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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4일 거리
요시다 슈이치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책을 덮고 났을 때 든 생각은
아마 연애란 건 잘못된 방향으로 가기 위해
하는 걸지도 모른다, 였다.
잘 될지 알 수 없고, 때론 이게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가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것.
뛰어들지 않으면 상처도 입지 않지만,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것.
그런 게 연애가 아닐까 하는.
작가의 의도도 이런 게 아니었을까? “한번 뛰어들어봐.”

조그만 마을에서 사는, 평범한 직장인 사오리.
자신이 사는 마을이 리스본과 구조가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버스정류장은 무슨 수도원, 기차역은 중앙역 이런 식으로
바꾸어 부르는 것이 즐거움이다.
(7월 24일 거리도 리스본에 있는 거리 이름이라고 한다.)
별다르게 기억에 남을 만한 연애를 해본 적도 없고.
고작 그리워하는 거라곤
고등학교 선배 사토시정도.
연애에 실패하는 여자의 열 가지 유형
(인기 많은 남자가 좋다/남이 싫어하는 여자는 되고 싶지 않다
/늘 들어주는 역할이다/의외로 가족 관계는 양호하다
/첫 경험은 열아홉 살/타이밍도 좋지 않다
/때로 순정 만화를 읽는다/밤의 버스를 좋아 한다
/아웃도어는 싫다/실수하고 싶지 않다)에 꼭 들어맞는 사오리가
이전과는 다르게, 실수할 것을 알면서도
그 연애에 뛰어드는 이야기, 가 이 책의 스토리다. 


사오리는 리스본의 거리이름과 자기가 사는 마을을
대치시킬 수 있을 정도로 빠져있으면서,
정작 그곳으로 떠날 마음은 없다.
그녀가 사랑을 대하는 방식이 이와 같다.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꿈꾸고 상상하지만,
안 될 거라 생각하고 한 발을 빼는 방식.
정작 그 속으로 들어갈 용기는 없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을 바꾸었으니까.
이제는 ‘연애에 실패하면서 성숙해가는 여자’나
‘연애에 능숙한 여자’가 되지 않을까. 

단조롭고 별 거 아닌 스토리 같은데,                                                                                                                             요시다 슈이치는 여자들의 심리를 너무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무엇하나 남자의 시선이라 느껴지는 부분이 없다. 정말 대단하네;;;

그동안 꼭 읽어봐야지 하면서도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을
피해왔던 건 순전히 이름 때문이었다.
하루키나 바나나, 류 같은 이름에 비해서
‘슈이치’라는 이름은 좀 애송이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니, 평범한 듯하면서
편안하고 아기자기하고, 따듯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이 책이
꼭 작가이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참 볼수록 매력있네.

그리고 사오리도, 메구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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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짱 2007-09-18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슈이치 소설이 순수한 느낌? 퍼레이드를 읽으시면 생각 바뀌실 듯^^

마음을데려가는人 2007-09-19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민짱님 저도 <퍼레이드> 읽고 뜨악 했어요. 하지만 이 책은 순수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있답니다. :)
 
달만큼 큰 미소
마이클 커제스 지음, 조혜진 옮김 / 홍익 / 2005년 10월
평점 :
품절


 

제목이 참 마음에 들었다. '달만큼 큰 미소'라니. 어떻게 웃는 게 보름달처럼 크고 넉넉하게 웃는 걸까. 제목이 좋았듯 내용도 내가 좋아하는 류의 이야기였다. 세상이 아무리 비웃고 멸시해도, 그 편견에 맞서서 보란 듯이 웃어보이는 약자들의 이야기말이다. 게다가 이 책은 새해 들어서 '전철에서 하는 독서 끊기'를 실천하고 있는 나에게 '금단증상'을 일으켜 그 결심을 무너뜨리게 한 첫 번째 책이기도 했다. 남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 재밌는 책은 '읽어 해치우는 경향'이 있는데, 오랜만에 그런 책을 만났다.

이렇게 "마음에 들어, 좋아. 정말 좋아."라고 해놓고서 막상 줄거리를 이야기하자면 스토리 자체는 흔히 말하는 '감동실화'와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인 학습장애아 스무 명은 정말 대단한 일을 해냈다! 중요한 것은 '특별한 능력'을 지닌 '한 아이'가 이룬 성과가 아니라, 학습장애를 가진 스무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자신만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옆의 친구를 돌보고, 그들과 협동하여 무언가를 해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이 아이들이 해낸 것은 무엇일까? 아이들은 우주로켓센터가 매년 주최하는 '스페이스 캠프'에 참가한 최초의 장애아들로서, 스페이스 캠프에 참가하여 실제 우주비행사들이 우주공간에서 수행하는 각종 임무를 직접 수행하고 첨단 우주과학에 관한 각종 지식을 테스트 받는다. 게다가 이 스페이스 캠프는 미전역의 과학영재들이 참가하는 코스다. 천문학, 우주공학, 수학 등 다양한 학문에 대한 기초가 있어야 하며, 1000가지의 이니셜부호를 외워야 하고, 변형된 위급상황에도 빠르게 대처할 능력을 가져야 한다.

이들의 선생님인 마이클과 로빈이 이곳저곳을 뛰어다미녀 아이들이 이 캠프에 참가할 수 있도록 동의를 얻고, 수많은 자료들을 공부해서 아이들에게 맞게 변형시켜 교육시키고, 이러 저러한 사람들의 도움을 얻고 '스페이스 캠프'에 발을 들여놓기까지의 과정은 내내 내 일처럼 가슴이 뛰었다. 마이클과 로빈이 고민했듯 일단 밀어붙이기는 했지만 '과연 이 아이들이 잘해낼 수 있을까? 이 아이들을 스페이스 캠프에 참가시킨 일이 잘한 일일까?'라고 고민했듯 나도 같이 두근거리며 조금은 불안한 마음으로, 조금은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정말 글이 어찌나 구성이 탄탄하고 스피디있게 전개되는지, 결국엔 해피엔딩으로 끝날 걸 알면서도 내내 마음을 졸였다. 결국 아이들은 해냈고, 사람들의 시선은 따듯해졌다.

다시 한 번 아이들은 어른들이 진심으로 믿어주기만 한다면, 조금만 도와준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확인했다. 장애를 가진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욕을 먹고, 무시당하고, 편견의 벽에 부딪혔던 아이들이지만 괌심과 기회를 주자 얼마나 잘해냈는가. 이 아이들은 운이 좋았다. 장애아라고 편하고 쉬운 길을 제공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록 상처를 받아가면서도 세상 속으로 들여보내고자 한 든든한 선생님이 뒤에 있었으니까. 후기를 읽어보니 이 아이들은 그 선생님의 마음에 보답이라도 하듯 각자 사회에서 제몫을 다 해내고 있다고 한다. 아, 행복해라!

"그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 날들을 자기파괴로 일관하며 살아왔는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특수학교를 거쳐 간 수많은 아이들이 세상 밖의 낙오자가 되어 떠도는 모습을 지겹도록 보아온 나는 이 아이들의 변화된 모습에 느끼는 바가 참 많았다. 세상은 그 아이들에게 변변한 기회 한 번 주지 않으면서도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운명이 마치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일이라도 되는 양 몰아세웠다. 하지만 그들의 눈을 보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의 얼굴에 머물고 있는 달만큼 커다란 미소를 한번 보면, 이 세상에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는 없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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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그림 같다 - 미술에 홀린, 손철주 미셀러니
손철주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그림을 볼 때 누가 옆에서 귀찮게(?) 설명해주는 것조차 싫어하는 나는, 그림해설서류의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똑같은 경치를 보고도 보는 사람의 마음과 취향에 따라서 각양각색의 이야기가 나오게 마련인데 그들이 설명해준 테두리 안에서 그림을 느껴보라니, 정말 싫다 싫어, 였다. 그래서 배경해설을 굳이 알지 않아도 되는, 작가의 표현력과 감성이 마구마구 발휘되는 현대미술 쪽을 더 좋아한다. 물론, 추상화는 예외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 고흐나, 샤갈을 마음에 들어 하는 이유도 내 맘대로 그들의 개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찌어찌하여 ‘인생이 그림이냐, 그림이 인생이냐.’라는 알쏭달쏭한 질문을 던지는 이 책을 알게 되었고, '그림을 어떻게 보든 내 맘이야’에서 ‘역시나 아는 게 힘인가? 힘인갑다, 힘이군.’으로 마음이 바뀌어 버렸다. 아마도 처음 서두에서 작가가 그림과 나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 미리 언급해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프롤로그에서 작가는 말한다.

 “나는 왜 남 눈치 보지 않고 그림을 내 멋대로 읽고 있는가. 그것은 그림 보기에서 ‘차이’와 ‘사이’를 수용하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것을 통해 제 자신이 깊어지는 걸 느끼고 있답니다. ‘차이’니 ‘사이’니 하는 말을 제 기억에 하이데거가 쓴 용어인데요, 저는 제 식대로 이것을 풀이하고자 합니다.

 (중략)

 ‘차이’는 변별성을 만들어 내는 것 아닙니까. 작가의 고유성은 이 차이에서 오는 거겠죠. 설혹 내용이 똑같은 아이디어로 창작을 해도 결코 판박이가 나오지 않는 것은 뻔한 얘기로, 문화의 차이, 교육의 차이, 경험의 차이가 있어 그런 거지요. 그의 속과 나의 속의 차이를 짚어보는 것, 그림 보기의 요체는 이겁니다. 그의 아이디어가 이러저러할진대, 왜 저런 모습의 작품으로 나타났을까. 작품의 원형질인 아이디어가 작가의 손을 거쳐 나오기까지 어떤 곡절을 거쳤으며, 그 사연은 작품을 보고 있는 나와 과연 공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서로 빗나간다 해도 저는 괘념치 않습니다. 아니, 빗나가는 것이 자명합니다. 오히려 귀한 것은 차이를 인식하고 있는 저를 자의식 안에서 거부감 없이 수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세가 갖춰질 때 작가와 나, 작품과 관객의 ‘사이’가 감상에 주효한 것이 되지요.

 김 선배, 그림 앞에서 사람들은 왜 떠드는 걸 주저하는 걸까요. 저는 작가의 그림 그리기와 감상자의 그림 읽기가 서로 달라질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상자는 맹목적인 동일시에의 집착이 있습니다. 너와 내가 그림을 본 느낌이 일치했으면 하는 희망, 그리하여 공감이 주는 안도감을 누리고 싶은 욕구, 이런 게 다 동일시에 대한 집착입니다. 작품 보면서 그런 느낌을 가지는 경우가 더러 있지 않았나요? 그런데 그게 다 허욕인 겁니다. 세상 보는 눈은 장삼이사 우수마발이 다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왜 작품 볼 때는 그 세계에 자신을 틈 없이 밀착하고픈 집착에 사로잡히는 겁니까. 동일시는 절대로 불가능한 욕망입니다. 차라리 차이를 인식하는 게 현명합니다.”

 이러니 그림과 나 ‘사이’의 ‘차이’를 좁히려면 더 많이 알고 관심을 가져야 그 검은(?) 속내가 조금이라도 드러나지 않겠는가. 저 글귀를 읽고 그림 대함이 마치 사람 대함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관심을 가지고 요모조모 꼼꼼하게 왜 저 사람이 그러할지 살필 때, 나와 그 사람의 차이를 인정할 때 비로소 그 사람이 보이는 것처럼 그림도 이와 같다고. 무엇보다 그 사람과 나와 같아야 한다는 동일시에 대한 허욕과 집착, 강박관념을 버릴 때 나와 그 사람 ‘사이’의 진짜가 보인다고.

 그렇게 마음을 열고 책장을 넘기자 옛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됐다. 여백의 미나 근거 없는 민족의 우수성 같은 것들을 주구장창 반복하지 않고서도 동양의 옛 그림에 대해 감탄할 만한 해설이 이어진다. 산수가 어우러진 모습을 눈으로 보는 그림이 있는가 하면, 귀로 듣는 그림이 있다는 것(정말로 정선의 <박연폭포>와 <내연산 삼룡추>에선 거친 물살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성기고 소박한 이미지를 뿜어내는 우리 그림의 넉넉함, 한때 유행이었다는 저고리 사이로 비치는 여인네의 가슴이 드러난 그림을 두고 그린 이에 따라 그림의 느낌이 얼마나 달라지느냐 하는 것. 요란하고 선정적인 남녀의 교합장면이 나오지 않고도 ‘있을 것은 다 있고, 될 일은 다 돼 있는’ 그림의 재치 등. 그러면서 작가는 우리네 초상화가 서양화가들이 그린 초상화와 다른 점은 그 초상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정신을 그려내려 한 점이라며 우리의 초상화는 ‘성형수술하지 않는 얼굴’이라 은근히 우리 그림의 우수성에 쐐기를 박아 넣는다. 이름있는 화가들이 계속 언급되고, 일본에서 대접받는 우리의 막사발에서 숨이 통하게끔 만든 옹이의 투박함까지. 옛물건에 대한 애정까지도 술술 풀려나오는데, 작가는 서양미술에 관한 이야기까지 아우르고 있다.

신앙심을 표현하는 도구였던 서양미술에서 풍경은 단순한 소품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동양의 옛 그림에서 사람은 코딱지만 하게 그리고 산수는 크고 웅장하게 그려지는 것과 정반대의 개념이다. 자연에 대한 인식차이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동안의 정형적인 틀에서 벗어나 다양한 표현방식을 선보이기 시작한(야수파, 인상파에 이은 표현주의의 등장, 그리고 줄줄이 입체주의 절대주의, 다다이즘, 신조형주의, 초현실주의,추상표현주의가 나타남.)19세기의 미술사, 뭉크, 모네, 앤디워홀, 고갱, 샤갈, 세잔 등의 이야기를 해준다.

하지만 잘나가던 작가의 글발은 마지막 장에서 잠시 삐긋하는데 끝으로가면서 내가 집중력을 잃어버린 건지 작가가 집중력을 잃어버린 건지, 구색을 맞추기 위해 넣은 글들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어쨌든 그림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던 나는 이 책을 통해 좀더 홀가분한 마음이 되었다. '인생이 그림이고, 그림이 인생이다.' 가만히 잘 들여다 보면 그 속엔 작가의 인생이 있고, 작가가 말하고싶은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와 내 이야기가 만나는 지점에서 나는 웃거나 울거나 슬퍼하거나 괴로워하거나 즐거워할 것이다. 그림의 이야기와 내 이야기가 갖는 '차이'는 당연한 것이니, 그 만나는 지점에서 '사이'좋게 지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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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그곳에선 시간도 길을 잃어 - 황경신의 프로방스 한뼘 여행
황경신 지음 / 지안 / 2005년 10월
평점 :
품절


 

'황경신'이라는 이름에 끌려 산 여행기다.

하지만 읽는 내내 뭔가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15일동안의 여행기이지만, 작가니까 뭔가 다를꺼라는 내 생각과는 달리,

여행이 주는 일탈의 두근거림,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 같은 것은 없고,

뭘 먹었고, 풍경이 조금 예뻤고,,, 뭐 이런 이야기뿐.

 

여행기를 읽는 이유는 내가 가보지 못한, 혹은 가보고 싶은 곳을

어떤 사람이 대신가서 글로 풀어준 걸 읽으며 느끼는 대리만족일 텐데.

황경신의 여행기엔.

내가 해보고싶은 여행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단지 무슨무슨 와인에, 무슨무슨 음식을 먹었다는 이야기들에선.

조금 부러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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