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마시면서

 

 

요즘은 아이들 봄 방학이야. 아침부터 장난인 듯 싸움인 듯 부딪히는 소리가 칠판 긁는 소리처럼 듣기 싫어서 오후에 가려던 병원을 오전에 다녀왔어. 약을 먹고 잠을 잤어. 잠에서 덜 깬 것처럼 멍하게 있다 자판을 두드리니 손끝에 닿는 딱딱한 느낌이 깨어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 아이들은 모두 학원에 가고, 아침에 잠시 날리던 눈은 흔적도 없고, 회색 구름 사이 태양은 창을 뚫고 나를 쏘아보고 있어. 내가 쳐다보지 않으면 해가 쏘아볼 일도 없겠지만.

 

해열진통제를 계속 먹고 있어서 열이 온전히 내린 건지 알 수 없지만 의사는 계속 약을 먹으라고 해. 다행히 폐렴도 아니고, 낫고 있는 거라는데 기침이 그치지 않아. 따뜻한 물도 너무 많이 마셔서 이제 입에 머금고 있어. 그러면 기침이 덜 나거든. 겨우 감기일 뿐, 어쨌든 낫겠지만.

 

내일은 어머님 제사야. 평소에 큰집이 경기도라 아이들 학기 중에는 제사에 못 갈 때가 많아. 어머님 제사는 봄 방학이고, 제사 중에 큰 제사이기도 해서 꼭 가는 편인데 이번엔 남편과 아이들만 보내야 할 것 같아. 제사 때까지는 다 나을 줄 알았는데... 제때 할 일을 못 하는 느낌이야. 이래저래 불편해.

 

언젠가 큰애가 자기가 하나님과 부처님께 다 기도해 봤는데 기도가 안 이루어지더래. 다 거짓말 같다고. 그 이야기를 듣고 기도한다는 건 원하는 걸 얻으려는 게 아니고, 원하는 걸 얻지 못했을 때 평온을 잃지 않으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갑자기 그게 생각이 나네. 짧게라도 명상하고 경전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좀 낫긴 나았나 보다. 뭐든 하고 싶은 게 생긴 거 보니.

 

밖을 보니 해는 건물 뒤로 넘어가서 보이지 않아. 시간은 흐르고, 차가운 바람도 부드러워지겠지. 기슭아, 네게 이야기하다 보니 내게도 봄이 온다는 걸 새삼 깨닫게 돼.

 

 

 

투병일기

_변희수

 

 

의사는 물을 많이 마시라는 처방을 내려주었다 물이 흘러갈 수 있는 곳이라면 안심이 되었다

 

아가미처럼 부푼 턱뼈 사이로 밀린 비가 내렸고 누가 사월이라고 말했다

풀이 자랐고 나무가 자랐고 꽃이 피었다 물오른 곳마다 흰 가운을 걸친 새들이 바쁘게 날아다녔다 바람이 불면 짙어진 풀빛 아래 누렇게 뜬 각질들이 버리고 간 처방전처럼 나부꼈다 호전好轉적인 풍경이었다

 

물을 마시면서 그리운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건조하던 이름들이 반짝거렸다 젖다가 스미다가 천천히 번지면, 흡수라는 말이 떠올라 마음이 부쩍 자란 기분이 되었다

 

넘치면 다시 울음이 될 거라고 했지만 목구멍으로 물 넘어가는 소리가 전생의 음악소리처럼 투명하고 맑아서

 

당신이 오면 양호한 사람처럼 웃었다

 

-변희수, 아무것도 아닌, 모든(서정시학,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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