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당 (무선) - 개정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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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카버의 소설과 작법 -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대성당>이란 작품의 자자한 명성 때문에 이전부터 읽어보고 싶던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이 번 기회에 읽을 수 있게 되어 처음부터 나는 매우 기대가 컸다. 아마도 제목에서 오는 아우라와 더불어 얼핏 들었던 마지막 장면에 대한 인상이 내게 크게 각인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자자했던 명성의 <대성당>을 구입하여, 첫 장을 읽어 내려가는 순간부터, 기묘한 예감에 휩싸였다. 왠지 이 작가의 작품이 내가 기대했던 바와는 달리, 별 것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었다. 그리고 사실, 지금 그의 <제발 조용히 좀 해요>,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까지 포함하여 대부분의 작품을 읽은 지금, 애석하게도 나는 나의 그 첫 예감이 적중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물론, 그 숱한 작품 가운데 인상에 남았던 작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성당>을 포함하여 몇 작품은 내게 어떤 여운 비슷한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그의 간결하면서도 디테일한 묘사 가운데 풍겨오는 현대적인 감각에서 내게 부족한 무언가가 있음 또한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데 뭐랄까... 이건 정말 하루키의 단편을 접했을 때 느낌과 흡사하다. 소년의 감성으로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를 읽고 그 여운에 한껏 취해 기대했던 하루키의 작품들은 내 기대를 무참히 산산조각 내버렸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물론 10년이 훨씬 넘게 지난 지금, 그리고 그 동안 단 한 편의 하루키 작품도 읽지 않은 내가 하루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러하기에 그저 지금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 오래된 기억의 편린일 따름이다. 아니, 어쩌면 그 때문에 내가 지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레이먼드 카버일 것이다.

 

 

  먼저, 그가 이야기하는 문장의 간결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다. 사실, 이 부분에 관해선 딱히 할 말이 없다. 아마 작가라면 누구라도 문장을 간결하게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한 작품 내에서 간결한 문장과 길게 늘어지는 문장의 배치를 구사하는 것은 작가적인 선택의 자유이다. 동시에 그러한 이유로 어떤 문장에 관해 기호를 가지는 것은 또한 독자의 선택의 자유이다. 만약에 간결한 문장만으로 이루어진 소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는 두 가지 점 정도를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는 작가들이 더 이상 만연체나, 화려체에 대한 집착을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어떤 측면에서 분명 긍정적인 기능으로 작용할지는 모르겠지만, 사상에 대한 집착이라든가,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에 대한 회의가 만연하다는 반증이라고 내 개인적으론 분석해 본다. 둘째로, 대중의 집중력에 대한 부재를 의미하게 될 것이다. 물론, 작가는 실험적이고 어려운 작품으로 대중을 소외시켜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러한 작품들의 추구를 중단해서도 안 된다. 우리에게 지금은 대문호라고 일컬어지지만, 니체나 도스토예프스키, 카프카 등이 만약 그들의 문체와 정신을 글을 통해 실험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근대의 정신적인 풍요에 대한 역작용으로 나타난 오늘날의 정신적인 것들에 대한 평가절하조차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즉, 문학이 그리고 예술이 그 정신적인 선도자 위치에 대한 자리를 스스로 포기해야할 아무런 까닭이 없는 것이다. 물론, 쉬운 것을 추구하는 대중에 발맞추어야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겠지만, 동시에 그러한 대중의 기호를 끌어올려야 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두 번째 이야기는 위의 이야기에 연장성상으로 묘사에 대한 중요성에 관한 부분이다. 하루키의 단편은 이제 거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카버의 경우 서두가 간결하면서도 세세한 묘사를 축으로 이루고 있다. 아니, 내 개인적으론 소설의 절정에서 결론까지, 거의 전반적으로 묘사를 축으로 두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던 거 같다. 카버의 소설이 묘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음에도 눈에 생생하게 그려지지 않은 아이러니한 이유가. 물론, 이 말은 약간의 과장과 풍자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의 뼈는 존재한다. 왜 소설이 이렇게까지 묘사에 집착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 그리고 이렇게까지 현대소설이 묘사에 집착하는데 왜 영화에게 그 문화의 왕좌를 물려줄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의문 등등. 위의 두 의문은 분명 아이러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진실이다. 물론, 많은 소설들은 묘사를 통해 분위기를 자아내고, 어떤 복선과 암시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런데 현대소설, 특히 카버의 소설에서 그런 작품들은 많지가 않다. 그렇다고 어떤 <의미>에 천착한 것도 아니다. 때론 왜 이런 소설을 썼을까, 하는 의문을 충분히 줄 만큼 아무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사건과 정황에 대한 묘사로만 끝난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사건과 정황이 카프카 식으로 어떤 현대적 우화의 감각을 띠었는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 봐도, 난 그 연결고리를 쉽게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왜 묘사에 천착하는 것일까?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어서 소설의 축으로 삼은 것일까? 재차, 삼차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의미>에 관한 부분이다. 개인적으로 의미에 천착하는 성향이 있지만, 동시에 그런 이유로 소설이 의미에 천착할 까닭은 없다고 믿고 있다. 왜냐하면 소설이란 것이 앞에서 말한 단순히 사건과 정황에 대한 묘사로 끝나는 것도 안 될 상황이겠지만, 의미를 캐기 위한 수단과 도구가 되어서도 안 되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즉, 소설은 어떤 사건에 대한 기록일지도 아니고, 어떤 의미의 설파를 위한 선전도구도 아니라는 믿음이다. 그런데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소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여야만 할까? 어떤 의미에서든, <의미>라는 이면을 가지고 있는 언어가, 그리고 그 언어작업의 결정판인 소설이 <의미>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은... 뭐랄까... 마치 내게는 소설의 궁극인 시와 소설이 합일된 작업처럼만 느껴진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존재 불가능한, 존재한다면 그러한 이상 속에서만 가능한 작업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것은 지극히 내 개인적인 견해일 따름이다. 누구도 시와 소설이 합일되는 따위의 이상을 가지고 있지 않고, 또 그래야할 까닭도 없다. 하지만 이런 지극히 개인적인 믿음 때문에, 의미에 대해 자유로운 소설에 대해 나는 쉽사리 인정할 수가 없다. 그것은 매양 소설을 추구한 어떤 기록일지일 뿐이다.

 

 

  빙빙 돌아갔던 이야기를 정리하고 싶다. 앞에서 말한 대로 카버의 소설이 그렇게 간결하기만 하고, 묘사만 추구하는, 아무 의미 없는 기록일지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그렇지만 그의 많은 소설이 그런 경향을 띠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느껴진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 또한 하나의 경향이고, 하나의 글쓰기일 것이다. 하지만 의미라고 표현하기엔 한정적인 정신적인 무엇과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하기엔 무리가 따르는 시적인 무언가를 이상으로 추구하는 내 개인으로선, 그의 소설의 경향과 작법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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