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의 미의식에 관한 화두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를 접한 지는 어언 10년이 지난 듯하다. 당시 문창과인 동생의 권유로 읽게 되었는데, 보는 순간 그 자리에서 그대로 함몰하여 책을 놓을 수 없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사실, 그 이전부터 한국문학보다는 외국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하루키와 무라카미 류를 시작으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오에 겐자부로 등의 책을 제법 적지 않게 읽어 보았고,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시대별 일본단편전집도 사서 읽었을 정도로 일본소설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오에 겐자부로의 경우는 이십대 초중반의 내 사상적인 궤를 다지는데 좋은 단초를 제공하여, 지금도 손에 꼽는 작가 중에 하나이다. 그렇지만 그의 그 어떤 소설도 아니, 일본 소설 중 그 어떤 소설도 ‘금각사’만큼 나에게 충격을 준 소설은 없었다. ‘금각사’ 이전에 랭보나 보들레르와 같은 시인들, 그리고 까뮈와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소설가들을 통해 어느 정도 사상적인 진일보와 문학적인 정수를 느꼈다고 자부했던 나였음에도 ‘금각사’는 또 다른 충격으로 내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무엇이 나에게 그토록 ‘금각사’란 소설을 통해 강렬한 충격으로 내 무의식에서 의식의 수면으로 파장을 울린 것일까?

 

 

  이십대에 많은 방황을 통해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던 나는 동시에 지적인 모험도 결행해야만 했다. 기존에 읽어왔던 철학서와 신학서적을 탈피하여, 많은 불경들과 노장자 사상이 담긴 책들을 접한 것도 그러한 모험의 일종이었다. 특히, 그 가운데 불경의 ‘금강경’과 노자의 ‘도덕경’은 당시에 내 서구적인 정신세계에 일종의 경종을 울리는 울림이며 떨림과도 같았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 때의 감정을 재구성하여, 그 때 알게 된 얕은 동양적 사상을 가지고 ‘금각사’에 대해 접근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 것이다. 오히려 후에, 내 신학적 세계관과 문학적인 세계관의 조화를 시도하기위해 집착했던 ‘신학적 미학’이란 관점에서 내 접근방식을 시작하는 것이 훨씬 더 정직하고, 내 개인에게 의미가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 글을 통해서 나는 ‘금각사’가 지닌 많은 단층 가운데 미적인 질문에 국한하여 내 개인의 질문을 던져보고, 글을 통해 미시마 유키오가 드러내려고 했던 지점을 찾아보고자 한다.

 

 

  내 개인에게 있어서 미적인 의식이란 것을 처음 갖게 된 것은 -의식적인 표피로 끌어내서 화두로 삼기 시작한 시점은- 아마도 도스토예프스키의 경구를 통해서 일 것이다.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당시, 신학적인 딜레마에 빠져있던 나에게 이 경구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아름다움에 대한 환상을 뇌리에 심겨다 놓았다. 하지만 아름다움이 대체 무엇이기에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아름다움이 주는 표피적인 언어는 내게 있어 여자, 꽃 혹은 자연의 엄청난 풍광들, 고작 이런 것들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구원이 될 수 있을지 지금도 나는 의심스럽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아름다움은 이런 표피적이고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영원성과 숭고성을 간직한 아름다움이어야 할 텐데, 그러한 아름다움이 어떻게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 말인가? 결국, 여기서 아름다움은 다시 형이상학적인 논제로 탈바꿈해 버리게 된다. 그렇다면 철학적인 문제로 넘어가 진리와 아름다움의 구분이 다시 모호하게 되어버린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다시, 이 세상 것이 아닌, 저 멀고 먼 누구도 가 닿아 보지 못한 세계의 것으로 영영 손에 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즉, 대상이 없는 아름다움의 논리는 이러한 자가당착에 빠질 공산이 크다. 결국, 이런 의미에서 아름다움에는 대상이 필요하다. 그것이 심각한 자기투영이든 혹은 왜곡이든 간에, 반드시 아름다움은 대상을 필요로 한다.

 

 

  시골에서 중의 아들로 태어나 말더듬이라는 외형적 장애를 통해 심각한 자기비하란 내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는 주인공은 어릴 적 막연하게 아버지로부터 ‘금각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라고 듣는다. 이를 통해 그는 막연하게 ‘금각사’를 동경하며, 상상하기 시작한다. 이와 대비되어 소설 첫 장엔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 장까지- ‘우이코’라는 아름다운 여성이 등장한다. 그러나 우이코에게 있어서 그는 한낱 말더듬이에 불과한 미미한 존재이다. 아니,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존재이다. 그러하기에 소설 전반에 걸쳐 그는 우이코로 되살아나는 여성들과 불협화음을 내며, 심지어 그 앞에서 무능한 자기 자신에 대한 도취감에까지 젖어든다. 그렇지만 금각사는 다르다. 비록 첫 대면에서는 그가 상상해온 금각사와 달라, 조금은 실망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생생히 되살아나 그의 뇌리에 각인되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는 그의 전 생애에 걸쳐 똬리를 틀고 자리를 잡아, 여성과 관계를 맺으려 할 때에도 나타나 모든 관계를 망치고, 오직 스스로만 그 아름다움을 뽐내기까지 한다. 그런데 기묘한 것은 그 아름다움이 가장 절정을 발하던 때이다. 주인공에게 있어서 금각사가 가장 아름다웠던 때는 다름 아닌 교토 공습이 곧 있을 것이라는 풍문과 함께였을 때이다. 즉, 곧 파괴되어질 가능성을 품고서 영원을 가장한 채 그 자리에 고요히 서 있는 금각사의 모습이 주인공에게 있어 가장 절정의 풍경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교토 공습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금각사는 그대로 존재하게 된다. 어쩌면 이때부터 막연하게 주인공의 내부에선 금각사에 대한 방화의 꿈이 꿈틀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러한 과정으로 가기 위해서 그는 ‘가시와기’라는 그의 또 다른 내면을 만나야 했다. 가시와기는 심각한 안짱다리 때문에 제대로 걸을 수가 없는 장애를 가진 이다. 그러하기에 그 또한 주인공과 같은 심각한 자의식에 사로잡힌 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주인공과 달리, 그러한 자의식을 외부적으로 표출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의 안짱다리임을 통해 자신이 다른 이와 다른 특별한 존재임을 드러내고, 그를 통해 여자를 유혹한다. 그에게 있어 세계는 한낱 실체가 없는 미몽일 뿐이다. 즉, 실체가 없는 인식의 대상일 뿐인 세계 속에서 그의 치기어린 행위들과 실험들은 그 근거를 보장받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주인공에게 있어서 세계는 현존하고 있다. 아니, 현존하고 있는 금각사 그 자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모든 목전에서 생생하게 드러나, 그의 진짜 생을 소멸케 한다. 그렇다면 결국, 인식의 대상이 아닌 금각사를 그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완전하게 소유하든가, 아니면 파괴하든가. 결국, 그는 파괴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것은 기이하게도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불경의 글귀로부터 그 행위의 근거를 삼고 있다. 어쩌면 이런 맥락에서 그에게 있어 금각사는 부처 그 자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금각사’란 확연한 대상이 없는 내게 있어서, 그리고 말더듬이라는 특수성이 없는 내게 있어서 이 소설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을 쓴 미시마 유키오 역시, 금각사의 내부를 실제 본 일이 없었고, 말더듬이가 아니었다. 이런 의미에서 서두에 언급했던 나의 화두로 이 글을 접근하는 방식이 어쩌면 더욱 ‘미시마 유키오’스러운 방식이고 결국은 문학적 방식이 이런 것이 아닌가, 잠시 생각해 본다.

 

 

  문학회 동아리 활동을 하던 신학교 시절, 동아리에 한 선배가 갑자기 화두 하나를 던져 놓고 모임을 탈퇴하였다. ‘시가 그리스도를 죽였다.’ 시와 선배 그 자체가 등가처럼 여겨질 정도로 우리에게 정신적 지주였던 선배의 경구였기에,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서 할 말을 잃었다. 특히, 가장 친했던 후배로서 나는 선배의 그 말에 한 학기 이상 고민하며 씨름하여야만 했다. 그렇지만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 언어 자체에 있지 않았다. 그 이후의 선배의 행적이 우리들에겐 더욱 충격이었다. 술, 담배를 잠깐 절제한 것은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신학이라는 길을 포기하고 사회인으로서 발을 내딛은 행위를 시작으로, 이전과 확연히 다른 여러 선배의 언행은 부지불식간에 선배의 삶과 존재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 때문에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독교 자체에 대해 커다란 공포를 느끼게 되었다. 대체 무엇이 내가 가장 존경하던 선배를 그렇게 치닫게 만든 것일까? 원래 선배에게 있어서 ‘시’와 ‘그리스도’는 양립 가능한 ‘미’와 ‘진리’의 대상 그 자체였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분명히 ‘미’와 ‘진리’가 일치하지 못하고 삐걱거리는 틈새가 발생한다. 특히, 인식의 무한한 자유를 기반으로 하는 ‘시’가 ‘그리스도’에게 갇힌다는 문제는 당시 우리 문학동아리 내에선 일정부분 수긍하고 들어가는 지점이었다. 다시 말해서, ‘시’가 우리 인간의 부조리한 삶 그 자체를 대변한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시’의 자리를 내줄 수 없다고 은연중에 모두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선배는 그 와중에도 꾸준히 혼자서 나름 그 일치의 지점을 찾으려고 했었던 거 같다. 그러다가 결국 ‘시’와 ‘그리스도’가 양립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시가 그리스도를 죽였다.’는 화두를 꺼내놓고서, 우리 곁을 떠났다. 아니, 내 곁을 떠났다. 대체 무슨 연유로 ‘시’가 ‘그리스도’를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왜 글속의 말더듬이 주인공은 ‘금각사’를 불태워야만 한단 말인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말은 대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단 말인가?

 

 

  지금 나는 기독교와 불교라는 어쩌면 근본적으로 너무나도 다른 두 종교에 거기다 문학적 화두까지 곁들어, 무리한 화두의 재구성을 하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다소 무리하더라도 할 수 있는 데까지 질문의 연결고리를 만들어보고자 한다.

 

 

  먼저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말에 대한 의미 해석이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부처라는 대상의 한계에 직면한 이에게 던지는 화두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부처라는 대상은 의미로 규정되는 존재가 아닌 까닭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부처를 공부하고, 부처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하는 한계를 규정짓고 있다. 때문에 많은 이들이 부처에 대해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고민하면 고민할수록 진정한 부처의 의미에 대해 잃어버리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당연히 그들이 그들 안에 재구성한 부처의 틀을 깨부숴야만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의미는 자기 안에 상정한 부처의 틀을 깨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하지만 많은 대중들은 여기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대다수 대중들은 자기 안에 상정한 부처란 틀조차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부처라는 조각상이라든가 혹은 부처에서 비롯된 수많고 현란한 신들의 이름에 현혹되어 그저 일신상 관련된 자기 안위만을 허공에 대고 염불할 뿐이다. 누가 잘 되게 하소서, 혹은 우리 아들 이번 대학시험에 꼭 붙게 하소서, 등등. 그렇다면 부처란 외부의 신을 부수는 의미 또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금각사’의 글속의 주인공은 왜 ‘금각사’를 불태운 것일까? 이 두 가지 의미이거나 아니면 다른 의미로써 그는 ‘금각사’를 불태울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금각사’의 주인공의 미의식에 대해 이 글에서 해석하는 것은 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첫째는 그 의식의 폭과 깊이가 글속에서 거의 독자가 따라잡기 어렵게 확장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는 그러한 의식의 폭과 깊이가 내가 이해하고 있는 불교의 수준에서는 가닿기 어려운 지점이기 때문이다. 다만, 3번 정도 ‘금각사’를 읽으면서 내가 잡을 수 있었던 글속 주인공의 의식은 ‘금각사’에 대한 병적일 정도의 집착이다. 그리고 그 집착은 그것이 외향적인 것인지 혹은 내향적인 것인지 구분하기 모호하지만, 주인공에게 있어서 부처에게 가닿는데 분명히 장애가 된다는 사실이다. 특히, 집착을 포기함으로써 깨달음을 얻는 종교가 불교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이는 분명히 모순이 된다. 즉, 주인공에게 있어서 ‘금각사’는 미의식 그자체이지만 동시에 그 까닭으로 ‘부처’와는 양립할 수 없는 ‘집착’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주인공은 ‘금각사’를 불태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부처란 진정한 미의식 그자체에 도달하기 위해. 어쩌면 나의 가장 존경하던 선배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지만 아직도 나는 여기서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글속 주인공이 ‘금각사’를 불태움으로써 정말로 그가 원하던 부처에게 가닿을 수 있었을까하는 점이다. 왜 ‘금각사’도 ‘부처’도 함께 양립할 수 없는가? 왜 일반대중이 그리고 그 일반대중의 하나인 내가 내 일신의 안위만을 위해 허공에 대고 기도를 하고 염불을 외우는 것이 잘못됐단 말인가?

 

 

  여기서 나는 한 발 더 나아가 내 선배에 대해, 그리고 내가 다시금 반문을 던진 질문에 대한 방향으로 더 확장해 나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미 처음 질문하기 전 밝힌 것처럼 절대적인 미의식이란 대상이 현재 없는 내게 있어서, 그리고 말더듬이라는 특수성이 없는 내게 있어서, 이런 질문은 애초에 양극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달리 길이 없기 때문이다. 또, 내가 아직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를 온전하게 품을 만큼의 지적인 폭과 깊이가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의 정반대 급부에 있기 때문일까? 나는 여전히 나의 선배를 존경하고 있고,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에 나오는 미의식에 관해 환상을 품고 있다. 그래서 여전히 바라본다. 내가 언젠가 이 버거운 화두에 조금은 가까워질 수 있기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품이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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