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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개발자들 - 알려지지 않은, 치열했던 여성 에니악 개발자 6인의 이야기
캐시 클라이먼 지음, 이미령 외 옮김 / 한빛미디어 / 2023년 8월
평점 :
"이 여성들은 누군가요?"
20세기 컴퓨팅 분야를 이끈 미국 여성들에 관한 논문을 조사하던 중 발견한 흑백 사진. 거대한 에니악을 운용하는 이들이 찍힌 그 사진엔 이름을 알 수 없는 여성들도 있었습니다.
컴퓨터 박물관 관장도 그저 냉장고 숙녀(냉장고 광고에서처럼 포즈만 취한 모델이란 뜻)라고 말할 뿐입니다. 캐시 클라이먼 저자는 이 여성들의 이름을 찾기로 결심합니다.
<사라진 개발자들>은 세계 최초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전전자식 범용 컴퓨터 에니악의 탄생과 운용에 영향력을 끼친 이름 없는 여성 개발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케이, 프랜, 베티, 말린, 루스, 진. 에니악 프로그래머 6명을 만나보세요.
이들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무어 스쿨에 취직합니다. 무어 스쿨은 애버딘 성능 시험장이라 불리는 거대한 육군 기지 휘하에 있는 조직인 육군 필라델피아 컴퓨팅 부서를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을 치르는 동안 무기 기술이 혁신적으로 발전하면서 수학으로 포격의 정확도를 더 높일 방법이 필요해졌습니다. 이 작업은 대학원 수준의 수학 기술을 지닌 사람만이 수행 가능했습니다. 해외 파병으로 남성들이 부족해지자 계산할 여성 인력이 필요했고, 여성 졸업자들이 있는 도시에 컴퓨팅 부서가 설립됩니다.
사회 분위기는 여성이라면 가정주부로 살아야 한다는 걸 당연시했습니다. 보수 좋은 일자리는 여성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교육을 받아도 남성은 전문가라는 직위를 얻지만, 여성은 준전문가 직위로만 직장생활이 가능했습니다.
6인 역시 보조 컴퓨터(당시 컴퓨터라는 용어는 계산하는 사람이란 뜻)라는 직위로 일했습니다. 이곳에서도 역시 차별은 있었지만 비서 월급의 두 배 이상인 여성 수학 전공자 모집 채용을 놓칠 수 없었습니다.
손으로 계산하면 궤도 하나에 30~40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약 40초면 목표물에 도달하는 포탄이지만 그 뒤에는 수기로 탄도 궤도를 계산해야 하는 노력이 숨어 있었습니다. 무어 스쿨은 어떻게 해야 더 빠르게 계산할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오늘날 가치로 무려 19억 원짜리 기계인 미분해석기가 지하에 있었지만 부족했습니다.
이 즈음에서 지구상의 20세기 가장 중요한 발명품인 전전자식 범용 컴퓨터 에니악이 등장합니다. 프로젝트 X라 불린 에니악이 거의 완성되어 탄도 연구소로 이전할 때가 가까워지자 운용하고 유지 보수할 직원이 필요해집니다. 그렇게 여성 6인은 에니악 프로그래머가 됩니다.
IBM 기계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갖추며 서로를 의지하고 동료애와 우정을 쌓아간 여성들. 전쟁은 끝났지만 탄도 연구소가 무어 스쿨에서 철수하진 않았습니다. 궤도 계산은 여전히 필요했습니다. 그들에게 내려진 임무는 에니악을 위한 탄도 궤도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인간의 문제를 에니악에 전달할 방법을 알아내야 했습니다. 아무도 이들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초반엔 에니악 방에 출입을 금지당한 채 도면만 덩그러니 놓고 알아내야 했습니다.
당시 프로젝트는 오늘날까지도 관련 문서가 일급비밀로 유지되고 있다고 합니다. 에니악 팀에 속한 사람들도 자신들이 계산한 방정식의 실체를 몇 년 동안 알지 못했을 정도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루기 어려운 업적과도 같았습니다. 에니악을 발명한 젊은 기술자들도 여성 6인의 능력에 존경심을 표할 정도였습니다. <사라진 개발자들>은 독학으로, 서로를 통해 배우면서 한 팀으로 성장하는 여정이 그려져 있습니다.
에니악 시연 날, 에니악 6인을 주목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날 그들이 경험한 것은 짜릿한 도취감과 동시에 깊은 우울감이었습니다.
육군 장교, 무어 스쿨 학자, 에니악 발명가를 소개할 때 프로그래머는 빠져 있었습니다. 프로젝트 참여자로 소개되지 않은 채 그 누구도 이들의 업적을 알지 못했습니다. 에니악 6인은 그저 기계를 조작하는 사람으로 남아버렸습니다.
현대 컴퓨터 분야 최초의 직업 프로그래머라는 직업을 탄생시킨 에니악 6인. 이후 저마다의 삶을 개척하며 살아갑니다.
컴퓨터 역사에서 빠진 소프트웨어의 역사와 여성의 역사. 무어 스쿨에서도 정작 에니악 6인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을 쫓아 저자가 참여했던 에니악 40주년 기념행사도 남성을 위한 파티였습니다. 그때 한 여성이 무대에 올라 '회상'이라는 짧고 감동적인 연설을 합니다. 연설자는 케이였고 베티, 진, 말린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자는 사라질 위기에 처한 프로그래밍 선구자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게 됩니다. 잃어버린 역사를 발굴하고 보존한 캐시 클라이먼 저자는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육군 연구소의 표창을 받습니다.
역사의 빈틈을 채운 <사라진 개발자들>. 배타적인 환경에서도 노력한 여성들의 삶이 보여주는 가치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