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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그림자의 춤
앨리스 먼로 지음, 곽명단 옮김 / 뿔(웅진)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행복한 그림자의 춤 - 앨리스 아줌마의 달콤 쌉싸름한 이야기보따리 요리

 


 이 번 앨리스 먼로의 ‘행복한 그림자의 춤’을 읽기 전, 나는 머릿속이 꽤나 복잡했다. 먼저는 정말 오랜만에 내 자신이 쓴 글을 합평을 받는 이유 때문이었고,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다른 글을 읽을 때 기존의 방식과 달리 무언가를 내려놓지 못하고 읽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이러한 글 읽기 방식은 내가 수도원을 내려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뭐,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수도원에서 내려오면서 나는 많은 것을 가지치기하기로 작정했고, 그 가지를 친 시간과 에너지를 글을 읽고 쓰는 데로 전환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원을 내려와서 약 두 달 동안, 나의 단단한 결심은 어디로 갔는지, 병든 닭처럼 집안 그 어딘가에 틀어박혀, 목구멍으로 세어 나오지 못하였고, 당연히 가슴 속에 맺혀 있던 말들도 글이나 혹은 그 다른 무언가로도 세어 나오지 못한 채, 시름시름 앓으며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갑자기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세 편이나 되는 단편을... 물론, 이 단편들은 전부 예전에 썼던 짧은 콩트이거나 수필 같은 형식의 글을 열심히 습작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견지 하에 다시 새로 고쳐 쓴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아니,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이 예전과 다르게 강렬하게 내가 시름시름 앓던 만큼 목구멍에 맺혀 거치적거리면서, 미묘하게 내가 예전에 글을 대하는 방식과 다르게 글을 보게끔 만들었다. 물론, 이는 글을 쓰는 이에게 중요한 조건 중에 하나일 것이다. 글을 쓰는 이가 글을 읽는 독자와 똑같이 글을 분석하고, 그저 감상하려고만 한다면 거기에서 ‘작가정신’이라든가 혹은 ‘창작의욕’이라 부를 수도 있는 다른 그 무언가가 피어날 여지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글에 대한 순수한 접근을 막는 커다란 장애적인 요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어설프게 피어난 작가의식은 글을 읽는데 있어서 글을 먼저 감상하고 느끼기보다, 분석하려 들고, 함부로 재단하게끔 만들기 때문이다. 특히, 이 부분을 내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이번에 이상 문학상의 작품들을 읽을 때였다. 아마, 이는 내가 내 글을 세 편 정도 쓰고 나서, 내 글에 대한 개인적 애착으로 한 50번 이상 퇴고를 한 다음, 이상 문학상의 글들을 접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본인에 대한 글의 퇴고는 너무나 가깝고 밀착되어 있는 까닭으로 거리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거리를 두고 분석하고 비평해 보려는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이유이다. 때문에 이상 문학상의 작품들을 읽을 때 나는 나와 비슷한 관념이 나열된 글에서는 지긋지긋함을 느꼈고, 다소 몽환적이거나 실험적인 글에서는 내 글에 이러한 부분을 어떻게 도입할까를 생각하면서 읽게 되었다. 이제까지와 달리 내게도 미약하게나마 ‘작가의식’이 피어오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작가의식’이 너무 익숙지 않은 경험이었기에, 어설펐다는 게 문제였다. 그러한 재단과 망상 속에 글을 읽다보니, 어느새 나는 글을 다 읽고 나서도 정작, 그 글이 무슨 글이었는지, 어떤 포인트를 말하고자 쓴 것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아니, 아예 염두에 두지조차 않고 글을 읽었다. 물론, 그 글들이 내가 평소에 별로 좋아하지 않는 유형의 글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십대 때부터 줄곧 나는 이상하게도 한국문학보다 외국문학에 더 친밀함을 느꼈고, 때문에 동경해 왔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유형의 글이라도 예전에는 결코 이런 식으로 접근한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 동안 줄곧 나는 글은 머리로 읽는 것이 아니라, 가슴과 오감을 사용하여 읽는 것이라고 믿어왔고, 그러하기에 가슴에 울림이 있거나 떨림이 있는 시적인 뒷맛이 있는 글들이 좋은 글이라고 말하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지금 이순간도 바로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에 나는 모든 글들을, 심지어 내 글조차 머리로만 읽었다. 바로 이 이유로, 나는 무언가를 내려놓지 못한 채, 내 개인적 사변에 휘둘리면서 글들을 그 글 자체로가 아닌, 하나의 내 글을 쓰기 위한 도구이거나 교재 비슷한 심정으로 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감정 속에서, 그리고 그러한 예감 속에서 나는 잔뜩 경계의 시선을 품고서, 앨리스 먼로의 ‘행복한 그림자의 춤’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제법 이제는 어린아이의 티를 벗은 주인공 소녀의 엄마의 어린 시절부터 근방에서 피아노를 가르쳐오던 마살레스 선생님은 매해 6월이면 학부모와 아이들과 함께하는 파티를 연다. 그렇지만 파티라고 해서, 뭐 왁자지껄하거나 대단한 행사 분위기를 연상해선 결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일종의 오래된 전통의식과도 비슷한 학예회 일종이라고 설명하면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파티라고 해서 차려지는 음식도 매해 아이들을 위해 차려지는 비슷비슷한 음식들이 고작이고, 파티의 하이라이트라는 것은 그냥 아이들이 그들의 학부모들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는 게 전부일 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이들의 실력이란 것이 원래 그렇기도 하지만, 얼마나 엉성한지... 간혹 재능이 풍부한 아이가 있었다손 치더라도, 마살레스 선생님의 끝없는 아이들에 대한 무한 긍정주의와 신뢰는 있던 재능도 사라지게 만들기 일쑤였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마살레스 선생님은 아이들의 재능 따위에는 안중에도 없는 눈치이다. 왜냐하면 그러기엔 그 본인 스스로가 나이가 무색하리만치 얼마나 순진무구하기 그지없는지, 아이가 설령 박자를 놓치고 다른 음정을 치더라도 개의치 않고 아이들의 그 엉성한 천진난만한 연주를 찬양하는데 여념이 없는 것이다. 이런 식이니, 대체 어떤 아이가 그 재능을 만개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모든 아이들은 그 순진무구한 때를 벗기까지 모두 마살레스 선생님을 좋아한다. 항상 친절한데다 칭찬일색인 선생님을 그 어떤 아이가 마다하겠는가? 사실, 그러하기에 주인공의 엄마도 자신의 그 추억의 자산 때문에 주인공 소녀를 마살레스 선성님께 맡긴 것이 아니겠는가? 아마 모르긴 몰라도, 몇 해 전까지 주인공 소녀도 그러했던 어머니와 같이 마살레스 선생님을 너무나도 좋아했을 게다. 하지만 이제는 마살레스 선생님의 그런 입에 발린 소리들을 듣고 좋아하기엔 주인공 소녀는 조금 커버렸다. 그리고 주인공 어머니도 이제 그런 고리타분한 파티에 참석하기엔 꽤나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게다가, 몇 해 전 경제적 사정으로 마살레스 선생님이 좁고 남루하기 짝이 없는 집으로 이사하면서, 그 집에서 피아노를 배워야만 하는데다 파티도 그곳에서 열려야 했기에, 어쩌면 올해를 끝으로 주인공은 마살레스 선생님께 피아노를 배우는 것을 그만둬야 할 것이고, 그런 이유로 그 특별한 파티의 참석도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주인공도 그녀의 엄마도 그저 마지막 파티일지도 모를 그 시간을 어떻게든 때울 작정으로 파티 내내 서로 딴 생각에 여념이 없다. 주인공 소녀는 그저 마지막 피날레가 될 자기 공연 시각이 어서 빨리 와서 파티가 끝났으면 하는 눈치이고, 그녀의 엄마는 선생님이 차려놓은 파티음식이 6월의 후덥지근한 날씨에 혹시 상하지 않았을까만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주인공 소녀의 피아노 연주를 끝으로 의례적이고 지루한 파티는 끝날 줄만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살레스 선생님은 파티 내내 안절부절 못하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이다. 가장 나이도 많은데다, 파티의 피날레를 맡은 주인공 소녀가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는데도 그렇게 썩 관심이 있는 눈치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주인공 소녀가 연주하는 그 도중, 그렇게나 마살레스 선생님이 안절부절 못하며 초조하게 기다리던 그 주인공들이 당도하여, 시끌벅적하기까지 하다. 똑같은 황갈색 옷의 제복을 입고 들어오는 열 명 남짓한 아이들, 근처 지적장애아 학교에서 마살레스 선생님이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인 모양이다. 개중에는 남자아이들도 여럿 보이는데 모두가 초점 없는 눈에 짧은 머리를 한 모양이 비슷비슷한 생김새이다. 그 모습에 엄마들은 수근거리기 시작하고, 예정에 없던 그 아이들의 연주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마살레스 선생님은 역시 그런 학부모들의 반응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그 아이들의 연주를 그저 흐뭇하게 지켜볼 따름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인공 키만 하고 여윈 ‘돌로레스 보일’이란 여자아이의 이름이 호명되고, 그녀의 연주가 시작된다. 연주곡은 독일의 작곡가 ‘글루카’가 그리스 신화 ‘오르페우스 전설’을 소재로 작곡한 3막 오페라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에 나오는 발레곡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한 ‘행복한 그림자의 춤’, 그런데 이 게 무슨 일일까? 그렇게나 수런대던 모든 소리들이 어느새 잠잠해지고 모두 그 소녀의 연주 속에 빠져든다. 그리고 모두 무언가 자신들의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열망 같은 혹은 그리움 같은 것이 되살아나는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그 감정은 여전히 당혹스럽기만 하다. 왜냐하면 그곳은 다름 아닌, 어떤 재능도 만개시킬 수 없는 그저 사람 좋은데다 궁색하기 짝이 없는 마살레스 선생님의 피아노 파티장소이고 (말이 좋아 파티이지 그저 학예회일 뿐인 장소이고), 그 연주자는 근처 지적장애아 학교를 다니는 한낱 흐리멍덩한 여자아이의 연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그 소녀의 연주가 끝마쳐지고,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까지 어떻게 그 감정을 설명해야 할지 모두 당혹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모두가 그 딱한 마살레스 선생님과 그 지루한 파티를 딱하고 지루하다 말할 수 없는 것은 그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 주는 개운하진 못하지만 달콤 쌉싸름한 뒷맛 때문이 아닐까?

 

 글을 다 읽고서 처음에 품었던 나의 경계심은 글속에 주인공과 학부모들이 지루한 마살레스 선생님의 파티와 지적장애아들에 대해 품었던 경계심이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란 피아노곡의 연주로 자연스레 스르르 풀려간 것처럼 어느덧 걷혀있었다. 그리고 이에 힘입어 전부 다 하면 400페이지가 넘어가는 앨리스 먼로의 단편들을 모두 읽어봐야겠다는 결심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한 주 동안 매일 도배학원을 오가는 전철 안에서의 1-2시간을 이용하여 짬짬이 그 글들을 모두 보게 되었다. 그리고서 내가 느낀 것은 크게 한 가지로 귀결되었다. 현재 내가 써가고 있는 내 글의 지점과 앨리스 먼로의 글이 추구하는 지점과의 차이와 그것을 통해 앞으로 내가 추구할 글의 지점에 관한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어차피 내 글에 대한 팽배한 애착을 오롯하게 버리기란 현 단계에서 힘들뿐더러, 그러한 애착과 상반되는 내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미묘한 거리두기에 대해 새삼 생각해 볼 수 있게끔, 앨리스 먼로의 글들이 어떤 단서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먼저, 앨리스 먼로의 단편들을 모두 읽고서 내가 ‘행복한 그림자의 춤’의 비평을 ‘앨리스 아줌마의 달콤 쌉싸름한 이야기보따리 요리란’ 제목으로 한 이유는 비단 ‘행복한 그림자의 춤’뿐 아니라, 그녀의 모든 글들에 그러한 맛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의 아버지, 어머니 이야기로 채색된 ‘떠돌뱅이 회사의 카우보이’와 ‘망상’, ‘사내아이와 계집아이’에서 그녀의 아련한 향수와도 같은 지나버린 시절에 대한 어떤 애착을, 힘없는 여성의 입장에서 남자의 사랑에 대해 대처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듯한 ‘태워줘서 고마워’와 ‘그림엽서’, ‘주일 오후’에서 여성 내부의 사랑에 대한 열망과 야멸찬 증오를, 뭐라 딱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 개운치 못하지만 달콤하면서 씁쓰름한 그 맛을 느낀 것은 대체 무슨 연유였을까? 분명, 이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절에 대한 애착들이 내게 어떤 개운치 못한 맛을 주고, 동시에 그 향수는 앨리스 먼로 특유의 장황하진 않지만 한가득 풀어놓은 선물 보따리 같은 묘사적인 필체에 기인하여 풍부한 달콤한 맛을 자아내고 있다. 그렇지만 그 개운치 못한 애착 때문일까? 아니면, 달콤하다고 말하기엔 앨리스 먼로의 주인공 여성인물들이 갖는 씁쓸한 자아 풍경 때문일까? 그 씁쓰름한 맛을 어떻게 표현해야만 할까? 특히, ‘태워줘서 고마워’에서의 마지막 여자아이의 제목과 똑같은 작별 인사말은 아련하게도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가벼운 이별에 대해 순응하고 있는 듯한 암시를 보이고 있기에, 내내 뒷맛이 텁텁했다. 아예 대놓고 그러한 이야기로 꾸민 ‘그림엽서’는 그 맛은 덜 하지만, 분명 같은 맥락의 뒷맛이 개운치 않은 여성의 이별이야기이다. 또, ‘주일 오후’의 하녀신분의 소녀가 상류층 신분의 청년의 갑작스런 키스로 발견해 내는 ‘자아 찾기’의 방식이란, 정말 여류작가가 이런 글을 써도 좋은지 하는 생각마저 들게끔 했다. 물론, 그 헛된 ‘자아 찾기’ 방식에 대한 불안의 전조와 예감을 숨기지는 않았지만... 어찌됐든 이렇듯 아이러니하게도 여류작가인 앨리스 먼로의 여성 주인공들은 힘없는 약자인 여성으로서 남자의 일방적인 사랑 앞에서 (그것을 사랑이라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한없이 무력하고, 순응적이다. 하지만 이렇듯 씁쓸하고 씁쓰름하다고만 하기엔 그녀의 글엔 다른 풍미가 은근히 배어있다. 특히, 그녀 자신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거나,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할 때면 이 향취는 이상하게 히스테릭하게까지 묘사된 그녀의 어머니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덤덤하면서도 낭만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나타난다. 그리고 그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남성성’에 대한 은근한 동경과 함께 자신의 ‘여성성’을 통해 그 ‘남성성’에 대한 동경을 극복해 보려는 강한 의지를 표출해내는 것을 엿볼 수가 있다. 물론, ‘사내아이와 계집아이’ 그리고 ‘붉은 드레스-1946’을 통해서 결국은 자신도 평범한 여성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해버리고 말지만... 작가 내부의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동경의 끊임없는 갈등과 더불어 해결안을 모색하고자 발버둥치는 자아상이 엿보인다. 그리고 종국에 가서, ‘행복한 그림자의 춤’을 통해 그녀는 ‘마살레스’라는, 어쩌면 자신이 추구하거나, 자신의 분신일지도 모를, 어느 시골의 늙고 순진한 피아노 선생님을 통해 그 모든 맛을 버물려 낸다. 물론, 그 모든 것은 ‘돌로레스 보일’이란 저쪽 나라에서 보낸 코뮈니케가 존재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코뮈니케의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란 연주를 통해서만이 작가내부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뛰어넘는 자리, 그리고 지나간 시절의 ‘애착’과 ‘향수’가 섞인 오묘한 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그 전까지 그녀의 글들에서 나던 씁쓰름하던 맛은 쌉싸름한 맛으로 뒤바뀌게 된다. 또, 그 맛엔 달콤함이 배어있기까지 하다. 그러하기에 씁쓰름하다고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달콤함은 씁쓰름함을 중화시키는 맛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의 모두에게 그러하듯이, 너무 달콤하기만 하면 그 맛은 금세 질리게 마련이다. 그러하기에 쌉싸래한 맛은 어떤 면에서 달콤함과 씁쓰름한 뒷맛을 동시에 오랫동안 남길 수 있는 그런 맛일지도 모르겠다. 어찌됐든, 이런 점에서 볼 때, ‘행복한 그림자의 춤’에서 ‘돌로레스 보일’이란 ‘코뮈니케’의 연주는 작가자신이 추구하는 ‘글’에 대한 맛이 아닌가, 잠깐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내가 현재 쓰고 있는 글의 지점과 앞으로 쓰고 싶은 글의 지점을 생각해 보게 된다.

 

 현재, 나는 습작이란 핑계를 대고 있지만, 다소 관념적이고 실험적인 글들을 썼고, 지금도 그런 글들을 쓰고 있다. 아마 이는 내가 시에 대한 집착이 있기에 시의 호흡을 소설로 가져가고 싶은 욕망에서 기인한 이유가 클 것이다. 동시에 줄곧 그러한 실제적인 관념과 실험 속에서 살아왔던 나로서는 남들과 같은 평범하고 소소한 이야기를 다룰 어떤 재간과 관심이 없다. 뭐랄까? 그러한 관념과 실험들이 내게 일상이 되어, 그런 것들이 내겐 평범하고 소소한 것들이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어찌됐든 현재의 내 재능과 지금까지의 내 살아온 과정, 그리고 내 글의 방향성에 대한 믿음,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생각해 볼 때 내가 지금 쓸 수 있는 글들은 당분간 그런 관념적이거나 실험적인, 더러 좋은 글이라면 시적인 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런 글들을 추구한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이것은 사실 별개의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현재 쓸 수밖에 없는 글과 자신이 추구하는 글이란 건 당연히 별개일 수밖에 없고, 언제나 모든 길엔 한 발자국씩 나아가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똑같이 자신에 대한 집착과 애착에 대해 이야기하더라도, 만약 자아과잉이 덜하다면, 아마 나는 앨리스 먼로와 같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는 방식으로, 혹은 다른 자아를 통한 묘사의 형식으로 나에 관한 이야기들을 자연스럽게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 덜어내지 못한 나의 관념들과 어떤 집착들은 그러한 글들을 쓸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국엔, 그러한 관념과 집착의 덩어리인 자아를 덜어내는 방법은 글이란 방식 말고 다른 방식을 배우지 못한 나로서는 글을 통해서만 가능하지, 달리 방도를 찾을 길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덜어내지 않고는 다른 걸음으로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을 나 스스로 절실히 예감하고 있는 까닭이다. 물론, 이 예감은 나를 묶어두는 퀴퀴한 족쇄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축지법’을 배운 적도 없고, ‘돈오’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저 모든 길엔 여정이 있고, 그 여정은 한 걸음 한 걸음 나갈 수밖에 없다는 자연의 섭리를 이제껏 보아왔기에 인정할 뿐이다. 아니, 그것은 거스르고 싶지만 거스를 수 없는 중력의 법칙임을 나는 인정하고 있다. 사실, 그러하기에 앨리스 먼로의 글들에 대해서도 긍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솔직히,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행복한 그림자의 춤’ 이전의 글속에 여성 인물들의 전형성은 부정해도 좋을만한 인물상들이었다. 게다가, 그 밑에 깔린 ‘남성성’에 대한 동경을 가장한 은근한 콤플렉스와 아버지에 대한 지나친 미화는 얼마든지 부정적으로 해석하고 비평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행복한 그림자의 춤’에서 보여주는 모든 미묘한 맛의 버물림은 그 이전까지의 글들이 하나의 과정이었음을 견지하게 했고, 과정의 중요함에 대해 새삼 내 스스로 재고하게끔 만든 것이다. 물론, 나는 어떤 글이 시기적으로 먼저인지 나중인지 모른다. 그리고 한 작품, 작품을 떠나 이렇게 그녀의 모든 작품을 한 작품에 뭉뚱그려 비평하는 방식이 결코, 좋은 비평방식이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전반에 흐르는 풍미를, 그리고 그 풍미의 절정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눈치 채지 못한다면, 한 작가에 대해서 그리고 그 작품에 대해서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하기에 지금 내가 처한 위치와 앞으로 자리하게 될 위치를 가늠해 보는 것은 내 글의 전반적인 풍미를 좌우하게 될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 아닌, 자기 내부의 고유의 갈등,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간에, 그것을 과감히 드러내고 동시에 그 해결안을 찾고자 발버둥 칠 때만이 찾아지거나, 자연스럽게 우러나오지 않을까 잠시 생각해 보게 된다. 또, 그 자리는 아마도 지금 현재부터 자신의 맨 처음, 애착이든 향수든 혹은 관념이든 이야기든 뭐든지 간에, 그 시작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도 된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풍미이거나 맛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사람됨은 그 시작점부터 차츰차츰 형성되어, 어느 순간이면 단단하게 굳어져버려 스스로 눈치 챌 수도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글을 쓰는 입장에서, 그리고 그런 사람됨의 형성과정에 대해 관심이 있는 입장에서, 그러한 시작점부터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대체 어느 지점에 관심을 둘 수 있겠는가? 그러하기에 아직은 조금은 더 느긋한 걸음으로, 어쩌면 앞으로도 쭉 그러한 것이 글을 쓰는 사람의 입장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길 뒤편도 바라보고, 길옆도 바라보면서 긴 여정을 잰 걸음으로 황소가 무겁고 고집스럽게 걷듯이 가야겠다는 생각을 새삼 해보게 된다. 비록 그 여정이 그 때문에 길고 지루할지라도 앨리스 먼로라는 어쩌면 그 과정을 모두 걸었을 작가의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란 작품처럼, 종국엔 그 모든 맛을 버물려낼 수 있는 작품을 하나쯤 써낼 수 있다면, 조금 느려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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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반점 - 2005년 제2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한강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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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반점 - 꽃을 향한 염원



부드러운 입술을 포개어

달콤한 혀끝 감각을 느끼는

당신의 아랫배는

따스하게 달떠 오르고

살짝 상기되어 불그스레한

당신의 수줍은 윗볼에

나는 갓 피어나 꽃잎을 펼친

당신의 질 옆 소음순을

상상하며 굵고 단단하게

그만 발기해버립니다.


온몸으로 발열하는 당신을

하나의 꽃이라고

살짝 젖혀진 당신의 입구를

하나의 꽃봉오리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지금 짐승처럼 발기한

나의 성기도

당신을 받쳐주는 줄기가 되어

바람에 흔들리듯 하늘거리며

당신 안에 흩뿌려질

나의 정액도

감히 꽃씨라는 이름을 붙여

하나의 의미 있는 아름다움으로

불리울 수 있을까요?

그렇게 당신과 같이 저도 감히

꽃이라 칭할 수 있을까요?


하나의 꽃이 되고 싶습니다.

당신처럼 하나의 의미 있는

아름다움이고 싶습니다.



 언젠가 어느 여자에게 ‘꽃을 향한 염원’이란 제목을 달고 이런 시를 선물한 적이 있다. 그것은 그 여자와 나의 달콤한 하룻밤의 첫 정사를 꿈꾸며 내가 썼던 일종의 나 자신을 위한 고백이었다. 그렇다. 분명히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순전히 나 자신만을 위한 고백 그 자체였다. 꽃에 관한 강한 열망을 품은, 그러나 늘 꽃일 순 없는, 늘 꽃 앞에서 시방 위험한 짐승일 수밖에 없는, 그런 내 자신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품은....... 그렇게 짐승처럼 발기한 나의 성기도 꽃대이고 싶은....... 한때 이를 닦으며 뻐끔거리는 치약 거품 속에서 스스로에 대한 역함을 느끼게 만들었던, 코를 푸는 휴지 속에 맺힌 누렇게 하얀 콧물들 속에서도 종종 보아야 했던, 혼자만의 허공에 뿌려진 혹은 종종 여느 여자들의 배 위나 콘돔에 그대로 사장되어버린, 내 정액들에 대한 뜨거운 연민이었다. 동시에 그 이유로 언제나 꽃과 의미에 대해 강렬한 콤플렉스와 함께 열망을 품을 수밖에 없는 내 자신을 위한 충실한 고백이었다. 그렇게 온전히 내 자신만을 위한 고백이었기 때문일까? 나는 20살 때부터 나를 휘감아 온 화두들로부터 그 여자를 따로 분리시키지 못했고, 이렇게 추상화된 꽃이란 이미지로 그냥 그 여자 역시 여느 다른 여자들처럼 내 가슴 속에 묻어야만 했다. 그저 사랑하고 싶었고, 꽃이라고 부르고 싶었던 어떤 기억으로.......



 ‘자위일 수 없는 까닭’,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사랑 없는 관계의 가능성’과 ‘신앙 없는 자의 기도’까지, 20살 때부터 내 뇌리 속을 사로잡았던 화두들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화두들에 휩싸이게 된 까닭은 아마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내 사춘기를 휘어잡았던 신에 대한 열망과 거기서 비롯된 죄책감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게다. 어쩌면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사춘기 때의 자위란 행위를 하면서 느꼈던 죄책감들, 그리고 20살이 되면서 차례차례 신을 떠나게 된 친구들의 방황과 그 속에서 한 여자에 대한 갈등에서 비롯된 정신적 고충들, 이런 것들이 하나하나 점층적으로 내 내면에 쌓여, 나는 그 모든 상황에서 비롯된 내 자신의 모순과 친구들의 절망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한없이 흔들려야 했던 한 여자에 대한 변명을 신이란 존재께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때문에 자위라는 혼자만의 외로운 몸짓도 누군가를 향한 간절한 바람이거나 기도일 수 있기를, 동시에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할 수 없는 한 여자와의 관계 속에서도 하나의 사랑의 형태가 꽃 피어날 수 있기를...... 그렇게 인간적이고 너무나 인간적인 모순이란 형태의 언어와 나이에 갇혀버린 나와 우리의 부질없는 모든 20살의 행위들과 바람들마저도, 결국엔 하나의 신앙이거나 진실일 수 있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또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이 순간도 나는 그것들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고, 또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자기 혼자만을 위한 자위와 사랑 그리고 신앙이란 곡조의 휘파람이란 얼마나 처량하기 그지없는지...... 어떤 누구와도 공감할 수 없는 혼자만의 진실을 비밀이란 신비로 포장한 그 마지막 곡조가 채 끝을 맺기도 전, 나는 그만 실소해버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도 그만큼 시간이 지났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20년이란 그 시간이....... 아니, 이제야 꼬박 그 20살이란 나이를 상쇄할만한 20년이 지나서야 겨우 알 거 같다. 꽃이란 실체와 그 꽃을 향한 내 강렬한 어떤 염원의 뿌리를.



 나는 지금 ‘한강’ 작가의 ‘몽고반점’을 읽은 지 채 30분도 되지 전에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실, 이런 급박한 호흡에서 글들은 ‘비평’으로써 그렇게 바람직하다고 말하기 어려울 게다. 왜냐하면 이런 호흡의 경우 대개 글들은 감정의 결들은 살아있지만 당최 냉정하지가 않아서, 나중에 보면 마치 하룻밤의 정사를 꿈꾼 듯 격한 감정과 욕망만 뒤섞여 있어, 그 난잡함에 언제나 후회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이 감정의 결들을 최대한 살리고 싶고, 또 이로 인해 후회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이 격한 감정의 결들이 비록 나중에 봤을 때 무모하기 짝이 없는 격정 그 이상이 아닐지라도, 이를 통해서 내 나름의 절실한 고백을 해야 하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면, 아니 지금의 이 격한 감정의 이유를 알 수 있다면, 내게 후회할 어떤 까닭이 전혀 없을 것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내가 ‘한강’ 작가의 ‘몽고반점’을 보고서 이런 격한 감정에 휩싸여 내 고백을 해야 할 절실한 까닭을 발견하게 된 것일까? 전혀 예상치 못한 내 시와 그녀의 글의 어떤 공감대를 내가 발견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 글에서 온 어떤 압도적인 몰입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물론, 이 두 가지 모두 사실이지만, 내 절실함을 끄집어낼 만큼의 진실은 아니다. 기실, 내 절실함은 어떤 수치심에 가깝다. 그동안 내 자신의 글에 대해 한없이 스스로 오만했던....... 때문에 타인과의 공감대 없이 나 혼자만의 소리를 내려했던, 내 스스로에 대한 미욱스러움 그리고 부끄러움........



 이 글을 읽기 전 나는 오랫동안 구상했던 글을 쓰고, 스스로 비평도 해보며, 동시에 여러 사람과 함께 평가도 하는 시간을 가져 보았었다. 글의 내용은 어떤 남자가 엘리베이터에 갇히면서, 어떤 흐릿한 형태의 여자 형상을 보고서 그간에 자신의 여자와의 관계 속에서 갖게 된 공포감과 수치심을 그 여자의 형상에 투영한다는 내용인데, 오랫동안 구상한 것에 비해 너무나 형편없이 졸렬하게 글이 써져 버렸다. 아마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글이 처음에 내 의도와 달리 너무나 추상적으로 가버린 데다, 엘리베이터 속의 여자 형상과 남자의 기억 속의 여자들의 연결고리가 미흡했기 때문이었을 게다. 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것은 결국 너무 내 혼자만의 이야기를 하기에 급급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로 그 글은 어떤 묘사도 인과관계도 없이, 화자의 추상 속에만 머물게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어떤 의미에서 비슷한 구상의 ‘몽고반점’은 내용 자체는 관능에 대한 추상과 관념을 다루고 있지만, 전혀 추상적이지도 관념적이지도 않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대체 무엇 때문에 내 글과 그녀의 글의 간극이 이렇게 똑같은 성적 관념을 다루는데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 가로 놓인 것 같은 차이를 만들어낸 걸까? 지금부터 나는 그 이유를 살피기 위해 먼저 이 글 ‘몽고반점’에 대해 나름 분석한 후, 내 자신이 부족했던 부분을 대조해보고, 글을 갈무리해 보고자 한다.



 먼저, 이 글은 ‘몽고반점’이라는 어떤 현실적인 소재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이 소재는 다소 생소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생소한 ‘몽고반점’이란 소재를 육체의 ‘순수성’과 연결 짓는 다소 시적인 연결고리는 일반인들에겐 전혀 예상치 못한 반전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렇게 매우 소소한, 그렇지만 일반적인 현실에서 쉽게 드러나지 않는 소재를 글에 끌어들임으로써 독자의 흥미와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동시에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녀는 능수능란하게 ‘몽고반점’에 성적인 관능과 함께 예술적 색채를 부여해 나간다. 특히, 여기서 그녀가 뛰어난 점은 이 ‘몽고반점’을 통해 드러나는 성적인 관능과 예술적 자연의 색채가 전혀 이물스럽지 않다는데 있다. ‘몽고반점’은 아직 어릴 때의 흔적이 남아 있는 순수성을 의미한다. 때문에 그 순수성은 육체적 순수성과 결부될 수 있고, 동시에 자연 그대로의 순수성으로도 연결되어진다. 그리고 이는 이 글에서 화자와 함께 가장 중요한 축이라 말할 수 있는 화자의 ‘처제’의 캐릭터를 구성하고 있다. 자연 그대로의 벗은 상태를 즐기고, 육식을 거부하는 문명에서 외떨어진 존재. 그 때문에 그녀는 그녀 식구들에게서조차 외면 받고, 모두에게 정신병자라고 오인 받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화자는 바로 그 이유로 그녀에게 성적인 욕구를 느끼기 시작한다. 또 더욱 아이러니한 점은 화자가 사회적인 영상을 찍던 작가였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사회에서 고립된 자신의 ‘처제’에게서 성욕을 느끼기 시작한 이후로 더 이상 사회적 작품이 아닌 관능 그 자체, 그리고 그 관능이 자연 그 자체로 표현되는 색채가 담긴 영상을 찍고 싶어하게 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경계는 너무나 미묘하고 위험하다. 왜냐하면 관능과 자연이 하나 되는 지점과 포르노그래피의 지점이 불분명할 뿐 아니라, 그 자신도 그 때문인지 처제에게 투영하는 자신의 욕망이 예술적인 욕망인지 관능적인 욕망인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는 기실 처음부터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순전히 관능적인 욕망이었다. 때문에 동시에 순전히 예술적인 욕망으로 승화될 수 있을 거라고 그는 확신하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인간의 사회는 경계와 구분을 나누는 하나의 도덕률이 존재하는 사회이다. ‘그’와 ‘처제’라는 관계, 동시에 ‘정상’과 ‘비정상’이 구분이 모호한 ‘처제’와의 관계가 어떻게 예술적 승화로 인정받고 용인될 수 있겠는가? 때문에 소설은 그냥 동화처럼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는 식으로 끝내지 않는다. 소설이 추구할 수 있는 모든 경계의 끝까지 이른 후, 이제까지 ‘화자’와 ‘처제’의 그런 모든 삶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용인해 왔던 ‘화자’의 ‘아내’의 시선과 언어를 통해 이 경계가 애초에 무리였음을 분명하게 드러냄으로써 끝을 맺는다. 즉, 하나의 관능적 실험으로써의 소설의 분명한 선과 한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글을 맺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내 스스로에 대한 비판과 앞으로의 글의 방향에 대해 잠깐 생각해 봐야겠다. 일단, 앞에서도 이미 밝혔듯이 내가 시도했던 관능의 실험은 너무나 추상적이었다. 때문에 캐릭터도 불분명했고, 배경 자체도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물론, ‘얼굴도 모르는 여자와 엘리베이터에 갇히다’라는 설정 자체에서 분명한 캐릭터와 현실적 배경을 끌어낸다는 자체가 이율배반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떠한 추상과 비현실도 실제와 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나는 잠깐 잊고 있었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추상과 비현실적인 소재를 가져다 와서 쓸 때, 그리고 그것을 주제로 삼을 때, 더욱 실제와 현실의 디테일에 대해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고 단순히 ‘시’적인 글을 쓰겠다는 막연한 논리로, ‘추상’과 ‘비현실’을 써내려간다면 어느 누구와 소통하고, 또 어느 누가 공감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2%를 위한 실험이었다고 한들, 그러한 글은 그 2%와도 소통할 수 없는 허공에 울리는 메아리가 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게 된다. 그러하기에 이제까지 20살 때부터 집착해온 나의 화두들은 분명히 이 지점에서 나의 글쓰기에 걸림돌이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아니, 분명 그러한 화두가 일반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한 다른 부분을 보게 한 점은 있겠지만, 동시에 그 시야를 함께 나누기를 스스로 거부하게 만든 걸림돌 그 자체였다고 말하는 게 좋을 거 같다. 그 때문에 나는 ‘한강’ 작가의 ‘몽고반점’에서 다루었던 비슷한 내용의 ‘시’를 쓰고서 어느 여자에게 선물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나도 꽃이 되고 싶었음을, 그렇게 누군가처럼 의미가 되고 싶었음을 읊조렸는지도....... 결코, 누군가를 향한 고백이 될 수 없는, 속으로만 타들어가는 소리로 그렇게 읊조렸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렇게 단순히 꽃이란 존재 자체에 대해, 그렇게 모든 존재에 대해 시기와 질투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이제 와서야, 내게 하나의 꽃이었던 대상도 그 실체도 사라져버린 지금에 와서야, 조심스럽게 내 마지막 시구를 바꿔보고 싶다.



당신과 하나의 꽃이 되고 싶습니다.

당신과 함께 하나의 의미 있는

아름다움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하나의 온전한 시가 된 이 시를 한강 작가의 ‘몽고반점’에 바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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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순 - 2014년 제38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편혜영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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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순 - One swallow doesn't make a summer!

    

 

 언제나 그렇듯이 한 계절이 가고, 한 계절이 다시 온다. 또, 언제나 그렇듯이 지나간 계절을 추억한다는 건 한없이 부질없는 짓이지만, 누구에게라도 어쩔 수 없는 생리적 본능에 가까운 일이다. 아니, 오늘이라는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가 거대한 계절의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계절이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나간 계절을 새삼스레 늘 회자하는 건 오늘을 어떻게든 살아내기 위해, 그렇게 다음 계절의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처음, ‘몬순’이란 소설을 읽어나갈 땐 다소 진부한 설정에, 진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또, 죽은 아이의 이야기? 그리고 웬 과학과 비과학에 관한 이야기? 문체가 부드럽고 읽어 내려가기 쉽게 구성된 점은, 역시 기성 작가답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모든 이야기가 너무 무난하고, 단조로웠다. 뭐랄까? 어떤 치열함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할까? 하지만 이야기에 어느 정도 절정에 이르러, 과학관 관장의 'One swallow doesn't make a summer.'1>라는 대사와 함께 몬순에 관한 이야기에 나올 때쯤 돼서, 슬슬 전반적인 이야기를 이해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제야 오히려 치열하지 않은 단조로움 아니, 담담함이 이 글에 어울리는 문체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한편으로 이것은 여성 작가가 남성을 화자로 여성의 내면의 고통을 표출하려했기 때문이 아닌가는 생각도 잠깐 해본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한 계절을 바꿀 수 없는 폭풍에 관한 이야기라면, 화자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담담함이 오히려 제격일 것이다. 어찌됐든 이러한 담담함을 바탕으로 내 개인적으로 이 글에 관해 두 가지 시선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앞에서 언급한 계절의 폭풍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마 이것이 이 글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미 언급한 듯이 그렇게 다소 담담한 투로 아기의 죽음에 대해 글은 서술해 나갈 수 있었으리라 생각해 본다. 다만, 아무리 커다란 폭풍이라도 한 계절을 바꿀 순 없겠지만, 폭풍 그 자체는 항상 무시할 수 없는 대상이며, 동시에 엄연한 현실이라는 점이다. 그러하기에 글속에선 폭풍에 대한 당혹감과 의혹을 남자 주인공의 시선으로 접근하고 있다.

 

 두 번째는 위의 이야기를 이어받은 남자의 시선에 관한 문제이다. 사실, 이 문제는 남자의 시선이라는 측면보다는 관계라는 측면으로 확장해 나가는 편이 더 좋을 거 같다. 왜냐하면 기실 여기서 남자가 자신의 부인에게 갖는 당혹감과 의혹은 이상하게도 마치 부인의 고통을 대변하고 있는 듯이 느껴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글의 후반부에는 이 부분에 대해 지면을 많이 할애하고 있다. 남자 주인공이 부인에게 갖고 있는 의혹과 당혹감, 그렇지만 함께 아기의 죽음이라는 폭풍을 견뎌낸 그 묘한 동지애... 그들은 그 관계 속에서 아직 지난 계절을 다 정리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렇게 폭풍에 정전이 되고, 누군가에 의해 고의로 깨진 아파트의 창문들처럼... 그러나 언제까지 그럴 순 없는 노릇이다. 아파트는 새로운 계절의 폭풍을 대비하기 위해 새로운 전력공급방식을 택했다. 그리고 이 때문에 필연적으로 단전의 상황이 발생한다. 마치 그들의 상황처럼... 그런데 한 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끊임없는 의혹과 당혹감을 내비치고 있는 글의 남자주인공은 그 어둠을 견딜 수 없어 밖으로 나가있고, 그래도 무언가 변화를 바라는 주인공의 부인은 단전한 아파트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는 어떤 측면에서 주인공의 부인이 갖는 당혹감과 의혹이 더 크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의혹과 당혹감마저 이제는 너무 힘에 겨워 어둠에 안주하고 싶어하는 그러한 심리를 대변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됐든 계절은 바뀌게 되어있다. 그리고 아파트는 더 이상 단전 없이, 언제나 환하게 빛날 것이다. 다만, 마지막 점검을 위해 깜빡, 깜빡 꺼졌다 켜지는 아파트로 진입해야할지 말지는, 아직도 밖에서 헤매고 있는 남자주인공의 몫일 것이다.



1> One swallow doesn't make a summer. 원래 의미는 한 마리 제비가 왔다고 해서 여름은 오지 않는다지만, 내 개인적으로 ‘아이의 죽음’을 제비로 표현하기엔 약하다는 생각이 들어, 제비를 폭풍으로 바꿔서 비유했다. 물론, 개인적으로 생각해 볼 때, 작가는 분명 의도를 가지고 Swallow를 사용했다고 생각한다. ‘아이의 죽음’을 그만큼 담담한 표현으로 비유하는 건 비상식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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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8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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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부인 - 존재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탄

 

 너무나 익숙했던 이름의 탓일까? 그 익숙함과는 교묘하게 배치되게도 나는 버지니아 울프를 접한 적이 거의 없다. 10대 때 아주 오래된 번연본의 시집을 본 기억과 20대 때 영화 올랜도를 본 기억 정도? 그렇지만 사실 이마저도 마치 날조된 기억처럼, 거의 뇌리 속에서 지워져버려, 아니 그만큼 별 느낌과 인상을 받지 못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거 같다. 물론, 이는 그 당시 나의 지적인 성장과 인생의 경험의 폭이 거기에 따르지 못했을 이유가 클 것이다. 더불어, 개인적으로 영미문학보다는 불문이나 독일이나 러시아문학 쪽에 줄곧 관심을 두어온 탓도 배제할 순 없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읽게 된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통해, 그동안 왜 내가 버지니아 울프에 관심을 갖지 않았는지, 왜 영미문학에 그토록 편협함과 비슷한 감정으로 다가서질 못했는지 반성해 보게 되었다.

 

 사실, 처음 글을 읽어 내려갈 때는 글에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전날 잠을 제대로 본 잔 탓도 있었고, 흔들리는 전철에서 대충 시간을 때워 보려는 어중간한 심산도 한몫 했을 게다. 하지만 그만큼 익숙하지 않은 문체와 스타일이기도 했다. 표지에 쓰인 ‘의식의 흐름에 따라 쓰인 기법’이라는 스타일이라는 것이 당최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동안 프랑스의 숱한 관념적이고 실험적인 소설도 접해 보고, 러시아식의 무겁기 그지없는 종교적 관념에도 굴하지 않았던 내가 왜? 대체 왜 그냥 길거리나 묘사하고, 날씨에 자기 기분이나 투영하는 한 여자의 글에 집중할 수가 없었던 것일까? 그동안 너무 외국소설과 장편을 등한시했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말하기엔 무언가 부족함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 소설들이 추구했던 관념과 여기서 쓰인 의식의 흐름이란 기법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는 기본적인 관념소설의 특징은, 특히 내가 많이 읽어왔던 장르에선, 시간의 축이나 장소의 축이 중심이 되질 않는다. 즉, 현실이란 공간보다는 사유의 측면이 부각되어져, 소설의 가장 큰 틀이며 기본 축이라 할 수 있는 스토리가 부재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버지니아 울프의 관념 속에서 현실은 너무나 생생하다. 그러하기에 여기엔 시간의 축도 존재하고, 장소의 이동도 공존하고 있다. 한 마디로, 스토리가 중시되는 관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의식의 흐름에 따라 순식간에 시간과 장소가 변경이 되고, 심지어 의식의 중심이 되는 인물도 눈 깜짝할 사이에 바뀌어, 순간 집중력을 잃어버리게 되면 버지니아 울프가 이야기하는 스토리를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게 된다. 일반소설과 달리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속에선 친절하게 제 3자인 작가나 의식의 주인공인 화자가 시간을 알려주거나 장소의 변화를 알려주지 않는다. 갑자기 뒤바뀐 의식의 주인공인 어느 화자가 자신의 의식을 어느 시각과 장소에 투영하면서 독자는 시각이 바뀌었음을, 그리고 장소가 변경했음을 그제야 알 수 있게 된다. 때문에 독자는 때로는 페이지가 한참 지나서야 의식의 주체도 바뀌었음을 인지하게 되고, 시각과 장소가 바뀌었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일부러 난해하게 그 의식의 흐름을 흩뜨려 놓은 경우는 없다. 내 개인의 경우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을 읽었을 때, 그런 인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작가가 일부러 의식의 흐름을 흩뜨리고, 난해하게 만들고 있다는, 어떤 그런 인상? 물론, 이 또한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날조되었을 확률이 크지만, 어찌됐든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은 그러한 작위적인 복잡성을 띈 글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럼에도 이러한 기법의 소설은 흔한 소설은 아니다. 그러하기에 집중력이 없고, 익숙한 기법만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외면 받을 확률이 크다. 이 글이 단순히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이라는 측면만 강조 된다면,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의식의 흐름의 내면을 속속들이 보게 된다면, 그리고 그 의식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현실을 보게 된다면, 결코 이 소설을 그러한 기법의 소설로만 설명하기엔 부족하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의식의 내면들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을까?

 

1. 클라리사 댈러웨이

 

 어떻게 보면 허영심이 가득한 속물적이고, 차갑기 그지없는 귀부인이면서도, 모두가 주목하게끔 만드는 우아함과 기품을 지닌 댈러웨이 부인에 대해 한 마디로 축약하기란 쉽지가 않을 것 같다. 비단, 버지니아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뿐 아니라, 다른 많은 인물들에 대해서 묘사할 때도 그 인물의 한 축만을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다른 이면에 대해 표현하기 위해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묘사가 외부에서 객관적으로 인물에 대해 묘사하려는 시도보다는 인물 내부의 의식으로 작가 자체가 들어가 인물과 동일시함으로써, 인물의 객관적 묘사를 시도하기에 더욱 그 정당성을 인정받게 된다는 점이다. 물론, 이 말에는 다소간의 어패가 있기는 하다. 작가가 인물의 내면에 들어가 동일시한다는 것은 그 표현 자체에서 객관적이지 못하고 주관적이라는 인상을 주며, 때문에 인물의 객관적 묘사의 정당성에 대한 반박의 여지를 얼마든지 갖게끔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한 인물만의 1인칭 시점일 때의 문제이다. ‘댈러웨이 부인’ 소설과 같이 여러 인물이 각자만의 1인칭의 시점을 갖고, 각자의 의식 속에서 서로 상대방을 의식하면서, 동시에 서로를 비판하고 애증 하는 관계 속에 있을 때엔, 이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인물 서로는 서로를 평가하게 되고, 이를 통해 독자는 각자 다른 시점 속에서 한 인물을 바라보게 된다. 동시에 그 인물의 의식 속에서 왜 그런 다양한 시점들이 그 인물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지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때문에 댈러웨이 부인은 그의 남편 리처드에게는 더 없이 사랑스러우면서도 지혜로운 존재로서 가치를 지닌다. 그렇지만 피터 월시에게는 허영심 가득한 속물이면서, 동시에 차갑고 이성적인 존재로서 상대적인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렇다면 그녀 스스로는 이러한 관점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바로 어쩌면 이것이 가장 그녀를 설명하는데 어울리는 키워드라고 말해야 할 것만 같다. 왜냐하면 그녀가 소설 초반부에서 인용한 셰익스피어의 ‘심벌레인’ 4막 2장의 ‘더는 두려워 말라, 태양의 열기를, 사나운 겨울의 횡포를’이란 경구가 이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에 나는 이 구절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조금 생뚱맞다고 할까? 피카딜리의 거리를 걷다가 문득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하면서 떠올린 이 경구가 대체 무슨 의미를 지닌단 말인가? 게다가 이 진부한 표현이란. 맨 처음 읽을 때 집중력이 없던 탓도 있었지만, 이 구절이 다시 인용되었기에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그렇게 가슴에 와 닿질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을 모두 읽은 후, 그녀의 단편 중 ‘본드 가의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서 이 경구에 대해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본드 가의 댈러웨이 부인’이 정확하게 몇 년 도에 쓰인 글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읽은 번역본에선 1922년에서 1925년 사이에 쓰인 단편으로 분류하고 있다. 즉, ‘본드 가의 댈러웨이 부인’은 1925년에 쓰인 ‘댈러웨이 부인’의 초고 형태인 단편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이유 때문인지 ‘본드 가의 댈러웨이 부인’은 ‘댈러웨이 부인’의 초반부와 거의 비슷한 구성과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거기서도 셰익스피어의 ‘심벌레인’에서 나온 경구가 등장한다. 그리고 동시에 영국의 시인 퍼시 셸리가 존 키츠의 죽음을 애도하며 썼다는 ‘아도나이스’의 한 구절도 등장한다. ‘서서히 스는 녹으로부터 안전해진 그는 이제 더 이상 슬퍼할 수 없네. 가슴이 차갑게 식고 머리가 하얘졌네.’ 여기서 특히, ‘서서히 스는 세상의 녹으로부터.’라는 구절이 강조되면서, 셰익스피어의 ‘심벌레인’의 구절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즉, 나이가 50이 넘은 댈러웨이 부인은, 더 이상 20대 때의 뜨겁고 격렬하게 피터와 사랑하고 싸우던 클라리사가 아닌, 세월의 풍파를 온 몸으로 겪어 늙고 닳은 한 여인으로써 이제야 삶에 자연스러워진 것이다. 서서히 스는 세상의 녹으로부터. 그러하기에 그녀는 동시에 젊은 날 자신을 집어삼킬 것만 같던 태양의 열기도, 사회주의라든가 혹은 페미니즘이라든가 하는 그런 관념으로부터, 그리고 인생의 사나운 겨울의 횡포도, 피터와의 이별이라든지 혹은 미스 킬먼으로 대변되는 종교와 권력의 횡포라든지 하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이제 담담하고 자연스러워져, 아무런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물론, 그 두려움을 인식하고 있다는 자체는 아직 거기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50이 넘은 그녀는 이제야 그 실체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됐으리라 생각해 본다. 그녀 자신이라는 그 실체를.

 

2. 피터 월시

 

 다른 어떤 인물보다도 개인적으로 많이 몰입하고 흥미를 가졌던 인물이었다. 비록 나이는 다르지만 50이 넘은 그와 40이 가까운 내 나이에서의 작은 연대감을 찾을 수가 있었고, 다른 무엇보다도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헛된 사랑과 꿈을 찾아 헤매는 방랑자의 모습을 통해 나를 쉽게 투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때문인지 피터 월시에 대해서는 꽤나 단순하게 내게 읽혔다. 물론 피터 월시의 캐릭터 자체가 특별한 것은 분명하다. 젊을 적 지금의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와의 사랑에 실패하여, 마치 도피하듯이 인도로 향하며, 그 인도로 가는 배에서 처음 본 여자와 결혼을 하고, 다시금 애가 둘이나 있는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온 철없는 남자가 어디 흔하겠는가? 하지만 작가가 여자였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야기의 축이 아무래도 피터보다는 클라리사에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피터는 어떤 면에서 피터 그 자체로 읽히기보다는 ‘클라리사’에 대한 ‘나르시시즘’을 대변하는 인물처럼 느껴졌다. 물론, 피터 자체에 대한 의식의 투영도 버지니아 울프는 많은 장을 할애하고 있지만, 너무 특별해서 일까? 아니면 나라는 개인적 인물과의 유사성에 기인한 익숙함 때문이었을까? 그도 아니라면 왜 피터 월시는 그 의식의 흐름 속에서 클라리사와 대비되는 불안감과 자유라는 측면 그 외에 피터 월시 그 자체의 이야기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소설의 말미에 등장하는 클라리사의 파티에 마지막이 이르기까지 부외자로 겉도는 피터 월시는 그 정체성을 찾지 못한 채 의식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내내 부유한다.

 

3. 셉티머스 워런 스미스와 루크레치아

 

 댈러웨이 부인과 피터 월시를 축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에서 다른 모든 등장인물들은 그 둘과 교묘하게 얽히고설킨 관계의 구조 속에 놓여있지만 이 두 인물만큼은 별도의 관계망 속에 놓여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 둘과 연관된 월리엄 브래드 쇼 경이라는 당대 최고의 정신과 의사는 클라리스의 파티에 등장하기도 하고, 직접적으로도 이 두 인물이 클라리사와 피터가 함께하는 산책과 여정 가운데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이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는 한다. 하지만 이 부부는 이 소설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클라리사 파티에 등장하고 있지는 않다. 아니, 마치 그 파티 이면에 가려진 비극의 전초처럼, 아니면 파티를 가능케 하는 비극적 자양분인양, 셉티머스의 불행한 자살과 함께 파티는 시작되고 있다. 그렇다면 굳이 왜 버지니아 울프는 이 두 인물을 등장시킨 걸까? 그것도 그렇게 많은 페이지를 할애해서....... 어머니의 죽음 때부터 시작되어 그녀 말년의 비극적 자살까지 이끈 그녀 자신의 정신 병력을 떠올려 볼 때 나름 수긍이 가는 점이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소설가와 소설은 분명히 분리되어져야 한다. 그렇다고 가정한다면 이 소설 속에서 이 부부의 비중은 왜 이렇게 큰 것일까? 심지어 어떤 면에서 이 두 인물은 많은 이들에게 이 소설 속에서 축이 되는 두 인물인 클라리사와 피터 월시보다 더 많은 공감대를 형성할 지도 모르는 인물들이다. 왜냐하면 누가 봐도 클리리사의 귀족적 삶과 피터 월시의 방랑자적인 삶은 비현실적인 면이 많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당시 세계 1차 대전을 겪은 후, 그것도 그 전쟁을 참여했던 당사자였던 셉티머스란 전도유망한 한 젊은이의 불행은 훨씬 리얼리티를 담보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불행한 젊은이의 죽음은 소설 속 정점이 아닌 그 정점을 이루기 위한 출발선에 놓여 있다. 피터 월시가 클라리사의 파티로 향하는 여정의 사이렌 소리로, 그것도 먼 곳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로. 이 소설의 정점인 클라리사의 파티와는 마치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그렇지만 이 불행한 부부가 참여하지 못한 클라리사의 파티에 그들의 불행에 일정부분 책임이 있는 블래드 쇼 경은 등장한다. 그것도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수단으로 클라리사 파티를 이용하기 위해서. 특히나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셉티머스를 자살까지 내 몬 블래드 쇼 경 그 자신의 다소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철학을 정책적으로 관철하기 위해 그가 파티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러하기에 어떤 면에서 윌리엄 블래드 쇼 경은 클라리사의 파티의 감춰진 위선과 거짓을 폭로하고 있는 구심점으로 등장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클라리사의 파티는 이들과 무관하게 클라리사를 위해 그리고 피터 월시를 위해 존재해야 하고, 이 소설의 정점이 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대체 또 무슨 이유일까?

 

4. 결말 : 클라리사 댈러웨이 부인의 파티

 

 앞에서 언급한 대로 클라리사의 파티는 셉티머스 워런 스미스의 자살과 그의 젊은 이탈리아 부인 루크레치아의 불행을 떠안은 채 시작된다. 동시에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인간 군상들이 집결되는 장소가 된다. 영국 수상에서부터 대대로 권력 군인가문인 레이디 브루턴, 모사꾼인 휴 휘트브레드, 정신의과 권위자인 월리웜 블래드 쇼 경에, 클라리사의 옛 친구인 셸리까지. 그렇지만 그 모든 인물들은 다시금 소설 말미에 두 축으로 압축된다. 하나는 리처드 댈러웨이와 그의 딸 엘리자베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클라리사 댈러웨이와 피터 월시에게로. 하지만 이 두 축은 사실 클라리사 댈러웨이를 통해 연결되어지고, 갈라진 축이다. 하나는 리처드와 엘리자베스로 대변되는 행복한 부녀관계를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댈러웨이 부인으로써의 삶의 일면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피터 월시로 대변되는 그녀 자신 클라리사로서의 삶에 대한 열정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 둘은 따로따로 분리되어질 수 있는 성질의 그 무엇이 아니다. 그러하기에 마지막에 피터가 느끼는 두려움과 황홀감 속에서의 이 두 삶의 축은 ‘클라리사로군.’이란 한 마디로 축약되어져 접합점을 찾고서, 소설은 바로 거기에 클라리사가 와 있다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그런데 이 마지막의 간단한 피터의 외마디 경탄은 내게 있어서 두 가지 의미로 읽힌다. 첫째는 그 동안 줄곧 부유하던 피터의 정체성이다. 피터의 정체성은 바로 클라리사 그 자체였다. 클라리사라는 존재 속에 피터의 모든 사랑과 절망이 존재해 왔고, 때문에 피터는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클라리사는 이미 자신의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피터는 클라리사를 고백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녀 없이는 이제까지의 자신의 그 어떤 삶도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피터의 삶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클라리사에 대한 미적 의식으로 확장되게 된다. 왜냐하면 피터가 ‘클라리사로군.’이라고 외마디 경탄을 했을 때, 피터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백과 더불어 줄곧 자신이 비판해온 클라리사의 허영과 거짓마저도 인정해버리게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분노와 공포감이 아닌, 황홀감과 두려움 속에서 클라리사의 이름을 외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클라리사는 결국 이 글 속에서 본인 스스로는 아니더라도, 피터를 통해 나르시시즘을 완성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면에서 셉티머스 워런 스미스 부부의 불행과 파티에 온 모든 인간 군상들을 떠안은 그녀의 파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거기엔 세상에 스는 모든 녹이 존재해 있고, 동시에 뜨거운 태양의 열기와 사나운 겨울의 횡포가 공존해 있다. 그럼에도 그 모든 것으로부터 어우러져, 동시에 외떨어져, 아름다움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클라리사’의 ‘나르시시즘’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나르시시즘’이 피터를 통해 확언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나르시시즘’의 확장인 진정한 ‘미’에 대한 획득으로까지 감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이야기를 다소간 정리해 보아야 할 거 같다. 이 글을 어떤 면에서 나와 같이 미적인 측면에서 읽는 것은 분명 위험한 해석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개인적으로 이 글은 ‘클라리사’로 대변되는 삶의 모순적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느끼고 있다. 비록 그것이 셉티머스의 불행한 죽음과 여러 인간 군상들의 위선을 바탕으로 한 것일지라도, 그래서 인생이 아름답다는데 반론을 꺼내야 한다면 어떤 인생이 행복할 수 있고, 또 어떤 인생에 아름다움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인생은 뜨거운 태양의 열기와 사나운 겨울의 횡포도 존재한다. 그리고 동시에 세상에 스는 녹들은 눈에 보이지 않게 천천히 우리를 좀먹어 들어, 눈치 챘을 땐 이미 늦었을 때가 대다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생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말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 중 그 어느 누구도 뜨거운 태양의 열기 속에 감춰진 찬란한 태양이 지닌 빛의 충만함을 쉽게 부인할 수 없으며, 사나운 겨울의 횡포 속에 가려진 눈 내리는 풍경의 아름다움을 함부로 외면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에 스는 녹은 어떤 면에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들이다. 아니, 어떤 면에서 분명 세상에 스는 녹은 아름다움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만약에 세상에 스는 녹이 없다면, 그렇게 우리가 모르게 머리에 새치가 생겨나고 이마에 주름이 늘어가는 그 세월의 녹이 없다면, 우리가 젊은 날의 아름다움에 대해 감히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란 존재가 이러한 세월의 녹들 가운데서도 혼자가 아닌, 그 어느 누군가에게는 두렵게까지 황홀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그 무엇보다 이 불행한 삶 가운데 놓여진 우리의 존재를 아름답다고 고백할 수 있는 동인이 아닐까? 그런데 우리는 왜 쉽게 이렇게 우리의 삶의 동인이 되는 누군가의 외마디 경탄을, 우리에 대한 존재 고백을 들을 수 없는 것일까? 어쩌면 이미 가 닿아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주 가까이에... 너무 낮은 읊조림이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잠시 귀 기울여 보자. 또 다른 방황하는 ‘피터 월시’라는 우리의 자아가 아주 낮은 목소리지만 두려움과 떨림을 가득 품은 황홀감으로 읊조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클라리사로군.’이란 외마디 경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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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의 연인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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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경을 읽는, 고통스러운 즐거움

- 비극적 원형의 인물군상들이 사는 세계에 대한 희극적 묘사

 


 먼저, 이 비평의 제목을 이 소설집 뒤쪽에 나와 있는 문학평론가 신승엽의 해설집의 제목을 그대로 차용했음을 밝혀두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사람의 비평을 읽은 것은 전혀 아니다. 원래 내 개인의 성향상 무언가 비평을 할 때 내 개인의 이야기와 엮어서 전혀 새로운 다른 이야기를 창출해내는 것을 나름의 재미라 여기고 있는 탓에, 기실 나는 거의 누군가의 비평을 읽는 경우가 드물다. 다만 우연히 읽어가는 도중에 본 이 소설집의 해설 제목이 내가 정미경의 소설을 읽고 느낀 바와 맞닿아 있는 맥락이 있어서 그대로 차용해 보았다. 그리고 두 번째로 미리 밝혀두고 싶은 바는 나는 이 소설집에 나와 있는 정미경의 소설 중 한 작품을 골라 비평을 하지 않고, 전 작품을 망라해서 비평을 해보고자 한다. 그만큼 한 작품 한 작품마다에서 느낀 재미가 개인적으로 남달랐고, 여운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어떻게 이 비평을 풀어나갈까 하고 몸이 달아있다. 아니, 읽는 그 순간부터 달아 있었다. 정미경이란 작가의 다소간의 색기 있는 묘한 얼굴이 내게 섹스어필한 작용을 한 구석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녀의 작품에 어른거리는 다소간의 냉소적이면서도 악착같은 그녀의 그림자에게서 내가 환영을 품은 걸 수도. 그 무어래도 좋다. 안달이 난 이 몸을 이 비평을 통해 다소라도 해갈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그를 통해서 내 글의 또 다른 방향에 대해서 생각해 볼 여지를 발견해낼 수 있다면, 이 비평이 단순히 내 자신을 위한 수음이 아닌, 그녀와 아니 그녀 문학과의 정신적인 접합이거나 접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일단, 그렇게 믿어보고 싶다. 그러하기에 먼저는 내 이런 안달의 이유부터 천천히 되짚어 보고자 한다.

 

 사실, 정미경의 소설집을 산 순간부터 나는 이미 흥분해 있었다. 이미 전에 ‘밤이여 나뉘어라.’를 통해서 그녀를 처음 접하고 신선한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고, 같은 소설집에 ‘나의 피투성이 연인’을 통해 일종의 내 이런 욕구에 대한 예감을 충분히 갖게 되었다. 제목부터 강렬하지 않은가? 마치 시그널 레드라는 원색처럼 강렬한 ‘나의 피투성이 연인’ 그리고 ‘밤이여 나뉘어라.’ 하지만 그때는 일종의 예감이었던 것만은 분명한 거 같다. 왜냐하면 나중을 기약하며 그녀를 바로 찾아보아야겠다는 욕망을 억누르고서, 이내 지워버렸으니까. 하지만 이번에 소설집을 펼쳐드는 바로 그 순간 나의 모든 기억의 저변에 깔려있던 욕망들이 되살아났다. ‘너를 사랑해.’를 읽는 그 순간부터 바로, 불꽃처럼 활활 타올라, 그 불꽃은 내게서 시그널 레드의 빛깔을 앗아가고, 경면주사 붉은 빛깔의 점이 비에 젖은 꽃잎처럼 착 들러붙었다. 그렇다! 그것은 분명 붉은 원색이란 원형에 대한 집착을 앗아갈 만큼 강렬하게 붉은 기억과 욕망이다. 그렇지만 그 때문일까? 사람들은 그 경면주사의 붉은 빛깔을 주홍색이나 적갈색이라고 폄하한다. 게다가 비에 젖은 꽃잎처럼 그 빛깔이 착 달라붙었다고 한다면 대체 사람들은 무어라고 생각하겠는가? ‘시그널 레드’ 속 화자는 ‘미쳤구나.’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차마 입 밖에 꺼내지 못하고 대신 스스로에 대한 초라함을 느낀다. 왜 일까? 글 속 화자는 타인에게 ‘미쳤구나.’라고 말을 꺼내게 될 때,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자신의 차가움에 진저리가 처질 거 같아서, 스스로에게 초라함을 느꼈다고 소리가 되지 못한 마음속의 말로 읊조리고 있다. 그렇게 글속 화자는 미친 경면주사의 붉은 빛깔을 이해하고 싶어하는 그 이유로, 원색과 유사빛깔 사이에 있는 색채에 대한, 다른 말로 단순하게 표현하면 광기에 대해 남다른 애착과 애증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쉬 이해할 수 있을까? 그 빛깔이 글속 k에게 갖는 이유를? 그 빛깔 때문에 어느 날 누군가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면 우린 이해할 수 있을까?

 

 ‘너를 사랑해.’를 읽는 순간, 문득 그리스 비극이 떠올랐다. 아마 마지막 장면 때문이었으리라 추측해 본다. 사랑하는 남녀가 생이란 팍팍한 현실을 위해 서로의 사랑과 감정마저 포기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하지만 왜 하필 그리스 비극이었을까? 그리스 비극을 남달리 읽은 적도 별로 없고, 아마 고등학교 때 문고판으로나 읽어본 게 전부일 텐데. 그저 철학을 공부했을 때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 조금 언급된 비극의 원형에 대해 들은 풍월과 그리스 철학에서 간간히 등장하는 소포클레스,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에 대해 이름만 알 뿐인데. 하지만 단 한 가지 선명한 기억이 있었다. ‘그녀는 12명의 자식이 죽은 후에도 식사를 거르지 않았다.’라고 하는 구절을 어디선가 최근에 내가 읽고서, 내 깊숙이에 각인시킨 그런 기억이. 그래서 인터넷을 통해 그리스 비극을 검색해 보았다. 그를 통해서 내가 알게 된 것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이 내게 꽤 맞을 거 같다는 정도였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이야기하는 ‘하마르티아(판단착오 혹은 도덕적 결함)’이 결여된 모순덩어리 그 자체를 다룬 비극이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과격한 인물군상들과 구성들이란 무언가 다른 비극작가들과 궤를 달리하는 바가 언뜻 봐도 훤히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작가들은 직접 읽은 것도 아니라, 무언가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원래 처음에 찾고자 했던 작품도 내 기억 속에 있는 ‘그녀는 12명의 자식이 죽은 후에도 식사를 거르지 않았다.’란 내용이 들어간 비극작품이었는데, 전혀 찾을 수 있는 단서가 보이지도 않아, 이 기회에 그냥 큰맘 먹고 그리스 비극을 정독해 보자란 마음으로 알라딘 중고샵에서 약 9만 원가량 되는 그리스 비극 전집을 결제했다. 그리고서 새벽에 우유배달을 한 후 집에 들어가서, 근래에 봤던 철학원서를 뒤져보았다. 분명 거기 어디선가 그리스 비극에 대해 읽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 책엔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그리스 3대 비극작가를 다루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새벽 지겨운 영어문자들이 난립하는 가운데에서도 차분하게 정신을 가다듬고 찬찬히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보았지만, 내가 찾는 구절은 어디에서도 나오질 않았다. 그리고 오늘 아침,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정오쯤이라고 해야 할 거 같다. 여하튼 그 시각에 불현듯 최근에 읽은 책 중에 ‘시몬느 베이유’ 전집이 있는 것이 기억이 나서, 한 1시간가량 또 책을 뒤적거렸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뜻밖에 내가 찾던 구절을 찾을 수 있었다. 원래 내용은 이러하다. ‘머리칼이 그토록 아름다운 니오베도 식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란 구절인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우스가 헥토르를 잃고 상심한 트로이의 마지막 왕 프리아모스에게 테베의 여왕이었던 니오베가 자식 열둘을 잃고도 식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는 이 고사를 통해 프리아모스를 위로하며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는 내용이다. 한 마디로,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난 완전히 삼천포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는 전혀 그리스 3대 비극작가와도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에우리피데스’니, ‘하마르티아’니 하는 작가도 말들도 그냥 뻘짓에 불과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그토록 그 구절에 집착한 까닭과 그를 통해 그리스 비극을 3-4시간 이상 일일이 검색해 가며, 과감히 지름신의 임재를 통해 결제까지 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쭉 돌고 돌아 온 정경미 소설의 색기인 그 경면주사 빛깔에 대한 이야기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오이디푸스’니 ‘엘렉트라’니 하고 많은 유명한 비극들을 놔두고, 왜 잘 알지도 못하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나와 있는, 그것도 그저 고사로 이용된 니오베의 이야기에 나는 꽂혀있던 것일까? 그리고 왜 불현듯 정경미의 소설을 읽었을 때 그 구절을 떠올리게 되었을까?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비극의 지점이 기존에 그리스 비극을 논할 때 흔히 말하는 운명과 굴레라는 지점이 아닌, 이런 현실의 기반 위, 다시 말해서 비극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되는 삶이란 비극의 지점에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잠시 생각해 보게 된다. 마치 ‘너를 사랑해’에서의 두 남녀의 아직 시작도 되지 않은 비극의 서막 같은 결말처럼, 그리고 ‘들소’에서 여주인공 ‘수혜’가 그가 그토록 끔찍이 여기던 남편 ‘하윤’이 죽고 난 이후에도 그 ‘하윤’의 그림자 속에서 나머지 생을 묵묵히 살아가야 하는 것처럼, 비극은 오히려 모두가 죽거나 벌 받거나 하는 식의 간단한 결말이 아닌, 생을 살아가는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자식이 많은 것을 자랑으로 여기던 니오베가 자신의 모든 자식이 죽고 난 후에도 식사를 거르지 못했던 것처럼, 그러하기에 비극은 오히려 생에 대한 강한 집착과 천착으로 이어진다. 그 때문일까? ‘바람결에’에서 여주인공은 사랑 없는 관계에서 태어날 아기에 대해서 집착하고, 그 아기에 대한 희망마저 꺼져버린 그 순간조차 억척스럽게 비빔밥을 비벼 먹는다. 그리고 ‘매미’에서 ‘간질’ 비슷한 정신병을 앓고 있는, 쓰러질 듯한 36kg의, 남편도 있고, 아이도 있는, 뻔뻔스러운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주인공 남자에게 생을 살아가기 위해 남자라는 특별한 다른 약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하필 이런 인간군상들 뿐이란 말인가? 아리스토텔레스 말대로, 이 모든 것은 그저 ‘하마르티아’라는 판단착오와 도덕적 결함이 빚어낸 인물상들에 불과한 걸까? 하지만 역으로, 그런 판단착오와 도덕적 결함이 없는 인물은 또 누구란 말인가? 그런 인물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할까?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봤을 때, 비극의 탄생은 이렇게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모순된 우리들을 판단착오와 도덕적 결함이란 잣대로 재단하여 만들어낸 죄책감과 죄의식이란 관념으로 붉게 물들게 하는 그 경면주사 빛깔에 있지 않을까?

 

 프랑스의 유명한 극작가 ‘라신’이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히폴리투스’란 작품을 각색하여 만든 ‘페드르’란 작품이 있다. 내용은 간단하다. 전쟁을 나간 아버지가 아들에게 그의 새 아내를 부탁하고 떠나는데, 그의 새 아내와 아들 사이에서, 다시 말해서 의붓아들과 새 어머니 사이에서 연정이 들끓어 올라, 결국엔 모두 자살로 끝나는 이야기이다. 어쩌면 정미경 작가가 ‘시그널 레드’에서 다소간 이 이야기의 원형을 자신의 소설 속에 끌어들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소설을 읽는 동안 했었다. 하지만 비단 이 작품이 아니더라도 이런 류의 금기된 사랑의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널려 있다. 그런데 왜일까? 정미경은 ‘시그널 레드’에서 그 금기된 사랑 이야기를 ‘경면주사 빛깔’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경면주사 빛깔’이 진짜 원형이 되는 시그널 레드의 빛깔을 앗아가 버린다는 이야기 구성을 취하고 있다. 왜, 금기된 사랑의 강렬함이 원형적 사랑의 형태를 앗아가 버리는 걸까? 왜, 똑같은 사랑인데 하나는 원형이고 하나는 금기가 되는 것일까? 만약 색의 맹이라면 그 두 색의 구분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사실, 개인적으로 실제 색약인 나는, 그것도 적녹 계열의 색약인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일정부분 공감하는 바가 있다. 색약검사를 하는 책자를 내가 읽을 때마다 학교 친구들은 큰소리로 웃었다. 분명히 내 눈엔 33으로 보이는데, 86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나는 어릴 적부터 이공계열과 예술계열에는 발을 들이미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다. 물론, 내 기질상 그 근처로 감히 갈 수도 없었겠지만, 여하튼 그렇게 권리를 빼앗기고, 소싯적 소방공무원 시험에는 이 문제로 인해 시험 응시 자격조차 얻을 수가 없는 실제 불이익을 겪기도 했다. 물론, 여기에는 다 나름의 합당한 이유가 있다. 실제 불이 났을 때, 색의 구분이 모호할 경우, 판단착오를 내려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사고도 대형사고로 이어지게 만들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런 색약인들을 위해 색약안경도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원형이란 것은 어떤 의미에서 분명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구분해 놓은 색의 규정에 따르면 분명히 색의 원형은 나름 존재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 소설 속에서도 나오지만 색의 구분이란 것은 너무나 인위적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에서 나라마다 가장 다른 정의와 구분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색이라고 한다면 우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실제로 색이란 원형은 우리 인간의 눈이 가진 관념으로 구분 짓고 규정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그런데 그 규정 때문에 우리는 많은 동류의 색을 단 몇 가지 원색 안에 묶는 일반화의 오류를 매일 범하고 있다. 왜, 경면주사 빛깔의 점이 비에 젖어 착 달라붙으면 안 되는가? 비록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시그널 레드와 다르다 할지라도 그것은 분명 같은 종류의 붉은 빛깔 아니란 말인가? 파랑을 붉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붉어서 붉다는 것뿐인데... 그 빛깔이 유난히 강렬하고 야하게 비쳐지는 까닭은 혹 그 경면주사 빛깔을 같은 붉은 계통의 색이 아니라는 오해에서 오는, 단순하게 말해서 그냥 금기시하는데서 오는 우리의 고정관념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그러하기에 비극은 탄생하고, k는 아파트 베란다에 뛰어내릴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 그 스스로도 분명 경면주사 빛깔에 대한 고정된 관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 테니까. 끝끝내 그가 뛰어내리는 순간까지. 하지만 악착같이 생을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이러한 비극적 코드도 얼마든지 희극으로 바꾸어 놓을 힘이 있을 것이다. 마치 정미경의 이 소설집 속 과장적이고 비극적인 인물들에 대해 전반적으로 유머러스하고 희극적으로 써내려가진 문체 그 자체처럼. 그 때문인지 나는 정미경의 소설집을 읽는 내내 카페에서 사람들 눈치를 봐가며 혼자서 키득거렸다. 물론, 정미경의 소설은 그런 비극적 삶에 대한 나름의 애착과 애증의 시선을 가지고 있기에 그렇게 가볍게 키득거리는 것이 실례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도 나머지 내 삶을 영위하기 위해, 그리고 문학이란 이 덧없는 놀이에 함몰하기 위해, 이 정도 냉소적인 웃음 약은 필요하지 않을까? 아니, 이런 거라도 없으면 대체 어떻게 생을 영위해갈 수 있단 말인가?

 

 이제 대충 이야기를 갈무리 해봐야겠다. 처음부터 방만하게 이야기를 벌려 놓아서 산만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느낀 바는 사실 간단하다. 정미경 작가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에 관한 부분이었다. 정미경 작가는 뛰어난 이야기 구성을 가진 작가도 아니고, 그런 구성을 구태여 짜지도 않는 작가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해 본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일까? 그녀의 작품 속 인물들은 생생하고 감정선이 살아있다. 마치 그리스 비극의 과장된 인물들처럼. 그렇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그녀는 소포클레스나 아이스킬로스처럼 인생의 굴레라 말할 수 있는 운명을 믿지 않는다. 그녀는 오히려 에우리피데스의 극중 인물들과 같이 악착같은 인물들을 좋아하는 듯하다. 자신의 남편에게 복수하기 하기 위해 남편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마저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도 잘 먹고 잘 산다는 식의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메데이아’처럼, 그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파르티아’로부터 자유롭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비극에 초연하거나 초탈해 있지는 않다. 그저 다소 냉정하고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즐긴다고 표현하면 좋을까? 그 때문에 비극을 코믹하게 표현하고 생생한 생으로 엮어낼 수 있는 것 아닐까? 거기에 비해 내 개인은 이제껏 내 개인의 이야기에 똬리를 틀거나, 관념 속에 파묻혀, 캐릭터에 대한 중요성을 간과해 왔다. 사실, 기본적으로 이야기 구성이 약한 나로선 이 부분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험과 고름 짜내기란 명목 하에 너무 관심을 두지 못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때문에 이번 계기를 통해 그리스 비극과 다른 캐릭터의 정형성이 살아있는 작품들을 공부해 봐야겠다는 의지를 다져본다. 어쩌면 다소 과장되고 어이없는 이런 캐릭터 구성들이 내게 더욱 어울릴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그 속에서 내 나름의 경면주사 빛깔의 점이 비에 젖어 착하고 달라붙는 그런 느낌의, 강렬한 원색에 대한 도전을 써내려가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아마도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내내, 내 개인은 거기에 천착해 왔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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