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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기 힘들어진 세상이다.
삶은 살아가는 것(life, To live)이 아니라 살아 남아야 하는 것(survival, To survive)이 되어 버렸다.

살아남는 것은 필연적으로 경쟁일 수 밖에 없다.
모두 원하지만, 모두 성취할 수 없는 것엔 항상 경쟁이 유발된다.
 
그러므로 경쟁과 생존은 불가분이다. 

살아 남아야 하는 세상.

경쟁할 수 밖에 없는 세상.

나의 경쟁력은 무엇일까? 

... 

생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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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하지 않던가. 
지금까지 수많은 갈림길을 만났고 난 선택했다. 오로지 하나의 길을.
그런데 요즘 여러개의 길을 가고 싶다는 말도 안되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어차피 그 삶도 하나의 삶인 것을...

포기할 건 포기하자.

"선택과 집중"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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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春"
이 말을 좋아한다.
'春'.
이름에 들어가면 한없이 촌스러워지는 이 말이
'靑'과 만나 이런 느낌을 줄 수 있다니
감격스러울 따름이다.

예전에 '청춘'이란 라면이 있었다.
언제나 청춘일 수밖에 없는 까치와 엄지가 나왔던
당시엔 파격적이었던
광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 라면이 싫었다.
가격 대비 중량
면발의 탄성과 꼬임의 정도
스프의 염분
다시마의 크기
썰어진 양념의 종류와는
하등의 관계 없이.

'청춘'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이는 그 말이
고작 인스턴트 식품 따위의 이름으로 불린다는 사실이 너무 싫었다.

'너구리'가 그랬다.

'너구리'하면 아직까지 라면이 떠오르는 난,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가 아니었다면 아직까지
너구리는 항상 '오동통'하다고 믿었을 것이다.

제2의 '너구리'가 '청춘'이 아니길
'청춘'이 '너구리'의 전철을 밟지 않길
그저 원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구멍가게 라면 진열대에서 얼쩡대는 사람과 마주칠 때면
묻지 않았음에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음에도
이렇게 말했다.
'청춘'의 면발은 고무줄 같고
스프에선 역한 냄새가 난다고.

당시 세상은 지금처럼 흉흉하지 않았고
인생을, 아니 적어도 라면만은 달관한 듯한
학생의 읊조림을
그들은 쉽게 외면할 수 없었다.

이것은 '하얀 거짓말'이다.

아름다운 '우리말'이
튀긴 밀가루와 빨간 소금물로 의미부여(기호학적으로 '기표'와 '기의'의 잘못된 만남)되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의 작은 노력으로
티비에선 더이상 까치가 나오지 않았고
가게 진열대엔 서서히 '청춘'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세상을 바꾸는 건 작은 노력이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청춘 사업'이란 말도 좋다.
'청춘'이란 말이
'사업'이라는
말그대로 비지니스적인 말과
이토록 어울릴 수 있단 말인가!

이 복합 명사의 궁합은
'청춘'의 이복형제인 '젊음'이 대신하므로써
느끼게 되는 이질화의 절대값 이상이다.

불행히도
내 청춘사업은 몇년째 극심한 불황속에 있다.
인정하긴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

사업을, 그보다 먼저 청춘을 가능하게 해주셨던 초기 투자자(부모님)는
이미 리턴(returns)을 포기한 상태고
한 때 함께 사업을 한
또는, 앞으로 그렇게 하자던
사람들은 이미 대박(혹은 쪽박)을 터뜨렸다.

하지만 난
가만히 서서 눈을 감는다.
옷깃을 스쳐가는 시간의 결을 느끼며.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푸른 봄'을 기다린다.
여전히 '푸른 봄'을 가슴에 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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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2-28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아노님의 글을 오랜만에 만나 더 반갑습니다.
청춘..좋지요.
님이나 저나 지금 청춘을 관통하고 있는거 아닙니꽈!!!
청춘은 봄이요, 봄은 꽃나라...노래를 부릅시다...
꽃이 피려다가 숨을 것 같은 날씨입니다. 왤케 춥습니까!
그래도 푸른 봄...가슴속에 피어나겠죠?^^

털짱 2006-02-28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행히도 내 청춘사업은 몇년째 극심한 불황속에 있다"
아아, 너무 공감가는 멋진 표현!!!!
추천 한방입니다.^^

털짱 2006-08-03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읽어봐도 너무 멋진 글입니다.... 왜 더 안쓰세요?
 

그러니까 어떤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뭔가를 배출하지 않으면, 진정한 내 모습이던 위선적인 내 모습이던간에 표출하지 않으면 터져버려 내 몸둥아리가 산산이 부서질 것만 같은 그런 심정이다. 감정에 얽매여 글을 쓴다는 건 자칫 실수나 과장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렇다고 표현하지 않는다면, 실수도 없겠지만 결과도 없고, 과장도 없겠지만 사실도 없다는 것 또한 잘 안다. 그러기에 난 표현하고, 그런 난 감정적이다. 글을 읽는 사람에게 상대방의 심리 상태까지 이해해주기 바라는 것은, 20점짜리 시험지를 쥔 어머니에게 자식의 심정을 헤아려 달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미 언어는 문자로 전해졌고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겐 문자 자체의 애매함과 모호함정도의 해석의 폭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글은 무섭고 잔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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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짱 2006-02-27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은 글을 쓰는 사람의 상황과 글을 읽는 사람의 상황의 조합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직까지 싱글('아직'과 '싱글'이 함께 사용되어 발생되는 사회적 용인의 문제는 차치하자)인 난, 각종 이벤트에 초대를 받는 수혜자로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이런 사회(학)적 지위가 언제까지 지속될는지 알 수 없기에 주어진 순간순간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려고 안간힘을 다한다. '진인사 대천명'을 가슴 속에 되뇌이며 말이다.

어제도 난 최선을 다했다. 자세는 흩트러짐 없었고, 목소리는 낮되 거만하지 않았으며, 시선처리의 형평성을 유지했고, 몸짓은 적절하게 과장됨이 없었다. 적당한 유머로 분위기는 애애했고, 상대방의 불명확한 의사 전달을 적절한 paraphrasing으로 부드럽게 연결시키는 여유 또한 잃지 않았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적당히 낮은 조도는 생면부지의 어색함을 가려주기에 충분했고, 룸 안에 충만한 샹송은 의미를 파악하려는 본능적 욕구마저 근접하지 못하게 하여 우리 모두를 서로에게 충실하게 했다.

그녀들의 직업은 방송댄스 선생님이었다. 방송댄스도 정규교육과정이 있냐는 바람빠지는 질문에 불편한 기색없이 친절히 설명해주는 그녀들을 보면서 난 문득 '프로페셔널의 조건'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일에 대한 열정, 내겐 흐릿해져 윤곽조차 희미해진 말이 그녀와의 대화속엔 넘쳐났다.

가벼운 와인과 서로의 눈빛으로 취해버린 우린 최고의 시설을 자랑한다는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멍석은 깔려졌다. 그녀들의 현란한 가무(특히 '무')에 비하면, 최고의 시설을 자랑한다는 노래방 조명은, 수학여행에서의 급조된 스위치 on/off 조명마냥 조악하기 그지 없었다.

너무나 빨리 가버린 시간이었다. 아직도 그 웨이브가 눈앞에 아른아른한데 말이다.

'댄스'하면 하루끼의 '댄스댄스댄스'가 생각나는 지금의 나도

 "댄스"......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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