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은 저렇게 아프고

 

 

기슭아, 요즘은 아이들 방학이야. 방학 이야기 나누려고 앉았는데 선배 생각이 자꾸 나. 우리 과 선배지만 너는 잘 모를 거야. 네가 1학년 때 선배는 4학년이었거나 대학원생이었을 테니까. 선배는 캣맘이고, 교수야. 선배를 생각하면 이 두 가지가 떠올라. 엄마고, 선생님이지. 성실해. 고양이에게도, 공부에도 한결같아. 20, 30년을.

 

내가 잠시 남경에 있을 때 선배는 그곳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어. 우리는 간혹 만나 맥주를 마시곤 했는데 그때 선배가 그랬어. 한국에 있을 때는 창문 없는 방에서 공부하는 느낌이었는데 이제 좀 알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창이 하나 생긴 것 같다고. 학위를 따고 한국에 와서 다시 만났을 때 그러더라. 공부하는 데 자유가 생긴 것 같다고, 공부가 재미있다고.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가 10년은 더 된 것 같아. 선배가 공부한 지 20년 정도 되었을 때네. 이제 30년이 되었네.

 

선배가 캣맘이 된 건 그러려고 해서 그런 게 아니었대. 우연히 길고양이에게 간식을 줬는데 그 고양이 가족이 선배 집을 찾아오면서부터였다고 해. 그 인연으로 한 마을의 고양이를 먹이고, 중성화 수술을 시키고, 위험에 빠진 고양이를 데려다 키우고, 고양이를 위해 민원을 넣었어. 혼자서 그렇게 했어. 혼자서 고양이에 대해 알아가고, 고양이 전문가가 되었어.

 

언젠가 내가 동네 길고양이 이야기를 했더니 선배가 이 길에 발을 들이지 마라. 나는 이번 생은 어쩔 수 없어. 걔들 책임져야 해.”라고 말하는 걸 보면 선배도 많이 힘들구나, 싶어. 사료비, 수술비, 치료비까지 경제적인 부분도 그렇지만 고양이에게 정성을 기울이는 시간, 그리고 고양이와 관련된 사람들과의 관계까지 생각하면 정말 어떻게 한 인간이 대가 없이 이렇게 헌신할 수 있나, 싶을 정도야.

 

아니 대가가 없는 건 아니지. 사랑하는 것.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게 대가가 아닐까. 고양이를 위해 매일(!!!) 밤에 가방에 캔을 넣고 골목을 걷는다고 해. 2시간이라고 했던가. 그 생활도 20년 가까이 되다 보면 도가 생겨나는지 고양이 밥을 주며 걷는 동안 논문 쓸 때 막혔던 부분이 해소 되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대. 고양이에게 밥을 주며 학문을 연구한다는 거, 왠지 시적이야.

 

저번 주에 선배를 만났어. 선배 아버지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오래 앓다 돌아가신 후 어머니도 교통사고로 고생하시다 요양원에 계시게 된 이야기, 공부와 생활에서 겪는 동료와의 갈등, 고양이와 관련된 크고 작은 소란과 아픈 고양이 이야기. 이야기 내용은 슬프고 답답하잖아. 그런데 나는 대화 도중 몇 번이나 소리 내서 웃었어. 선배는 어떤 이야기도 유쾌하게 하는 능력이 있거든.

 

예전에 우울하면 간혹 선배에게 전화했어. 내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냥 다른 이야기를 하는데 통화 내용이 무엇이든 나는 실컷 웃었어. 선배를 만나고 와서 계속 선배 생각이 나. 그 이야기들이 맴돌고, 유쾌한 웃음이 떠오르고. 그 부조화가 가져오는 여운 때문에 선배 이야기를 네게 하고 싶었어.

 

공부할 때는 공부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공부하고, 고양이를 대할 때는 고양이 외에 아무것도 없는 듯이 대해. 그 성실함이, 집중이, 이해가 속세에 푹 빠져 있는데도 속인이 아닌 듯이 느껴져. 그래서 선배가 슬픈 일도 재미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건가 싶기도 하고.

 

 

 

묘생2

_이용한

 

 

도망칠 것도 없이

이번 생은 망했다

그러니 여기서 망가진 꼬리나 쓰다듬어야지

골목은 저렇게 아프고

아프지 않은 것들은 돌아앉았으니

지붕을 베고 힘껏 잠들어야지

당신이 떠난 봄날에

죽은듯이 누워서

사랑한다는 문장이나 핥아야지 

 

-이용한, 낮에는 낮잠 밤에는 산책(문학동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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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0-01-17 08: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누아님의 글을 읽다 보니 문득 작년...(해봐야 지난 달이었지만요~^^)
친구부부와 또 친구 한 명을 함께 만나 저녁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눴던 장면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누군가가 어린시절 좀 못먹고 컸었다고 화두를 꺼내자 서로 경쟁하듯 자신이 불쌍하게 자랐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 중 고아로 자란 친구의 신랑 이야기에 우린 빵 터져버려 눈물을 찔끔 흘리면서 웃었는데 속마음은 좀 아려오더군요.
참 아픈 이야기를 유쾌하게 전달해주는 사람들을 보면 그동안의 내공이 그 사람의 인격을 만든 원천이 되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누아님의 선배 이야기에 푹 빠져 잘 읽고 갑니다....이누아님도 유쾌한 하루가 되시길요^^

이누아 2020-01-17 14:28   좋아요 0 | URL
영화 노팅힐에 불행 배틀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님 얘기 들으니까 그 장면이 떠오르네요. 거기서도 불행을 얘기하는데도 무척 유쾌한 분위기예요. 내용을 떠나 사람을 유쾌하게 하는 능력은 정말 훌륭한 능력이에요. 님 말씀처럼 내공도 있고 센스도 있고. 올 한 해 책읽는나무님 곁에 유쾌한 사람과 유쾌한 시간들이 함께했으면 좋겠어요. 이미 그런 것 같기도.^^

프레이야 2020-01-17 16: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양이시인 이용한 시인의 묘생과 인생 이야기를 좋아해요. 시집 업어갑니다. 고양이랑 동행하는 삶의 이야기를 보면 그 진심이 느껴지는 시인이라 참 좋더군요. 이누아님 리뷰 잘 읽었어요 ^^

이누아 2020-03-02 08:31   좋아요 0 | URL
이용한 시인의 묘생2에는 달관의 느낌이 있어요. 실제로 고양이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기도 해요. 저도 프레이야님 글 잘 읽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