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는 9세기부터 15세기까지 크메르제국의 수도였던 곳으로서, 현재의 캄보디아 북서부, 씨엠립 근교에 위치한 왕도이다. 산스크리트어로 도성을 의미하며, 왕도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 9세기 초부터 15세기 초까지의 제국, 그 시대의 유적군을 가리키는 말이다. 802년, 힌두교도 왕이었던 자야바르만 2세가 현재의 프놈쿨렌 언덕에 왕조를 창건하고 점차로 국내를 평정하기 시작했다. 이후 아유타야의 압박을 받아 메콩 강 유역으로 중심을 옮긴 15세기 전반까지를 캄보디아사에서는 앙코르시대라고 부른다. (p.578. 옮긴이의 글)
학부 때 미술사학을 복수전공으로 생각해볼 만큼 좋아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랬듯 주로 서양, 그것도 중세, 르네상스 아니면 19-20세기 미술사에 아주 얕게 발 담그고 있을 뿐이면서 나는 학문을 할 수도 있을 거라 착각했다. 예를 들면, 다시 진로를 정한다 해도 국문과 지망을 도무지 고려할 수 없는 건 모두에게 어렵지만 특히나 진절머리나게 싫은 「국어학개론」 때문이고, 미술사학 역시 전공으로 하거나 그쪽으로 나가기에는 얄팍한 호기심만 갖고 있었기에 생각이 실천으로 옮겨가진 않았다.
이제 세계가 주목해야 할 곳은 아시아라는 생각을 점점 더 많이 한다. 비단 유적지, 유물 등의 문명 뿐 아니라 베트남 전통 식당이 이탈리아 요리 식당으로 대체되는 일련의 서양화에 대항해야 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길을 걷기에 올림픽이나 월드컵에 참가하고 싶어도 못하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의 여러 국가들을 보는 일도 속상하고 서글픈 일. 식민시대, 약탈의 피해, 억눌리고 저평가된 아시아 고고학사를 고미술(건축물은 이미 제법 주목받는 듯)사 중심으로 조사, 발굴하여 학술적으로 끄집어내어 대중화 시킬 필요가 있다(학계에서 이미 진행중인지도 모르고 꾸준히 진행해왔을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여전히 미술사는 서양사에 집중되어 있다). 정체되고 해체되어 여기저기 널린 아시아 고고학과 미술사를 유럽에 견주어 뒤지지 않는 특수하고 고유한 문명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아시아가 나서는 수밖에 없다. 아무도 우리의 것을 우리로부터 빼앗아 이득을 보게 해서는 안된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앙코르 고고학 역사 속의 '하나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캄보디아의 앙코르 유적에 대해 쓴 책이라기보다는 식민주의 시대의 프랑스의 역사책이라는 『앙코르와트』는 쉬운 책이 아니다. 파리의 프랑스극동학원과 국립동양어학교, 파리와 리옹의 기메미술관, 마르세유와 파리의 고문서관 등 관계기관의 약력이 폭넓고, 인물 약력 역시 헷갈릴 정도로 방대하고, 또 이 책을 일본 미술사학자가 쓰면서 일본(다른 아시아국)과의 연관성까지 다소 고려하도록 만들어졌다. 역사의 배후를 짐작하고 이해하고 시대의 흐름 속에서 새로이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 작가가 프랑스의 시점에서 서술했을 뿐, 캄보디아의 입장에서 새로 쓸 능력이 없다고 인정하는 데서 같은 대륙인으로서 서글픔이 느껴진다. 그런데, 일본이 오로지 피해자로서 무언가를 잃어본 적이 있었던가. 내 기억 속에서 일본은 늘 가해자였는데.
하필 왜 캄보디아일까. 아프리카는 얻을 게 많은 대지인만큼 위험부담도 커서 복불복이라면 넓지만 부상 못한 국가가 수없이 많은 아시아는 좋은 의미에서든 그 반대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분명하다. 크고 인구가 많으며, 분쟁이 끊이지 않고 개발부상중인 국가가 많다. 천 년의 신화 앙코르와트 씨엠립에 가도 아무런 지식이 없어 내게는 별 감흥이 없을텐데도 오랫동안 앙코르 문명을 동경해왔다. 신비롭고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약간 슬프고 아픈 역사마저도.
얼마 전 가짜 삼을 진짜라고 속여 판 일당이 20억 가까이 챙겼다는 뉴스를 보며 피해자들은 대체 진짜 가짜를 구별할 수도 없으면서 그 비싼 걸 뭐하러 사먹었을까 생각했다. 최소한의 지식도 없이 효용만을 바라고 믿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지에 대해서도. 이 생각이 약간은 잘못되고 위험하고 일반화의 오류를 비롯한 온갖 오류를 품고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먹을거리, 화장품, 명품가방, 모피코트, 거기다 미술품, 고고학적 유물들까지 속이려면 얼마든지 속일 수 있는 것들에도 대입추론 가능하다. 나 역시 대영 박물관이나 루브르 박물관에 걸린 그림이 가짜라한들 '진품'이란 강력한 신뢰 아래 감상할 뿐 구별할 능력도 이유도 목표도 없으니.
대표적으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의 박물관(미술관)들이 당시 식민국에서 훔치거나 불법 반출한 유물들로 가득찼다는 사실은 새 소식도, 신기한 일도 아니다. 대영 박물관과 루브르 박물관에는 고대 이집트,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의 전용관이 마련되어 있고, 이는 식민지의 미개성과 서구의 근대성을 밤과 낮, 흑과 백으로 대치시키고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며, 비슷한 지배력을 가진 유럽국들에 전통적으로 문명교화의 사명을 부여한다. 고고학적 기술의 성공으로 거둔 다수 복원도와 복제품은 식민지국(인도,캄보디아 등)의 정체성을 현저히 훼손할 뿐더러 전통을 빼앗고 역사와 정신을 망각시킨다. 빼앗긴 국가로서는 다시 돌려받기도 어렵고 불가능한 상황에 속이 쓰린 패배감과 전통을 지키지 못한 부채감을 떠안게 된다.
『앙코르와트』는 19세기 후반(1866) 프랑스 해군 대위로 복무 중이던 루이 들라포르트가 조사차 방문했다가 접한 앙코르 유적에 매료되어 오로지 유물 약탈을 목적으로 조사를 수행하고 결과를 반출한 사정으로 시작한다. 아주 작고 사소한 시작이 끝무렵 결과를 완전히 바꿔놓는다. 프랑스는 당시 지배국 유럽 중에서도 한복판에 서 있었다. 프랑스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인도차이나 반도, 남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알제리, 카메룬,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 차드, 도미니카, 이집트, 모로코, 콩고 등을 비롯한 광대 식민제국을 건설했다. 캄보디아는 1863년에서 1953년까지 근 100년간 프랑스의 보호국이었다. 어릴 때부터 데생을 그리는 등 예술적 호기심이 많던 들라포르트는 1880년, 캄보디아의 풍물, 문물, 유적의 소개와 고찰, 유물반출의 전말을 상세하게 기록한 기행문 겸 예술 전반에 걸친 역사서 <캄보디아 여행>을 펴낸다.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빈번했던 유럽 식민제국의 약탈은 우연한 기회로 시작됐지만 차츰 치밀하게 진행되었고, 지금까지도 유럽 각국에 엄청난 부를 선사하고 있다. 1907년 돈황굴에서 발견된 무수한 경전을 프랑스로 가져간 폴 펠리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앙코르 왕조 모두를 포함하는, 캄보디아의 원류가 된 크메르 제국의 18세기에서 19세기까지 고미술품과 유적의 슬픈 진실을 추적하고, 웅장함과 화려함을 고루 갖추고 있는 낯선 앙코르 유적으로 기꺼이 인도하는 책이다. 수많은 삽화와 사진으로 크메르 유적과 유물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키고, 비록 성격이 다르지만 아시아 대륙이라는 동질성으로 동양에 대한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을 다시 비판해보게 한다.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땅과 하늘, 현세와 상상 속, 기독교와 유대교, 유럽과 이슬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언덕 위 도시와 메시아 국가라는 이중성을 설명하기 위해 성서의 <창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예루살렘의 기원, 역사, 지정학적 위치를 논증적으로 서술한다. 성서 이야기가 제법 많아서 어려움을 느꼈는데, 대체 성서에 얼만큼 통달해야 다윗과 골리앗, 노아의 방주, 카인과 아벨 이야기처럼 명확하고 재빠르게 성서의 부분 부분을 짚어낼 수 있을까. 소설 속에서 종종 성서와 관련된 인용을 만나면 늘 성서를 혼자 읽을 수 있을 듯한 자신감에 불타오르지만 막상 내것으로 만드는 건 얼마나 어렵고 복잡하고 불가능한 일이던지. 툭 던져진 성서 속 인물의 일대기를 어슴푸레 연결하다보니 결국, 성서를 버리고 이 책을, 예루살렘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닿는다. 읽는 사람의 목적과 집중에 따라 얻고자 하는 게 달라지는 카멜레온 같은 책이다.
성서와 예수, 순례와 종교적 성지(복음), 폭력과 희생이라는 키워드로 거슬러 올라가야 그 기원을 찾고 말할 수 있는 땅. 예루살렘의 기본적 텍스트는 당연히 성서일 수밖에 없다. 거기서부터 지정학적, 지리학적, 문화적, 인류학적, 종교적으로 대치하는 지점에서 예루살렘을 둘러싼 각종 문제들-종교 분쟁, 영토 분쟁, 난민, 테러, 유대인과 아랍인-을 읽어내야 한다. 예루살렘을 향한 세 대륙, 세 문명, 세 종교의 열병과 광기가 왜 생겨났는지, 다들 왜 그 땅을 손에 넣지 못해 죽고 죽이는 뻔한 싸움을 지속하는지를 추적하다보면 결국 현재 종교적 폭력과 유혈 희생제의, 보복과 홀로코스트를 능가하는 무시무시한 상황과 만난다. 거기다 원유原油의 패권다툼까지 더해지면 이 땅의 피바람은 당분간 멈출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득 보는 자와 희생되는 자가 일치하지 않는 사실에 대하여 어떤 말을 덧붙여야 할지 모르겠다.
책을 고르고 어떤 진실 혹은 지식을 기대하며 읽는 중에 내가 범한 실수가 있다. 제임스 캐럴이 이 책을 쓴 건 2011년도, 물론 그때도 이스라엘의 국제적 정세와 사정은 물론 역사적 평가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지만 커다란 분쟁이 다시 발발한 지금 와 보니, Jerusalem, Jerusalem: The Ancient City that Ignited the Modern World라는 원제를 『예루살렘 광기』로 바꾼 건 현상황(이스라엘(선진국)과 팔레스타인(하마스)의 직접적 대치상황)에 적절하게 일치시키기 위해 실질적으로 책이 가진 의도를 비튼 걸로 보인다. 적어도 나는 '현재'를 위해 책을 골랐는데 과거를 훨씬 많이 본 느낌. 내용의 키워드 중 'The Ancient City'을 빼놓을 수 없고, 이 모든 현상을 '광기'라는 단어 안에 가둘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물론 다 읽고 나서는 거대한 예루살렘의 물꼬를 트는 방향잡이 노릇을 탁월하게 해낸 책이란 생각을 하면서 제목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을 했지만. 미국은 물론 세계 전역의 지도와 욕망의 고리를 어떻게 얽히고 설키게 만들었는지 밝히며ㅡ비슷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많은 루트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독서를 해야 하는 이유를 제대로 알려준 책 중 한 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