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는 건, 페이퍼에 몇 자 쓰기 위해서 따로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러니까, 내일 페이퍼를 뭘 쓸까? 고민하다가 '쓸 일'을 그 날 저녁에 하기로 결정하는 식이다. 참으로 재밌는 '거꾸로 살기'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심정으로 페이퍼를 쓸지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나는 가끔 그런다. '오늘의 메뉴' 같은 코너를 운영해 보면 어떨까? 지난 밤 저녁 식사 메뉴를 어떻게 만들었고, 맛이 어땠고 그런 것. '인물 이야기'는 어떨까? 재밌겠지?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 내 주위의 P씨와 C씨 이런 평범한 사람들 이야기. <썸데이 서울> 같은 재미가 있을거야. 등등...

자질구레하고 쓰잘데기 없는 것들이 요즘 좋아진다. 하찮은 것을 할 때 참 즐겁다. 왜일까 생각해보니, 시간에 쫓기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회사일도 그렇고, 집안일까지 항상 '똑딱똑딱' 시계추가 움직인다. 이건 몇 시까지, 언제까지 끝내야 하고, 오늘은 방 청소를, 내일은 빨래를 이렇게 쉴 틈도 없이 시간표는 이어진다. 가끔은 이 모든 것을 아작내고 정말 '가만히' 쉬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랬다간 '영원히 쉬는' 수가 있기 때문에 어기적어기적 거리면서도 일을 끝내고(하긴 요즘 일 처리 속도가 무척 느려졌다) '귀찮아'를 연발하면서도 싱크대 앞에 선다. 어쩜 할 일은 끝도 없는지.

나를 움직이게 하는 시간표는, 내용상 당신의 것과 다르겠지만 형식에 있어서는 일치할 것이다. 당신 또한, 이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늘 시간표가 필요하다. 뭘 언제까지, 지금은 이걸, 다음은 저걸...과 같은 끊임없는 '자기혁신'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은 계산가능해야 한다. 

업무 스케쥴은 업적 평가를 위한 토대가 되고, 근무 시간 후의 내 생활은 새로운 인생을 위한 투자가 된다. 그것까지도 계산가능해야 한다. 새 인생에 대한 투자나 일에서의 업적이 계산이 불가능하다면 나는 의미없는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손익분기점을 따져보고, 점검하면서 이 일을 계속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이게 하버마스가 말한 '시간표 중독 문화', '혁신 중독 문화'다. 끝없이 자신을 갱신해야 하고, 회사를 갱신해야 하고, 집안 인테리어도 갱신해야 하고, 인간관계도 시효가 지나면 갱신해야 한다. 시간표에 맞춰서 내 몸과 정신을 개조하는 사회가, 지금 이 시대가 아닐까?

딱딱 맞춰진, 규격화된 시간을 잠깐 파토내고 하찮은 일에 집중할 때.... 그래서 나는 즐겁다. 물론, 이렇게 시간을 '낭비'(혹자는 그렇게 말한다)할 때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다. 이 시간에 '아침형 인간'은 벌써  일어나서 체조를 하고 영어 공부를 하고, 신문을 읽을 텐데... 그런 생각(함정)에 빠지면 도저히 하찮게 놀 수 없다.  

나는 시간표에서 (긍정적으로) 나를 빼내려 노력한다. 나는 게으른 것이 아니고, 형편없지도 않고, 자족적인 인간이라고 늘 되낸다. 노는 나를 너무 비난하지 않기로 한다.

그래, 페이퍼를 쓰기 위해서 '먼저 뭘 할까?'를 생각한다고 해서 나쁠 건 없다. 즐거운 일이니까, 자꾸 생각나는 건데... 행위하고 나서 쓰기나, 쓰기 위해서 행위하는 거나 다를 건 또 뭐야. 즐거운 일을 이어나가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내겐 페이퍼 쓰는 일이 즐겁고, 이 시간 만큼은 '시간표'에서 날 빼내 쉬게 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상할 것 아무것도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