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2016년 2월 21일 일요일




    일찍이 박이문 선생께서 한 서문의 자리에 이런 고민을 털어놓으신 적이 있다. “슬프게도 타고난 재주가 없어 예술가의 길에서 벗어나 딴 직업을 갖게 되었으면서도 예술에 대한 나의 막연한 향수는 버릴 수 없었으며, 예술은 언제나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가장 멋있는 것으로만 느껴진다.”(박이문,『예술철학』, 10쪽) 아, 이것은 내 마음이다. 미술을 유랑하는 두 발의 힘, 먼 언덕에 걸린 작품을 희미하게나마 바라볼 수 있는 두 눈의 힘, 그리고 미술의 책장을 넘기는 두 팔의 힘, 여하튼 이 노마드의 모든 힘은 동경에서 샘솟는 것이었다. 나는 언제까지고 그렇게 술회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예술 하는 것’과 ‘예술을 동경하는 것’에는 얼마나 큰 간격이 있는가. 예술을 동경만 하는 주제에 마치 예술을 하는 것처럼 세상을 속여 예술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요쓰야 괴담(四谷怪談)의 독약 같은, 그리하여 예술과 우리의 결합에 훼방을 놓는 가증스런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그런 이들이야 이름을 얻고, 돈을 벌고, 독자들에게 빌붙고, 세상에 아부하고 떠나버리는 먼지일 뿐이지만.) 건너지 못할 강의 한쪽 하안에서 아무리 석벽을 쌓고 석교를 놓으려고 해봐도, 계절마다 찾아오는 홍수처럼 나의 의지를 쓸어가 버리는 것이 있다. 그 위력을 나는 안다. 알 수밖에 없다. 그것도 아주 처절하게. 얼마간 나는 그것을 ‘광기’라는 단어가 아니면 도무지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언젠가 다른 단어로 표현할지도 모르겠으나, 어디까지나 그 의미는 내가 넘보지 못하는 순간과 세계에 담겨있으리라. 예술의 대가들에게 갖는 존경은, 내게 이런 것들이다. ‘어렸을 적부터 예술가로 단련되었으면…’이라는 어리석은 후회를 하루에도 수 번 한다. 나에게는 딱지를 떼어내고 아린 상처에서 일부러 피의 맛을 보는 못된 버릇이 있다.


    하지만 다행이도 나는 독약 같은 자가 되지 않았다. 양심을 지켰다. 예술가로 자란 불행 속에 살고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차라리 한 명의 훌륭한 칼잡이일 것이다. 베어버리는 쾌감으로 미쳐가다가 제 목을 그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독자라서 차라리 이렇게 빌붙어 사는 삶으로 연명하는 것이다. 불쌍하다, 예술가들이여. 몇 안 되는 예술가 : (일동,  무대 밖을 향해 관객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대사는 없으며, 무표정.) 그리하여 행복하다고 말하는 예술가들을, 나를 오른팔을 내밀어 흔들며 이 마당에서 쫓아버린다. 휘이, 저리 가거라. 페소아와 피카르트와 블랑쇼와 소세키와 포와 카잔차키스와 보르헤스와 칼비노와 가오싱젠과 ... 그리고 무엇보다도 니체(오, 불쌍한 니체)가 있어야 할 곳에, 왜 그대가 멀뚱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서있는가. 염치도 없이. 그러나 그것은 연민의 마음까지는 되지 못하고, 때때로 나는 예술가에게서 아무런 정도 느끼지 못할 때가 있으니, 그건 엄연히 동경의 마음 때문이다. 나의 든든한 어리석음 탓이다. 그 짝이 오히려 쓸모가 있는 일. 동경이 제일 크다. 여태 그래왔다. 불쌍하다는 말의 안팎을 굳이 구분하는 않는 까닭도, 그거다.


    이 어리석음. ‘동경’이라는 이름의 어리석음은 예술의 바다를 항해하는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튼튼한 돛이요, 노를 젓는 강인한 완력이다. 그리하여 나는 단 몇 분이 되더라도 하루도 빠짐없이 해와 북극성을 바라보며 배의 방향을 구한다. 정 힘들 때면 카시오페이아까지만 본다. 그러고 보니, 이 공간의 이름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gyrocompass로 지었다. 아무 생각 없이 붙인 이름인데, 내 안에 그런 연원이 있는 까닭에 저도 모르게 끌린 단어였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gyrocompass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나의 좁은 식견으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으나. 어쨌든 그것은 방향. 보르헤스의 시를 읽을 때부터 나는 언제나 선원(혹은 해적?)이 되고 싶었다. 바다와 예술은 퍽 어울린다. 항해는 나의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너에게도 역시 또다른 황금 해변에서          A ti también, en otras playas de oro,

    부식되지 않고 기다리는 보물이 있네          Te aguarda incorruptible tu tesoro:

    광대하고, 막연하고, 피할 길 없는 죽음이     La vasta y vaga y necesaria muerte.


    (보르헤스, 우석균 옮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기』, 72쪽.「장님의 자리(Blind Pew)」 中)



*   *   *



    동경은, 한편으로는 무언가에 대해 안달을 내는 것이다. 속에서 열이 나서, 안에서부터 익어가는 것이다. 겉으로는 차분한 척 예술을 읽고 듣고 보면서도, 그 속에 용광로 하나 가져보지 않은 이가 어디 있는가. 그리하여 하나의 시가 생각난다.


    꽃무늬 팬티를 입으시는 어머니를 둔 김경주의 한 시 앞에서 한참을 울던 날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 시집을 기억하는 건 〈백야(白夜)〉라는 다른 시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도무지 모를 그 말들 사이에서 침잠의 새벽을 보내다가 불판의 고기를 맨손으로 짚는 광기를 부리며 한 구절을 이면지에 옮겨 적었었다. 김경주,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풀에게 흉터를 남기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제 속의 열이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

    (김경주,『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45쪽)


    오랜 시간이 지나고, 마음으로는 정말 수 십 년을 보낸 것 같은 가증스런 상상을 하면서, 바로 오늘 다시 그 시와 구절과 그 날을 떠올린다. 나는 풀이요, 그것도 아주 열병이 나버린 풀이다. 안에서부터 익어가는 기이한 살덩이를 지닌 한 마리의 고기일 수도 있겠다. 무엇이 나에게 그런 얼토당토않은 흔적을 남기는가. “바람을 버리고 우수수 떨어”지는 이 밤은 (실로 밤이야말로 바람이 지탱하고 있는 어둠이 아닌가) 시인의 눈[眼] 속을 흐르는 겨울열매[雪]가 도무지 이상하지 않은 차디찬 계절. 이 극명한 온도 차가 오히려 속의 안달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것인지도.


    예술을 읽는 두 손의 냉증과, 예술을 보는 두 눈 앞을 가로지르는 찬바람과, 하여 그런 것들이 열병을 식혀주기도 하는 이 다행인 계절에, 나는 바람이 아닌 흉터의 결대로 이리저리 꺾이며 춤을 추는 하나의 풀이 된다. 서재에 장작은 충분하다. 화력 앞에서 증기를 뿜어대지 않는 열차는 없다. 나는 이런 글로 굉음을 낸다. 달리고 있다는 증거로 하얀 거품들을 머리 위로 뱉어낸다. 나의 속도대로 예술이 풍경처럼 지나간다. 나를 선로 위에 얹어놓고 강철로 무장시킨 모든 대가들에게, 나는 거치는 모든 역마다 손님들을 내리고 싣는 봉사로 답한다. 그녀/그들은 모두 나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이 추운 왕국의, 열병을 지닌 신민들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16-02-21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좋은 글들과 감상 잘 읽었습니다. 즐거운 밤 되세요. *^
 

2016년 2월 13일 토요일



    나에게도 박준의 <미인>이 있었다. 그러나 <미인>이 마음에 앉으니, 언어보다 훨씬 선명한 걸 알게 됐다. 그것은 차라리 소리. 갇힌 공간에서 끊임없이 울려 돌고 도는 음성이었으며, 나는 그 감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언어의 그물은 자주 찢어졌다. 잡히는 것도 없는데 허구한 날 찢어졌다. 어부는 성질이 나서 시를 관뒀다, 라고 말하면 될까. 시는 내게서 시작하는데, 안에서 나오는데, 도무지 공간의 메아리는 나의 것일 수가 없어서, <미인>은 시가 될 수 없었다. 시도 <미인>은 될 수 없었다. 박준에게도 성긴 그물을 만지작거린 날들이 있었으리라. 만지작거렸으니 저 정도로 썼지, 그가 훌륭한 낚시꾼이었다면 세상 모든 애가(哀歌)는 종말을 고했을 것이다. 물고기 없는 바다는 비현실적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배신자가 됐다. <미인>이 떠난 후로도 쓰지 않던 시를 대학 늦깎이 시절 강의 때문에 수 십 편 썼다. 거기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다. 들어줄 이가 있을 것 같아 이렇게 적는다. 차라리 이 공간의 조촐함이 좋다. 나는 당신이 볼 수 없는 어딘가에 숨어 사는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라. 그래도 읽어주니, 당신에게 깊이 고마울 따름이다.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당신이 그 소수 중 한 사람이라, 고마움은 고마움에 겹친다.



*   *   *



    메아리는 공간을 돌고 돌아 어느덧 미세한 잔향만 남기고 더 이상 마음을 울리지 않았다. 잔향을 듣는 귀의 지혜를 잃었다. 배신은 언제나 이렇듯 교묘한 술수를 부린다. 나는 짓궂게 웃고는 눈을 딱 감았다. 시를 쓰자. 혹은 시를 쓴다는 이들 곁에 앉아라도 보자. 그것은 무엇인가. 그래도 갈구한 날이 있었으니까.


    김승희 시인 앞에서 시를 썼다. ‘정신줄’이라는 걸 놓고 쓰니 칭찬도 받았다. 한 번 만 더 결석하면 F처리 되는 나를 우수한 학생이라 불러줬다. 취향이려니 했다. 자주 대화를 나누던 남학우 여학우와 도무지 모를 말들에 대해 말했다. 모두 자기 것만 발표하고, 다른 사람 것은 몰랐다. 이게 뭐지, 했다. 계속 모르니까, 결국 아는 게 생겼다.


    쓰다 보니, 나는 다시 청각이 예민해졌다. 저 소리들, 뭐라 하는 거야, 뭐라는 거야. 너는 알고 말하느냐, 나는 언제까지 들어야 알 수 있느냐, 아니, 나는 알고 썼느냐. 이 기이한 창작의 공방(工房). 내리치는 망치와 그걸 받는 모루 사이의 굉음에서 메아리의 흔적을, 감금의 추억을 기억해냈다. 그렇다. 돌연 <미인>이 그리워지고, 소리 속에 침묵하던, 오직 침묵만을 실천하던 때가 그리워졌다.


    다시 망각으로 들어가자. 무수한 시집들은 그렇게 내 서재의 무수한 책들 사이에서 얇고 비스듬하게, 아무 의미 없이 꽂혀 있다. 그에 비해 여기까지 돌아온 이 궤적의 거리는, 이 비틀비틀한 거리는 또 얼마나 긴가.



*   *   *



    쓸 때는 많이 읽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도대체 읽지 않으면 쓸 수 없으니, 읽어서 몰라도 일단 ‘읽는다는 것’을 해야 했다. 그만큼 곤욕인 게 또 어디 있는가. 젊은 시인들을 읽고, 난해한 시들을 읽고, 시의 흐름을 보려고 탁류에 고개를 처박고, 대체 숨은 제대로 쉬는지 모르겠는데 끈질기게 수중의 생을 보내다가 새벽 늦게야 이불 속에서 숨을 쉬었다. 코로 숨을 들이마시면 물이 눈에서 떨어지니, 몸 어딘가 액화 과정이 일어나는 기관이 있는 모양이었고, 그게 싫었다. 지겨웠다.


    나를 속이는 것들. 저자들은 나를 바보로 만들 속셈인가보다. 분하다. 나는 철저하게 실패하고 있다. 그런데도 뭘 쓰고 있다. 막스 피카르트가 말한 ‘그 모든 것의 원천’, 침묵이여, 나를 도와다오. 아무리 입을 다물고 있어도 침묵할 수 없는 이 박약한 정신. 밀어내려는 의지와 단절된 말. 그 와중에 일어나는 폭력. 언어 사투. 예술이란 그런 것이었는가. 이러다 미쳐버리겠지. 아주 돌아버려서 훌륭한 시인이 되어버릴 거야. 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읽을 수 없는 글을 쓰면서, 세상 모든 것을 뒤집어버리고, 그리하여 온전하게 홀로 제정신인 상태로 살아가겠지. 그렇게 되는 것이겠지.


    요컨대 나는 반 년 정도를 새벽마다 미치며 보냈다. 그런 와중에도 국문 고전 레포트를 쓰고, 종교분쟁을 연구하고,「莊子」를 읽은 것은 신기였다. 사람이 이렇게 진폭이 큰 소리로 살아도 신체가 부서지지 않다니. 아, 그러고 보니 또 ‘소리’다. 언제나 소리로 돌아온다. <미인>이 내게 가르쳐준 것. 붙어 떨어지지 않으니, 그것은 계절이 지나도 화석처럼 매달려 있는, 엇나간 나뭇잎 같다. 저 창 밖에 한 장이 빗속에 부산스럽다.



*   *   *



    미쳐도 글이 써진다는 것이 미쳐야만 글을 쓸 수 있다는 얘긴 아니겠지만, 여하튼 김승희 시인은 내가 살짝 돌기 시작할 무렵부터 습작에 관심을 가져줬다. “식도는 어둡다.”라든지, “다섯 살이 부서져요, 엄마”라든지, “잠에서 깨면 늘 나는 遠洋의 감옥 속에 있다.”라든지, 이런 구절에서 멈춰서더니 시가 죽고 사는 일에 대해 말해줬다.


    더 미쳐야 한다는 뜻으로 들었다. 그러나 한 번 미치면, 뭐를 분별하는 건 둘째 치고 어느 선까지 미쳐야 하는지 누가 판단하는가. 여기까지? 여기가 어딘데? 도대체 정신의 공간에 어디 좌표가 있던가. 마름질 할 수 없는 곳에서 자를 들고 서있는 사람만큼 우스꽝스런 광대도 없다. 그런 작자들의 글에 수도 없이 속았고, 이런 공간이든 저런 공간이든 자신을 바보라 드러내는 똑똑하고 지혜로운 이들은 삼태기에 담아 수백이나 된다. 속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단단하게, 곡식 낱알들을 고르며 살아왔다. 이런 광기가, 말하자면 그건 또 광기일 수밖에 없는데, 그 미친 정신과 뜨거움과 운동과 폭력과, 하물며 성스러움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들로 나는 함몰의 고비를 늘 상처로 지나왔다.


    그런데 더 미치라니.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갔다. 저는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라고 속으로 말하면서도, 대시인 앞에서는 정중해야 하는 까닭에 더 다듬어서 제출하겠다고 했다. 다른 강의들 준비로 분주하게 마음을 추스르고, 성적을 확인하고, 나는 그 미소 뒤로는 다시는 미치지 않기로 했다. 관심 가져준 그분께는 고마운 마음이지만, 소설을 가르친 어느 교수의 말대로, 한 명의 독자로 살아가기로 했다. 충실하게. 더 충실하게.



*   *   *



    창작하는 이들은 광인이다. 그녀/그들이 뭐라 항변해도 나는 앞과 같이 확언한다. 모른다면 알려줄 생각이다.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작가의 글은 읽지 않는다. 작품을 통해 거의 미쳐서 공간을 부수고 땅으로 꺼지든 하늘로 날아가든 할 것 같은 불가능의 사람들만 만날 것이다. 그 일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미인>처럼 사랑할 수밖에 없다.


    미쳐본 이들이여, 라며 그녀/그들을 어느 공간에 소환한다. 미쳐서 죽은 이들도 바람에 날려 올 것이다. 나는 그렇게 거짓으로 불러놓고, 멀찌감치 그녀/그들의 한가운데서 멀어진다. 공간에서 벗어나진 않는 거리까지. 한 눈에 보일 수 있는 정도면 좋다. 그녀/그들이 뭐라고 서로 말하고 있는지, 무슨 안부를 전하는지, 작품 잘 되냐고 묻는지, 고민은 뭔지, 대체 우리말과 다른 말은 어떻게 통하는지, 그런 건 듣지 않아도 상관없다. 다 어차피 미친 소리일 텐데.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듣고 싶은 소리다. 그 소리를 듣고 싶을 때면 언제든 다가간다. 모습을 보려고 할 때면 또 뒤로 물러난다. 둘 다 실패로 끝나긴 해도, 끊임없이 한다.


    눈치 챈 사람도 벌써 있겠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그녀/그들도 나와 같은 공간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공간이 차원이라든가 물리라든가 하는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정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는 나의 서재다.



*   *   *



    누군가는 비웃겠지만 그래도 서재라고 갖고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독자로 산다. ‘독자됨’이 무엇인지 쉼 없이 묻고 갈구하면서, 광기의 새벽을 떠올린다. 광인들이 극도의 고온에서 건져낸, 하지만 우리는 저 차가운 활자와 헐거운 백지로 붙들고 읽게 되는 책에서 나는 광기와 마주하는 작업은 부단히 한다.


    광기의 독자인가, 잠시 생각해본다. 저 먼 헤겔의 미학, 그걸 난 곧이곧대로 듣진 않지만 작품은 완성됨과 동시에 미완성이라는 그의 말은 옳다. 몫은 독자의 것. 하지만 ‘완성’이라는 단어는 매우 위험하다. 독자도 완성하지 못할 때가 있다. 아니, 사실 완성은 없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왔다. ‘독자가? 독자 주제에?’ 속으로는 이렇게까지 생각한다. 폄하로 들어도 상관없다. 자신의 유능함을 믿는 독자처럼 어리석은 자도 없으니까. 미완성을 세상에 내놓는 작가와 미완성을 읽고 미완인 생을 사는 독자만이 있다. 나는 미완이라 이렇게 쓰며, 이렇게 쓸 수밖에 없다. 솔직함으로 죄를 면할 수 있다. 하지만 서평이라며 자신의 얄팍한 이해의 잣대를 들이대고 이런 말과 저런 말을 분간 없이 하는 이들을 보고 있으면, 아니, 별로 들여다보진 않는데, 서두부터 웃는다. ‘현실을 들먹이며 판타지를 사는 이들이여.’


    참으로 많은 책이 있으며, 많은 작가가 있고, 많은 글이 있지만, 그리하여 우리는 독서의 부족에도 이상하리만치 풍족한 ‘말’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실로 그런가? 지칠 대로 속아서 완전히 지쳐버렸는데도 내일 또 속는 이 굴레의 지겨움.



*   *   *



    당신은 미쳐본 적이 있나요?


    이렇게 물었을 때, 대답하는 이들의 글은 읽지 말라. 제정신인 사람은 이 무대에 설 수 없다. 우리를 움직이게 할 수 없다. 움직이게 할 수 없으면, 아무 소용없다. 읽었더니 눈물이 나오더라, 읽었더니 힘들더라, 두 번 다시 읽고 싶지 않더라, 하지만 서재에 가만히 꽂아두고 자꾸만 눈을 주더라… 그 작가와는 죽을 때까지 작별하지 말라. 오래도록 읽지 않아도 남는 이들이 있다. <미인>이 있다. 소리가 있다. 뭐라 말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울림을 그치지 않는 음성이 돈다. 그런 독자는 행복하다. 몹시도 많은 불행 속에서, 그녀/그들에게는 적어도 분명한 것이 하나 있으니까.


    이렇게 물었을 때, 아무런 대답도 않고 묵묵히 글을 쓰는 이들에게 눈을 둬라. 미쳐서 쓰는 사람은, 질문을 듣지 않는다. 들을 수가 없다. 우릴 머쓱하게 만든다. 저기, 그래도 대답은 좀… 안타깝지만 그런 작가는 독자에게 대답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독자이다, 우리는. 무엇이 우릴 그렇게 불행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수도 없는 이야기가 있지만, 자꾸 뭘 묻는다. 광인은 그런 우리에게 그동안 미쳤던 흔적을 툭 던진다. 그리고는 그 공간에서 사라진다. 소리처럼 저기 가서 울리고, 다음에는 다른 곳으로 가서 울리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그녀/그들은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좇을 수밖에 없다. 공간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무수한 책 앞에서, 서재에서, 당신의 그 공간에서, 단 한 번이라도 확언하듯 책 한 권을 덥석 잡아들고 끝까지 만족한 적이 있었는가? 그렇게나 자신하는가?


    독서는 끝없는 실패다. 아, 이걸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녀/그들의 글을 읽어보면 ‘초장’부터 자만이다. 조금은 더 작가와 가까워진 것 같아요다시 읽어보니 이건 바로 그뜻이었겠구나 (‘바로’라고?) 싶더라고요, etc, etc, etc. 단 한 권도, 심지어 단 한 문장도 우리는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알아듣기 쉽게 말하라는 사람들은 그냥 대중문화에 섞여 지내면 된다. 여기는 애당초 그녀/그들의 공간이 아니다. 불평은 무소용이다. 해봤자 광인은 듣지 않는다. ‘미친 길’이라는 건 따로 있는가? 그런 듯도 싶다. 어떻게든 설명해보고 싶지만, 직접 본 적도 없고, 물어봐서 들은 대답도 없다. 하지만 존재한다. 이게 무슨 비과학적 언사인가 싶어도, 사실이다. 독자들에게 물어보면 된다. 가을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처럼 살아가는 그녀/그들에게 물어보면 된다. 그거요? 보이진 않는데, 있는 것 같아요. 이런 대답이 하나 둘 쌓이면 그 길은 실재가 되고, 우리는 믿게 된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우리 독자가 뭘 믿고 읽는지 생각해보면. 저요? 이렇게 처참하게 매일 떨어져 나가면서도 이상하게 나무에 붙어 있더라고요. 왜 그런 것일까, 생각해봤어요. 누군가가 저를 자꾸만 나뭇가지에 도로 데려다주는 것 같아요. 붙어 있으리라는 건지, 다시 떨어지라는 건지, 참, 도통 모르겠네요. 아, 그게 누구냐고요? 미친 사람이지 누구겠어요?


    광인 : 나무 주변에 서식하며, 시간을 거슬러 사건을 되돌리는 이를 일컫는 말. 정신 생명 유지의 근원. 그 자체로는 수많은 곡해를 받기 마련이며, 의외로 주목 받는 만큼 이해되지 않는다. 수많은 지구의 영적 존재들은 주변에 낙엽이 뒹굴든 말든 상관하지 않으나, 광인은 손에 잡히는 낙엽이면 그 무엇이든 다시 나무에 붙인다. 따라서 고통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광인을 멀리한다고 알려져 있다. 광인의 수는 무척 적으며, 주로 숨어지내 소재를 알 방도가 없다.


*   *   *



    읽는다. 쓴다. 미친다. 자꾸 미친다, 미친다 하니 내가 미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더욱 고마울 따름이다. 그래도 서재 밖에서는 잘 살아간다. 바다 밖에서는. <미인>이 없는 곳에서는. 새삼스럽지만 인간은 원래 육지 생물이며, 그 중에서도 거의 막내라서 애당초 물에서는 살 수 없다. 물 속에서 허파로 숨쉬는 사람이 있으면 손을.



    추신 : 이 이야기는 당신의 공간 밖으로 새어나가면 안 됩니다. 광기의 비밀은 당신과 저만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밖에서는 가끔 재미로 ‘미친 척’을, 하지만 여기서는 제대로 한 생을 다하여 기꺼이, 그리고 한없이… 미쳐 있으면 됩니다.





    시스템 : 당신에게 잠금 장치가 배송되었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16-02-13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해한 산문시를 읽는 느낌이었습니다. 한가지 주제에 매달려 이렇게 장문의 글을 쓸 수 있는 필력이 부럽네요. 탕기님은 타고난 글잽이인 것 같고요. 지금은 모르겠지만 평론이든 시든 산문이든 나중에 뛰어난 작가가 될 거에요. 저랑 내기할까요. *^^

탕기 2016-02-13 23:01   좋아요 0 | URL
한 권의 독자로 사는 것도 버겁습니다. 뛰어난 작가라니요. 저는 `작가`라 부르는 사람이 몇 없습니다. 그런 제가 작가인 척 하는 불손한 사람은 될 수 없는 노릇이죠. 뭘 거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기는 저의 승리입니다. 많은 몫을 걸지 않으셨길 바랍니다. ^^ 칭찬으로만 듣겠습니다. 건필하십시오.
 

2016년 2월 9일




    남의 공간에 배설된 흔적을 더듬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는 책의 권위를 믿는 보수적인 사람일 수도 있겠다 싶다. (이 못된 버릇을 고치지 못해 늘 안타깝다.) 그런 생각이 드는 때가 종종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책’은 몹시 제한된 단어이지만. 누구나 책을 낼 수 있는 시대 안에서 우리 독자들이 감내해야 하는 끈질긴 검색, 그 번거로움은 응당한 대가이기도 하다. 하물며 사기를 치는 전문의들이 상품 선전하러 토크쇼에 나온다는 항간의 괴담이 사실인 시대. 노출 빈도와 인기가 눈앞의 막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턱턱 막힐 때도 있다. 무엇에 근거해야 하는가를 판단하는 힘이야말로 필수요, 불가결이다.


    이렇게 보면, 휘둘리는 사람들은 참 많다. 차라리 부유한다는 생각으로, 나처럼 정착의 빈곤을 그러려니 생각하며 고전과 철학과 과학과 종교와, 인류의 지적 재산과 지혜의 보고를 더듬고 다니는 불량한 독자의 신세가 더욱 낫다고 하겠다. 나는 적어도 내가 건초더미에 올라앉은 어리석은 무리는 아니라 생각한다. 오만일까. 그래도 좋다. 광기의 한 동패에서 일탈하려는 몸부림도 일종의 광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까. 방향만 다를 뿐, 미친 건 매한가지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수레 구르는 소리가 들리는 정도의 거리에서 본다.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그림 속 위치가 죽기 전의 우리를 결정하리라, 그런 생각이다. 그것은 도무지 내 힘으로 된 일이 아니기에 나는 더욱 읽고 생각할 수밖에.



*   *   *



    그런 생각으로 스쳐지나가던 여러 흔적들 중에 내가 안타깝게 바라본 것은, 그 중 단연 가장 애처로이 바라본 건 ‘글쓰기’에 대한 여전한 목마름이다. PR과 사무적인 일로 글을 쓰는 것이라면, 그건 당연히 배워야 마땅한 것이다. 그런 글들은 오히려 ‘안 그렇게’ 써버리면 이상하니까. 목적이 뚜렷한 글은 그걸 드러내는 시퀀스들을 외워버리면 끝이다. 하지만 그 외의 글들은 무슨 까닭에 배우려고 하는 것일까. 심지어 본인이 시나 소설을 쓸 것도 아니면서 마치 어떻게 글을 써야만 한다고 스스로 빠져 있는 그 강박의 끈적거리는, 불쾌하기 그지없는 기분을 한사코 유지하려고 하는 까닭, 나는 모르겠다.


    일단 그런 생각을 하는 그녀/그들은 과연 많이 읽는가. 다독 다작 다상량. 이런 말이 있는데, 순서가 잘못됐다. 달리 해석해보자. ‘다상량’이 혼자 세 글자라 가장 마지막으로 밀려난 것일 뿐이다. 단, 첫 번째는 맞다. 뭘 읽어야 쓸 수 있다. 이걸 아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녀/그들이 자신에게 정말 솔직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쓰는 걸 과감히 관둘 것이다. 과감할 필요도 없다. 절로 관두게 된다. ‘포기’라고 표현하면 좀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오에 겐자부로는 하루 여덟 시간을 쓴다. 와~, 할 일이 아니다. 그가 얼마나 읽겠는가, 혹은 읽었겠는가를 생각하고 탄식을 내뱉어야 할 일이다. 탄식의 호흡이 더 길어야 하는 까닭은, 뭔가를 읽는다고 바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얼마나 쌓여야 제 값을 다할 수 있는지 모르는 것이 독서다. 아니, 대체 그 값이란 있는 것일까, 의심이 들 때도 있다. 중요한 건 이거다. 독서는 독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나름의 링크를 만들기 때문에, 상당한 집중을 한 상태라면 그 독자는 책과 책을, 분야와 분야를 넘나드는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된다. 그 링크는 본인이 통제할 수가 없다. 그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지경에 이르러서도 글을 쓰긴 힘들다. 설령 짧게 토해냈다고 하더라도 그런 글은 값어치가 없을 수도 있다.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이어야 한다. 잇는다 하더라도 결국 맺어야 한다. 하지만 맺고 나서 몽땅 지워버릴 수도 있는 게 작(作)의 전체 과정이다.



*   *   *



    가벼운 투정이라면 상관없지만, 대체 이 분위기는 뭔가 싶다. 누군가가 자꾸만 조정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대놓고 출판사와 일부 작가들을 겨냥하진 않겠지만, 그런 부류가 아니면 또 누가 그렇게나 독자들에게 “글을 쓰시오.”라고 말할 수 있으며 또 그녀/그들을 안달이 나게 할 수 있겠는가, 묻고 싶은 것이다. 대관절, 왜 또 글은 잘 써야만 하는가? 답은 이미 있다.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러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거리낌이 없을수록, 다시 말해 솔직할수록 강하게 남는 글을 쓰기 마련인데, 뭔가를 자꾸 덧대려고 한다. 옷을 입고, 화장을 한다. 단어를 몰라 말을 못 하는 게 아니라, 단어를 ‘골라’ 말을 못 하게 되어버리는 형국이다. 아니, 파국이다. 대체 얼마나 정교한 연금술사가 되려고?


    작품을 할 게 아니면 그냥 뱉으면 된다. 놀라운 일이 이어지니까. 뱉다보면, 이상하리만치 정교해진다. 난폭한 글은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고운 속살을 가지고 있다. 그런 글은 섣불리 건드리기 어렵다. 눈으로 요리조리 피하고, 밤기운에 몰래 들어와 다시 펼쳐보고, 그러는 것이다. 독자와 소위 ‘밀당’을 하는 거다. 이 정도의 거리낌 없는 마음가짐이 없으면, 도무지 글이라는 건 쓸 수가 없다. 사전을 쓰고 싶은 사람에게는 이런 말은 하등 관계가 없겠지만.


    둘째, 다상량에 대한 오해는 지워야 한다. 박박 긁어서 떼어버려야 한다. 다상량은 글에 대해 생각을 하라는 게 아니다. 내뱉을 것들에 대해 뭔 생각을 그리 많이 하는가. 읽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라는 좋은 가르침이다. 조용히 써내려가며 생각을 이어보고, 낙서 속에서 균형과 조화를 찾는다. 하지만 아예 빗나간 것일수록 좋을 때도 있다. ‘차원’이라 하면 정확하진 않지만, 어쨌든 우리에게는 그런 느낌으로 다가오는 틈의 벌어짐이 낙서 속에서 불현듯 나타날 때가 있다. 이건 분명 위험한 방법이다. 멀리 간 것일수록 이질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도발이든 퀴어이든, 그런 것들. 여기서 눈 가리지 않고 귀 막지 않으며 입 닫지 않는 그녀/그들이 다상량의 진면목을 본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할 줄 알았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다독도 대단한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그 못지않은 집중과 인내가 필요한 때가 바로 다상량의 시간이다.


    그에 비하면 다작은 먼 궤도를 도는, 그 크기가 왜소한 행성과도 같다. 그러나 그 궤도의 행성을 돌리는 힘은 이미 오래 전에 시작해 ‘본질’이라고 밖에 표현할 도리가 없는 다독과 다상량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궤도는 분명하지 않다. 어디서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애당초 ‘궤도(軌道)’라 했으니, 돌고 도는 것이지 않은가. 하지만 오히려 궤도라 다행이다. 작(作)이라는 것은 일선처럼 반듯하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것들을 의도치 않게 반복적으로 만나는 일련의 과정이다. 그 만남을 이미지로 기억하든, 단어로 기억하든, 혹은 향으로 기억하든, 그건 쓰는 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메커니즘은 그렇다. 돌고 돌 때마다 우리가 강조하고 싶은 자신 안의 무언가가 있다. 그것이 주제가 된다. 글이라는 것은, 때문에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척도다. 품격이니 뭐니 하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과격한 니체는 강의실에 들어가면 ‘소녀 모드’였다. 글에서 우리가 느끼는 건 그런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무엇에 집중하고 어떻게 접근하며 얼마나 생각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진한 맛이 날수록 우리는 그녀/그들을 신뢰해야 한다. 그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 물수제비처럼 얕게 튕겨 지나가는 글들은 읽을 가치도 없다. 다독의 아까운 기회를 날리는 것이다. 우르르 몰려가서 읽지 말고, 읽기 전에 다상량의 실천이 있었는지 먼저 생각해볼 일이다.



*   *   *



    생각이라는 것은 읽고 생각하고 쓰는 전 과정을 통해서 사방으로 나아간다. 넓게 퍼지며 면적에 따라 그 깊이가 얕아지는 것 같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결과적으로 깊어진다. 그 와중에 단어의 범주도 넓어지고, 표현 역시 농익는다. 자신도 모르게 발현되는 순간들인 것이다. 그 과정 자체가 워낙 긴 시간을 필요로 하기에, 그런 일은 얼마든지 그런 식으로 일어난다. 많이 읽는 이들은 이걸 안다. 그래서 그녀/그들 중 대부분은 쓴다는 것에 대해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는다. 누구에게 글 쓰는 법을 배웠냐고 묻는다면 그녀/그들은 십중팔구 이렇게 답할 것이다. ‘스승이 너무 많아 누굴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다시 말해 그녀/그들은 어떻게 쓰는지 자신도 알지 못한다.


    글을 쓴다는 건 문제될 것이 없다. 창의적인 글쓰기? 그런 학원 간판을 볼 때마다 생각하는 것인데, 그런 것에 돈을 쏟는 사람들의 손에 그 값의 양서들을 쥐어주고 싶은 심정이다. 글을 쓰고 싶다는 사람들은, 즉 우리는 평생을 독자로 살아야 한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끝나지 않을 과업이다. 언젠가는 얼마나 많이 읽었는가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순간이 온다. 우리가 문제 삼는 건 그 사이의 일이다. 그 사이의 길이, 그 길의 흔적이 글로 남기 때문에, 아마 우리는 쓴다는 것을 그토록 두려워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상술의 속내에 빠져 돈의 손을 잡든, 맹렬히 독서를 하며 여전히 아무런 글도 쓰지 않는 수행을 하든, 우리는 모두 끝 있는 삶의 한계 속에서 뭔가 얻어 보고 그걸 표현해보려는 욕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이왕이면, 읽고 생각하고 쓰는 것의 힘을 느껴볼 양으로 그 분투의 한복판에 뭐라도 손에 쥐고 뛰어들 생각이면, 대가의 법을 따르는 것이다. 오로지 정직함으로. 모르면 반복해서 읽고, 알겠다 싶어도 다시 읽어 모름을 알고, 그렇게 한없이 부딪히면서 난폭하게 책의 외관을 열쇠로 긁어도 보고, 새벽을 쓰며 증오하고, 자신을 비췄다가 그 거울을 부숴보고, 온갖 미친 짓을 해가면서 어느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건 하나의 실험일까? 실험이라 해도 별 수 없는 것이, 결과를 모르니까. ‘그래서 결론이 어쨌다는 것인데?’ 이런 질문을 한다 해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누군가 알았더라도 그녀/그들은 이미 세상에 없고, 당신과 나만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사람은 쓰지 않으면, 읽지 않으면, 그리고 생각하지 않으면 밖으로 나가떨어진다. 처절하게 굴러다닌다. 차라리 나가떨어지고 구를 바에야, 좀 더 낯설고 무시무시한 자기 안이 그 장소임이 더 낫지 않은가.


    글은 그 안의 '내'가 쓰는 거다. 그래서 부끄러운 일이고, 그 위에 갑옷을 입히고 껍질을 덧붙여 버젓한 한 생명으로 치장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살아 있다는 건 무엇인가. 누가 살아 있는가. 갑옷과 껍질인가, '나'인가? 미생인 나도 알겠는데, 전자는 확실히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한 판 시원하게 걸며 건초더미 수레에서 뛰어내리겠다. 어딘가가 아픈데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