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와 파도와

 

 

남편과 아이들이 부산에 가고, 나만 집에 있어. 오랜만에 혼자 있어서 네게 말을 거는데, 자판을 칠 때마다 손가락이 약간 아파. 약한 몸살 같은 느낌이야.

 

2주 전에 큰애 반에서 유행한 독감이 우리 집으로 옮겨 왔어. 큰애와 남편과 내가 모두 독감에 걸렸어. 아이와 남편은 사흘 지나고 열이 떨어졌는데 나는 아직도 열이 있어. 해열진통제를 먹지 않으면 열이 올라. 할 수 없이 다시 독감 검사를 하고, 폐 사진을 찍었는데 괜찮대.

 

괜찮다는데 어젯밤에도 열이 올라 오늘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혹시 외국에 다녀오지 않았는지 물어. 코로나19가 유행하니까 그러나 봐. 확실히 A형 독감에 걸렸다니까 주말에 약을 먹고, 월요일에 다시 검사하자고 하네. 보름이 지났는데 독감 첫날처럼 오한이 왔다 갔다 해.

 

예전 같으면 우울했을 텐데 약 때문인지 잠도 많이 오고, 나른한 게 좀 멍청해진 느낌이지, 우울하진 않아. 그냥 그럭저럭 살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 아프면 어차피 하지도 못하는 것들인데 천천히 하지 뭐, 하는 그런 생각.

 

아프면서 유튜브로 예능 프로를 봤어. 보다가 생각 없이 웃기도 하고. 예전 같으면 시간 낭비라고, 보고 나서 후회했을 텐데 지금은 이것도 괜찮네, 싶어. 얼마나 대단하게 살겠다고 매일 할 일을 정해 놓고, 안 하면 불안했을까.

 

약 먹으니 좀 나은지 집 더러운 게 보여서 오랜만에 걸레질했어. 그동안 로봇청소기만 돌렸거든. 얼마나 더러운지 청소기는 청소를 안 했나 싶을 정도야. 그거라도 하고 나니 마음이 좀 개운해. 그저 웃기는 이야기를 보고, 청소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괜찮아. 조금 피로할 뿐.

 

 

 

피로와 파도와

_이제니

 

 

피로와 파도와 피로와 파도와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바다를 향해 열리는 창문이 있다라고 쓴다

백지를 낭비하는 사람의 연약한 감정이 밀려온다

 

피로와 파도와 피로와 파도와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한적한 한담의 한담 없는 밀물 속에

오늘의 밀물과 밀물과 밀물이

어제의 밀물과 밀물과 밀물로 번져갈 때

 

물고기들은 목적 없이 잠들어 있다

물결을 신은 여행자가 되고 싶었다

 

스치듯 지나간 것들이 있다라고 쓴다

눈물과 허기와 졸음과 거울과 종이와 경탄과

그리움과 정적과 울음과 온기와 구름과 침묵 가까이

 

소리내 말하지 못한 문장을 공책에 백 번 적는다

씌어진 문장이 쓰려던 문장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피로와 파도와 피로와 파도와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이제니, 아마도 아프리카(창비, 2010)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02-15 2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15 2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20-02-16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누아님, 독감 걸리셨군요. 빨리 나으시고, 좋아지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이누아 2020-02-17 17:58   좋아요 1 | URL
예. 고맙습니다. 남편이 아이들 데리고 놀러 가줘서 주말에 푹 쉬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