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참 좋다. 계절은 햇살의 눈부심과 바람으로 가늠할 수 있다. 싸대기라도 한 대 후려갈기 듯 거칠었던 겨울바람이 가니, 내 볼을 살살살 어루만지는 봄바람이 온다. 바람이 온몸에 휘감기는 느낌이 참 좋다.

 

3월엔 헐벗은 나무들 사이로 힘겹게 힘겹게 몽우리를 만들어내던 녀석들이 어느덧 짙은 연두빛을 뽐내며 싱그럽게 자라났다. 진달래도, 개나리도, 산수유도 아직은 삭막한 숲속에서 반짝반짝 빛이 난다.

"봐, 지금은 내 세상이야, 내 계절이라구!" 외치는 것 같다.

 

내 마음은 바닥이다. 6월이면 전세계약 만기가 다가오는데, 급등하는 전세값을 생각했을 때 어느 정도 올려달라고 할 거라는 예상은 했었다. 그런데 어젯밤 신랑의 전화로 집주인이 전화를 걸었다. 자기 아들이 결혼을 앞두고 있어서 돈이 필요하니 3천 만원을 올려달란다. 본인도 너무했다 싶었는지 3천에 3년을 계약을 하자고.

 

3년 계약이 문제가 아니라, 3천만 원이 문제인 것을. 아줌씨는 은근슬쩍 구렁이 담넘어 가듯 얼버무리려한다.

 

워낙 조분조분 고분고분한 말씨를 가진 신랑이라, 어이없다는 식의 표현을 하지 않는 게 옆에서 듣는 나로선 좀 짜증이 났다. "그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표현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실은 주인아줌마에 대한 분노인 것을.

 

전화를 끊고 신랑과 얘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한도는 3천만 원의 반이다. 협상이 결렬되었을 때 이사할 것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좋은 집을 찾는 것은 둘째치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삶이 지겹고 힘겹다.

 

신랑은 내 집이 아닌 이상 아무 데서나 살아도 상관없다는 입장이고, 나는 인간은 좀 더 쾌적한 곳에서 살아야 심신이 건강하다는 주의이다. 기분좋음을 유지하기에 쾌적한 환경만큼 유용한 것도 없으니까.

 

자면서 밤새 주인아줌마와 씨름했다. 부산에서 올라온 아마도 '돈'이 최상의 가치이며 '돈'을 갖기 위해서 악바리처럼 살았을 그 아줌마와 어떻게 하면 이야기를 잘 풀어나갈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나마 시나리오를 그려본다. 실전에서는 바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하고 싶은 말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볕이 눈부신 봄이라 좀 위로가 된다. 스산한 바람이 부는 계절에 이런 상황이었다면 나는 저 바다의 심연속으로 가라앉아버렸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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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사업을 하다가 사이가 틀어졌다는 얘기는 흔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친구'란 이해를 목적으로 하는 관계가 아닌데, 함께 사업을 하며 이윤을 추구하다 보면, 여지껏 '친밀한 관계' 속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또다른 모습이 나오게 마련이고, 그 모습은 내가 친구로서만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일 확률이 높다. "내가 알던 누구누구가 아니야"라면서 배신감을 느끼기 쉬운 것이다.

 

오늘은 아주 사소한 일로 이중적 관계에 대해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자주 가는 개인카페가 있는데, 동네에 있고 워낙 자주 가다 보니 사장 언니와도 굉장히 친해져서 일상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눌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동네친구이기도 하고 자주 가는 가게의 주인과 손님이기도 한 관계.

 

언니가 쉬는 날엔 다른 단골들과 맥주를 얻어마시기도 하고, 뷔페에 같이 가기도 한다. 단골들이 모여 있으면 언니는 커피 한두 잔 정도는 서비스로 주는 편이고, 우리도 가게 안의 사소한 일들에 대해 신경을 써주는 편이다. 언니가 바빠서 손이 모자랄 땐 다른 손님에게 화장실을 안내해주거나, 언니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손님에게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말해준다거나.

 

오늘은 테이크아웃을 해서 좀 걷기로 작정하고 집을 나왔다. 뒷산에라도 가서 기분전환을 하고 싶은데 추적추적 내리는 비 속에 산에 가기엔 좀 무리인 듯 싶었고, 동네 산책 정도라면 괜찮을 비라서. 나름 할 일을 정해놓은 터라 마음이 조금 바빴는데, 가게 안에 단체손님이 있었다. 조금 시간이 걸릴 듯 싶어 앉아서 기다렸다. 이상하게 기다리기 시작하면 시간은 더디 간다.

 

나는 상대나 주변상황에 굉장히 신경을 쓰는 사람이라 이어폰을 한쪽 귀에 꽂고 언제 주문을 받으려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내 차례가 올 기미가 안 보인다. 이동진의 빨간 책방을 듣고 있었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집중도 안 되고 주문도 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단체 손님에게 음료가 나가고도 두 팀 정도 주문이 더 밀려 있었는데, 음료 네 잔 정도야 금방 끝나려니 하는 사이, 세 명의 테이크아웃 손님 들어왔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차례에 민감한 편이다. 아무리 바쁜 상황이라도 내가 먼저 왔는데 뒷사람이 먼저 서비스를 누리는 꼴을 못 본다. 그런데 언니가 "**씨, 좀만 기다려줘요" 하더니 나보다 나중에 온 사람들의 주문을 먼저 받는 게 아닌가.

 

만약 오늘 내가 마음의 여유가 있었거나 카페에서 먹고 갈 생각이었다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일이, 오늘은 내 심보를 건드렸다. 그런데  "제가 먼저 왔는데요"라고 이의를 제기하기에는 너무도 친한 사이인 것이다. 언니는 단골이고 그만큼 잘해주는 손님이니 이해해주겠거니 생각했을 테지만, 나는 친한 건 친한 거고 오늘은 나도 음료 빨리 받아서 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

 

딜레마다. 애매한 관계다. 손님으로서의 권리만 주장하기엔 언니가 마음을 써준 일들이 참 많고, 그냥 참고 넘어가자니 나 또한 돈을 내고 음료를 먹는 손님인 거다.

 

나는 속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이라 '안 좋은 표정'을 보이기 싫어서 나중에 온다고 하고 카페를 나왔다. 그리고 찬찬히 생각해본다. 그래봤자 오 분 정도를 못 참고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이유가 단지 '뒷사람에게 먼저 음료를 주었기 때문일까'

 

음, 사실 나는 내가 '한가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게' 불편했던 것 같다. 자주 카페에서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내니 언니 입장에서도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건데. 나는, 어제 면접에서 한참 자존심을 구긴 후에 '뭐라고 되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인데 현실은 따라와주지 않는 이 불편함 속에서, 괜히 '내가 한가한 사람으로 보이니까 뒷사람 주문 먼저 받는 거 아냐?' 하고 마음속에서 시비를 걸었던 거다.

 

늘 원인은 내 마음이다. 괜한 사람에게 시비 걸고 마음만 잔뜩 상해 씩씩거리느니 당분간은 집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게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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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한 잔 믹스커피를 마신다.

커피전문점에서 마시는 에스프레소커피에 비하면 한참 싸구려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믹스커피를 마실 때 뭔가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은 묘한 쾌감을 느낀다.

매일매일 믹스커피가 얼마나 몸에 나쁜지 세상이 떠들고 있고,

그래서 모두가 믹스커피를 끊고 있는 마당에

나 혼자 대세를 거스르고 한 잔 하는 맛이 참 좋다.

몸에 좋은 야채와 생선으로 구성된 밥을 먹고 기분상 뭔가 건강해진 것 같은데

그 후식으로 믹스커피 한 잔,

하고 나면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

철저하게 규칙적이고 건강하고 완벽한 것에서 오는 숨막힘을 해소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

술도 나쁘고 담배도 나쁘고 마약도 나쁜데

너무 믹스커피만 가지고 뭐라고 하는 것 같아서,

얘는 얘 나름대로의 맛이 있다고, 가끔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냐고 대변해주고 싶은 마음도 든다.

 

그렇다고 에스프레소커피를 안 마시는 것도 아니다.

아메리카노는 커피로 마시고, 믹스커피는 간식으로 마신다고나 할까.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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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 고 남들은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고 신이 어쩌구,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어쩌구 하는데. 나는 파이의 권태로움에 대해 생각한다. 리차드 파커(호랑이)와 싸울 땐 삶의 의미나 목표에 대해 생각할 필요 없이, 오로지 '살아남고자 하는 본능'에만 몸을 맡기면 되지만, 그 나머지 시간들-끝없이 이어지는 제한된 일상의 참을 수 없는 권태와 지루함에 대해.

 

나는 요새 무척이나 지루하다, 삶이.

 

복닥복닥 뒤처리에 지칠 아기도 없고, 도저히 먹고살기 힘들다고 욕할 회사도 없고, 그렇다고 남는 시간을 찬란한 취미생활에 보낼 만한 돈도 없다. 그래, 남편은 있다. 어쩌면 이 '남편'이란 존재가 내가 유순하게 권태로움 속에 몸을 맡기고 움직이지 않도록 하는 원천인지도 모르겠지만.

 

젊은 시절엔 억지로라도 즐겁게 살아보려고 했지만, 이젠 '억지로' 하는 데 들어가는 정신적, 육체적 소모가 두렵다.

 

잔잔하고 아름다운 바다 위에서 멍한 눈빛을 한 파이를 보며, 때론 '죽을 수 있다는 희망'이 삶의 희망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죽으면 편해질 거야. 이 끝없는 권태도 사라질 거야. 신기루 같은 희망.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 너무 오랜 시간을 나태하게 보낸 죄, 달게 받고 있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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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4-01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르는 삶에서
느긋하게 권태 누리면서
앞으로 찾아올 즐겁고 바쁜 하루
조용히 기다려 보셔요.
머잖아 신나게 바쁘도록 온갖 일 하시리라 믿어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13-04-02 11:2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번역회사에 면접을 보고 왔다. 사장이 초쉬크했다.

 

번역은 많이 안 해봤죠?

일본어 번역 지원자가 250명이에요.

경력과 능력에 따라 다 다르니까 연봉은 그쪽에서 제시해야 돼요.

 

지랄.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열받는다.

엄청난 열정과 능력을 요구하면서 돈은 많이 줄 수 없다, 널린 게 일본어번역자다, 라고 말하는 모순.

억울하면 출세해야지, 하면서도 그런 꼴은 못 보고 못 참고... 그래서 백수의 기간이 길어지는 나.

 

뭐라도 되고 싶다.

뭐라도 하고 싶다.

근데 아무거나 되고 싶고, 아무거나 하고 싶은 건 아니다.

배가 불렀다, 아마도.

 

하지만 배부른 자처럼 우아하게 내 삶에 꼭 들어맞는 무언가를 찾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

4월은 뭐라도 되고 싶다.

뭐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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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4-01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원자가 그만큼 많다 하더라도
그 많은 분들이 다
똑같은 말을 들으며
똑같은 느낌 받지 않았으랴 싶어요.

참.... 거시기하군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13-04-02 11:24   좋아요 0 | URL
면접관-구직자의 권력관계 때문일까요.
그 자리에서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나온 게 후회스러요 -_-b