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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철학자들 -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
이본 셰라트 지음, 김민수 옮김 / 여름언덕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기 시작할 때는 자신을 포지셔닝해보는 게 좋다. 결단력 있는 태도는 올바르지만 냉소적이면 공감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기 쉽고, 세상을 똑바로 보지 않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하는 자에게는 철 없는 몽상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스타일이 아니라면 정치적 포지션은 어떤가. 헤겔이 인종분리주의자이자 반유대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인격에 심한 결함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런 자의 철학적 사유를 익히기 위해 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저작을 읽고 공부하나. 자신이 권력지향형이자 친미주의자였으므로 굳이 친일파를 처단할 생각은 하지 않았을, 그래서 흉내만 내는 걸로 소임을 다해 끊임없이 프랑스의 드골과 비교되는 이승만과 일본 왕에게 폭탄을 던지려다 실패하고 체포된 이후 사체조차 찾지 못한 걸로 알려진 의인 이봉창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이승만이 미국 유학 5년 만에 학석박사를 전부 딴 천재적 두뇌의 소유자였고, 이봉창이 보잘 것 없는 집에서 태어난 가난한 노동자였다는 걸로 그 거리를 짐작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은 대통령으로 초호화 생활을 했고 또 한 사람은 국가의 독립을 위해 비참한 삶을 감수하면서까지 희생했다는 사실로는? 

 

정치는 말이 쉽다. 비유도 대체도 대비도 쉽다. 지나간 생은 하나의 결과로만 남겨지고 죽은 자는 더이상 말이 없기에 우리 삶과는 조금 동떨어진다. 히틀러에게 동조한 철학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 히틀러의 동조자와 관조자라는 대결구도. 독재자의 매커니즘은 늘 같다. 어째서 본인을 내려놓고 타인을 아끼고 지키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늘 가난하고 불행한가. 히틀러를 중심으로 도는 세상 혹은 시대를 기술記述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어떤 면을 훑어도 무궁무진한 자료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2의 히틀러가 실시간 등장하지 않는 한 그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정치, 사회, 문화 등의 카테고리에서 별종이든 괴물이든 영웅이든 어쨌든 악명 높은 대상일 것이다. 시간의 축이 명확하다는 점과 히틀러가 접할 수 있었던 모든 철학사상가의 책과 사유를 대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히틀러의 철학자들>은 잘못 읽기 쉬운 책이다. 수십 명의 철학자를 빵쪼가리처럼 맥락없이 툭툭 던지는데다 그들의 철학적 사유가 어떻게 히틀러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는지까지 나아가기 때문에 철학자 혹은 시대적 배경에 대한 기본지식이 요구된다. 내용을 독해하며 읽어야 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지만 웬만한 호기심으로 인내하지 못하면 길을 잃기 쉬운 책이라고 읽는 내내 생각했다. 긴 시간 들여 이 얘기 저 얘기 다 들어보지만 결론은 뻔한데, 그 결론이 나오나마나한 상황이라면.

 

삶의 지향점이라는 단서로 우리는 몇몇 철학자들의 정치성향과 가치관을 판단할 수 있지만 그와 별개로 또 상당 부분은 우리가 당시를 살지 않았기 때문에 짐작이나 상상으로만 채우려는 선입견이 있을 것이다. 결국 이 책은 지식인들은 왜 각자 다른 길을 걷는가 혹은 글(철학)은 역사의 맥락 속에서 얼마만큼 왜곡될 수 있나에 대한 해답이다. 첫 번째 해답은 지식인이든 철학자든 '사람'이기 때문이고, 두 번째 해답은 '늘(always)'이다. 누군가의 말 한 마디, 글 한 줄을 앞뒤 정황도 맥락도 없이 떼어내서 자의로 해석하는 일에 대한 위험성. 철학자와 그들이 남긴 저작(사유, 의견, 목소리), 저작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으면 좋았겠지만 막상 철학이론 계보를 줄줄 읊을 정도로 이론지식이 꽉 들어찬 사람이 굳이 이 책을 집어들 것 같지도 않다. 이 공간에서도 나는 의도치 않게 어느 글이 타인에 의해 오해를 낳고 비난을 받고 의도적으로 이용되는 광경을 많이 봤다. 불특정 다수라는 익명에 숨어 내가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횡행하는 편 먹기, 의도의 왜곡, 의미의 교묘한 짜깁기, 언뜻 논리적인 듯 보이기도 하는 의견다툼을 넘어선 감정싸움, 도 넘은 비난까지. 거기 동조하고 있는 나도 참 싫었다.

 

철학자의 삶이 내가 느끼는 소설가의 삶을 향한 거리만큼 가깝다면 어느 철학자가 어떤 식으로 이용됐는지, 동조하거나 저항하는지 가능한 한 주목하며 읽는 게 좋다. 그게 아니라면 그저 이야기 읽듯 한 편의 에세이처럼 읽어나가야 막히지 않는다. 저자가 그렇게 썼다고 밝히기도 했고 대화체와 인용이 등장하니 약간의 어려움이 와도 그냥 돌파하는 게 무난해 보인다. 나는 당연히 철학자를 다 몰라서 슬픈 편에 속하는 독자였다. 손택의 글을 좋아해서 문학비평 역시 무척 좋아하지만 그녀가 다루는 작품 일부는 읽을 수 없거나 번역되지 않은 작품으로(그게 그거다) 이루어졌다는 걸 감수해야할 때의 막막함과 아쉬움처럼 히틀러라는 게임판 위에 슈미트, 하이데거, 니체, 헤겔, 벤야민, 아도르노, 아렌트, 후버, 바그너, 스피노자, 해켈, 슈펭글러, 칸트, 레싱, 실러를 잘못 혹은 다르게 배치했다면 순전히 내 오류다. 지식인으로서 저버린 양심과 영혼, 박해와 망명을 감수하면서도 지키려 했던 양심. 두 가지 양심은 얼마나 다른 동시에 또 같기도 했을까. 우리 역시 독립운동사에서 완전한 흑백논리를 적용하면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와 '그러려는 의지가 명백한' 이를 똑같이 취급한다. 아마 홀로코스트 논리에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게 바람직한 걸까, 그래도 될까. 인류 평생의 고민이기도 하다.

 

그래서 히틀러는 동시대, 그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죄 없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저서에서 유리한 부분만을 따오고, 뜻이 전혀 통하지 않는(그런 의미가 아닌) 부분조차 억지로 유리하게 변형하거나 비틀어 통치를 뒷받침하는 정당한 근거로 만들었지만 그가 '총'이 아닌 '머리'로 세계를 지배하는 데 성공했냐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자살과 타살을 불문하고 독재 정권 아래 시인과 소설가들이 입은 피해를 더해보면 이 상황이 오로지 동시대 철학자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스페인 시인 로르카, 인도 출신의 영국 소설가 살만 루시디의 삶이 정치와 얽혀 어떻게 흘러갔는지만 보더라도. 열등한 혈통이 통용되면 자기가 다스리는 세상이 하급의 인종으로 가득 찰까봐 시작한 유대인 청소는 결국 오늘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 똑같이 이용되고 있다. 이를 두고 이스라엘이 말하는 방식을 보면 주로 '먹히기보다는 먼저 먹는 게 낫다'는 뜻인 것 같다. 이래서 역사에는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고 하는 걸까. 선조대에는 당하기만 했으나 이제는 조금 되갚을 수 있게 된 이스라엘 민족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는 세상이 늘 변하고 있다고 믿지만 실은 놀랍게도 많은 부문에서 논리와 역사는 같은 방식으로 반복된다. 나치에 저항한 이들의 거룩한 삶을 여기서 굳이 더 말로 해야 할까. 그들이 독일에서는 독일 사람이 아니고 프랑스에서도 프랑스 사람이 아닌, 영원한 이방인이었다는 걸. 후버, 아도르노, 아렌트, 벤야민은 할 말을 한 덕분에 영원한 망명과 난민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박해나 처형은 빈번했고 자연스러웠으며 당연했다. 어쨌거나 독일 철학 혹은 히틀러가 서로 상대방에게 빚을 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 논리는 오늘날 더이상 회자될 것이 없을 줄 알았는데 저명한(절친한) 지식인들이 눈앞에서 나를 배신하고 돌아설 때, 나를 처형하고 유대인의 학살을 승인하는 지시를 내릴 때, 그게 다 나치라는 잔학과 야망과 폭력으로 얼룩진 정권을 타당화하기 위한 것이며 그들이 다시는 이쪽으로 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혹은 자신이 저들 반대편으로 건너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심정이 어땠을까.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자들의 절박한 시도와 숨가쁜 저항과 절절한 희생이 지금처럼 숭고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어떤 윤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다. 이봉창, 윤봉길, 안창호 등 독립 운동가들의 후손이 모두 가난하게 숨죽이며 평생을 살아도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 지금의 우리가 이 땅에 멀쩡히 사는 이유는 눈 감고 싶고 모르고 싶고 알면 죄의식에 휩싸이는 진실, 바로 그들의 희생 때문이다. 히틀러가 만든 세상에서 히틀러 아니면 죽음을 선택해야 했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서 무엇을 보고 어떠한 방향으로 갈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내가 내릴 결정인데 마냥 그렇게 여겨지지도 않는다. 세상은 더 발전하고 더 빨라지고 더 편리해졌다고들 하는데 모른 척하는 사이 선택의 폭은 십 년 전 이십 년 전과 비교해 하염없이 좁아지고 있다. 이 시대의 비극은,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고 무엇을 보고 있으며 어떠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아서 생기는 게 아닐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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