의 독재 정치에 당당하게 맞섰고, 1960년대 베트남에서 자행되는 미국의 만행을 고발하였으며, 말년 실명했으면서도 68혁명 운동정신을 통해 혁명정신을 고무하려하였던 행동하는 지성인, 앙가주망의 대표이자 분신 그 자체가 아니었던가? 그러한 그이기에 그의 분신이라 칭해지는 로캉탱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써 여기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렇지만 동시에 바로 이러한 모순-로캉탱 자체의 모순 그리고 로캉탱과 사르트르 사이의 모순-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실존주의 그리고 지식인에 대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사르트르는 한 가지 실례를 들고 있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한 학생이 고민이 있어 찾아 왔는데, 그의 모든 형제들이 전쟁으로 인해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하기에 그의 어머니는 마지막 남은 자식인 자신에 대해 끔찍하게 염려하고 있고, 늘 자신이 전쟁에 나설까 노심초사 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젊은이로서 그 또한 조국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어, 전쟁터에 나서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까지 어머니 곁을 떠나게 되면, 이미 두 아들을 전쟁터에 잃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어머니가 그만 돌아가시지 않을까 염려가 되어, 어떻게 할지 도무지 판단할 수가 없다고 사르트르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 때 사르트르는 그에게 답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전쟁터에 나서는 것도 옳고, 어머니를 곁에서 돌보는 것도 옳다고 그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진정 원했던 답은 그 자신 안에 있는 것이기에 만약 그가 전쟁터에 가고 싶었다면, 어떤 장군에게 상담하러 갔을 것이고, 만약 어머니 곁에 머무르고 싶었다면, 신부를 찾아갔을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즉, 그는 이러한 선택의 모순적 상황 속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이며, 그러하기에 단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닌 인류애로써의 선택은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그 학생은 어머니 곁에 남기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사르트르는 같은 혁명이라는 노선을 추구하던 공산주의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들어야만 했다. 왜 인간을 허무하고 부패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규명하여, 인류애가 아닌 어떤 여지의 가능성을, 개인적 선택의 모순성을 남겨둔단 말인가?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상류층의 이데올로기에 따르지 않고, 하급계층의 사상을 대변하는 자로서, 그러나 하급계층의 근시안적인 시각이 아닌, 미래에 대한 그 어떤 초월에 대한 희망을 가진 자로서, 그렇지만 어떤 노동력의 기능을 상실한 모순적인 존재로서 규명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모순 속에서 지식인의 역할과 기능을 설명하려 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식인은 실제로 태생이 하급계층이 아니기에 어떤 노동력이 없고, 그러하기에 늘 초월적인 이데올로기에 관심을 표명하면서도,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상류층에 의해 조정당하는 것을 묵과할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지닌 이러한 태생적인 모순이야말로 그들의 기능이며, 역할이라는 것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과 소설로 돌아와 보자. 로캉탱은 무력하고 모순적인 지식인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르트르라는 이제는 고전이 된 그 이름과 더불어 우리들에게 그러한 무력함과 모순을 계속 환기시키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무력함 혹은 무용성이라는 모순은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인간조건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사르트르가 그 말을 싫어할지라도.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로 무력하고 모순적인 인간존재 속에서 나온 인류애를 향한 앙가주망의 선택이야말로 분명 고귀한 선택이 될 것이다. 그러나 더불어 이는 우리에게 늘 허무와 무의미라는 공포를 그 밑바탕으로 삼게 한다. 까뮈의 ‘이방인’의 뫼르소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그것은 누군가 말한 어떤 반항이나, 모든 법칙에 대한 도전인 동시에, 한 인간 생명에 관한 무의미, 허무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늘 우리를 공포스럽게 한다. 아니, 나를 공포스럽게 한다. 비록, 이러한 모순 속에서만이 어떠한 우리 삶의 신비, 선택의 거룩함이나 정당성을 확증 받을지라도, 그 언치에 맴도는 허무와 무의미를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나와 당신이 인간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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