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성의 몸으로 붓다가 되리라
비키 메킨지 지음, 세등(世燈) 옮김 / 김영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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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대학 때 대구 시민회관 소강당에서 전시회를 본 일이 있다. 그곳에 걸린 달마의 그림을 보고, 어떤 아저씨가 내게 달마는 깨달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남자라고, 여자는 깨닫지 못한다고 했다. '달마의 스승이 여자라는 설이 있어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논쟁이 될까 두려웠다.

인간이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논쟁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답답했다. 그러나 여자들은 숨어 있고, 또 역사가 숨기고 있었다. 답답함에 베트남의 칭하이 무상사나 한마음 선원의 대행 스님 강연을 듣기도 했다. 그분들 역시 텐진 빠모와 같이 여자의 몸으로 깨달음을 이룬 분들이셨다. 강연을 들으면 남녀에 관한 이야기가 없다. 깨달음엔 유정물도 무정물도 없는데, 남녀가 있다는 것이 어처구니없는 것이리라. 그런데도 끊이지 않고, 수행단체들에서 듣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여자는 어려워'였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자꾸 듣게 되니 내 게으름으로 인한 어려움도 내가 여자라서 그런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했다.

텐진 빠모는 '여자는 아무래도...'의 한 가운데 있었다. 불행하게도 여자의 깨달음에 대해 가장 부정적인 곳은 수행자 집단이다. 티벳에서도 그랬다. 쉬임 없이 수행함으로써 텐진 빠모는 부당한 조건에서 수행하는 여스님들에 대해 달라이 라마에게까지 개선을 요구하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스스로에게 당당해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본 랜드와 같은 영적인 여성이 주부로서 수행하기 위해 자신에게 맞는 수행을 발견하는 모습 등에서 실제로 내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여성의 깨달음만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깨달음은 이미 성을 초월해 있음으로, 텐진 빠모의 동굴에서의 수행이나 스승과의 관계, 그리고 내면의 힘 등 여러 방면은 남녀 관계없이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좋은 본보기이며, 이 책 구석구석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깨달음에 대한 훌륭한 가르침이다. 그녀의 수행법이나 티벳의 토그덴들의 교훈들은 아직도 내 가슴에 넘실거린다.

여성으로서 영적인 성장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책을 읽기 권한다. 수행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유익할 것이다. 책은 무척 가볍고, 쉽다. 그러나 미소짓게 하고, 깨달음에 대한 절실함을 불러 일으킨다. 그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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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미카엘 엔데 지음, 차경아 옮김 / 청람문화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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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줄 아는 귀를 가진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누군가에게 말하고나서 괜히 말한 것은 아닌지 불안해한 적이 있을 것이다. 듣는다는 것은 소리만을 듣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가 마음에 여유가 있고, 열려 있을 때 내게 말하는 이는 평안을 느끼고, 말한 다음에도 찌꺼기처럼 자신에게 남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마음이 조급하고, 닫혀 있을 때는 말하는 사람도 힘들고, 하고 나서도 왜 했나 싶게 된다. 모모가 언제나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졌다면 그 아이는 언제나 마음이 평온했으리라. 쫓기지 않는 마음이 그런 평안을 가져왔을까? 시간이나 상황에 쫓기지 않는 그 마음은 욕심 없음에서 나온 건 아닐까?

시간도둑에게 시간을 빼앗기는 사람은 처음에는 아주 작은 욕심으로 그렇게 하지만, 나중에는 빨라진 시간에 대처하느라 모모를 만날 시간도 없어진다. 그리고는 왜 그렇게 바빠졌는지 모른다. 오늘 나는 시간을 팔아 무엇을 사들이고 있을까? 모모처럼 할일 없는 사람처럼 가만히 있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 시간도둑의 담배를 말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시간을 절약함으로써, 결국 실제로는 전혀 엉뚱한 것을 아끼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어느 누구도 자기의 삶이 점점 빈약해지고, 단조로워지며, 차가워져 간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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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비룡소 걸작선
생 텍쥐페리 지음, 박성창 옮김 / 비룡소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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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 나는 이 책을 외우기까지 했었다. 얼마전 조카에게 이 책을 선물하면서 다시 보았다. 참 신기한 책이다. 참 신기해. 여우와 어린왕자의 대화가, 그 다음엔 알약 파는 사람과 샘의 이야기가, 그후엔 너무 어려서 꽃을 사랑하지 못한 왕자의 이야기가, 그리고 일시적인 존재이기에 더욱 소중하다는 이야기...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새로이 살아났다.

일주일에 53분을 절약할 수 있는 알약 파는 사람이 알약을 사라고 어린왕자에게 말했을때 어린왕자는 사람들이 그 53분으로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했다. 알약파는 사람은 그 시간으로 사람들이 하고 싶은 걸 한다고 대답했다. 그때 어린왕자는 '내게 그 53분이 있다면 샘을 향해 천천히 걸어갈텐데..'라고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 '마음에 좋을지도 모르는 물'을 마시기 위해 사막의 어둠을 걸어 축제처럼 즐겁게 그 샘을 만난다. 목이 말라서가 아니라 그저 마음에 좋을 것 같아 샘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다. 목을 축이려는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욕심 없는 발걸음...

이 이야기는 늘 나를 돌아보게 한다. 돈을 번다, 시간을 절약한다, 그렇게 알약을 사서 먹는다, 그리고는 무엇을 하는가? 내 자신을 찾아 떠나기엔 사막의 막막함처럼 내 삶이 막막하게만 느껴지는가? 두려운가? 왕자처럼 아무 계산 없이, 욕심 없이 동틀 무렵 샘을 발견하리라는 믿음이 내게는 없는 것일까? 나도 그 물을 마시고 싶다. 알약말고, 마음에 좋은 물을.

사막 한 가운데에서 샘을 향해 떠날 수 있는 어린왕자도 후회라는 것을 한다. 지리학자의 설명에 따르면 꽃은 일시적이며, 일시적이라는 말은 곧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다는 뜻이다. 그런 꽃을 두고 온 것을 후회한다. 그리고 너무 어려서 그 꽃이 그의 별을 향기로 뒤덮게 한 행위를 보지 못하고, 허영에 찬 꽃의 말만을 들었던 것에 대해, 너무 어려서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 후회한다. 여우의 말처럼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꽃의 향기처럼 보이지 않지만 우리 존재를 뒤덮는 것이다. 누가 중요한 일을 하는가? 나는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야 라고 매일 외치는 버섯이 되지 않으려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건 아닌지...

아, 자꾸만 살아난다. 어린왕자. 그의 별과 그가 친구가 되고 싶어 했던 가로등 켜는 사람, 수수께끼 같은 말만 하는 뱀, 그리고 왕과... 그 모두가 내 친구였다. 살아있는 책, 살아나는 책, 신기한 책-어린왕자. 아, 어린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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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16 14: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19 22: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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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침묵들을 위하여 창비시선 188
유승도 지음 / 창비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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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도를 처음 만난 것은 1995년 [문예중앙]에서였다. '나의 새'라는 시가 한눈에 확 들어왔다. 그 잡지의 신인문학상을 수상했던 그는 개구리가 밤에 따뜻한 아스팔트를 찾다가 차에 깔려 죽는 이야기를 하며 자신이 상을 받는 행위가 개구리의 행위처럼 되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의 당선소감을 썼다. 늘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후 그가 시집을 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우연히 서점에서 다시 만난 그는 결혼을 하고, 강원도의 농사꾼이 되어 있었다. 시집에서 첫번째 시는 '침묵'이었다. '바람 속에 내가 있었으므로 바람의 처음과 끝을 이야기 하지 않았다'는 그의 말처럼 그는 철학이 아니라 순간과 삶 속에 있었다. 그는 이미 새들이 막 잠에서 깨어 새들의 눈이 그를 바라보는 것을 보았으리라.

그의 시가 훌륭한지 그렇지 않은지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바라보고 웃는 작은 것들을 나도 보며 따라 웃을 수 있다. 그가 걷는 그 산길을 따라 걷는다. 그리 험하지 않고, 고요하면서도 뭇 작은 생명들이 눈을 반짝이고 있는 그런 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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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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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그의 시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의 마지막 구절이다. 그의 시는 중얼거림 같다. 어둠 속의 중얼거림.

처음 기형도의 시를 읽을 땐 어둠밖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해서 책을 덮었다. 그 후, 어둠에 좀 익숙해진 내 눈이 기형도의 시어를 보았다. 이미지들. 훌륭했다. 어둠 속에서도 알알이 빛났다. 다시 편 이 책은 철학책 같았다. 좀더 자세히 그의 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만 갈갈이 시집을 찢는 듯한 느낌이 들어 그만둔다. 어쨌든 익숙해진 까닭인지 어둠보다 그의 중얼거림이 이제 더 잘 들린다.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를 피워내는 나무들처럼 희망-그것도 다른 이들이 누리고 있기 때문에 나도 누리고 싶은 질투로 가득찬 희망-과 그 희망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탄식들에게 자신을 찾지 말라고 한다. 그는 솔직하다. 지나치게 솔직하다. 그 지나침이 그를 이 세상에 살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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