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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 입문 - 프랑스어권의 비트겐슈타인 입문 필독서
롤라 유네스 지음, 이영철 옮김 / 21세기문화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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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시작 전, 교실은 어제 있었던 일들을 경쟁적으로 이야기하려는 학생들의 무리 속 어지러운 소음들로 가득하다. 난 담임 선생님이 들어와 교탁 뒤에 있다는 것을, 친구가 볼펜으로 옆구리를 찌르는 바람에 짜증스럽게 돌아보다가 알아차렸다. 수학을 가르치는 담임 선생님은 당구채의 앞부분을 잘 잘라내 사포로 맨들맨들하게 갈은 길쭉하고 앞쪽으로 오면서 좁아지는 모양의 원뿔형 막대기로 교탁의 오른쪽 옆면을 때리며 말한다.
˝자. 조용! 조용! 오늘 새로운 친구가 전학 왔다. 환경이 낯설어서 어색한 게 많을 거야. 주변에서 잘 도와주고. 자기 소개하고 저기 창가 끝 쪽 빈자리에 가서 앉아.˝
담임은 원뿔형 막대기로 창가 자리 마지막 열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사유가 남긴 흔적이 새겨진 높고 평평한 이마, 경계선 위에 있는 것 마저도 분명하게 규정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뾰족한 턱, 세상에 있는 모든 모순과 혼동을 단호하게 베어버릴 것 같은 콧날, 필요하지 않은 말은 하지 않겠다는 침묵의 입술, 그리고 그 다문 입을 대신해 뭔가를 말하려는 듯한 우발적 눈빛을 하고 말한다.

˝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야.˝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어 보이는 소개를 하고 그는 덤덤히 자리로 들어갔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기도 했지만, 왁자지껄하고 지리멸렬한 분위기 속에서 누구 한 명 들어오고 나가는 일은 어떤 이의 이목도 집중시키지 못했다. 그냥 조회가 끝났다는 사태로 인식될 뿐이었다.

난 짝이 생겼다. 지금까지 내 옆자리에 앉았던 아이들은 모두 나의 짝이라고 불렸지만, 그가 전학 온 후로 나는 곧 비트겐슈타인의 짝이 되었다.그는 그런 존재였다.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존재. 우리가 모르는 은하계 행성에서 태어나, 거대한 음모 또는 막대한 실수로, 생존할 수 있는 아주 필수적인 지식만 가진 채 지구로 던져진 존재다.

그는 오기 전 항공기를 공부했다며 우리 철학과 아이들의 수많은 논쟁을 이렇게 비유했다. 항공기라는 것을 ‘공중에 떠 이동하는 물체’라는 것에 집중해서 대상화하여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가 기본적으로, 선행적으로 이해해야 할 대상은 ‘대기‘라는 것이라고. 항공기가 존재하고 다닐 수 있게 하는 그 특질, 항공기를 항공기로 불리게 하고 만들어질 수 있게 하는 그 본질에 대한 이해가 먼저라고. 그러면서 그는 우리 논쟁이 그 본질(언어)에 대한 오해와 불명료함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봄학기 때 그는 언어를 세계를 반영하는 논리적 구조로 바라본다. 그 과정에서 ‘언어 그림 이론‘이 탄생했는데, 언어가 현실을 그림으로 묘사한다는 바탕 아래, 세계를 사태의 총합으로 그리고 사태는 사물 간의 관계로 구성된다고 설명한다. 그는 그의 유일한 짝인 내게 친절하게, 또박또박 설명했지만, 친절하게 또박또박 인쇄된 미적분 문제가 사칙연산으로 바뀌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논리철학 논고>를 통해 자신의 이론을 선보인다. 훗날 이 시기를 ‘전기 비트겐슈타인‘이라 칭한다.)

그런 그가 가을학기(두 학기의 간격을 시간으로 환산해 보면 약 30년쯤 차이가 난다)가 되자 언어를 ‘맥락’과 ‘쓰임’이 중요한 실천적 행위로 바라본다. 여기에서는 ‘언어놀이‘, ‘가족 유사성‘을 얘기한 그는, 쥐어뜯은 내 머리를 기계처럼 진정시키며 말했다. 언어는 언어가 쓰여 질 때 비로소 그 의미가 드러나고, 다양한 놀이(games)에서 서로 다른 규칙과 맥락 하에 사용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가족 유사성은 내 코가 이모를 닮고 내 성격이 할아버지와 비슷한 것처럼, 공통된 본질을 가지기 보다는 여러 가지 서로 겹치는 유사성을 통해서 연관된다고. 그는 알 수 없지만 내게는 일목요연하게 보이는 설명을 숨쉬듯 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 시기로 그의 이론은 <철학 탐구>에 정리되어 있다.)

...

2025년 9월,
대한민국에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어쩌면 껍데기만 남은 교리 같은 그의 말 앞에서,
다행히 껍데기라도 남은 그 사상의 편린을 어루만지며, “침묵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분연히 외친다.
우리는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말해야 하는 것에.

*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는 말이 참(true) 명제일 경우, 그 대우 명제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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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그먼, 좀비와 싸우다 - 나쁜 신념과 정책은 왜 이토록 끈질기게 살아남는가
폴 크루그먼 지음, 김진원 옮김 / 부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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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정치경제'라는 과목이 있었습니다. 당시엔 왜 정치와 경제를 한권의 교과서에 묶어 가르치는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사실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지금은 이름도 잊힌, '허벅지'라고 불리던 정치경제 선생님만 희미하게 떠오를 뿐입니다. 허벅지가 너무 두꺼워 '허벅지'가 된 그는, 라스트 네임을 떼고 '벅지'로 불리다가 그 조차도 귀찮아져, '벅'을 경유해 '뻑'으로 불리게 되죠. 
그 때 정치와 경제가 종이 한장 만큼 매우 가깝다는 걸 느꼈습니다. 정작 정치도, 경제도 모르는데 그 둘이 친하다는 것을 먼저 알아버린 거죠. 

민주주의 국가는 국민이 후보자의 정책 방향성, 가치관 등을 판단하여 선거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대표자를 선출합니다. 선출된 대표자는 그가 내건 공약과 가치관을 실현하기 위해 정책을 통해 이를 현실에 구현하죠.  
예산이 필요한 정책이 있고 그렇지 않은 정책이 있지만 제도나 환경을 바꾸기 위해서는 예산이 필요하고, 또 그렇게 시행된 정책은 어떻게든 경제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경제 또한 대표자나 정책 결정권자가 어떤 가치관을 가졌느냐에 따라 좌우됩니다. 미세조정이 힘들고 파급효과를 예상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만큼 충분히 신중해야 하지만 너무 신중한 나머지 '골든 타임'을 놓쳐버리면 막대한 손실과 희생이 뒤따를 수 있으므로, 무턱대고 신중만이 능사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저자인 폴 크루그먼은 책에서 '테크노크라트(technocrat)*'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노력한다는 말을 합니다. 
(* 테크노크라트는 정책입안자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정책과 관련된 냉철한 지식을 제공하는 사람)
그렇기 때문에 그의 연구는 '실증 경제학(positive economics)', 즉 세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분석하는 것이지, 세상이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를 주장하는 '규범 경제학(normative economics)'은 아닙니다. 
결국 현상을 사실 대로 기술하고 가치(정치) 중립적으로 판단하려 하는 게 그의 연구의 목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완벽한 중립이 존재할까요? 이건 이론적인 것이지 실재하는 않습니다. 현실 세계에선 완벽한 직선도 완벽한 원도 없으니까요. 

저자는, 정치화는 왜 그것이 계층의 이해와 정확히 맞아떨어지지 않는 영역까지 확장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습니다. 
사실 저도 늘 궁금했던 부분이기도 하고요. 물론 경제적 혜택(사회보장제도, 공공의료제도, 이전 소득 등)이 모든 정치적 선택의 최우선 기준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현실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므로 차순위로 넘어 가거나 아예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제가 너무 세속적인 건가요?). 그럼 왜일까요?

저자는 논쟁적인 이슈(부자&기업 감세, 무역 전쟁, 불평등 심화에 대한 부정, 극단적 보수주의, 보편적 의료보험 등 '좀비(zombies)'라고 칭하는 것들)에 대해서 그들(트럼프, 부시, 공화당 등)이 어떤 논리와 프레임을 가지고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전환시키는지 설명합니다. 

내용들을 보면 우리나라와 상당히 유사한 사회 이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언론의 중립 문제**에 대해서 잠시 얘기해보겠습니다. 
(** 기계적 중립주의(bothsidesism)에 대해서 "한쪽이 분명 거짓말을 하고 있음에도 논쟁을 벌이는 양쪽을 똑같이 대하는 거짓 등가성(false equivalence) 같은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 p. 282)

언론과 보수주의 정치세력의 밀착 구조는 언론의 기원, 자본주의 발전, 계급 권력과 관련이 깊습니다. 
근대국가 형성과 함께 시작된 언론은, 시민혁명과 공화주의 확산과 함께 정치적 담론과 여론 형성의 장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하지만, 부르주아 계급의 입장을 반영하는 도구로 쓰였다는 점에서, 언론은 태생적으로 '중산층과 자본의 언어'로의 역할을 했던 겁니다. 언론은 자본과 광고에 종속된 위치로 전락하게 된 것도 이런 출생의 이유 때문이었던 것이죠. 즉, 언론은 자본에 비판적일 수 없고, 자본의 정치적 파트너인 보수정당에도 우호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책 <폴 크루그먼, 좀비와 싸우다(Arguing with Zombies)>는 위에서 열거한 이슈 외에도 다양한 사회 제도과 정책에 대해서 경제적인 관점을 곁들여 설명합니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이슈에 대해서 논쟁적이기에 이슈를 환기시키는 의미에서도 좋고, 중간중간 나오는 경제학적 이론과 지식을 배울 수 있어서 재밌습니다. 

끝으로 우리나라와 흡사한 이 책의 내용을 몇 개 그대로 소개하며, 두서없은 글을 마치겠습니다. 

- 공화당은 그저 사악한 이념만 쫓는 게 아니다. 현재로서는 사악한 존재 그 자체다. - p.221
- 트럼프는 일탈이 아니다. 그는 공화당이 지난 수년 동안 걸어온 길의 정점이다. - p.225
- 운동보수주의가 미국의 국민 대다수를 희생양 삼아, 부유한 특권층에 이로운 정책을 펴 나가면서도, 선거에 이기려 백인들의 적의에 기댈 때, 어떻게 백인 민족주의가 대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p.234
- 반대자들을 정당한 지위에서 물러나게 하고 자신들의 행동에 용기 있게 비판하는 사람들을 멸시할뿐더러 처벌까지 할 빌미를 제공하는 수단이 된다. - p.238
- 그(트럼프)는 공무원들이 미국 국민이 아니라 자기 개인에게 충성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선거가 끝나고 2년이나 흘렀지만 정적을 위협하고 응징하며 여전히 "힐러리를 구속하라"라고 앞장서 구호를 외친다. 
- 노동자 측은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어떠한 대표도 전혀 갖지 못했다. ; 고용노동부 장관 김문수 - p.245
- 브랫 캐버노의 연방대법관 지명, 그는 극명하게 극단적인 반노동을 표방하며 주류에서도 한참 오른쪽... ; 800원 판사 오석준 대법관 - p.246

이런 워딩만 보면, 폴 크루그먼이 자신을 테크노크라트(technocrat)라고 한 주장을 냉큼 인정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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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읽기 세창명저산책 99
김성도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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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중학교 2학년의 태도(무차별적인 반항심과 무조건적인 비타협성)를 가진 외계 청소년이 우주 어느 행성에서 무심코 주파수를 돌리다가 월드컵 중계 화면을 포착한다면, 그리고 그 외계인이 텔레파시로만 소통한다면, 그들의 시선은 축구라는 이 낯선 의례에서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이 외계인들은 소리를 감각하지 못한 채, 화면 위를 불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스물세 개(각 팀 11명 + 주심 1명)의 존재와 하나의 작은 구(球)체에 주목한다. 누군가는 패스 성공률에, 다른 누군가는 헤딩 횟수에, 또 다른 이는 볼 응시 시간이나 경기 전후 체중 변화에 의미를 부여한다. 수많은 관점과 데이터가 쏟아진다. 그러나 그들이 점차 축구라는 행위의 본질(수단으로써의 공, 구조로써의 규칙, 제한된 역할)을 깨닫는 순간, 이전까지 탐구했던 모든 정량적/정성적 지표는 본질을 포장한 일종의 랩핑(wrapping)이었음을 알게 된다.

레비스트로스는 <슬픈 열대>에서, 현상을 따라 눈에 띄는 이질성과 다양성에 집착하지 않고, 그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구조를 찾는다. 축구가 단순히 골이 골망을 흔드는 개수의 합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짜여진 규칙과 상징의 집합인 것처럼, 인류학 역시 표면 아래 숨은 체계와 패턴을 읽어내는 일로 패러다임을 전환한 자가 바로 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이다. 


실존주의 vs 구조주의

지금 진행되는 경기는 실존주의와 구조주의의 대결이다. 실존주의팀의 주장은 사르트르, 구조주의팀은 레비스트로스다. 존재가 본질을 앞선다”는 실존주의의 관점에서, 축구장의 선수는 아무런 미리 정해진 역할 없이, 순간순간의 선택으로 자신을 정의한다. 골키퍼가 갑자기 공격수가 되기로 선택할 수도 있고, 그 순간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롭다. 사르트르의 인간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투사된 존재'로서, 끝없이 자신을 초월하며 의미를 창조한다.

반면 레비스트로스에게 인간은 이미 주어진 구조 속에서 움직이는 존재다. 축구장의 흰 선, 골대의 크기, 오프사이드 규칙은 선수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고, 선수의 모든 자유로운 움직임은 실은 이 구조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가능하다. 인간의 언어, 친족 체계, 신화적 사고는 마치 DNA처럼 우리 의식 이전에 이미 코딩되어 있다. 우리가 선택한다고 믿는 것들조차 '구조의 변주'일 뿐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두 철학자는 서로를 완전히 적대시하지 않는다.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에서 사르트르를 위대한 철학자라고 인정하면서도, 그의 '역사 중심주의'를 비판한다. 구조주의자인 그에게 역사란 하나의 신화일 뿐이며, 사르트르가 말하는 '진보'나 '프로젝트'는 서구 중심적 착각이다.

사르트르 역시 레비스트로스를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구조주의가 제기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되, 인간의 실천이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축구장의 규칙도 결국 인간이 만든 것이며, 인간은 언제든 그 규칙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두 사상가의 진정한 차이는 시간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다. 사르트르에게 시간은 선형적이고 미래 지향적이다. 인간은 과거를 넘어서서 미래를 향해 자신을 투사한다. 반면 레비스트로스에게 시간은 순환적이고 신화적이다. 모든 변화는 결국 변주일 뿐이며, 인간은 영원회귀하는 구조의 패턴을 반복한다.


과학 vs 구조

레비스트로스는 의미와 관계가 과학 이성의 분석이나 인과적 추론만으로 모두 설명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p.190). 과학 지식, 과학 사상이란 예리한 칼끝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이라는 숫돌에 의해 쉼 없이 버려지지만, 본질의 상실을 대가로 치르기 때문이다(p.200). 그렇게 예리해져 많은 사실을 절단할수록 과학은 본질로부터 점차 멀어진다(p.201). 


그의 통찰은 현대 문명이 직면한 근본적 딜레마를 날카롭게 포착한다. 과학의 효용성을 부정하진 않지만, 과학이 현상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분류할수록, 역설적으로 본질로부터 점차 멀어진다는 구조적 모순을 지적한다. 세상을 분해해 설명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정확하고 유용하지만, 전체로서의 본질(의미와 관계성)은 이 과정에서 사라져버린다. 마치 시계를 분해해서 톱니바퀴 하나하나를 완벽히 이해했지만, 정작 시간이 흐른다는 것의 의미는 놓치는 것과 같다.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적 차원에서의 인식을 제안한다. 과학이 '예리한 칼끝'이라면, 구조적 사고는 '의미의 그물망'이라 할 수 있다. 칼은 정확히 자르지만 연결을 끊어버리고, 그물은 개별 요소들을 놓칠 수 있지만 전체적 관계를 포착한다.

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즉 개별 요소들이 아니라 관계와 패턴에 주목하는 사고방식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의미는 사물 자체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 사물들 사이의 관계에서 창발한다.



결국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를 지르고 말았다. 문학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이 책에서 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시나브로 기울어진 서구 중심주의에 대한 나의 왜곡된 시선이 조금이나마 제자리를 찾는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가치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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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읽기 세창명저산책 99
김성도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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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스트로스는 <슬픈 열대>에서, 현상을 따라 눈에 띄는 이질성과 다양성에 집착하지 않고, 그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구조’를 찾는다. 과학의 효용성을 부정하진 않지만, 과학이 현상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분류할수록, 역설적으로 본질로부터 점차 멀어진다는 구조적 모순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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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케인스 - 다음 세대가 누릴 경제적 가능성
존 메이너드 케인스 외 지음, 김성아 옮김, 이강국 감수 / 포레스트북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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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에 미래 예측 에세이를 현재 시점에서 평가하는 건, 작가가 케인스가 아니었다면 아마 시도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에세이는 일종의 ‘오마주‘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때에야 비로소 날개를 편다.˝는 말처럼, ‘지혜의 시차‘에 누가 태클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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