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9일




    남의 공간에 배설된 흔적을 더듬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는 책의 권위를 믿는 보수적인 사람일 수도 있겠다 싶다. (이 못된 버릇을 고치지 못해 늘 안타깝다.) 그런 생각이 드는 때가 종종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책’은 몹시 제한된 단어이지만. 누구나 책을 낼 수 있는 시대 안에서 우리 독자들이 감내해야 하는 끈질긴 검색, 그 번거로움은 응당한 대가이기도 하다. 하물며 사기를 치는 전문의들이 상품 선전하러 토크쇼에 나온다는 항간의 괴담이 사실인 시대. 노출 빈도와 인기가 눈앞의 막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턱턱 막힐 때도 있다. 무엇에 근거해야 하는가를 판단하는 힘이야말로 필수요, 불가결이다.


    이렇게 보면, 휘둘리는 사람들은 참 많다. 차라리 부유한다는 생각으로, 나처럼 정착의 빈곤을 그러려니 생각하며 고전과 철학과 과학과 종교와, 인류의 지적 재산과 지혜의 보고를 더듬고 다니는 불량한 독자의 신세가 더욱 낫다고 하겠다. 나는 적어도 내가 건초더미에 올라앉은 어리석은 무리는 아니라 생각한다. 오만일까. 그래도 좋다. 광기의 한 동패에서 일탈하려는 몸부림도 일종의 광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까. 방향만 다를 뿐, 미친 건 매한가지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수레 구르는 소리가 들리는 정도의 거리에서 본다.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그림 속 위치가 죽기 전의 우리를 결정하리라, 그런 생각이다. 그것은 도무지 내 힘으로 된 일이 아니기에 나는 더욱 읽고 생각할 수밖에.



*   *   *



    그런 생각으로 스쳐지나가던 여러 흔적들 중에 내가 안타깝게 바라본 것은, 그 중 단연 가장 애처로이 바라본 건 ‘글쓰기’에 대한 여전한 목마름이다. PR과 사무적인 일로 글을 쓰는 것이라면, 그건 당연히 배워야 마땅한 것이다. 그런 글들은 오히려 ‘안 그렇게’ 써버리면 이상하니까. 목적이 뚜렷한 글은 그걸 드러내는 시퀀스들을 외워버리면 끝이다. 하지만 그 외의 글들은 무슨 까닭에 배우려고 하는 것일까. 심지어 본인이 시나 소설을 쓸 것도 아니면서 마치 어떻게 글을 써야만 한다고 스스로 빠져 있는 그 강박의 끈적거리는, 불쾌하기 그지없는 기분을 한사코 유지하려고 하는 까닭, 나는 모르겠다.


    일단 그런 생각을 하는 그녀/그들은 과연 많이 읽는가. 다독 다작 다상량. 이런 말이 있는데, 순서가 잘못됐다. 달리 해석해보자. ‘다상량’이 혼자 세 글자라 가장 마지막으로 밀려난 것일 뿐이다. 단, 첫 번째는 맞다. 뭘 읽어야 쓸 수 있다. 이걸 아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녀/그들이 자신에게 정말 솔직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쓰는 걸 과감히 관둘 것이다. 과감할 필요도 없다. 절로 관두게 된다. ‘포기’라고 표현하면 좀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오에 겐자부로는 하루 여덟 시간을 쓴다. 와~, 할 일이 아니다. 그가 얼마나 읽겠는가, 혹은 읽었겠는가를 생각하고 탄식을 내뱉어야 할 일이다. 탄식의 호흡이 더 길어야 하는 까닭은, 뭔가를 읽는다고 바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얼마나 쌓여야 제 값을 다할 수 있는지 모르는 것이 독서다. 아니, 대체 그 값이란 있는 것일까, 의심이 들 때도 있다. 중요한 건 이거다. 독서는 독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나름의 링크를 만들기 때문에, 상당한 집중을 한 상태라면 그 독자는 책과 책을, 분야와 분야를 넘나드는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된다. 그 링크는 본인이 통제할 수가 없다. 그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지경에 이르러서도 글을 쓰긴 힘들다. 설령 짧게 토해냈다고 하더라도 그런 글은 값어치가 없을 수도 있다.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이어야 한다. 잇는다 하더라도 결국 맺어야 한다. 하지만 맺고 나서 몽땅 지워버릴 수도 있는 게 작(作)의 전체 과정이다.



*   *   *



    가벼운 투정이라면 상관없지만, 대체 이 분위기는 뭔가 싶다. 누군가가 자꾸만 조정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대놓고 출판사와 일부 작가들을 겨냥하진 않겠지만, 그런 부류가 아니면 또 누가 그렇게나 독자들에게 “글을 쓰시오.”라고 말할 수 있으며 또 그녀/그들을 안달이 나게 할 수 있겠는가, 묻고 싶은 것이다. 대관절, 왜 또 글은 잘 써야만 하는가? 답은 이미 있다.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러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거리낌이 없을수록, 다시 말해 솔직할수록 강하게 남는 글을 쓰기 마련인데, 뭔가를 자꾸 덧대려고 한다. 옷을 입고, 화장을 한다. 단어를 몰라 말을 못 하는 게 아니라, 단어를 ‘골라’ 말을 못 하게 되어버리는 형국이다. 아니, 파국이다. 대체 얼마나 정교한 연금술사가 되려고?


    작품을 할 게 아니면 그냥 뱉으면 된다. 놀라운 일이 이어지니까. 뱉다보면, 이상하리만치 정교해진다. 난폭한 글은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고운 속살을 가지고 있다. 그런 글은 섣불리 건드리기 어렵다. 눈으로 요리조리 피하고, 밤기운에 몰래 들어와 다시 펼쳐보고, 그러는 것이다. 독자와 소위 ‘밀당’을 하는 거다. 이 정도의 거리낌 없는 마음가짐이 없으면, 도무지 글이라는 건 쓸 수가 없다. 사전을 쓰고 싶은 사람에게는 이런 말은 하등 관계가 없겠지만.


    둘째, 다상량에 대한 오해는 지워야 한다. 박박 긁어서 떼어버려야 한다. 다상량은 글에 대해 생각을 하라는 게 아니다. 내뱉을 것들에 대해 뭔 생각을 그리 많이 하는가. 읽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라는 좋은 가르침이다. 조용히 써내려가며 생각을 이어보고, 낙서 속에서 균형과 조화를 찾는다. 하지만 아예 빗나간 것일수록 좋을 때도 있다. ‘차원’이라 하면 정확하진 않지만, 어쨌든 우리에게는 그런 느낌으로 다가오는 틈의 벌어짐이 낙서 속에서 불현듯 나타날 때가 있다. 이건 분명 위험한 방법이다. 멀리 간 것일수록 이질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도발이든 퀴어이든, 그런 것들. 여기서 눈 가리지 않고 귀 막지 않으며 입 닫지 않는 그녀/그들이 다상량의 진면목을 본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할 줄 알았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다독도 대단한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그 못지않은 집중과 인내가 필요한 때가 바로 다상량의 시간이다.


    그에 비하면 다작은 먼 궤도를 도는, 그 크기가 왜소한 행성과도 같다. 그러나 그 궤도의 행성을 돌리는 힘은 이미 오래 전에 시작해 ‘본질’이라고 밖에 표현할 도리가 없는 다독과 다상량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궤도는 분명하지 않다. 어디서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애당초 ‘궤도(軌道)’라 했으니, 돌고 도는 것이지 않은가. 하지만 오히려 궤도라 다행이다. 작(作)이라는 것은 일선처럼 반듯하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것들을 의도치 않게 반복적으로 만나는 일련의 과정이다. 그 만남을 이미지로 기억하든, 단어로 기억하든, 혹은 향으로 기억하든, 그건 쓰는 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메커니즘은 그렇다. 돌고 돌 때마다 우리가 강조하고 싶은 자신 안의 무언가가 있다. 그것이 주제가 된다. 글이라는 것은, 때문에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척도다. 품격이니 뭐니 하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과격한 니체는 강의실에 들어가면 ‘소녀 모드’였다. 글에서 우리가 느끼는 건 그런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무엇에 집중하고 어떻게 접근하며 얼마나 생각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진한 맛이 날수록 우리는 그녀/그들을 신뢰해야 한다. 그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 물수제비처럼 얕게 튕겨 지나가는 글들은 읽을 가치도 없다. 다독의 아까운 기회를 날리는 것이다. 우르르 몰려가서 읽지 말고, 읽기 전에 다상량의 실천이 있었는지 먼저 생각해볼 일이다.



*   *   *



    생각이라는 것은 읽고 생각하고 쓰는 전 과정을 통해서 사방으로 나아간다. 넓게 퍼지며 면적에 따라 그 깊이가 얕아지는 것 같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결과적으로 깊어진다. 그 와중에 단어의 범주도 넓어지고, 표현 역시 농익는다. 자신도 모르게 발현되는 순간들인 것이다. 그 과정 자체가 워낙 긴 시간을 필요로 하기에, 그런 일은 얼마든지 그런 식으로 일어난다. 많이 읽는 이들은 이걸 안다. 그래서 그녀/그들 중 대부분은 쓴다는 것에 대해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는다. 누구에게 글 쓰는 법을 배웠냐고 묻는다면 그녀/그들은 십중팔구 이렇게 답할 것이다. ‘스승이 너무 많아 누굴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다시 말해 그녀/그들은 어떻게 쓰는지 자신도 알지 못한다.


    글을 쓴다는 건 문제될 것이 없다. 창의적인 글쓰기? 그런 학원 간판을 볼 때마다 생각하는 것인데, 그런 것에 돈을 쏟는 사람들의 손에 그 값의 양서들을 쥐어주고 싶은 심정이다. 글을 쓰고 싶다는 사람들은, 즉 우리는 평생을 독자로 살아야 한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끝나지 않을 과업이다. 언젠가는 얼마나 많이 읽었는가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순간이 온다. 우리가 문제 삼는 건 그 사이의 일이다. 그 사이의 길이, 그 길의 흔적이 글로 남기 때문에, 아마 우리는 쓴다는 것을 그토록 두려워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상술의 속내에 빠져 돈의 손을 잡든, 맹렬히 독서를 하며 여전히 아무런 글도 쓰지 않는 수행을 하든, 우리는 모두 끝 있는 삶의 한계 속에서 뭔가 얻어 보고 그걸 표현해보려는 욕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이왕이면, 읽고 생각하고 쓰는 것의 힘을 느껴볼 양으로 그 분투의 한복판에 뭐라도 손에 쥐고 뛰어들 생각이면, 대가의 법을 따르는 것이다. 오로지 정직함으로. 모르면 반복해서 읽고, 알겠다 싶어도 다시 읽어 모름을 알고, 그렇게 한없이 부딪히면서 난폭하게 책의 외관을 열쇠로 긁어도 보고, 새벽을 쓰며 증오하고, 자신을 비췄다가 그 거울을 부숴보고, 온갖 미친 짓을 해가면서 어느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건 하나의 실험일까? 실험이라 해도 별 수 없는 것이, 결과를 모르니까. ‘그래서 결론이 어쨌다는 것인데?’ 이런 질문을 한다 해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누군가 알았더라도 그녀/그들은 이미 세상에 없고, 당신과 나만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사람은 쓰지 않으면, 읽지 않으면, 그리고 생각하지 않으면 밖으로 나가떨어진다. 처절하게 굴러다닌다. 차라리 나가떨어지고 구를 바에야, 좀 더 낯설고 무시무시한 자기 안이 그 장소임이 더 낫지 않은가.


    글은 그 안의 '내'가 쓰는 거다. 그래서 부끄러운 일이고, 그 위에 갑옷을 입히고 껍질을 덧붙여 버젓한 한 생명으로 치장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살아 있다는 건 무엇인가. 누가 살아 있는가. 갑옷과 껍질인가, '나'인가? 미생인 나도 알겠는데, 전자는 확실히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한 판 시원하게 걸며 건초더미 수레에서 뛰어내리겠다. 어딘가가 아픈데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