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문학만 읽는 사람 아니, 문학만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는 싫지만 문학에 관한 한, 하나의 길을 만들고 싶다. 또한 내가 낸 길이 믿을 만한 문학사전이기를 바란다. 한편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책들만 붙잡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나 그렇기는 하지만. 문학이 제대로 기능한다면 말로는 못할 한 마디였으면 싶다. 독서에 관한 한, 상대가 먼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배경지식의 결함은 진정한 관심과 경청의 마음가짐으로 극복가능) 결정적 단점이 있지만, 아무렴 어때, 지금까지도 충분히 괜찮았으니까. 마음과 의도는 왜곡되기 마련이고 나이를 먹어 좋은 점은 당연한 걸 두고 예전처럼 많이 오래 속끓이지 않아도 된다는 거다. 

 

간혹 진짜 천재 얘기를 들었다. 커서 뭐가 될까 궁금했다. 흝어보고도 80% 이상을 완전히 복기하는 친구를 두고 누군가는 처음엔 이기려 했고 열등감을 가졌지만 본인이 너무 힘든 나머지 나중에는 그냥 나와는 다른 세계 사람이라 인정하고 말았는데 그 인정 과정이 참 힘들더라는 얘기. 천재 의대생인 엄마가 시인 아버지를 만나 진화론적으로 완벽히 결합된 자식을 창조하고 싶어했다는, 제 엄마를 소시오패스라고 아프게 말하는『신의 퀴즈』의 한진우 박사를 보면서 나는 한번쯤 고독한 천재로 살아보고 싶다는 꿈을 품었는지도 모른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독서다. 한 분야의 천재적 기질을 발현할 수 없다면 최소한 수많은 시공간의 간접경험으로 내가 원하는 지식욕을 채워보자, 나는 이런 원대한 꿈도 품었을 거다, 아마.

 

 

1.

 

순문학과 장르문학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지만 전혀 다른 낯선 두 문명-아시아와 남미-을 연결하고, 고대 중국과 현대의 페루라는 2000년 터울의 시간을 교묘하게 잇는다. 진실은 현상황의 위기를 모면할 열쇠가 다른 문명의 과거에 있는 식이다. 외교부에서 일하는 아버지 덕에 세계 각국을 오가며 자랐다는 작가 이력으로 보면 여러가지 문화를 체득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창작된 것 같다. 차용했을 뿐인 공자, 노자, 손자 등 고대 중국 철학가들의 사상에 작가가 정말로 정통한지는 미지수지만 <손자병법>, <논어>, <도덕경>의 구절을 비밀을 푸는 열쇠로 배치하여 서구 문화에만 익숙한 우리를 불교, 도교, 카발라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새롭다. 보기 드문 소재랄 수 있는데 내용이나 구성은 인디아나 존스류의 모험담과 다르지 않다. 전생과 현생, 빛과 어둠, 선과 악, 입구와 출구, 삶과 죽음, 육체와 영혼 등 흔하지만 말로 하기 힘들었던 세계관-잉카 문명과 진나라 문명-을 자연스럽게 융합한다.

 

마추픽추가 눈앞에 있다. 칠레 시인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파블로 네루다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마추픽추는 영혼의 평온함과 우주와의 영원한 결합으로 가는 여행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한없는 나약함을 느낀다. 남미에서 가장 경이로운 곳. 생명의 순환 한가운데이 있는 나비들의 안식처. 또 하나의 기적." (p.231)

 

진시황은 고대 중국의 다 빈치로 불릴 만큼 뛰어난 재능을 가진 린카이푸에게 죽어서도 영원히 살 수 있는 거대한 무덤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한다. 의심보다 믿음이 컸기에 과감히 맡긴 시도가 이토록 오랫동안 하나의 비밀을 품고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황제는 자기 시신을 안치할 때 이룩한 모든 재산과 명예, 수천 명의 노역자와 장인, 왕녀들, 신하들을 산 채로 함께 묻어 무덤의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게 해달라고 명령하지만 린카이푸는 명령에 따르는 척 하면서 이 모든 사람들을 살릴 묘책과 방도를 강구한다. 언젠가 더 좋은 삶에 대한 꿈, 더 나은 세상이 오리라 선언한 린카이푸는 예언자였다. 그로부터 2000년 후, 현재 페루는 안보를 위협받는 위기 상태다. 대통령은 이를 비밀 리에 해결함으로써 국민을 보호하고 국가적 위신을 바로 세우며 주모자를 색출해야 하는 임무를 안고 있다. '열두 개의 바람을 다스리는 자'인 세인츠SAINTS 핵심요원 수호는 인종은 다르지만 마음만은 하나여야 할 할아버지 디에고와 함께 문제의 마추픽추로 향한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고 수수께끼의 비밀이 뒤얽히며 수호와 오드리, 디에고, 로니의 활약이 펼쳐진다. 페루를 악의 무리로부터 지키기 위한 누구아의 돌이 2000년 전 숨겨진 진시황릉에 있다. 열두 개의 바람을 다스리는 자가 돌을 가질 경우 날씨를 조종하는 절대악으로부터 세계를 구할 수 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한 쌍의 단추가 있답니다. 좋은 단추, 나쁜 단추 이렇게 말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의 좋은 단추를 나쁜 단추보다 더 자주 누르면 그들은 화합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결혼하기 전 1년 동안 이 점을 생각해보라고 하더군요." (p.389)

 

액션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영상이겠지만 주역으로부터 지령을 받아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2000년의 간극과 진시황릉과 마추픽추의 조화는 뜬금없다고 생각하는 와중에도 절묘하게 어울린다. 게다가 좋아하는 소설인 <둔황>이나 <지상의 노래>와 상통하는 구석이 있다. 세월과 시공간의 간격이 넓고 깊지만 변할 것은 변하고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세월(시간의 흐름) 속에 비밀을 영원히 묻어버리고 싶어하는 자들이 수도없이 많지만(혹은 당시에는 드러나서는 안 되는 비밀로 반드시 숨겨져야 하는 비밀도 있기 마련이지만) 세상이 변하고 다른 가치가 덮여 온통 새로움으로 가득한 것처럼 보여도 결국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며 나무와 산과 하늘이 아는 한 완벽히 가려지는 비밀은 없다는 점에서.  

 

 

 

 

 

 

이 소설들은 밤새워 읽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재미도 의미도 충분하다.

 

 

 

2.

 

어떤 계절은 혼자만 발을 뺄 수 없게 하는 재주를 타고 난다. 먼저 버릴 수도 없고 버려질 때까지 머물기도 싫다. 아무도 찾지 않는 도시의 끝에서 안도감과 초조함을 동시에 느끼는 계절. 여름은 누구에게나 뜨겁고 특별한 기억이지만 유독 이 소녀들에게는 더했던 것 같다. 그 여름, 도시 개발에 밀려 점점 더 음침해지는 뉴욕의 변두리 공장지대 레드훅에서 분홍색 고무보트를 타고 기름기 섞인 바다로 나간 권태로운 두 소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모든 판단을 자신이 보고 느낀 대로 믿는 신중함을 가진 가게 주인 파디도 좋고 소녀들이 고무보트를 타고 떠다니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으면 변하지도 새로워지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만큼의 감수성을 지닌 진중한 소년 크리도 좋지만, 그 누구보다도, 꿈을 잃고 노래하는, 물가에서 온몸이 젖어 팔다리가 축 늘어진 채로 발견한 밸러리를 충분히 오해받을 수 있는 상황임에도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곧장 자기가 믿는 방향으로 들쳐안고 뛴 로맨티스트 예술가 조너선이 좋다. 모든 날씨를 음악으로 바꿔말하는 자연스러움, 말할 때 극적인 몸짓으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거나 무대 뒤의 연인을 향해 세레나데를 연주하는 낭만이.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조너선은 파디에게 그날에 어울리는 음악을 언급했다. 지난주에는 "거슈윈을 위한 오후네요. 대체로 맑고 살짝 상쾌하면서도 비가 올 것 같은" 하고 말했다. 그리고 그제 밤에는 이렇게 물었다. "오늘 해 지는 거 보셨어요? 해거름을 그렇게 그리는 양반은 필립 글래스밖에 없죠." (p.61)

 

뉴욕의 공장 변두리가 어떤 분위기인지, 개발과 고립, 권태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하루하루를 짐작할 수가 없다. 이 젊은 작가는 공감각적 묘사와 공포와 환상이 자아내는 이미지 형상화의 고수다. 미스터리 같으면서도 마을 사람들의 순수한 성장 드라마같다. 사라진 소녀들 중 한 명만 발견되고 소녀조차 떠있는 보트가 기울어지면서 친구 준이 이상한 그림자에 이끌려 물속으로 빨려들어갔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증언하지 못하는 와중에, 철없는 소녀들의 이상야릇한 마지막 모습이 조너선과 크리에게 포착됨으로써 모든 의심의 고리가 이들에게 쏠린다. 형사는 왜 밸러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그랬는지를 묻지 않고 무조건 조너선과 크리를 의심할까. 진짜 둘중 범인이 있을까. 한 마을에 사는 소녀들을 안다는 이유로 은연중 용의선상에 올라 당하는 협조를 빙자한 수사가 지나치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밤에 혼자 부두를 거닐고 있을 때면 크리는 어디 사차원 세계에라도 뚝 떨어졌으면 싶었다. 평생 한곳에 갇혀 살았다는 느낌, 이 좌절감을 달래줄 무언가가 걸렸으면 했다. 그런데 지금 저 소녀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부두에 가만히 서서 그런 걸 바란 게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보트를 타고 강 위로 나가면 레드훅에서 해방감을 느낌과 동시에 레드훅 가까이에 머물러 있는 셈이었다. 저 두 소녀는 온 도시를, 온 해안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심지어 저 멀리 뉴저지의 항구들조차 저 애들 것이었다. 저 애들은 도시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이 밤의 모험을 저 애들만 누리게 할 순 없었다. (p.106)

 

입바른 소리로 합리적인 척 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자기 삶에 충실하면서 타인의 삶을 따뜻하게 봐주는 일은 어려워서 대단한 일이다. 그냥 지나쳐도 됐을 일들, 어느 누가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믿고 또 믿어주는 마음,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신중함, 이 엄청난 주인공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는 일은 생략하더라도, 막상 끝이 나니 개발과 소외의 경계에서 시름을 앓는 뉴욕 변두리 레드훅의 임대 아파트 단지와 동네 사람들의 작지만 반짝였던 여름날들이 간혹 떠오를 것 같다. 최선을 다해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었던 그 뜨거운 관심과 사랑을, 너무 서투른 대신 너무 바르고 아름다웠던 온기를 우리는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 내것을 예뻐하고 지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내 부모, 내 자식, 내 연인, 내 친구, 내 조카, 내 일, 내 집, 내 차.. 우리에게는 이토록 간절히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아서 지키고 싶어도 지킬것을 잃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종종 잊는다. 타인의 외로움 속으로, 타인의 추억 속으로, 타인의 이기적인 동화 속으로 한번 들어가보는 건 어떨까. 늦지 않게 이런 소설을 만났고 이제 곧 이 여름밤의 열기도 가실 테니까.

 

 

 

3.

 

 

미국에서 늘 좋은 반응을 얻었거나 얻고 있다고 소개되는 작가지만 이 작품은 한국계라는 정체성과 이방인이라는 낯선 땅에서의 고독을 모두 내려놓은 채 써내려간, 그간 출간된 작품과는 다르게 굉장히 메타포적이고 낯설다. 환상의 거미줄을 헤치고 작가가 던진 먹이를 받아들기 위해 몇 개의 난관을 거쳐야 하는 기분.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지 말지는 지금의 입장, 의지, 사고가 결정한다. 쉬이 잘 읽히지도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판이 자기가 키우던 수조의 물고기를 갑자기 전멸시킨다든지, 차터 지역으로 차출된 레그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B-모어 지역을 떠난다든지 하는 대목에서는 99%의 확률로 문맥이 주는 이외의 의미를 읽어내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른다. 세계의 안과 바깥, 인내와 폭발, 수용과 도전의 대비는 작가가 그렇게 썼기 때문이지 억지스럽게 읽어낸 의미는 아니다.

 

미래의 미국 사회는 B-모어, 차터 그리고 자치주라는 기묘한 방식으로 각자 다른(우리는 계급으로 읽어내는) 세 개의 세계로 나뉘었다. 우리가 어디에 속하는지는 각자가 판단해 보시길. 적어도 나는 내가 속할 만한 곳을 택한 상태에서 읽긴 했으나 세 세계의 장단점, 같은 점과 다른 점은 굳이 판단하지 않았다. 작가 역시 의도적으로 (무형의) 계급을 위시한 상태에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구성한 것처럼 보였다. 판과 레그는 B-모어 지역 토박이로, 이 지역 사람들은 완전히 정체되어 변화와 도전을 저버린 삶을 산다. 여기서 만족이나 안정을 얻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무기력에서 오는 권태, 두려움에서 오는 정체에 삶의 재미를 뺏겨버린 것처럼 보인다. 대다수가 다른 세계로 가기 위해 무리하게 애쓰거나 과도하게 집착하는 법이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차터 지역으로 차출된) 남자친구 레그를 찾아 나선 판의 결정은 고요한 물 위의 물수제비처럼 변하지 않던 B-모어 사람들을 조금씩 바꾸어나간다. 단지 사랑은 아니었다. 아기에게 아버지가 반드시 필요하다거나 해서도 아니었다. 시작은 어떤 끝을 바라보며 선택되지만 조금만 지나보면 우연이 운명을 이끌고, 운명이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끝을 위해 시작했지만 어느새 끝과 시작은 각기 다른 지점에 서 있기도 한다. 판이 그랬고 B-모어 사람들이 그랬고 자치주에 살던 여러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의료 문제를 가장 크게 다루는 건 미국 사회의 가장 본질적인 계급 문제가 의료 문제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직시하기 때문일까. 의료 문제는 결국 돈, 계급, 생명 존중, 고독과도 연관되어 이 사회의 병적인 문제들을 예리하게 각인시킨다.

 

그녀가 길을 나선 것은 단지 레그를 찾아내기 위해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는 레그가 어디로 갔는지, 또는 그가 심지어 살아 있는지에 관한 진짜 실마리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어느 누가 그런 불확실성을 가지고 우리의 봉쇄 구역을 떠나려고 하겠는가? 레그가 자극제였던 것은 맞다. 그건 정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일이 설명되지는 않는다. 결코 하나의 사람이나 사건만으로 전체가 구성되지는 않는다. 그 사람이 누군가에게 아무리 소중하고 아무리 사랑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우주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이야기는 우리가 그것을 유심히 관찰할 때마다 끊임없이 팽창한다. 종국에 가서 우리는 그 이야기가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에서 끝나는지 그리고 우리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pp.95-96)

 

나는 잘 알지 못하는 이창래 작가가 태양보다는 토양 같은 사람일 거라 추측한다. 가장 열악하고 뜨거운 순간에도 그는 꼿꼿하고 예리하게 몸을 낮춰 방어한다. 부르짖지도 숨지도 않고 같은 자리에서 묵묵히 투쟁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간 읽은 세 편의 소설들 중에서도 나는 여전히 <생존자>를 제일 아낀다. 준, 헥터, 실비는 한 번 읽히고 잊혀질 사람들이 아니며, 우리 전쟁의 역사는 전쟁(의 순간) 그 자체가 아니라 이전과 이후에 더 의미있는 무엇으로 변했다. 네 번째 작품으로 <가족>을 읽는다.

 

 

4.

 

 

태운 사람 모두를 죽인 여객기 사고에서 살아남은 3개월의 갓난 아이를 추적해가는 슬프고 기이한 미스터리지만 책을 덮을 때 이것 말고 어떤 결말을 더 생각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결말을 모른 상태에서는 충분히 재미있지만 막상 결말을 알면 이렇게 싱거울 수가 없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서정이 다분한 문장은 충분하지만 의도된 결말로 나아가기 위해 엎치락뒤치락하는 진실을 즐거운 반전이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사건이 기묘할수록 산 자들에 의해 조작, 은폐되는 일이 허다한 법. 그럴 수밖에 없는 선택들 사이에서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들을 잘 포착한다. 할머니는 더없이 사랑스러운 손자의 사랑을 지켜주고, 탐정은 모두가 행복해길 바라지만 결국 이득을 위해 움직인다. 소녀의 언니는 동생을 영원히 살리기 위해 선택이란 걸 하지만 그건 어린 소녀의 선택처럼 보이지 않는다. 가장 아름다운 소년은 모두가 욕심내는 소녀를 이렇게 지킨다.

 

릴리는 이야기를 지어서 말하길 좋아했다. 마르크는 아래 침대에 누워 릴리가 하는 이야기를 잠자코 듣곤 했다. 가끔 릴리가 무서워할 때면 침대에 앉아 릴리가 잠들 때까지 손을 잡아주었다.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릴리가 늦게까지 책을 읽으면 불빛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마르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양에게 햇빛을 그만 비추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p.409)  

 

 

 

5.

 

 

<세계 아닌 세계>과 <패자의 기억>은 혁명의 시대를 몸소 부딪쳐나가는 사람들의 긴 인생에 바치는 헌사다. 멕시코 작가 호르헤 볼피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 체르노빌 사고, 냉전체제 종식 등 20세기를 관통하는 러시아사를 배경으로 얽히고 얽힌 관계와 삶을 시간순으로 짚어가는 소설 <세계 아닌 세계>를 구성했고, 색다른 소설이 낯선 배경을 가리키고 있어 시간의 경과와 인물의 성장, 소설의 끝이 한 곳에서 만난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프랑스 작가 미셸 라공도 <패자의 기억>에서 비슷한 구성을 보여주는데, 실제 기계공이면서 노동자였던 그는 2차대전 중 레지스탕스 활동의 경험과 문학과 예술의 세계관, 온갖 직업을 전전하며 넓힌 풍부한 체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썼다. 주인공 알프레드가 유럽의 20세기-가장 혼란한 시절-를 통과하면서 겪는 아나키스트들과의 추억담, 독서와 체험 사이의 괴리, 자신의 삶을 들려준다. 작가가 스스로 펴낸 20세기 회고록인 셈이다. 역사의 소용돌이를 벗어나본 적 없는 자칭 '패자'의 굴곡진 삶을 펼치면 놀랍도록 가짜같은 진짜 역사가 흐르기 시작한다.    

 

알프레드의 말은 진심이었다. 바스킨의 그림에서 여러 모습으로 변신한 플로라, 꿈속에서 본 플로라를 제외하면 알프레드는 플로라를 다시 만나지 않았다. 머릿속 방황에도 책임을 져야 하는가? 욕망에 따른 동요까지도? 그는 플로라를, 바스킨이 그린 나체의 플로라를 갖고 싶었다. 알프레드는 그녀가 자신의 여자였을 때 원했던 것 이상으로 강렬하게 플로라를 탐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해서, 플로라를 향한 이런 열정이 난폭성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이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플로라를 멀리했던 것이다. (p.435)

 

레닌, 트로츠키, 크롯포킨, 고리키, 블룸, 마흐노, 소렐, 페기, 말로 등 이 유명한 사람들은 모두 알프레드 곁을 스쳐지나거나 더없이 오래 머무른다. 그랬다고 해도 여전히 한때다. 한때 우리 곁을 지키던 사람들, 한때 우리 곁을 스치던 바람, 한때 우리와 같은 생각과 웃음과 희망들. 가장 복잡하고 혼란했던 시절 자의반 타의반 이별한 연인을 아쉬워하지 않을 도리는 없지만, 삶이란 어느 경계를 지나면 가능했었던 동화와 꿈이 실제 있었는지도 모르게 되어버리는, 어떤 기약도 확신도 없는 무엇 아니던가. 갖가지 모양의 삶이 허공을 떠돌고 그것들은 하나의 기준으로 이기거나 실패했다고 말해질 수 없다. 

 

영원한 영원은 결코 없다. 아직 너의 삶에 간섭할 수 있다는 작은 진실 하나만이 그저 고마웠을 뿐. 비현실같은 비명과 신음과 폭탄 사이, 은은한 사랑을 찾아나서는 길에서 주어진 물결 따라 파도를 타는 것외에 다른 경로는 도통 허락되지 않는 여정이었다. 여기서 더 크면 우린 어떤 어른이 될까, 마음 깊은 곳에 이상한 질문을 품는다. 겪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 이 세상에는 분명 있지만 겪지 않고는 함부로 말할 수도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걸 부정할 수도 없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삶. 경계. 중간. 희미. 수많은 사람이 죽고 또 사라졌건만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온 알프레드는 더이상 예전의 알프레드가 아니며, 다시는 입을 열지 않는다. 그때 깨달았다. 어떠한 경우에도 살아남아 서로의 현재와 과거를 반추하는 의미가 되어야 한다는 걸. 이 독서의 결과, 사랑스러운 레지스탕스가 나오는 <유럽의 교육>을 떠올리며 평소 궁금했던「10월혁명」과「스페인 내전」을 가르쳐줄 책으로 터를 옮겨갔다.

 

 

 

6.

 

그리고 몇 편의 소설은 기대와 달랐다. 그게 꼭 나쁜 것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누구나 설정, 소재, 캐릭터, 구성, 결말 중 하나라도 자신을 휘어잡아주기 바라며 책을 펼치지만 거기 미치지 못할 때 그 작품은 아주 빠르게 안드로메다로 가버린다. <난 너에게 장미정원을 약속하지 않았어>와 <내가 미친 8주간의 기록>은 바쁘고 강압적이고 혼란스럽고 시끄러운 이 세계가 사람을 미치게 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내가->에서 날마다 반복되는 삶에 지친 현대 여성 밀라가 번아웃 신드롬(burnout syndrome)에 시달리며 자발적으로 찾은 정신과 상담에서 우울증을 진단받게 되어 입원한다면, <난 너에게->에서는 열여섯 살 소녀 데버러가 마음 속 또다른 세계인 '어두운 왕국'에 의해 광기로 타락해가는 정신분열증으로 부모님에 의해 병원을 찾게 된다. 부모님마저 이해하는 엄마와 이해하지 못하는 아빠로 나뉘어 격렬히 대립하는 와중에 데버러는 점점 더 위축될 수밖에 없다. 밀라와 데버러는 병원에서의 상담치료, 비슷한 환자들과의 관계로 자신감을 안고 다시 세상으로 나온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의 헤이즐을 떠올렸는데 암 환우 모임에서 만나 서로의 아픔과 마음을 나누며 공감한다는 얘기에도 별로 공감하지 못했던 건 '아픈 사람을 이해하는 건 아픈 사람'이라는 뻔한 방식을 거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아니란 걸 알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공포, 불안, 허무가 눈에 보이는 고통, 어려움, 혼란에 비해 다소 작게 느껴진다. 힐링 소설의 범주에 내멋대로 스스로 행복하지 않으면 함께도 행복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가든 스펠스>와 <집으로 가는 먼 길>을 나란히 놓는다.

 

 

7.

 

천둥꽃은 실제인물인 주인공 엘렌 제가도(Helene Jegado, 1803-1852)를 지칭한다. 그녀를 너무나 아끼고 사랑한 엄마가 어릴적부터 그녀를 천둥꽃이라 불렀지만 왜 그렇게 불렸는지 다 읽고나서도 잘 모르겠다. 한눈을 많이 팔며 읽어서 사연이 나왔는데 놓친 걸 수도 있다. 천둥꽃은 귀하디 귀하게 길러졌지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이유로 몰락한 귀족 가문의 가사도우미가 된다. 미스터리로 치면 '왜'가 빠졌기 때문에 장르로도 드라마로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도지만 브르타뉴 지방색과 1800년대 시대상이 오싹하고 광기어린 여인을 형상화하는 데 무리가 없다. 컬트 문화, 미신, 신비주의의 매력은 충분하지만 벨라도나 열매와 비소의 독으로 가는 곳마다 그녀의 요리를 먹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데도 불구하고 이유와 동기를 밝히지 못했다는 점에서 흥미가 떨어진다. 그녀는 결국 재판장에 서지만 콜레라 창궐과 겹치는 바람에 희생자 수마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작가가 개인적으로 매력을 느꼈거나 재현하고자 한 부분이 사건 전체가 아니라 중세와 맞닿아있는 브르타뉴 특유의 민중성 묘사에 있었던 것 같다.

 

 

8.

 

2013년도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북한을 소재로 주목을 끌지만 문학 전문 출판사에서 출간되지 않은 건 그렇다 쳐도 이례적으로 낯선 스토리다. 한국문학이 북한을 소재로 쓴 작품에서 이념적 갈등이 없던 적이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가 보는 북한과 서구가 보는 북한의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고아원 원장의 아들이자 주인공인 준도의 직업을 특수훈련을 받은 일본인 납치담당으로 설정했는데 부조화스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당의 고위 간부에게 엄마를 뺏긴 아버지를 향한 연민과 애증, 엄마를 향한 깊은 그리움, 인민배우 선문과의 사랑. 일상을 놓고 보면 보통의 우리와 다르지 않은 루트 때문일 수도, 한반도에 사는 당사자로서 자동 형성된 이념을 뒤엎기 힘들기 때문일 수도. 작가는 북한을 오로지 인권의 사각지대로 설정한 상태에서 특수하고 부조리한 면을 최우선으로 둔다. 준도를 정부 당국의 억압에 직간접적으로 항거하는, 자유의지를 지닌 인물로 설정한다고 밝혔지만 이데올로기 최전선 북한의 상황이 훨씬 뜨겁고 처참하다는 걸 아는 나와 우리에게는 싱거운 요리일 수 있다. 북한 인민이 그저 평범한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다.

 

 

 

9.

 

 

 

 

 

 

 

 

괴테, 실러, 토마스 만, 찰스 디킨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카카오로 만든 초콜릿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여 자주 마시기도 했지만 작품에서 언급한 경우도 있다. 찰스 디킨스는 <두 도시 이야기>에서 프랑스 귀족이 초콜릿을 마시는 장면을 약간 과장되게 묘사하면서 퇴폐적인 면모를 그렸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남태평양에서 직접 카카오를 경작하면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그것이 얼마나 지저분하고 힘든 노동인지 썼다. 시대가 변해 초콜릿 대신 차와 커피를 즐겨 마시지만 지금도 초콜릿 생산과 조리 방식은 열대 우림에서 유럽으로 카카오의 명성이 뻗어나가던 16-19세기처럼 대중 깊숙한 곳에서 변신을 거듭하며 진화하고 있다.

 

그중에 아동노동은 가장 나쁜 경우에 속한다. 비슷한 나쁜 일들은 도처에서 같은 방식으로 발생한다. 바나나, 커피, 초콜릿, 카카오. 뭐 하나 다를 게 없다. 특정 지역, 특정 기후에 재배되는 돈되는 작물에 대한 착취가 카카오를 강타한다. 카카오의 핑크빛, 핏빛 역사를 되짚으며 나아가는 달콤하면서도 잔혹하고, 매혹적이면서도 무시무시한 책이다. 카카오의 과거와 현재, 생태와 재배법까지 모든 것을 다룬다. 유리잔에 찰랑이는 맑은 핏빛 와인의 향과 혼자만 아껴마시고 싶은 맛. 온갖 비밀을 품은 이 작고 붉은 빛 나는 갈색 열매는 가히 열대 우림의 승자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다.

 

협정 182조는 최악의 아동노동을 없애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여기서 아동이란 18세 이하 모든 사회 구성원을 말한다. '최악의 아동노동'이라는 표현은 노예제, 인신매매와 같은 노예제와 유사한 행태, 학교에서의 노예 노동과 강제 노동 및 의무 노동 같은 농노 노동, 무장 투쟁에 강제로 동원하는 것을 포함해, 아동 매춘 제공 및 알선, 포르노나 유산 포르노 제작, 마약 거래에 이용하거나 불법 행위에 아이들을 연루시키는 행위, 아동의 건강과 안정, 도덕에 해가 되는 노동을 말한다.

 

2000년 서아프리카 카카오 농장에서의 아동 노예를 다룬 내용이 언론에 나왔다. 독일, 영국, 미국의 중앙지에 기사가 실렸고, 주요 방송국은 끔찍한 영상의 르포를 방영했다. 아동 납치와 강제 노동에 대한 세계적인 비난이 일었고, 국제노동기구는 서아프리카의 카메룬, 코트디부아르, 가나, 나이지리아에 대한 대규모 조사를 단행했다. 조사 대상은 최악의 아동노동 행태들이었다. 강제 노동과 벌채용 칼을 사용하는 위험한 노동, 과도하게 무거운 카카오 자루 운반, 독성 살충제 살포 등이다. (<신들의 양식, 인간의 욕망-카카오> p.83)

 

자, 책을 읽었고 페이퍼도 마감했으니 어떤 의미(-적어도 독서)에서는 이 계절을 완벽하다 말할 수 있을까. 책으로 완벽해진 계절 따윈 살면서 단 한 번도 없긴 하지만. 오래 전 '완벽한 이웃을 만나는 법'이라는 드라마를 재미있게 봤다. 독서는, 결국 찾지 못할 완벽한 책을 만나기 위해 애쓰는 노력이고, 삶은, 결코 없을 완벽한 생을 찾아나서는 여정이며,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다고 믿는 완벽한 짝을 갈구하는 열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완벽한 계절이나 완벽히 아름다운 날들 같은 것들을 나는 믿지는 않지만 여기 아닌 세상에 언제나 존재하고 있을 거라 확신한다.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그편이 살만한 건 분명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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