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든 피해자든 수용소 생활을 한 자는 많다. 죽은 자들보다 적겠지만 산 자들도 꽤 된다. 사건이 하나라고 해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몸 전체가 젖은 자와 발만 담근 자,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겪은 자와 일부만 경험한 자 등 그 가해와 피해의 경험이나 기억의 범주가 전부 같지도 않을 것이다. 피해자에게 망각의 욕망이 차올라도, 가해자의 왜곡과 은폐 노력이 아무리 절실해도, 기본적으로 세상에 비밀이란 게 있을 수가 없다(고 믿는다). 살아 돌아온 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고통의 시간에 대해 말하고 싶어했다. 말하지 않고 견딜 수가 없었거나 그 용기가 함께 생활했으나 처참히 떠난 이들에 대한 예의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 일과 전혀 상관없는 자들은 상황 전반을 해석해보려 하지만 겪지 못한 일을 빠짐없이 알기 위한 노력은 필사적이고 눈물겨운 반면, 애초부터 한계를 갖는다.
홀로코스트 반백 년을 훌쩍 지난 현재,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수용소에 관한 지식은 매체를 가리지 않는다. 손만 뻗으면 닿고 언제든 꺼내볼 수 있다. 그전에나 후에도 끔찍한 일은 많을 텐데 유독 더 혹독하고 야만스럽게 기억하는 자들이 많다. 프리모 레비는 사람들이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라 고통과 아픔과 비극의 진실을 알기 거부한다고 말한다. 내것이 아닌 상처를 헤집어서 괜한 죄의식이나 죄책감에 시달릴까봐 두려워서겠지. 그런데 왜 유독 프리모 레비는 더 많이 읽히거나 주목 받는가. 단지 그가 이 자리에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미친다.
3.1운동은 어린 학생들이 먼저 거리로 뛰쳐나와 일어난 일제시대 최고의 독립운동이다. 목소리가 갈라지고 목이 터져나가도록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자들은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역사는 유관순 만을 기억한다. 그녀는 어렸고 붙잡혀 처참한 고문을 당했고 그러면서도 목이 터져라 소리쳐 결국 죽음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역사의 소용돌이 안에서 같은 일을 겪어도 소수의 몇을 제외한 나머지는 그저 그림자로 남는다. 안네와 프리모 레비가 대표주자가 될 수 있는 건 그들이 문학적 글쓰기를 뽐냈기 때문이지, 그들만이 살아남거나 유독 심한 고통을 겪었거나 역사에 희생당했기 때문은 아니다. 우린 이름있는 자들 뒤에서 그림자의 그림자로 사라져간 수많은 사람을 기억해야 한다.
비교적 덜 알려져 있고 덜 연구된 부분은 비밀을 간직한 수많은 사람들이 또 다른 쪽, 즉 압제자들 쪽에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비롯 대다수는 알고 있는 게 적었고, 극소수만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놀라우리만치 잔혹하게 저질러진 일들에 대해, 나치 기구 내에서 모를 수 없었던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모른 척 할 수 있었는지,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눈과 귀를 (무엇보다 입을) 꽉 닫고 있겠다는 보다 신중한 길을 선택했는지 그 누구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찌됐든 대다수의 독일인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대학살을 받아들였을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렇게 보면 라거에 대한 진실을 확산시키지 않았다는 것이야말로 독일 민족이 저지른 가장 중대한 집단 범죄의 하나이며 히틀러의 테러로 인해 독일 민족이 다다른 비겁함을 가장 명백하게 증명해주는 것이다. 관습 속으로 들어와버린 비겁함, 너무나 깊어서 남편이 아내에게, 부모가 자식에게도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드는 비겁함이다. 이 비겁함이 없었더라면 그토록 극단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고 유럽과 세상은 오늘날 달라져 있을 것이다. (p.14)
특수적 상황이 보편화가 되어버렸고 그들이나 장소 혹은 시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면 여러 수용소에서의 삶과 죽음, 가해자와 피해자, 기억과 망각을 굳이 프리모 레비의 목소리로 읽을 의미가 사라지니까. 한여름에 아우슈비츠라니, 어딘지 모르게 뭉클하고 알싸하다. 더 많이 공감하고 아파하고 이해해야지. 나치스와 아우슈비츠 담론을 써내려간 철학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읽는 페이지는 아직 50p..
이현수의 <나흘>은 구소은의 <검은 모래>만큼, 김영하의 <검은 꽃>만큼 좋다. 임철우의 <황천기담>을 어서 읽어야 하는데 생각하며 떠올리는 <이별하는 골짜기>와 <등대>만큼 좋다. 여기서 '좋다'는 '아프다'와 동급의 의미에서다. 무겁고 질기고 깊고 아련하다. 때로 너무 아득해서 끝끝내 닿지 못하는 삶들이 여기저기서 툭툭 솟구친다.
사랑보단 미움이 훨씬 강한 화력과 점액질의 성분을 갖고 있다는 걸 그때야 나는 알았다. ... 폭발을 억누르며 사는 경우가 가장 나쁘다고 하던데. 그럼에도 나는 남은 목숨을 부지하며 변함없이 인영을 기다린다. 우리는 너무 깊고 무거웠고 불안한 세월은 느리게 흘러갔다. 나는 지금 세속의 질서를 지키며 수도승처럼 살고 있다. 우리는 사랑과 증오의 감정을 넘어선 상태이고, 인영이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대도 나는 이 오래된 기다림을 멈출 수가 없다. 비록 고독과 황폐의 끝을 본다 할지라도. 이건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경우의 수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이현수, <나흘>)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는 피해자가 어떤 사정으로 가해자가 되어버리고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피해 사실을 영원히 묻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가해자를 온전히 미워하지도 못하게 애정과 증오를 동시에 품은 대상을 보는 일이라든가. 아버지의 가정 폭력 앞에 자식이 느끼는 애증같은 것. 여자라서, 남자라서, 가난해서, 사랑해서, 나약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한때, 그 처참함과 애절함을 <나흘>은 마치 어제처럼, 내 일처럼,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힐 듯 생생하고 또렷하게 포착한다. 아픔을 드러내는 것이 더한 상처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자가소독하고 아물도록 기다리지만 상처는 터져 피가 나고 곪고 닳고 삭혀야 겨우 아물 기미가 있을 뿐이다. 소중한 것을 지키지 못한 이들의 충실한 죄의식은 그로부터 다시 반 백년이 지날 때까지 죽은 채 살아숨쉰다. 누군가에 의해, 누군가를 위해, 누군가로 인해 드러난 진실은 추악하고 처참하고 아프지만 꼭 알아야 하는 것들이다. 내시가家, 동학 혁명, 6.25까지 현대사 60년의 세월을 두 가문과 마을 사람들을 통해 듣는다.
여자들이 머무는 부엌에는 칼과 피와 꽃이 있다. 여자들은 한 달에 한 번 자기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보며 가랑이 사이로 아기를 낳는다. 여자들은 하루에 세 번, 날카로운 칼로 무언가를 끊임없이 자르고 벤다. 무심한 얼굴로 생선을 토막내고 포를 뜨며 살아 있는 닭의 모가지까지 비튼다. 그런 뒤 피 묻은 손을 씻고 정결한 얼굴로 식탁에 앉아 꽃을 예쁘게 꽂는다. 강인하고 헌신적인 어머니라는 이미지 뒤엔 이런 잔인함이 숨어 있다. 아버지의 말처럼 나는 지금도 여자를 모른다. 여자들의 산수도 헤아리지 못한다. (이현수, <나흘>)
이 책을 읽은 시점은 츠바이크의 또 다른 책 <어제의 세계>를 펼쳤지만 진도가 잘 나가지 않을 때였다. 아직도 그 책은 앞쪽 어딘가 책갈피가 꽂힌 채 집구석 어딘가를 방황하고 있을 테지만 지금으로선 당장 그 책을 펼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가라앉은 1인칭 시점이 묵직해서 굉장한 몰입이 필요한 책이었다. <체스 이야기>를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정우성과 이시영이 키스신 드립으로 제작발표회를 했지만 정작 줄거리상 그 키스신은 있으나마나 한 사소함(심지어 욕망도 아님)인 걸로 기억되는 <신의 한 수>를 볼 때였다. 집에 돌아와 보니 정우성보다 피프광장에서 먹은 매운 어묵과 씨앗 호떡이 더 기억에 남는 그런 영화였는데, 바둑이 꼭 체스 같고, 보는 내내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이 츠바이크의 소설을 읽었으리라는 확신 아닌 확신을 했다.
그러나 예술의 영역에 나타난 한 명의 천재는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마찬가지로 역사상의 별 같은 순간은 이후 수십 수백 년의 역사를 결정한다. 전 대기권의 전기가 피뢰침 꼭대기로 빨려들어가듯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건들이 시간의 뾰족한 꼭지점 하나에 집약되어 실현되는 것이다. 보통은 평온하게 전후로 나란히 일어나던 일이 단 한 순간 속에 응축되어 나타나고, 그러고 나면 그 순간은 역사상의 모든 것을 규정하고 결정하게 된다. 단 한 번의 긍정이나 단 한 번의 부정, 너무 빠르거나 혹은 너무 늦거나 하는 일이 이 순간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서 개인의 삶, 민족의 삶 심지어는 인류 전체의 운명의 흐름에 결정적인 작용을 하게 되는 것이다. (슈테판 츠바이크, <광기와 우연의 역사> 서문)
예전에 하나의 별과 또 하나의 별이 십자가처럼 겹쳐져 중앙에서 만나 빛나는 사실을 믿었다면 요즘은 뾰족한 세 개의 꼭지점이 겹쳐지지 않은 채 손을 붙잡고 있는 트라이앵글을 믿는다(고 누구에게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까). <광기와 우연의 역사>는 그런 이야기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것이 아닐 수도 있고 누구나 보고 듣고 공부할 수 있는 시공간이지만 아무나 배열할 수는 없는 특별한 우연과 열정의 역사. 그렇게 어느 영역에 나타난 반짝이는 이야기는 얼마나 많은 십자가 혹은 트라이앵글을 가능하게 하는가. 우리는 그걸 운명이라고도 우연이라고도, 그것도 아니면 역사 혹은 이미 지나왔지만 앞으로도 올 수 있는 일이라고 부른다. 전후, 좌우, 위아래처럼 그때 그 시간 그곳에서 하필이면 그 순간이 실현되었다는 게 기적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익숙한 내용에 독특한 시각(관점)에 구성과 문체의 독창성에 감탄하지만 다소 이렇게 수긍하게도 하는 책이다. 그렇지만 평범했어, 라고.
보르헤스의 강연은 어렵다. <칠일 밤>도 그랬고, 그의 강연은 머릿속에서 잘 정리되지 않는다. 비유와 암시가 많고 그걸 적절하게 이용하는 글쓰기에 능한 문학가이자 비평가라 그럴 거라고, 내가 스페인권이나 남미 문화를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한 권 두 권 읽으면서도 계속 같은 느낌이라 이제 잘 모르겠다. 소설도 이론(강연)도 어려운 보르헤스에게 끌리는 이유가 낯선 예문을 사용하여 설명하는 암시의 마력에 빠졌기 때문일까, 손에 잡히지 않는 멀고 두렵고 아득한 느낌 때문일까.
에머슨(Emerson)은 어딘가에서, 도서관이란 죽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일종의 '마법 동굴'이라고 쓴 듯싶군요. 여러분이 그들의 책갈피를 펴면, 이 죽은 사람들은 다시 태어날 수도 있고, 다시 살아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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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교부(敎父)의 또 다른 문장이 생각나는군요. 그 교부는, 무식한 사람의 손에 책을 건네주는 것은 아이들의 손에 칼을 건네주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고 말했지요. 그래서 책이란, 고대인들에게는 한낱 임시변통물에 불과했습니다. 한 편지에서 세네카(Seneca)는 거대한 도서관들에 반대해서 썼습니다. 그리고 한참 지난 뒤, 쇼펜하우어는 책을 사는 것을 책의 내용을 사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착각한다고 썼습니다. 가끔 저는 집에 쌓인 많은 책들을 바라보면서 그 책들을 다 읽기 전에 죽을 것이라고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새 책을 사고 싶은 유혹을 견딜 수 없답니다. 서점에 들어가서 제 취미-예를 들어 그대 영시, 또는 고대 노르웨이 시-에 딱 맞는 책을 발견할 때마다 저는 이렇게 되뇝니다. "저 책을 살 수 없어서 얼마나 애석하냐, 이미 집에 한 권이 있으니 말이야." (보르헤스,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척하는 삶>(제목이 척하는 삶이 뭐냐!)에서 내가 접은 부분은 지난번에 썼던 리뷰를 참조했더니 두 구절이다. 주로 닥 하타가 세계 2차 대전 일본 군의관으로 참전했을 때 거기서 만난 위안부 자매와의 기억의 일부. 사실 이창래의 소설은 소재에 비해 도드라지게 확 튀어오르는 문체는 아니다. 한국전쟁, 참전 군인, 고아원에서의 삶을 다룬 <생존자>도 그렇지만, 입양된 재일한국인, 참전 군의관, 위안부, 입양을 다루는 <척하는 삶>도 예외는 아닌데, 시점이 주로 다 겪은 후의 시간을, 아프고 고통스런 기억을 담담히 회고하는 형식을 취하기에 독자가 직접 주인공의 삶에 뛰어들지 않게 되면서 고통의 맥락이 조금 희석되는 느낌을 받는다. 겪은 사람도 이리 덤덤하게 살아가는데 징징대는 내 존재가 사치 아닐까 싶은 마음에서 오는 위안. <생존자>는 또 다른데, 이 소설은 정말 좋다. <척하는 삶>은 <생존자>에 비하면 구성이 훨씬 단조롭고, 아픔을 제대로 터치하지 못한다기보다는 일부러 안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작년 봄 쓴 페이퍼를 열어 보았더니 당시엔 잘 느껴지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 세 작품을 연달아 읽는 시간은 정말 끔찍했다. 우울에서 나와 다시 우울에 빠지고 또 다시 빠지며 다가올 낙관을 고대하던 시간이.
누군가 그때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면 대답을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그 젊은 남자를 대신해서 말할 수 있다면, 내가 그를 위해 진실의 일부를 말할 수 있다면, 그는 그녀에게 마음이 끌렸다고, 그녀의 거기 있음 그 자체에 끌렸다고 말하겠다. 그녀가 거기 있다는 것이 결국 아름다움 같은 것조차 옆으로 밀어 버렸다. 그는 그때 그것을 몰랐지만 그는 자신이 그저 그녀 가까이에 있을 수 있다면, 그녀의 목소리와 그녀의 몸과 가까이 있을 수 있다면, 또 그녀의 잠든 정신과 가까이 있을 수 있다면, 그러면 그녀가 그를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pp.333-334)
닥 하타의 인격이나 인간성을 의심한 적은 단연코 없지만 이상한 점이 많다. 모든 것을 겪은 후 철저한 이방인이 되기로 하면서 미국으로 이민오면서 한국 태생의 부모 모르는 버려진 여자아이 입양하는 것. 규정에 어긋나 불가능하다며 남자아이를 권하는 담당자를 설득해 기어이 여자아이를 데려오는 것. 딸이 간절했을 수도 있지. 혼자 사는 나이든 남자가 자신이 태어나 버려진 땅에서 버려진 여자아이를 입양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의심할 만한 일인데, 설정이나 상황이 어색해서 자꾸만 나쁜 생각하게 되는 이유가 그간 쌓인 내 선입견에서 나온다는 걸 깨닫고 근거 없는 믿음이 얼마나 위험한지 제대로 자각했다. 그는 그저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을 원했을 뿐이었을지도. 연애도 하고 호의와 선의를 베푸는 삶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을 만족시키고, 과거에 느꼈던 고독을 나누고 위로받으려는 마음으로 예쁜 딸을 원했을 뿐인지도 모르는 일. 내가 너무 오해 했다. 딸도 왜 하필 자신을 데려왔냐며 자라는 내내 오해 한다. 게다가 왜 당신은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냐며 질책한다. 줌파 라히리의 <저지대>에서 문제의 본질을 피한 채 계속 소리없이 삐걱대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가 떠오르기도 한다. 군의관으로서의 경험, 한국인 위안부 자매를 보며 느꼈던 자기 정체성의 혼란이 과거의 갈등이라면, 시니컬한 딸이 계속 엇나가기만 하는 이유와 관계 회복은 현재를 떠받치는 갈등이다.
나는 이제 뭘 '본다' 해도 내가 보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그것이 현실인지. 아니면 내가 만든 것인지. 아니면 그 중간쯤으로 우리가 삶에 기대하는 것 때문에 만들어 놓고 공유하는 환상인지. 아니면 이렇게 묻는 것이 오히려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최대한 버텨 내고 만족하고 목적을 부여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만 할까? (p.116)
그러니 사람이든 문학이든 그외의 어떤 것이든 약간은 내가 들어갈 틈을 주는 은근함이 좋다.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겉과 속이 뻔한 사람보다는 사기는 안 친다는 가정 하에 조심스럽게 자기를 감추는 사람이 매력 있다. 혈액형, 별자리 모두 나더러 완벽주의 성향이란다. 다 믿을 것도 못 되지만 영 아닌 것도 아니라서 절반쯤은 당연히 믿을 수밖에 없는데 생활 속의 나는 덤벙대고 고집 센 다혈질에 가깝지만 막 쓰는 페이퍼조차 이렇게 괜찮은 마무리 하려고 애쓰는 걸 보면 맞는 것도 같다. 집앞 슈퍼에도 씻고 옷 갖춰입고 가는 건 또 어떻고. 꼭 그런 날 몇 년 안 보던 친구나 이웃 사람 만나는 법이니까. 지식욕이 강하고 생각이 많고 유능하지만 성욕을 감추는 순수기질에다 뮤즈와 완벽주의 성향.. 나는 그리 재미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영감은 나한테 더 필요하지 남한테 그 좋은 걸 왜 주냐고. 더해서 자부심이나 자긍심 꼭대기에 닿기 전에 여기서 끝낸다. 항상 그랬지만 더우니 쓰는 것보다 읽는 거, 읽는 것보다 데굴데굴 누워서 보는 게 더 편하다. 요즘은 장나라와 장혁, 한그루와 연우진, 우에노 주리, 기무라 타쿠야, 에이타와 나가사와 마사미, 오구리 슌 나오는 드라마랑 <MOZU>.. 그것만 보면 다행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