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READ 사르트르 ㅣ How To Read 시리즈
로버트 베르나스코니 지음, 변광배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나는 타인들의 자유를 원하지 않을 수 없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사르트르는 1945년 10월 28일에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습니다. 이 강연이 있기 두 달 전에 마르셀이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이라는 말보다 이 ‘실존주의’라는 용어를 사르트르의 저작에 적용시켰을 때만 하더라도 사르트르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 용어의 사용은 탄력을 받게 되었습니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라’라는 강연은, ‘실존주의’라는 용어의 의미가 무언인가를 그가 직접 분명하게 밝히려고 했던 첫 번째 본격적 시도였던 것이죠.

실존주의의 첫걸음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존재의 임자가 되게 하고, 그에게 그의 존재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돌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고 우리가 말할 때, 그것은 사람이 자신의 엄격한 개성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은 오히려 모든 타인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자신을 위해 선택한다고 말할 때, 이것은 우리 각자가 스스로를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각자가 스스로를 선택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을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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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증이 있습니다. 심할 땐 약도 삼켰지만, 정작 무서운 건 오늘 밤이 아니라 내일의 컨디션이죠.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라"는 말, 적어도 잠에겐 해당사항 없습니다. 잠은 내일을 위한 적금 같은 거라, 내일이 없다면 애초에 잘 이유도 없으니까요. 

어젯밤도 비몽사몽, 새벽 5시까지 누운 채 '수'자 놀이 했습니다. 



내심장을 쏜 넌 명사수
그냥 가면 너의 실수
그런 사람 부지기수
외통수에 걸린 자충수

미소는 살인미소
그것은 살인미수
모태 미인 유일한 성형, 쌍수
그대는 미의 무기수, 난 그대의 간수
내 마음은 호수, 심청인 인당수

넌 금수저 아니 그냥, 금수

장비는 장수
장수는 김수한무

나는 가수
노래는 김범수
얼굴은 야수
입술에 키수

장마는 억수
취임새는 얼쑤
본캐는 정수

케리비안해적은 가위수(手)
의사의 사명은 수(壽), 검사의 사명은 수(sue)

세상은 무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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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ano避我路 2026-08-11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정인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시대착오적인 어휘의 무리한 사용을 인정합니다.
 

Youtube Shorts에 이런 게 떴습니다.

카더가든이 나오는 영상입니다.


카더가든이 초등학교 1학년 쯤 돼 보이는 아이에게 묻습니다.

"오늘 학교에서 뭐 배웠어?"

그럼 아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억 나지 않아. 다 까먹었어."


다시 그는 이렇게 묻죠.

"기억 안나면 어떻게, 그럼 학교에 가는 의미가 없잖아."

아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의미는 있지."


그가 다시 묻죠.

"뭐가 의미가 있어 기억에 안나는데."

그럼 아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차피 내일 가면 다시 배우니까. 그건 맞잖아."



아이는 어제를 창고에 넣지 않고 그냥 흘려보냅니다. 그런데도 불안해하지 않죠. 왜냐하면 내일이 다시 배달되니까요.

아이에게 학교란 저장소가 아니라 매일 새로 켜지는 수도꼭지인 겁니다. 어제 마신 물을 기억 못 해도, 오늘 목마르면 또 틀면 그만이죠.


우린 반대로 삽니다.

배운 걸 붙잡아야 안심하죠.

메모하고, 저장하고, 잊을까 봐 사진까지 찍습니다.

그런데 정작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것들, 이를테면 걷는 법, 말하는 법, 사랑하는 법, 은 전부 기억 없이 배운 것입니다. 몸이 외운 지식은 뇌의 서랍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이의 논리에는 구멍이 아니라 지혜가 있습니다.

반복되는 것은 저장할 필요가 없다는 것.

삶이 매일 같은 문을 두드린다면, 어제의 열쇠를 잃어버려도 오늘 다시 만들면 되는 겁니다.


망각은 실패가 아니라, 내일을 믿는 자의 특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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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문제설정을 예를 들어 설명해보겠습니다. 전 이 부분을 이해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질문을 잘 해야 하는지 다시 한번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청년 실업 문제'를 예로 설명해보겠습니다. 


이데올로기적 문제설정을 통해서 나올 수 있는 질문은 이렇습니다. 


"청년들은 왜 취업을 못할까?"


문제의 틀을 개인의 능력과 태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자리가 충분한가?, 노동시장 구조는 어떤가?, 교육시스템에 문제는 없는가? 같은 질문이 들어갈 자리는 애초에 없습니다. 


과학적 문제설정으로 전환한다면 이렇습니다. 


"청년 실업을 야기하는 구조적 매커니즘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이 나올 경우, 사업구조 변화, 비정규직 확대, 교육과 노동시장의 미스매치 등 나올 수 있는 해결책은 폭넓고 다양합니다. 


이렇듯 우리가 어떤 사안이나 현상을 보고 의문을 갖게 될 때, 어떤 질문을 하느냐에 따라 방향성과 해결책 등이 확연히 달라지게 됩니다. 

사안의 본질과 핵심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능력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노력하고 연습해야 할,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매우 중요한 자질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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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ano避我路 2025-12-11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난에 대해서 논의할 때, 이런 질문은 어떨까요?

이데올로기적 문제설정은 이렇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특성은 무엇인가?˝

이런 대답이 나올 수 있겠죠.
˝교육 수준이 낮다˝, ˝저축을 안 한다˝, ˝무계획적이다˝

여기서의 문제는 증상(가난의 결과로 나타나는 특성들)을 원인으로 뒤바꿔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과학적 문제설정은 이런 게 아닐까요.
˝가난이 만들어지고 대물림되는 사회적 메커니즘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양하겠지만, 임금구조, 교육 기회 불평등, 자산 축적의 세습... 이런 것이겠지요.
교육 수준이 낮은 건 가난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문제설정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이론적 실천에서 핵심적인 문제는 절단을 통해 이데올로기적 문제설정을 폐기하고 과학적 문제설정을 확립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 설정(problematic)은 단순히 어떤 질문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 보다 훨씬 더 깊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어떤 질문이 가능한지/불가능한지를 결정하는 틀

- 어떤 답이 의미있는지/무의미한지를 규정하는 구조

- 무엇이 보이고/보이지 않는지를 정하는 인식의 지평


이데올로기적 문제설정이 갖는 문제점은 이렇습니다.

- 겉으로는 문제를 다루지만, 실제로는 문제를 은폐함

- 명백한 것을 질문하는 척하며 실제로는 답을 이미 전제함

- 증상을 원인으로 착각하게 만듦


과학적 문제설정의 특징은 이렇습니다.

- 겉으로 드러난 현상이 아니라 구조를 질문함

- "왜?"보다는 "어떻게?"를 물음

- 자명해 보이는 개념들을 문제화함


그럼 '절단'은 무엇일까요?

'coupure'라는 프랑스어로 알튀세르가 의도한 의미는 '비연속성'에 있습니다.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죠. 과거의 개념 자체를 폐기하고 새로운 개념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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