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에 따른 수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배수아 옮김 / 봄날의책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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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얼거림이다. 나는 중얼거리고 있다. 6개월 간 청소부의 방이었던 공간에서, 내 집이면서 내 집이 아니었던 공간에서 중얼거리고 있다. 방을 정리하려고 들어갔지만 정리할 것이 없다. 하려고 했던 것이 사라진 시간에 옷장에서 바퀴벌레를 본다. 문을 닫아 바퀴벌레를 짜부라뜨린다. 나는 기쁨으로 불결해진다. 바퀴벌레의 몸에서 흰 내용물이 고름처럼 흘러나온다. 이것은 엄마의 젖 같다. 중립적 사랑을 생각한다. 바퀴벌레의 흰 덩어리를 입안에 넣을 수 있을까. 생각만으로 토한다. 포기한다. 포기는 계시다. 낮고 겸허해진다. 그리고 바퀴벌레의 질료를 입안에 넣는다. 마침내 내 껍질은 깨어졌고, 나는 한계가 없다. 내가 아니었으므로 나였다. 내가 하는 말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이렇게 이 글의 줄거리를 이해해도 될까? 혹은 오해해도 될까. 중얼거리지 말고 날 쳐다보고 또박또박 말해 봐요. 작자는 관심이 없다. 초인적인 무관심. 그 무관심 속에서 책을 읽는다. 한 문단을 읽으면서 이게 무슨 말이지? 했다가 다음 문단이 맘에 들어 포스트잇을 붙이고 있다. 다 읽을 수 있을까, 하면서 다 읽었다. 다 읽었지만 다 읽었다고 해도 될까. 책은 알록달록 포스트잇으로 뒤덮여 있다. 너무 많은 표식은 없는 것과 같다. 포스트잇이 무의미할 정도로 이 책이 좋았나. 책을 덮고 한 시간을 가만히 있었다. 이런 책이 좋다. 이해를 지연시키는 책. 무언가를 보고 나면 이해하고자 한다. 약간씩의 이해가 책장을 넘기게 한다. 그러나 다 이해하지 못한 느낌. 그 미완의 기분으로 나는 계속해서 읽게 된다. 읽고 있는 중이다. 읽지 않는 순간에도.

 

옮긴이 배수아 작가는 만약 어떤 독자가 이 책을 읽고 어떤 종류의 고양을 느꼈다면, 그는 이것을 읽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고, 읽지 않을 것이고, 영원히 읽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페이지를 펼칠 때마다 어떤 종류의 고양을 느낀다. 어쩌면 그 고양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바퀴벌레를, 바퀴벌레의 고름 같은 흰 덩이를 보고 있는 사람의 중얼거림을, 방에 혼자 앉아 듣고 있는 것뿐이다. 그뿐이라도 이 책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읽어야 한다. 비록 읽지 못하더라고 그런 장소가 필요하다. 내 집이면서 내 집이 아닌 공간이. 내 생각이면서 내 생각이 아닌 생각이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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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12-27 12: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독한 거 읽고 계시네요ㅋㅋㅋ지독했어요 진짜...다 읽어도 뭔말인지 몰라...

이누아 2020-12-27 12:56   좋아요 2 | URL
다 읽었어요. 다 읽었다고 말할 수 없는 책 같기도 하고, 제 마음속에서 계속 읽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열반님 서재에서 보고 따라 읽은 거예요. 저는 정말 좋았어요. 덕분에 읽을 수 있었어요. 감사해요. 저는 약간 혼란스러운 책이 좋나 봐요. 이 작가의 다른 책도 읽어 볼까 해요.

*아까 댓글 달았는데 갑자기 이전 페이지로 가면서 사라져서 다시 썼어요.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일까요. 이제 없는 글인데. 이제 없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걸까요. 이 책을 읽으면 이런 종류의 중얼거림이 일어나요.^^

반유행열반인 2020-12-27 12:58   좋아요 2 | URL
네 저는 단편 쪽이 그나마 더 나았어요 ㅎㅎ아주 가끔은 서사가 잡혀서요ㅋㅋㅋ그러게요 말이 무슨 소용이겠어요. 그래도 눈으로 글자 좇았으니 바퀴벌레 알만큼 내장만큼이라도 어디 모를 곳에 박히지 않았을까요 ㅎㅎㅎ

이누아 2020-12-27 13:26   좋아요 2 | URL
허기가 불러서 다녀 왔어요. 먹어도 먹어도 허기는 반드시 찾아 와요. 그렇다고 안 먹으면 죽겠죠. 먹은 것들은 몸으로 가든 몸 밖으로 가든 사라져요. 그 사라지는 것들로 나는 살아가고 있어요.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바퀴벌레나 나나 바퀴벌레의 흰 고름이나 엄마의 젖이나, 까지 닿게 될까요. 중얼중얼. 계속 흘러나와요. 흘러가요. 근데 이런 이야기 하다가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군요. 서사가 잘 안 잡히는 글을 읽으면 읽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계속 서사를 채우거나 구성하게 되지 않나요? 그런 면에서 서사가 잘 안 잡히는 책이 소설가가 읽어야 할 책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열반인님의 소설을 읽고 싶어요. 바퀴벌레가 나오든, 안 나오든.^^

반유행열반인 2020-12-27 13:29   좋아요 2 | URL
헤헤 언젠가 이누아 님께 닿을 수 있을 만큼 열심히 뻗어 보겠습니다. 소설 속 인물이야 밥 안 먹어도 안 죽고 바퀴벌레 내장 집어먹어도 살지만 우리는 밥을 먹고 힘내야죠 ㅋㅋㅋ밥도 먹고 책도 먹고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