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로부터의 수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하로부터의 수기 - 벽이란 화두 혹은 신이란 벽 그리고 천국에 관한 물음

 

 

  어릴 적 문고판으로 접한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닌, 제대로 된 의미에서 도스토예프스키를 처음 접한 것은 21살 적 성공회 수도원에서였다. 당시, 종교와 사랑문제 등, 모든 것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나는 성공회 수도원에서 몇 개월 동안 머물렀었다. 그렇지만 1달 앞으로 나가온 군대영장 때문에 결국엔 그곳에서도 떠나야만 하는 순간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쉬 떠날 수 없는 발걸음 때문에 나는 2박 3일 정도의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위한 피정을 신청하고, 홀로 방안에 틀어박혔다. 말이 수도원이긴 하지만, 일종의 기독교 수도공동체와 가까운 그곳에서 피정, 그것도 혼자서 방안에 틀어박혀서 금식에 가까운 피정을 하는 일은, 그 당시 30년 가까운 그곳의 역사에서 처음이었다고 한다. 뭐 여하튼, 막상 피정을 신청하긴 했는데 그 좁은 방안에 혼자서 무얼 해야 할지, 당최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렇게 하루를 막연하게 보내고서, 문득 책장에서 눈에 보이는 책 한 권에 눈길이 갔다. <죄와 벌>, 그 수도원에 들리기 전 혼자 여기저기 방랑을 하면서 무작정 사두었던 책들 중 하나였다. 약 800페이지의 빽빽한 글씨들, 그 당시 갈 곳 없던 내 마음과 뒤섞여, 너무나 길고 길었던 그 하루 흡사 사투를 벌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했다. 그렇지만 고통을 쾌락으로 즐길 수 있다는 인간의 권리와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은 당시 감수성 예민했던 내게 막연하게나마 알알이 박혔고, 후에도 끊임없이 그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던 듯싶다. 때문에 군대를 제대하고서 나는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카라마조프가 형제들>과 그의 단편 중에 가장 그를 잘 대변하고 있는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찾아 읽게 되었다.

 

 

  아마 신학을 전공했고 아직도 그 선상에서 헤매고 있는 내 개인의 관점이기에 <지하로부터의 수기>에 대한 해석은 지극히 종교적일 것이란 예상과 전제를 먼저 해두고 싶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사상서 비슷한 아니, 사상 나부랭이 비슷한 1부 <지하>에 대한 내 개인의 해석을 한 마디로 압축하자면, 벽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두고 싶다. 벽!! 실제로 소설 속에서도 등장하는 벽에 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생각은 일종의 화두와 비슷한 것이 아닌가, 잠깐 생각해 본다. 물론, 소설 속에서 벽은 신 혹은 자연의 진리와 가까운 형태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이 벽에 대처하는 여러 가지 유형의 인간 군상들이 더불어 표현된다. 벽을 부수려는 자, 벽에 기대어 안주하는 자, 혹은 벽 주위를 한없이 맴도는 자... 그리고 결코 부셔질 수 없는 벽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러한 까닭으로 끝까지 품으며 고통스러워하는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자들... 아니, 어쩌면 지금의 나의 이런 묘사에도 모순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벽을 부수길 원하며 동시에 부술 수 없음을 수긍하며, 벽에 기대어 안주하길 원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불가능함을 역설하며, 벽 주위를 쥐새끼처럼 한없이 맴돌면서도 동시에 벽 앞에서 면벽하면서 벽의 의미를 묻는, 그런 복잡한 유형의 인간일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그에게 있어 벽은 ‘신이란 화두’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는 왜 그 신이란 화두를 가슴속에 깊이 떠안고 고통스러워하면서, 동시에 그 고통의 쾌락을 즐기면서도, 마지막 순간엔 침 뱉을 수밖에 없던 것일까? 그리고 지하로, 히키코모리라기보다는 반항자로서 언더그라운드로 침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2부 <진눈개비에 대하여>서 그는 1부 <지하>로 가게 된 그 이유에 대해 문학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주인공인 <나>는 당시 24살의 나이로 관청에서 말단관리로 일하고 있다. 그는 심술궂은데다 자기의 지적인 능력으로 인해 남을 깔보는 경향마저 있기에 주위에 친구가 없다. 게다가 그 나이에 벌써 몽상가로서 혼자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취미마저 있어, 그가 남들을 먼저 찾는 일도 거의 드물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도 인간인지라, 내리 몇 달 혼자 공상에 처박혀 살 순 없는 까닭에, 그의 직장상사인 안톤 안토니치라는 지인과 그의 동창생인 시모노프라는 지인이 있기는 했다. 이야기는 바로 이 중 시모노프라는 그의 동창생을 찾아가면서 부터 시작된다. 지겨운 몽상의 나날 끝에 찾아온 고독을 참지 못하고 찾은 그의 예정 없던 이 방문은 우연히도 주인공 자신이 배제된 일종의 동창회 자리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동창생 중 가장 그의 증오의 대상이라 할 수 있는 즈베르코프의 환송회에 대한 기획회의 자리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여하튼 초대받지 못한 그 자리에서 그냥 돌아서면 될 것을, 어떻게 돼먹은 인간인지 이 주인공 <나>는 기어코 그 환송회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사실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이란 사실은 논외로 치고, 관청의 일개 말단관리로서 그 자리에 참석한다는 자체가 경제적으로도 그의 한 달 치 봉급이 드는 무리한 자리였다. 그럼에도 가불까지 받아가면서 그가 기어이 그 자리에 참석한 이유는 그의 숙적 즈베르코프를 골탕 먹이고 싶은 그의 못돼먹은 심술 때문이었다. 그런데 골탕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골탕에 무시까지 당한 쪽은 주인공 그 자신이었다. 때문에 1차로 비싼 레스토랑에서 자리 이후 2차 기방까지 갈 돈이 없던 그는 시모노프에게 일종의 구걸과도 같이 돈을 빌려 그 자리를 쫓아간다. 그리고 쫓아가는 마차에서 1차 자리에서 모욕 받았던 순간을 내내 곱씹으며 즈베르코프의 따귀를 갈긴 후 결투신청을 할 몽상에 빠진다. 하지만 기방에 들어섰을 때 이미 그들은 각자의 방으로 흩어진 이후였다. 그의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그가 원하던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사실 따귀를 갈길 용기도 결투를 할 자신도 없는 그런 비겁한 부류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건 그런 자신을 모욕하기 위해 기방 안으로 들어가 처음 보는 창녀와 뒹구는 일일 뿐일 게 분명하다. 아니, 자신을 모욕할 용기도 없기에 창녀를 흠씬 모욕하고 경멸하는 행위가 그런 부류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만난 창녀인 리자는 그가 쉬 모욕할 수 있는 부류의 창녀가 아니었다. 그런 곳에서 일한지도 얼마 안됐을 뿐더러, 무언가 창백하면서도 고통을 머금은 표정은 그녀를 모욕하겠다는 그의 첫 의도와 달리, 그녀를 진심으로 교화하는 일로 전도되어버리게끔 만들어버린다. 게다가 그와 같은 인간에게도 일말의 사랑에 대한 갈망이 있었는지 그는 그의 집주소를 그녀에게 남기기까지 한다. 때문에 그녀는 며칠 뒤에 그의 집을 찾아온다. 그런데 그 시점과 상황이 적절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가장 적절한 타이밍이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로선 가장 그녀에게 보이고 싶지 않던 그의 본질을 들키게 되었으니까... 그의 하인에게 월급을 줄 돈이 없어 무시 받으면서도, 한없이 비겁한 이유로 자존심을 내세우는 옹졸하기 그지없는 그의 본질을... 그런데 오히려 거기서 그녀는 그녀 자신보다 불쌍한 그의 그러한 본질을 봄으로써 그에 대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녀 자신의 모든 것을 그녀의 온 마음을 담아 바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꿰뚫고 있음에도 아니, 앞으로 그녀를 통해 얻을 그 자신의 구원까지 충분히 예감하고 있음에도 그는 그녀에게 화대를 지불하면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아마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짧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과 문학에 대해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1부 <지하>에서 거의 직선적으로 그의 사상을 피력한 후, 2부 <진눈개비에 대하여>에서 그의 사상의 실험으로써 문학의 특질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앞에서 밝힌 동어반복이 될지 모르겠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1부에서 벽이란 화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 벽이란 화두는 동시에 신 혹은 천국이거나 구원이란 화두에 관한 비유일 것이다. 그런데 그 자신이 책 속에서 이미 표현했듯이 인간의 모든 모순과 절망이 통제된 완벽한 천국이란 장소가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런 곳이 존재한다면 그곳에서 인간은 침 뱉을 권리조차 없는 그런 존재여만 하는 것일까? 물론 그러한 완벽함을 경험해보지 못한 인간이 그곳에 대해 상상하고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이렇게 상상 불가능하다고 단정 짓는 순간, 그러한 장소 혹은 그러한 존재는 인간의 오성을 넘어버려 판단불가라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즉,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수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것의 존재를 신이라 규정짓고 그곳에 귀의한다. 아니, 그 품에 안착한다. 하지만 인간의 것이 아닌 것을 어떻게 인간이 규정하고 안착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논리적 모순을 누군가는 이율배반이란 철학적 용어로 해결하고, 신 존재의 당위성에 관해 말하려 했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이 자체가 이율배반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이 또한 지극히 인간적인 언어란 이성의 판단범위에서 이루어졌고, 신의 당위성이란 말 자체가 이미 신 존재의 물음에 관해 배제한 채 <신은 인간의 이성과 질서를 위해 존재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논리인 까닭이다. 한 마디로, 너무나 인간의 경험과 이성적 한계치를 무시한 허공에 붕 뜬 논리가 아닐까, 잠시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차라리 인간경험과 이성적 한계치 안에서 신과 구원에 관해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도스토예프스키가 그의 소설 속에서 앞의 이율배반이란 논리를 펼친 칸트에 관해서 언급한 글을 본적이 없기 때문에 그가 이러한 논리의 역방향으로 그 자신의 사상을 구축했는지 솔직히 단언할 자신은 없다. 그렇지만 칸트가 그보다 1세기 앞선 사람이고, 그를 통해 유럽의 사상적 방향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을 떠올려 볼 때, 도스토예프스키가 칸트의 철학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했으리란 점은 쉬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이러한 유럽의 정황과 기독교에 관해 오랜 전통의 뿌리를 지니고 있던 러시아적 상황 속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전까지의 전제와 달리 인간의 경험과 이성치 안에서 <만약 신이 없다면 인간이 진정 자유로울 수 있을까?>란 물음을 문학을 통해 던지고 실험해 본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고 싶다. 왜냐하면 그가 선택한 장르가 철학이 아닌, 다름 아닌 문학인 까닭이다. 만약 그가 철학이란 장르를 선택했다면 신에 관한 문제에 대해 풀어가기 위해 아무래도 인간의 경험보다는 이성이라는 논리에 기댔을 것이다. 즉, 논리의 기본인 대전제를 통해 지극히 관념적인 세계를 구축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인간의 경험을 더 중시할 수밖에 없는 문학이란 장르를 택함으로써 인간의 경험치 안에서의 이성으로 신의 문제에 관해 생각하고 한정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그의 소설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왜냐하면 2부에서 그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구원과 신의 세계를 ‘리자’라는 존재를 통해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리자’라는 존재의 사랑을 그는 화대를 줌으로써 거절한다는 것이다. 즉, 그는 신이란 존재 혹은 천국이란 완벽한 장소가 있을지라도 인간이 그곳에서 침 뱉을 수 있는 권리가 있어야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인간이란 존재가 그러한 모순덩어리일 수밖에 없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인간의 모순이 동시에 신과 구원이란 불가해한 존재와 개념을 가능케 한다고 그는 믿고 있는 듯싶다. 왜냐하면 소설 마지막에도 나와 있듯이 그 스스로 원해서 들어간 지하임에도 그는 지하에서 탈출하기를, 어쩌면 다시 ‘리자’라는 천국을 경험할 수 있기를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단 이는 그의 이 소설 뿐 아니라, 여러 작품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죄와 벌>에선 노파를 죽인 죄를 지은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냐라는 존재를 통해 그의 죄를 회개함으로서 구원을 얻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의 형벌을 의미함으로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에서는 친부살인을 통해 <신이 없는 자유>를 꿈꾸었던 이반의 모순과 정작 이반의 사상을 실행해 옮긴 스메르코자프의 자살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의 사상의 문학적 실험이 지속적으로 보인다.

 

 

  이제 내 자신도 감당하지 못하는 허공의 붕 뜬 말들로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꼬인 이야기를 대충 정리하고 싶다. 왜 하필 또 다시 17년 만에 예전의 성공회 수도원에 들어갈 것을 결심하고서 이 소설을 떠올렸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처음에도 밝혔듯이, 내 이십대의 모든 화두는 아마도 도스토예프스키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문에 내가 천국이라고 상정해둔 그곳에 다시 돌아갈 때 어떤 화두를 가지고 가야할지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던 거 같다. 그리고 거의 흐릿한 기억이었지만 다행히도 이 소설을 택한 것은 내 개인적인 물음들을 정리하는데 다소간의 도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과연 그곳에서 내가 침 뱉을 수 있을지, 없을지 나는 아직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이 과연 아직도 여전히 내게 17년 전처럼 천국일 수 있을지도 나는 아직 잘 모르고 있다. 하지만 이 질문은 반드시 가지고 들어가야만 할 거 같다. 그곳이 내게 천국이라면 내가 과연 침 뱉을 수 있을지, 없을지... 과연 천국이란 건 내게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