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곰탕집 성추행 사건”이라고 들어 봤어? 곰탕집에서 남자가 여자의 엉덩이를 움켜잡았다고 여자가 주장했어. 두 사람이 스친 시간이 1, 2초에 불과하고 CCTV에 움켜잡는 손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여자는 스치자마자 즉각 반응했고 그 남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아무런 이유가 없었어. 그게 재판까지 가서 남자가 유죄를 받았는데 증거가 확실하지 않는데 유죄였다거나 동종 범죄보다 과도한 형량이었다거나 하는 문제로 대법원판결이 났는데도 시끄러운 사건이야. 나는 이 사건을 보면서 기억하기 싫은 장면이 떠올랐어.
고등학교 때였나, 대학 때였나 시기는 불분명한데 그 장면은 선명해. 우리 집 근처 큰 도로 옆 인도를 걷고 있었어. 밤이었지만 큰 길이라 환했어. 그때 술을 마셨는지 약간 비틀거리는 남자가 마주 오고 있었어. 양복을 입고 있었고, 나이는 30대 정도로 보였어. 그렇게 지나가는데 그의 왼손이 내 가슴을 움켜쥐듯이 누르고 가는 거야. 정말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어. 나는 획 뒤돌아봤지. 소리도 못 지르고 쳐다봤는데 그놈의 발걸음은 아까와 전혀 다르지 않았어.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프라이팬 같은 걸로 그놈 뒤통수를 내려치고 싶은 충동이 생겨. 그랬다면 CCTV도 없고, 목격자도 없었으니 내가 폭력범으로 잡혀갔을지도. 근데 기슭아, 이게 30년 가까이 지난 일인데 내가 너무 잘 기억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물론 기억이라는 게 왜곡이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가 어떤 일을 기억하고 못 하고를 구별하는 건 감정이 얼마나 개입했느냐, 라고 해. 나는 그 일에 대해 분노의 감정이 있어서 이렇게 생생하게 떠오르나 봐. 성폭력 피해자들의 기억이 그토록 또렷한 것도 두려움과 분노의 감정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동안은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않았어. 불쾌한 경험이고, 지금 와서 어쩔 수 없는 이야기고, 듣고 싶은 이야기도 아닐 거고... 그래도 난 뉴스를 보다 그때가 떠올랐고, 떠올라서 말할 수 있었어. 어쩌면 그 일이 내가 말할 수 있을 정도겠지. 그 정도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어. 그러니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특히 성추행이나 성폭행에 관한 이야기는. 그러나 말하지 않을 뿐이지 여자라면 이런 이야기 한두 개쯤 없는 사람이 없을 거야.
『문학동네』(2018, 여름호)에 황정은 작가가 쓴 “痕”(흔)이라는 글이 있어. 거기서 사촌에게 당한 성폭력 사건을 이야기해. 사실 그 글은 록산 게이의 『헝거』(사이행성, 2018)가 부제로 적혀 있었지만 그 책에 관한 내용은 거의 없었어. 그러나 그 책을 읽었기 때문에 자신의 이야기를 쓸 수 있었다고 말해. 그리고 아주 작게 각주에 ‘그리고 동생들이 이 글을 쓰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면’ 이야기를 쓸 수 없었을 거라고도 해. 시간이 흘러도 말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시간이 흘러도 얼마나 생생한지, 가해자를 잡아서 어떻게 할 것도 아닌데 이렇게 하기 힘든 말을 왜 하는 건지, 생각해.
말했을 때 말하기 전보다 더 힘든 시간을 보낼 가능성이 커 보이면 우리는 입을 다물지. 입을 다물면 겉으로는 없었던 일이 되고, 안으로는 흐르지 못하는 물처럼 점점 무거워지지. 미투의 부작용이 있다고 하지만 자기 이야기를 내놓은 사람들 덕분에 가해인지도 모르고 가해했던, 가해인지 알면서 가해했던,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위축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생각해.
내 가슴을 만지고 간 그놈은 어떻게 살까? 곰탕집 성추행 사건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술을 마셔서, 너무 많이 그런 짓을 해서 기억도 못할까? 어쩌면 내가 마음으로 그놈 뒤통수를 너무 많이 때려서 그놈 머리가 ET처럼 변하고 있을지도.
괴물
_최영미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30년 선배를 들이박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 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이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최영미, 『다시 오지 않는 것들』(이미,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